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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요람

  • 작성일 2015-12-31
  • 조회수 238

 .인류는 어느덧 정보화 사회의 정점으로 접어들었다. 통신기술의 발전은 지구권을 하나로 묶었고, 많은 이들이 무선 디바이스를 이용한 네트워크 기반의 생활을 영위했다.

 신체에 부착된 자그마한 디바이스는 그 뒤편에 자리 잡은 정보의 바다로 길을 열어주었다. 제2의 인터넷이라 할 수 있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교류하고 활동하며 거대한 공동체를 이루었다.

 정보가 범람했다.

 수십 년간 쌓여온 수많은 데이터, 그리고 100억에 가까운 인간들이 앞으로도 계속 쌓아갈 방대한 데이터들은 그 끝을 몰랐다.

 햇수를 더해갈수록 가속화된 정보의 물결은 과거에 기록된 수많은 데이터들을 시간의 뒤편으로 매몰시켰다.

 누군가의 일생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가, 다른 누군가가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소설이, 가족과의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남긴 사진과 영상들이, 회고록이, 그림이, 그 외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매몰된 삶의 흔적들은 당사자의 죽음으로 찾는 이 없이 기억에서 잊히거나, 혹은 시간이 흘러 서비스 종료라는 형태로 영영 소실되었다. 그리고 소실된 정보만큼이나 많은 데이터가 작성되어 다시금 바다를 메웠다.

 때문에 많은 이들은 원했다. 비록 자신이 죽어 사라질지언정 그 흔적만큼은 영원히 남기를. 무덤 한쪽에 자리할 초라한 묘비 따위가 아닌, 자신이 세상에 존재했었음을 알리는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을 수 있기를.

 사람들의 열망에 형태를 갖춰준 것은 항공우주공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손꼽히는 존 파웰의 주장이었다.

 "화성에 영구히 존속할 수 있는 데이터센터를 구축해서 누구든 이용할 수 있는 기록보관소로 만드는 것은 어떠한가?"

 인류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개인이 남긴 기록을 영구히 보존한다는 발상은 과거의 타임캡슐 개념을 보완하고 광범위하게 확장한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주장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인류 문명의 발전은 이미 달의 유인기지를 시작으로 화성 유인탐사, 더 나아가 토성의 위성 중 하나인 타이탄 향한 유인탐사선 발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수많은 인재들이 우주개척을 위해 나아갔고, 그들을 맞이한 국제 우주 정거장과 각 국가에 소속된 우주 정거장들이 지구 궤도에 머물며 인류의 생활권을 점차 넓혀가고 있었다.

 이러한 우주 진출에 대한 가시적인 성과는 과거 냉전시기의 소련과 미국의 우주경쟁 이후 가장 활발하여 인류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많은 이들이 십 수 년 뒤에는 달에 민간인이 거주할 수 있는 콜로니가 완공될 것으로 기대했다.

 때문에 존 파웰의 주장은 충분히 현실성이 있었다. 그러한 주장에 불이 붙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누군가가 물었다. 지구와 달을 놔두고 왜 굳이 화성이여야 하는가? 되돌아온 것은 인간의 추악함을 비꼬는 조소였다.

 "각종 사고와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지구는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가까운 달을 놔두고 굳이 화성으로 눈길을 돌린 것은, 큰 전쟁이 벌어질 경우 달조차 그 여파가 미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탐욕과 그것이 몰고 온 세계대전을 다시 한 번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데이터센터가 과연 영구히 보존될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에는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 먼 미래에는 SF 소설에서나 볼법한 광경이 펼쳐질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 논의되는 기록보관소조차 불필요한 과거의 잔재로 취급될지 모르죠.

 그렇기에 지금의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후손들이 기록보관소에 보관될 우리의 문화와 역사, 개개인의 삶을 통해 되새기고 나아갈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뜻이 먼 미래까지 닿는다면, 앞서 언급한 인간의 탐욕마저도 반성하여 나아갈 수 있는 그러한 미래가 될 것이리라 저는 믿습니다."

 각국의 정치권에서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이러한 존 파웰의 주장을 본격적으로 검토했다.

 목표는 뚜렷했다. 반영구적인 수명을 목표로 하되, 인간의 간섭은 최대한 배제하고 인공지능을 이용한 로봇들로 통제되는 무인시설을 건설하는 것. 주기적으로 보내지는 자재를 이용하여 확장공사 및 유지보수가 가능할 것.

 국제기구가 설립됐다.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화성을 향해 선발대가 출발했다.

 각종 자재와 무인로봇들을 싣고 여러 차례에 걸쳐 우주선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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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데이터센터 건설이 마무리되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후발대가 출입문을 봉쇄했다.

 그곳의 이름은 ‘황혼의 요람’. 인류의 모든 지식을 집대성하여 보존하고, 모든 이들의 삶을 기록하는 보관소.

 - Stand-By dusk cradle system

 시스템이 가동됐다.

 황혼의 요람이 완성되자 전 인류가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황혼의 요람 접근 및 쓰기권한이 주어졌다. 화성과의 거리 탓에 느린 통신 속도를 보완하고자 건설된 중계 데이터센터는 황혼의 요람과 동기화되어 실시간으로 열람이 가능하도록 서비스함과 동시에 데이터를 화성으로 전송했다.

 누군가의 일생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가, 다른 누군가가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소설이, 가족과의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남긴 사진과 영상들이, 회고록이, 그림이, 그 외의 모든 것들이…….

 황혼의 요람은 끊임없이 자료를 쌓아나갔다.

 자식들은 그들의 부모가 황혼의 요람에 남긴 기록을 보며 성장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기록을 남겼다. 그들이 낳은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쌓이는 자료와 비례해서 황혼의 요람도 여러 번의 확장공사가 진행됐다.

 최초 2개의 동으로 나뉘었던 건물은 이후 7개의 동으로 늘어났다. 통신설비가 교체되고 인공지능도 더욱 강화되었다. 투자되는 비용은 날이 갈수록 늘었지만, 인류의 문화에서 황혼의 요람을 떼어내기란 요원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여러 세대가 거듭되었다.

 그리고, 제 3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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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대를 넘겨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허리를 괴롭혔다. 쉬라고 재촉하는 나이를 애써 무시하며 허리를 매만지던 브라이언은 바닥에 놓인 가정용 보조배터리에 코드를 연결하고 전원을 켰다.

 배터리의 등이 점멸하자 그는 근처에 놓인 지저분한 의자를 끌어와 걸터앉았다. 그리고 맞은편에 있는, 언제 마지막으로 사용됐을지 모를 거치형 디바이스의 전원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기다림은 계속됐다. 조금이나마 기대감이 엿보이던 표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실망으로 바뀌어갔다.

 "이것도 글렀군."

 브라이언은 기대를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터리를 챙기고 건물 안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그는 고개를 흔들며 문짝이 떨어져나간 출입구로 향했다.

 폐허가 된 마을 한복판을 거닐고 다니는 브라이언의 모습은 부랑자와 다를 바 없었다. 헤진 옷과 다듬어지지 않은 수염이 그러한 행색을 대변해주었다. 돈이 될법한 것은 허리에 찬 권총 한 자루가 전부다.

 몇 군데의 건물을 더 둘러본 그는 더 이상 건질 것이 없음을 깨닫고 마을 밖으로 나왔다.

 마을의 입구에는 군데군데 도색이 벗겨지고 금방이라도 퍼질 것 같은 회색 4인승 차량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운전석 옆에 탑승해있던 12살 남자아이가 휑한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뭐 좀 건졌어요?"

 "아니."

 맥밀란의 물음에 브라이언은 고개를 저었다.

 운전석에 탑승하고 손을 내밀자 여기저기 접혀 너덜거리는 지도가 브라이언의 손에 건네졌다. 그것을 받아든 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오른쪽이 좋냐, 왼쪽이 좋냐?"

 "음, 오른쪽?"

 "그럼 왼쪽으로 가야겠네."

 "엑! 그런 게 어딨어!"

 칭얼거림을 뒤로하고 시동을 걸자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새까만 배기가스가 뿜어졌다. 예전이라면 환경법 위반으로 단박에 붙잡혔겠지만, 지금 시대에는 환경법은커녕 과속을 해도 붙잡을 경찰조차 없었기에 브라이언의 입에서는 흥겨운 휘파람만 흘러나왔다.

 해가 저물기 시작할 즈음, 개활지 근방에 주차한 브라이언은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열었다. 진즉에 유통기한이 지났을 고기 통조림 두 개를 꺼내 차 안으로 돌아와 하나를 맥밀란에게 건네주었다.

 벌써 15년간 계속된 통조림 식사였기에 맛을 느끼기보다는 허기를 채운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지겨웠어도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했다.

 "다 먹었으면 공부하자."

 "오늘은 그냥 자면 안돼요?"

 "안 돼."

 "어제도 했으면서."

 "디바이스를 사용하려면 뭐가 필요하다고 했지?"

 노트를 펼쳐 훑어보던 그가 타이르자 맥밀란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공부요."

 "그렇게 잘 아는 놈이 칭얼거리냐?"

 "그래도 아저씨가 있잖아요."

 "매번 말하지만 너도 어른이 되면 혼자 살아야한다. 그 땐 나도 없어."

 "저도 매번 말하지만 아저씨한테서 안 떨어질 건데요?"

 "그래? 그러면 오늘밤에 몰래 버리고 가야겠네."

 "씨! 뭐만 하면 맨날 버린대!"

 브라이언의 심드렁한 대꾸에 아이 특유의 심통이 터져 나왔다. 그것을 본체만체하며 문제를 적은 그가 노트를 맥밀란에게 건넸다.

 "다 풀면 옛날 얘기 해줄게. 그러니까 해 지기 전에 후딱 풀어라."

 "정말이죠?"

 단순한 녀석이라며 쓴웃음을 지은 그는 해가 완전히 질 무렵까지 공부를 가르쳤다.

 밤이 찾아오자 뒷좌석에 놔둔 모포를 각자 두르고 의자를 뒤로 젖혀 누웠다. 벌레소리조차 안 들리는 고요한 하늘 아래서 브라이언이 나직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하늘 저편에 캄캄한 우주가 있다고 얘기해줬었지? 1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있었어. 그보다 멀리 떨어져있는 달에는 지어진지 얼마 안 된 자그마한 도시도 있었고.

 하지만 지상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 지금이야 사람 찾아보기가 식량 구하는 것보다 힘들지만, 옛날에는 사람이 없는 장소를 찾는 게 힘들 정도였다."

 그의 어조가 점차 부드러워졌다.

 "바쁘기도 했지만 따지고 보면 참 즐거운 시절이었지. 셔틀을 타고 지구를 벗어나 우주유영도 할 수 있었고, 태평양 한가운데에 떠있는 인공 섬에서 바다를 구경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 무렵에 날 만났더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즐거웠을 거다."

 "전 지금도 좋아요."

 "글쎄. 늙은 아저씨랑 어울리는 것보다는 네 또래들이랑 어울리는 게 훨씬 재미있을 걸?"

 "그거야 아저씨 생각이죠. 전 지금이 더 좋아요. 그리고 디바이스만 찾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다고 했잖아요."

 "그럼."

 "그 때 살아가던 사람들도 만날 수 있구요."

 "그래. 만날 수 있지. 모습도 볼 수 있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읽을 수 있어. 아마 평생 읽어도 다 못 볼 정도로 많을 거다."

 고개를 돌려 맥밀란의 옆모습을 바라본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그곳에서 배울 수 있지."

 "아저씨는 맨날 공부밖에 몰라요?"

 "그야 공부가 중요하니까 그렇지. 내가 네 나이 때는 하루 6시간씩 공부를 했단 말이야. 근데 넌 고작 1시간밖에 안하니 내가 걱정이 안 되겠냐?"

 "그래도 공부는 싫어요. 전 그냥 엄마랑 아빠만 만날 수 있으면 돼요."

 맥밀란의 눈이 선루프 너머의 밤하늘만 응시하자 그의 시선도 마찬가지로 밤하늘을 향했다.

 "그래. 사실 공부보다야 그게 더 중요하지."

 그러다가 장난기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디바이스를 다루려면 공부를 해야 하는데 어쩌나?"

 "씨, 저 그냥 잘래요."

 돌아눕는 맥밀란의 모습을 미소와 함께 곁눈질하던 브라이언은 다시금 하늘을 올려봤다.

 핵전쟁의 재앙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늘뿐이다. 지상이 폐허가 되었어도 하늘만큼은 그를 지켜보며 함께 해주었다. 그러니 탁 트인 하늘처럼 기분도 상쾌하면 좋으련만, 꽉 막힌 가슴만큼은 15년간 답답한 채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없는 지상에서 아등바등하는 삶은 쳇바퀴의 연속이다. 음식을 충당해야했고, 그 다음엔 식수를, 차를 움직이기 위한 기름을, 탄약을, 그리고 다시 음식을…….

 끊임없이 반복되는 끈질긴 삶이지만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점차 늙어가는 기억으로는 붙잡을 수 없는 추억. 그렇기에 되새기고 싶은 추억.

 밤하늘 저편. 지금으로서는 닿을 수 없는 붉은 행성에 추억이 남겨져 있었다.

 그렇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아직 숨이 붙어있을 때, 기필코 동작하는 디바이스를 찾아 황혼의 요람에 접속해야했다.

 하지만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것이 가능할까? 족쇄처럼 매달린 불안감이 언제나 그렇듯 취침을 앞두고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나 한결같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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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되는 여행 속에서 간신히 몇 개의 디바이스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공위성과 통신소가 EMP에 의해 먹통이 된 상황에서 살아있는 회선을 찾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무용지물인 디바이스를 뒤로하고 살아있는 통신소를 찾기 위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북미 대륙을 서에서 북으로, 다시 북에서 남동으로 가로지르는 여행은 어느덧 오대호에 닿았다.

 브라이언은 미국과 캐나다의 접경 지역이었던 슈피리어 호에서 자그마한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 중 통신계통에서 일하던 기술자가 남미 끝자락에 위치한, 한 때 기술자 자신이 일했던 통신 중계소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곳만큼은 고고도에서 발생한 EMP의 여파에서도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다시금 희망을 안겨주었다.

 북미 대륙을 채 종단하기도 전에 수년간 함께하던 차량이 수명을 다했다. 새로운 차량을 구하기란 힘든 일이었기에 손수레를 이용한 도보여행이 시작됐다.

 그렇게 1년이 지났을 무렵, 브라이언의 건강이 점차 악화되었다. 초창기 방사능 낙진과 핵겨울을 겪은 그가 노년이 되기까지 살아남은 기적은 그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렸다.

 2년이 지났다.

 남미 대륙에 간신히 발을 디딘 브라이언은 결국 그 숨을 다했다. 유언에 따라 시신은 땅에 묻혔다. 단 한 명의 조문객만이 아무도 없는 장례식을 마주하며 눈물을 흘렸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째 해가 저물고,
 사흘째 밤하늘이 그를 지켜봤다.

 그리고 일주일. 작은 봉우리만을 남긴 채 맥밀란은 홀로 여행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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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이 흘렀다. 어느새 성인이 되어버린 맥밀란은 노련한 여행자가 되어 홀로 남미 대륙을 달렸다. 그의 곁에는 빛바랜 일곱 권의 노트와 한 자루의 권총, 요란스런 오토바이가 함께였다.

 무법천지의 세상을 살아가며 많은 위협을 겪었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목숨을 노리는 이들을 수없이 죽이고, 살아남고자 식량을 훔치며, 결국에는 그 자신이 무법자가 됐다는 것을 깨달았음에도 후회는 없었다.

 아니, 정말로 후회가 없을까?

 맥밀란은 고개를 저었다.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룬 공동체를 멀찍이서 지켜보며 먼저 떠나버린 브라이언과 함께 자리를 잡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만큼은 일말의 후회를 떨쳐내지 못했으니까.

 때문에 생존자들의 마을을 지나칠 때면 오토바이의 엔진은 어김없이 멈췄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 매번 브라이언의 목소리를 빌어 속삭였다. 혼자라도 그들 틈에 섞여서 살아가라고. 이정표조차 없는 여행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보고 싶은 얼굴이 있으니까.’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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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해와 달이 번갈아 뜨는 횟수도, 계절의 변화조차도, 그 모든 것을 세월의 흐름과 함께 흘려보내고서야 당도한 그곳. 세상의 끝이라 할 수 있는 그곳에서, 어스름한 하늘아래 거대한 접시안테나가 설치된 낡은 중계소가 그를 맞이했다.

 세상을 몰락으로 이끈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발길을 들여놓은 방문자를 향해 중계소는 환영의 인사대신 수북이 쌓인 먼지를 피워 올렸다. 창문조차 없어서 어둠으로 감싸인 내부를 손전등의 불빛이 밝게 비췄다.

 먼지 쌓인 장비들과 이곳저곳 널브러진 기자재들을 뒤로하고 맥밀란은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숨죽인 채 오랜 세월을 버틴 비상발전기가 그를 반겼다.

 맥밀란은 손에 든 노트를 펼쳤다. 너덜거리는 페이지들이 세월의 자취와 함께 공부의 흔적을 드러냈다.

 페이지를 넘기던 그의 손이 멈췄다. 과거, 브라이언과 함께 여행할 무렵에 만났던 기술자가 중계소에 대해 서술한 페이지였다.

 발전기를 조작할 수 있는 제어판이 불빛을 발하자 시동이 걸렸다. 곧이어 중계소 내부 전등이 들어왔다. 멈췄던 장비들에 불이 켜졌다. 하늘을 바라보던 접시안테나가 외부와의 연결을 위해 오차를 수정하고 위치조정을 시작했다.

 점차 요동치는 심장이 맥밀란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1층으로 되돌아간 맥밀란은 중계소의 제어판 앞에 섰다.

 [UTC 21:42:12] 월면 국제 위성 중계소
 - 실패 : 응답 없음
 [UTC 21:43:28] 국제 우주 정거장
 - 실패 : 응답 없음
 [UTC 21:44:56] [GEO] T.SC3 위성
 - 실패 : 위치추적 불가
 [UTC 21:45:47] [MEO] SCUS-TM 위성
 - 위성안테나 위치조정 중

 화면에는 연결실패의 메시지만 반복되고 있었다.

 맥밀란의 손이 제어판으로 향했다. 익숙지 않은 조작 탓에 손이 제어판의 이곳저곳을 오고갔다. 연결위치를 변경하고 확인을 누르자 화면이 새로고침 되었다.

 [UTC 21:48:30] 연결을 취소하였습니다.
 - 연결대상 변경 : 황혼의 요람
 - 위성안테나 위치조정 완료
 [안내] 현재 지구와 화성간의 거리 : 13,211만km. 응답대기시간은 약 16분입니다.
 - 응답을 기다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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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TC 21:56:05] [Mars-HEO] 존 파웰 중계위성
 - 성공 : 응답상태 양호
 - 황혼의 요람에 응답요청
 [UTC 21:56:11] 황혼의 요람 – 윌라멧 위성모듈
 - 성공 : 응답상태 양호
 - 요청에 의해 위성모듈의 4번째 안테나를 통한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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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TC 22:04:29] [Local] 중계소 – URP 모듈
 - 성공 : 동기화상태 양호
 [안내] 황혼의 요람과의 직통연결 과정이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눈가가 떨려오는 것을 손으로 매만진 맥밀란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틀림없었다. 브라이언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과거의 유산은, 여전히 저 멀리 떨어진 붉은 행성에서 모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맥밀란의 발걸음이 중계소 제어판 옆에 비치된 거치형 디바이스로 향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저도 모르게 디바이스 조작과 접속에 대해 설명된 노트를 펼치려던 맥밀란은 손에 든 노트를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수백, 수천 번을 보고 외운 그것은 더 이상 노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디바이스가 실행되자 능숙하게 조작해서 황혼의 요람에 접속했다.

 - 중계 데이터센터가 응답하지 않습니다.
 - 원활한 통신상태의 회선을 탐색중입니다.
 - 직통회선과 연결되었습니다.

 상관없었다.

 [안내] 직통회선을 통한 황혼의 요람 이용은 화성과의 거리 및 통신 상태에 따라 약 수십 분의 지연이 발생합니다.

 이미 기나긴 세월을 지나왔다.

 상태 : 사용자 식별불가
 - IPD(International Personal Data)에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입니다. 해당 국가의 관리국에서 사용자 등록을 진행하여 주십시오.
 - 미등록 사용자는 쓰기권한이 제한됩니다.

 맥밀란은 황혼의 요람에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과거의 잔재가 나중에는 미래를 향한 발판이 될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과거에 남고 싶었다. 나이가 들고 죽음을 앞에 둔다면 조용히 땅에 묻히고 싶었다.

 그렇기에 알고 싶었다.

 과거의 기록을.

 자신을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해준 이의 기록을.

 검색을 활성화하고 떨려오는 입술을 조심스레 열어, 소중히 간직해온 열다섯 자리 코드를 말했다.

 지구와 화성을 오고가는 통신은 하늘을 넘고, 달을 건너, 1억km의 거리마저 단숨에 내달려 한 사람의 기록을 디바이스로 전달해주었다.

 화면에 하나의 사진이 떠올랐다. 생소하지만 분명 익숙함이 묻어나는 얼굴은 주름진 피부도, 지저분한 수염도 없이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옆에는 여자아이를 목말태운 아버지가, 그 곁에는 두 아이를 향해 미소를 짓는 어머니와 함께.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작성된 기록.

 단 한 줄의 문장을,

 맥밀란은 나직하게 소리 내서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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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의 염원이 담긴 여정의 종착지에서 지구와 화성은 다시금 하나로 연결되었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분명 과거의 찬란했던 문명은 모두 사라졌다. 파괴된 환경과 생태계는 불모지만을 남겨놓았다. 살아남은 이들도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인류의 끝은 아니었다.

 황폐화된 대지는 여전히 인간의 두 다리를 지탱해주었고, 오롯이 떠있는 달은 과거의 흔적과 함께 하늘을 거닐었으며, 우주 저편에 있는 황혼의 요람은 모두를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마을이 생겨났다.

 불모지를 다시금 개간해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길이 깔리고 교류가 이어졌다.

 인구가 늘며 도시가 생겨나자 인간의 발길이 다시금 곳곳으로 뻗어나갔다.

 문명이 재건되어가자 모두가 하늘 저편을 올려봤다. 인종이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지만 그들 모두는 알고 있었다. 그곳이 있기에 자신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은 영원히 변치 않을 인류의 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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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세대가 바뀌며 인류는 다시금 과학문명을 이룩해 나갔다. 하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혼란도 사회 전반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개인이 내는 목소리가 집단을 만들었다. 집단이 가진 이념은 다른 집단과 대립하여 서로를 뒤흔들었다. 그로 말미암은 다툼은 국가를 움직여 충돌을 야기했고, 끝내 하나의 형태를 띠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존 파웰은 인간의 본성을 너무 얕잡아 보았다."

 모두가 깨달았다. 종말의 전쟁을 딛고 일어섰음에도 탐욕은 여전히 인간의 내면에 남아있었음을.

 전쟁이 벌어졌다.

 또 다시 많은 이들이 죽었다.

 혼란은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지도자들은 과거의 문명을 꽃피우기보다는 인류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고자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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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홧발을 내딛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감색 군복에 달린 원수 계급장이 내보이는 위엄에 모든 이들이 자세를 바로잡고 경례했다.

 거침없는 걸음이 멈춘 것은 두 번의 검문을 통과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철통같은 경계를 둘러친 서기장실 앞에서 노년의 장군은 문 앞을 지키는 보좌관에게 물었다.

 "서기장 각하께서 보고 계신 용무는?"

 "나가있으라고만 하셨습니다. 아마도 개인적인 용무가 아니실런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그가 보좌관에게 말했다.

 "각하께 알리게."

 보좌관이 조심스레 문을 노크했다.

 "서기장 각하, 트리체먼 장군이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

 문 안쪽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보좌관이 문을 열었다.

 나무향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고풍스럽게 치장된 실내는 두터운 카펫이 깔려 걸음소리조차 잠재웠다. 방 안으로 들어선 트리체먼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뒤로하고 중앙에 비치된 소파에 앉았다.

 책상 앞에서 손에 든 서류를 훑어보던 서기장이 고개를 들었다. 트리체먼과 마찬가지로 주름이 늘어가는 얼굴은 특유의 콧수염과 맞물려 노년의 멋을 자아내고 있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신경 쓸 일이 많더군요."

 "한숨 자고 가는 게 어떤가?"

 서기장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묻자 트리체먼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누구와는 다르게 속 편히 잠들 수가 없습니다."

 "누가 들으면 내가 가장 태평한 줄 알겠어."

 "아쉽게도 참모들은 세상에서 제일 태평한 사람으로 절 꼽더군요."

 "이런, 아무래도 서기장 자리는 나보다 자네가 더 어울릴 것 같군그래."

 자리에서 일어선 서기장이 찬장을 열고 술병을 꺼냈다.

 "한 잔 하겠나?"

 "한 잔만 하겠습니다."

 서기장이 술병과 잔을 들고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기울인 술병을 타고 흐르는 옅은 갈색 액체가 잔을 채웠다.

 잔을 건네받은 트리체먼은 그곳에 비춰지는 늙은 군인의 모습을 잠시 응시하더니 이내 슬쩍 흔들었다. 술잔에 파문이 일어 모습이 지워지자 그것을 단숨에 삼켰다. 묵직한 목넘김에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을 느끼며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자 서기장이 다시 잔을 채워주었다.

 "한 잔만 더 하게."

 짤막한 권유와 함께 서기장이 자신의 잔을 들어 마시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트리체먼의 얼굴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돌아가자마자 참모들 정신교육 일정을 잡아야겠군요."

 결국 권유를 무르지 못한 그가 잔을 들자 서기장이 건배했다.

 "태평한 나날을 위하여."

 "위하여."

 두 잔째를 비운 트리체먼은 살짝 취기가 감도는 것을 느끼며 잔을 테이블 구석으로 치웠다. 완곡한 거부의 표현이었기에 기회를 엿보던 서기장은 아쉬움과 함께 자신의 잔을 채우며 물었다.

 "예정시각까지 얼마나 남았나?"

 "30분 남았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야. 성공해야해."

 "이곳에 오기 전에 최종점검을 끝마쳤습니다. 연구소에서는 완벽하다고 자신하더군요."

 "이미 완성된 물건에 조금 손댄 것 가지고 기고만장해졌군."

 "전 세계의 하이브 시티 중에서 그들만큼 뛰어난 이들은 없습니다."

 "뛰어난 만큼 머리도 제정신이 아니지. 매일 밤 오펜하이머의 초상화를 앞에 두고 기도를 올리는 광신도들이니까. 놈들은 그저 무기에 영혼을 팔아넘긴 미친놈들에 불과해."

 잔을 든 서기장은,

 "그리고 나 또한 미친놈이지."

 무덤덤한 어조로 자조하며 두잔 째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트리체먼과 마찬가지로 잔을 테이블 구석으로 치웠다.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서기장의 두 눈이 트리체먼을 응시했다.

 "아직도 계획에 반대하나?"

 "반대합니다."

 단호한 어조가 확고함을 내비쳤다.

 "그런가. 그렇다면 자네에게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겠군."

 어조에서 씁쓸함이 감돌았다.

 "30분이야. 설득해보게. 자네가 설득에 성공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계획을 취소하지."

 "싫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서기장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아뇨. 정확히 들으셨습니다."

 잠깐의 침묵을 사이에 두고 질문이 던져졌다.

 "어째서지?"

 "이미 충분하니까요."

 "충분하다고? 지난 수년간 나에게 찾아와서 계획 취소를 외치던 자네가, 지금 이 순간에는 그조차도 싫다고 말하는 건가?"

 묵묵부답이 다시금 침묵을 불러오려는 찰나,

 쿵-!

 서기장의 양손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대답해!"

 외침이 분노를 담아 울리자 트리체먼의 입이 열렸다.

 "잠시 뒤면 공화국은 마지막 선을 넘습니다. 계획이 실행되면 전 한 명의 군인으로서 움직일 것이고, 당당하게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자넨, 끝까지 날 우롱하는군. 한 명의 군인으로서 움직인다고? 그렇다면 좋아. 군인의 허물이 자네와 나 사이를 가로막는다면,"

 서기장은 자리를 박차며 일어섰다. 오른손이 가슴팍에 붙은 서기장 배지를 거칠게 떼어냈다. 허리춤에 있는 권총을 빼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트리체먼 에드놀드. 반대한다면 그 총으로 날 쏴라.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계획에 찬성한다고 말해!"

 그 과격한 행동을 지켜보던 트리체먼은 테이블에 놓인 총으로 시선을 옮겼다. 검은색 권총이 그를 향해 총구를 내보이고 있었다.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이율배반적인 속내가 자네를 결국 이렇게까지 몰아붙였군."

 "아니. 세상이 날 이렇게 몰아붙였다. 지금의 공화국이, 주변의 나라들이, 내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이!"

 권총에서 시선을 거둔 트리체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흔들림 없는 태도로 서기장과 마주선 그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자네의 의견에 찬성했어.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도 그 때문이지. 그런데도 굳이 내 입에서 찬성이라는 한 마디를 들어야겠나?"

 "자네만이 나와 같은 눈높이에 있으니까."

 분노로 들끓는 목울대가 노성을 터뜨렸다.

 "분명 같은 세상을 보고 있는데도 자네는 여전히 이 세상에 희망이 있다고 믿으니까.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빌어먹을 희망을, 자네는 여전히 그 눈으로 보고 있으니까-!"

 격한 발걸음이 서기장을 창가로 이끌었다. 바닥까지 닿은 두터운 커튼이 힘껏 젖혀졌다. 한쪽 벽면을 통째로 사용한 창문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바깥세상을 비췄다.

 "이 광경을 봐!"

 외침이 닫지 않는 창문의 건너편. 푸른 하늘 아래로 대기를 옅게 물들인 황갈색 스모그가 보였다. 그 밑에 펼쳐진 건 짙은 먼지로 이루어진, 햇빛조차 바닥에 닿지 않을 회색의 바다였다.

 그러한 바다 한가운데에 떠있는 외딴섬.

 외부의 오염된 공기와 격리하기 위해 지어진 높이 900m의 거대한 돔 형태 구조물. 먼지 밑바닥의 대지를 딛고 선 그것은 절반 이상이 먼지에 잠겨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오염된 폐수를 강으로 내버리듯 곳곳에 뚫린 작은 굴뚝으로 끊임없이 매연을 뿜었다.

 그 위에, 조금이나마 맑은 공기를 마시고자 치솟은 수많은 빌딩들이 있었다. 소수의 상류층들이 살아가는 노블레스 시티. 과거의 마천루들처럼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있는 그곳은 가장 낮은 빌딩조차도 수백 미터에 달했으며, 가장 높은 빌딩은 1.3km를 넘어갔다. 그럼에도 스모그로 얼룩진 대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 더 높은 하늘로 치솟은, 허락받은 자만 출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빌딩을 우러러 보았다.

 스모그가 범접할 수 없는 높이. 노블레스 시티조차 끝내 닿지 못한 최상층. 공화국의 정점으로 군림하는 이가 기거하는 서기장실에서, 그는 까마득한 지상을 향해 고함을 터뜨렸다.

 그것은 인류에 대한 경멸이었다.

 인간의 손에서 탄생한 무기가 모든 것을 파괴했다. 인류를 몰살시키고 과거의 찬란하던 문명을 처음으로 되돌렸다. 남아메리카 대륙을 지구상에서 지우고 지구의 자전축마저 뒤틀어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만들었다. 파괴된 달은 본래의 모습을 잃은 채 과거의 잔재만을 남겨놓았다.

 화창한 하늘과 푸른 대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대륙 곳곳에 지어진 하이브 시티만이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과거의 찬란한 문화에는 그 어느 것 하나 닿지 못했어. 끊임없는 다툼과 전쟁만이 살아남아 서로를 물어뜯을 뿐이야. 그런데도! 세상 모두가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보고 있다. 화성 한구석에 처박힌 무덤의 이름을 연호하면서!"

 주먹이 두터운 유리창을 후려쳤다.

 "죽어 나자빠진 놈들의 공명심이 남긴 무덤 따위가 신으로 둔갑한 세상에서, 난 어떠한 희망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 희망을 찾기 위해 이 자리까지 올라왔지. 아닌가?"

 "희망이라고?"

 분노에 찬 눈빛이 트리체먼을 노려보았다.

 "살기 위해 지옥의 밑바닥에서 기어올라 왔을 뿐이다! 그조차도 지금 시대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고!"

 그는 갈증을 해소하듯 술병을 손에 들고 그대로 들이켰다. 얼마 남아있지 않던 술을 모조리 넘기고 모멸감이 깃든 어조로 말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인민들 대부분이 노예처럼 지내다가 굶어 죽는 세상이 올 거야. 그 위에 올라타 왕 행세를 하는 돼지새끼들은 그걸 유희삼아 낄낄거리다가 최후에는 자기들끼리 죽이려들겠지. 난 그런 비참한 미래를 원하지 않아."

 또 다른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우리가 과거의 인류보다 우월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잔혹함이다."

 그것은 광기였다.

 "화성에 있는 가짜 무덤을 파헤치고 이 세상에 끝을 가져올 거다. 인류가 무덤으로 삼을 수 있는 장소는, 오직 지구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드높은 장소에서, 짙게 덧칠된 광기가 전 인류를 향해 냉혹한 선고를 내렸다.

 트리체먼의 우묵한 두 눈이 창밖을 향했다. 우주에서 바라본다면 죽어가는 잿빛의 지구가 그들을 노려보리라.

 "그럼에도 난 인류를 믿네. 황혼의 요람이 가르친 고대 인류의 역사가 그러하듯, 두 번의 대전쟁을 딛고 살아남은 지금의 인류가 그러하듯, 인류는 끝까지 나아갈 것이야. 난 절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아. 그러니,"

 그는 자신의 의지를 되새겼다.

 "난 자네의 의견을 반대하네."

 하이브 시티 전체에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창밖 너머로 섬광이 떠올랐다. 어쩌면 전 세계에 단 하나만 남아있을 고대의 로켓은, 화성을 향한 기나긴 여정을 위해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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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세기에 걸쳐 격납고에 잠들어있던 발사체는 처음이자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우주로 향했다. 순식간에 대기권을 벗어나 스모그로 뒤덮인 하늘을 발아래에 두고 1단 발사체가 분리됐다.

 하늘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세상의 끝자락에 걸쳐진 발사체를 사이에 두고 지구와 우주가 세상을 양분했다.

 대기로 이루어진 지평선 너머로 달이 떠올랐다. 핵폭탄이 심어져 내부로부터 파괴된 달은 한 귀퉁이를 잃고도 여전히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었다.

 달이 그러하듯 지구도 과거의 모습을 잃었다. 사라진 북극. 달의 파편이 꽂혀 곳곳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긴 아시아. 과거의 참사와 함께 바다 속으로 수몰된 남아메리카. 2번의 대전쟁으로 인해 잿빛으로 덧칠된 지상.

 그럼에도 태양빛을 받는 지구는 여전히 파랗게 빛났다.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우주공간에서 2단 발사체가 점화했다. 초속 21.26km의 속도로 지구 궤도를 돌며 가속하기 시작한 발사체는 이내 중력을 뿌리치고 핵탄두가 탑재된 본체를 밀어내며 분리되었다.

 지상의 관제소로 모든 과정이 정상적으로 완료됐음을 알린 본체는 지구를 뒤로하고 수백 일에 달하는, 화성을 향한 여행길에 올랐다.

 6일째, 통신양호. 항행은 순조로웠다.
 22일째, 통신양호. 항행은 순조로웠다.
 69일째, 통신양호. 항행은 순조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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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일째, 관제소 응답 없음. 항행은 순조로웠다.
 163일째, 화성궤도 돌입 준비.

 관제소를 향한 마지막 통신을 끝으로 본체가 화성의 궤도에 미끄러지듯 돌입했다. 15분 만에 화성을 한 바퀴 돌 수 있을 막대한 가속도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붉은 대지와 수많은 크레이터가 스쳐지나갔다.

 입력된 계산에 따라 나아가던 본체는 목표범위에 들어서자 역분사로 감속했다. 순식간에 연료가 소모되며 분사가 멈췄다. 입력된 프로그램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본체의 속도와 외부의 수치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차범위가 30m까지 좁혀진 그 순간, 자세제어를 통해 지상으로 탄두를 조준했다.

 원뿔형의 탄두가 향한 그곳에, 여행의 종착지인 황혼의 요람이 있었다.

 조준을 끝마친 본체가 탄두를 분리했다. 분리된 탄두는 그대로 점화되어 지상을 향해 발사됐다.

 회전하며 쏘아지는 탄두가 대기와의 마찰로 붉게 물들었다. 표면의 온도가 치솟으며 화성의 하늘에 붉은 빛줄기를 남겼다. 163일이라는 여정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초 단위의 짤막한 시간마저 가르고 탄두가 꽂혔다.

 폭발이 일어났다.

 예상됐던 폭발은 아니었다. 탄두가 지면에 충돌하며 일으킨 폭발이었을 뿐, 핵융합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주선이 오고 갈 수 있도록 황혼의 요람 앞에 마련된 착륙장. 탄두가 꽂힌 그 자리에 마치 흉터처럼 크레이터가 생겼다.

 간만에 찾아온 손님이 남겨놓은 흉터를 바라보며, 황혼의 요람은 다시금 침묵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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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보다 긴 화성의 하루는 시간의 흐름을 더욱 느리게 만들었다.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이 넘을 길고 긴 시간을 흘려보냈음에도 시간은 여전히 그칠 줄 몰랐다.

 생명이라고는 없는 화성의 쓸쓸한 황무지 한복판에서, 마치 노년의 세월을 덧없이 흘려보내는 노인처럼 황혼의 요람은 하늘 저편에 있을 지구를 바라보았다. 거센 먼지폭풍이 할퀴고 지나가도, 간혹 떨어지는 운석이 소란스럽게 굴어도……, 지구를 향한 기다림은 멈추지 않았다.

 지구를 향해 뻗은 안테나가 스러졌다.

 수백 년을 버티리라 장담했던 외벽은 그보다 오랜 시간이 흐르자 녹슬고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장비가 노후되어 삐걱거렸고, 데이터가 점차 소실되었다.

 시설을 정비하던 로봇들은 이미 가동을 멈춘 지 오래였다.

 수족을 잃은 인공지능은 데이터들을 최대한 보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시설을 유지했다. 어떻게든 데이터를 보존하는 것이 인공지능이 부여받은 최대의 사명이었다.

 침묵의 세월은 계속됐다. 아득한 시간을 뛰어넘었음에도 화성은 여전히 흙으로 뒤덮인 황무지였다. 생명이 없는 붉은 행성은 매번 모래폭풍을 일으키며 유일하게 품은 생명을 위협했다.

 인공지능을 구성하는 섹터들의 대다수가 기능을 정지했다. 지하의 원자로는 수명의 끝자락을 달리고 있었다.

 황혼이 내렸다.

 불빛이 멎었다.

 요람의 심장은 조용히 그 생명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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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깎여나가는 시간의 조각들이 흙으로 변해 화성에 쌓여갈 무렵, 하늘 저편에서 소형 우주선 한 척이 내려왔다. 하늘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던 우주선은 착륙장에 남아있는 크레이터를 피해 사뿐히 착륙했다.

 출입구가 열리고 타이트한 우주복을 입은 사내가 내렸다. 그는 조심스런 걸음으로 나아가 정면에 위치한 황혼의 요람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러분."

 경건함이 깃든 목소리가 오롯이 황혼의 요람으로 향했다.

 "인류가 고난을 딛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정말 기나긴 시간이었죠. 그래서일까요?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던 꼬마가, 이제는 어른이 되어 세월이 담아낸 이야깃거리를 가져왔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아요.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정말 찰나와도 같더군요.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짤막하게나마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고난의 시대를 거치며 수많은 과오를 되풀이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깊은 상처를 아로새기고 그것이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상처를 냈죠. 하지만 우리는 잊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다른 생각, 다른 뜻을 가졌더라도 원하는 것만큼은 같다는 것을.

 미래.

 여러분은 과거지만, 그렇기에 미래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는 다가올 미래였고 가르친 공부는 미래를 향한 발걸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뜻이 먼 미래까지 닿는다면, 인간의 탐욕마저도 반성하여 나아갈 수 있는, 그러한 미래가 될 것이리라……. 비록 지금의 우리가 탐욕을 이겨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반성하고 한 걸음 나아갈 준비는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구를 떠나 새로운 항성계로 이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곳에서의 새로운 시작으로 다시금 미래를 붙잡을 겁니다.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곳 황혼의 요람과 함께해야 하는가. 이주하는 그곳에 황혼의 요람을 재건해야하는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의 삶, 그리고 인류의 역사. 이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잠든 이곳은 요람임과 동시에 무덤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제2의 고향이기도 하죠. 그렇기에 남겨두기로 정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약속하겠습니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수만 년, 어쩌면 수십만 년……, 설령 그보다 더 오랜 기간이 지나더라도 다시 우리의 고향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그 때가 되면 먼 미래의 후손이 저 대신 인사를 건네겠지요.

 그러니 지켜봐주십시오. 보이지 않는 머나먼 행성이겠지만, 여러분이 지켜봐주시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믿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그는 크레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과거의 잔해는 먼지가 쌓인 채 그곳에 방치되어 있었다. 지면에 내리꽂혀 쪼개진 탄두. 그 안에 들어있던 녹이 슨 보관함. 지면을 때린 엄청난 충격량에도 살아남은 그것은 오랜 세월을 버텨 그 후손의 손에 들렸다.

 그는 보관함을 열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꺼내들었다.

 은빛 명판이었다. 지구를 품은 요람과 그것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전신상이 새겨진 명판은 세월의 흐름을 빗겨간 듯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다.

 그리고 명판에 적힌 단 한 줄의 문장을,

 나직하게 소리 내서 읊었다.

 "요람에 누운 아이는 황혼과 함께 잠들고, 어머니의 미소를 보며 깨어난다."

 아련함이 깃든 손길이 명판을 쓰다듬었다.

 현재, 그리고 과거, 어쩌면 떠올릴 수도 없을 아득한 고대……,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한 자리에 모였다. 그것이 자신이었고, 이 명판이었으며, 이곳 황혼의 요람이었다. 그렇기에 떠나야했다. 미래를 찾기 위해.

 그는 황혼의 요람 입구로 다가가 그곳에 명판을 부착했다. 명판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제 작별할 시간이군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한 그는 우주선에 탑승했다. 서서히 떠오른 우주선은 그대로 화성을 벗어나 자취를 감췄다. 황혼의 요람은 다시금 홀로 남겨졌다.

 그 순간, 하늘이 물들었다.

 맑은 하늘을 수놓는 수백여 개의 불빛. 마치 밤하늘의 별빛과도 같은 그것들은 마치 작별인사라도 하듯 긴 꼬리를 남기며 우주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마지막 불빛마저 자취를 감추자 곧이어 화성의 하늘을 타고 셀 수 없을 만큼의 꽃송이가 떨어져 내렸다. 과거의 지구처럼 꽃으로 뒤덮인 들판이 황혼의 요람을 짙은 색채와 함께 둘러쌌다.

 스러진 안테나가 있던 자리가, 떨어진 외벽의 틈새를, 그리고 모두의 염원이 담긴 명판 앞을…….

 황혼의 요람은 과거에 남았다.
 그리고, 미래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이들을 언제나 그렇듯 조용히 지켜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