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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술 마시고 떠드는 단편

  • 작성일 2016-01-01
  • 조회수 398

하늘은 희미한 안개가 펼쳐져 있었고, 저녁 어스름이 낮게 깔려있었다. 어둡거나 칙칙한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마을을 감도는 장막처럼 느껴졌다. 여기가 대체 어디일까. 그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대석을 심어 포장한 길, 길게 늘어진 돌담, 창문 안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불빛, 숲으로 둘러싸인 마을과 그 한복판에 서있는 자신. 이곳에는 성벽도, 목책도, 결계도 없어 길목에 심어진 작은 이정표 같았다. 이런 식으로 마을을 짓는다면 위험한 짐승들이 어슬렁거릴지도 모르는데. 아니, 자신이 왜 마을의 안전을 걱정하는가? 무엇을 위한 마을인지 전혀 알 수 없었고, 바람 소리 조차 없는 적막한 공간이었다.
그 때, 망토를 눌러쓴 두 사람이 슬그머니 나타나더니 그의 앞을 지나쳐 걸어갔다. 바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여유로운 걸음도 아니었으며 표정도 하나같이 무언가에 홀린 듯 풀려있었다. 그는 멍 때리다 놓칠세라 얼른 뒤쫓아 갔다. 그런데 그들이 갈림길에 들어서자마자 서로의 반대로 가버리는 게 아닌가.
누구를 따라가야 하지?
고민하는 찰나에 그들은 이미 멀찍이 떨어져 버렸다. 한숨을 내쉰 그는 옆의 계단에 터벅터벅 걸어가 주저앉았다. 정적이 흐르는 계단에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는데, 어디선가 향긋하고 고소한 냄새가 풍겨와 코끝을 자극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냄새의 근원을 찾아 계단을 올라갔다. 가장 가까운 집의 문을 두들겨도 반응이 없자 옆의 창문을 들여다봤지만, 새까만 연기가 낀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레 남들보다 무척 예민한 감각을 지녔다고 떠올린 그는 일일이 집을 확인하지 않고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도착한 어느 집의 문고리에 손을 올려놓았다. 나무문이 경첩과 떨어지며 끼이익 소리를 냈고, 고기 타는 냄새가 좀 더 확연해졌다. 정답이다.

“어서 오십시오.”

입구와 정면으로 위치한 카운터에 주인으로 보이는 엘프가 천으로 접시를 닦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카운터 앞으로 향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은 일부러 방치한 듯싶었다. 진열대에 놓인 그릇들은 매우 다양하고 깨끗했으니까. 세 명의 남자가 식탁 하나를 두고 빙 둘러앉았고, 주점 구석에선 개방된 화덕 앞에 큼지막한 고기가 꼬챙이에 꿰인 채 구워지고 있었다. 그들을 제외하고 다른 손님들은 보이지 않았다.

“저는 이 여관의 주인 리오메르입니다. 당연히 식사부터 하시겠죠? 무엇으로 드릴까요?”
“…아무거나 시원한 걸로 주십시오.”

그는 리오메르가 건넨 흑맥주를 받고 유일한 손님들 곁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별로 꺼려하는 기색 없이 앉기 편하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는 잠깐 묵례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들 가운데 유난히 눈에 들어온 자가 있었으니, 녹색 피부에 큼지막한 어금니와 짐승에 가까운 눈매, 어깨 너머로 보이는 벽에 세워둔 큼지막한 도끼는, 이 전사가 확실한 오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는 일단 흑맥주로 목을 축였다.

“…어라?”
“푸하핫, 깨달았구먼! 하하하하!”

자신이 맥주를 마신 것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옆의 남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것과 별개로 맥주 맛은 기가 막히게 좋았다. 혀에 감기는 갈색크림이며, 부드러운 맥주 그 특유의 쌉쌀한 맛이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이윽고 그는 입을 열었다.

“맥주 맛이 참 인상적이군요.”
“자네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우리도 이 술의 향연에 취해있다네. 내 이름은 헤잔이고, 이쪽 오크의 이름은 칸투라고 해. 옆의 친구는 러스켈이야. 자네 이름은 뭔가?”
“제 이름? 라프넨입니다. 비투스 도시 출신이고, 과거 스페스 기사단으로 활동했었습니다.”

과거? 했었습니다? 라프넨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왜 과거형으로 말했는지 의아했지만, 곧 헤잔의 놀란 목소리에 생각이 끊어졌다.

“오! 그 맹금 기사단 말인가? 놀라운 일이구먼. 안 그래, 러스켈?”
“그래. 살아가면서 도시 연합의 기사랑 마주칠 일이 별로 없을 테니까.”

맹금은 독수리 형상의 표식을 달고 있는 스페스 기사들을 부르는 명칭이었다. 라프넨은 이들이 연합의 기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에 내심 놀라웠다. 왜냐하면 그들이 연합을 만들기 위해 치른 참혹한 전쟁의 여파는 무수히 많았으니까.

“이 맥주가 무슨 재료로 만들어 질 것 같나?”

느닷없이 들려오는 굵직한 목소리에 라프넨의 눈이 오크를 향했다. 칸투, 칸투의 질문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보리와 물, 다년초들을 포함한 것들 아닙니까?”
“그 전부를 포함하고도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들어간다. 특별한 맛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지. 네가 가지고 있고, 또 이곳에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곳에 있는 이유라. 곱씹을수록 아리송해진다. 라프넨은 고민하기를 포기하고 곧장 반문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대체 뭡니까?”
“성질 급한 친구로군. 자네의 추억이야. 늙으면서 미화되는 기억들, 끝내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기억들, 사람이 마지막까지 이성을 잃지 않게 해주는 편린. 자네는 죽었어. 떠오르는 것은 없나?”

라프넨은 잠시 자신이 헛소리를 들었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을 믿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라프넨이 잊혀진 기억을 헤집는 사이에 리오메르가 식탁에 음식을 차례차례 내놓기 시작했다. 버터에 구워 양념과 버무린 닭고기, 화로에 걸어둔 돼지고기를 뜯어 육즙에 절인 뒷다릿살, 기름에 튀긴 후 파슬리 가루를 뿌린 감자 조각들, 과실 향이 뛰어난 붉은 빛깔의 와인, 육즙이 풍부하게 베인 스테이크를 즉석에서 잘라 후추와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헤잔이 입맛을 다시며 와인잔을 들었다.

“이 맛있는 음식을 보라고. 우리에겐 술친구가 늘어난 셈이지. 경사로세, 경사로세. 라프넨, 일단 한 잔 가볍게 마셔봐. 무언가 막 떠오를지도 모르잖아?”

라프넨은 와인잔을 들어 두 모금 삼켰다. 그 순간, 라프넨의 뇌리를 강타하는 기억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기사가 되던 날 처음으로 마셔보았던 와인, 아버지를 따라 왕궁을 둘러본 저녁, 축하연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발그레한 얼굴의 귀여운 공주, 전쟁에 출정하며 소중하게 건네받은 시민들의 하얀 손수건, 그리고 전장에서 승전 깃발을 보지 못하고 검과 함께 진흙 속으로 몸을 뉘었던 장면을 끝으로 의식이 현실로 전환되었다. 시선 끝에 닿은 와인 잔은 어느새 비어있었다. 라프넨은 떨리는 목소리를 다듬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대륙 서부의 사크라피시움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어이없게도 전쟁의 발단이 되는 싸움이었죠. 결국 대륙을 놓고 도시들의 패권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거의 마지막 전쟁터에 도달했을 즈음, 저는 죽고 말았습니다. 젠장맞을.”
“나도 대륙 소식은 들었지. 전쟁도 참 오래 지속하는군. 끔찍한 힘겨루기야.”

헤잔이 다시 와인을 채워주자 라프넨은 단숨에 들이마셨다. 러스켈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이제 그것들은 모두 지워버리는 게 편할 거야. 우리의 존재를 사랑했었던 그들에게 알릴 방법은 요원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다신 만나지 못할 테니까.”
“그건 이 공간이 사후세계이기 때문입니까?”
“글쎄. 안타깝게도 그 부분만은 우리도 확실하게 단언할 수 없어. 자네, 카운터 옆의 선반이 보이나?”

러스켈의 손가락을 따라 라프넨은 장식대를 쳐다보았다. 장식대에는 갖가지 모양의 와인 잔은 물론,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책들이나 요리도구도 정돈되어 있었다.

“생활 도구들 말입니까?”
“그렇다면 저 계단 옆의 선반도 보이나?”

그곳에는 와인 잔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술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의미를 모르는 라프넨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라프넨의 모습을 본 러스켈이 심술궂게 웃었다.

“자네는 내가 왜 그릇들이나 술들에 관심을 보이는지 모르겠지?”
“전혀 모르겠군요. 왜 저것들을 가리킨 겁니까?”
“자, 나는 생전에 농부였었어. 내 아버지도 농부였고, 내 할아버지도 농부였지. 아마 내 자식도 농부가 될 테고. 어쨌든 간에 나는 밭일이나 하던 인생에 어느 상단 밑에서 일을 하게 됐단 말이야? 그곳에서 잡일 하는 노역 꾼들은 워낙 거칠고 힘들어서 고된 노동이 끝나면 항상 주점에 들어가 맥주와 안주로 저녁을 때웠지. 나도 마찬가지였고. 그렇게 내가 그들과 어울리다 보니 술 종류를 잘 알게 됐어. 이게 중요한 점인데, 저기 오른쪽 끝에 사슴이 그려진 녹색 병 보이나? 난 저걸 딱 두 번 본적이 있어. 어떤 마법서의 거처에서, 그리고 귀족들과 거래하는 마차 안에서. 저게 얼마큼 비싸냐면, 간 큰 귀족이 갑옷 다섯 벌을 사는 만큼의 돈이 들지. 자네는 기사니까 대략 가격이 어떠한지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예, 놀라운 가격이군요. 한데 그것이 어떻습니까?”
“에구, 이 둔감한 친구야. 리오메르가 서있는 저 카운터 뒷문으로 내려가면 주방이 있고, 더 내려가면 와인 보관소가 있어. 자네는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주민이 없는 텅텅 빈 작은 마을에 여관이 있고, 거대한 와인 저장소가 있고, 그곳에는 비싼 술로 가득하다니. 그중에서는 여신의 신도들이 성수라 칭하는 위엄 넘치는 것들이 있다는 거야.”
“그럼 그 술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재주로는 절대 구할 수 없을 테니 이곳은 확실한 사후세계다, 이 말이군요. 상당히 신선하고 재밌는 추론이었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장담하지는 못해. 적어도 허구로 이루어진 세상은 아니라는 결론뿐이지. 인간의 상식과 지성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곳이야.”
“그런데 저는 이곳에 도착할 당시 이상한 사람들을 잠깐 봤는데, 그들은 주민이 아닙니까?”
“추측하건대, 그들은 아마도 아직 정신이 혼미한 유령이라고 생각해. 자네도, 우리도 그런 상태였다가 천천히 실체를 되찾고 한곳에 모여드는 거지. 그다음엔 우리처럼 삶의 잔존 기억들을 술로 빚어내 들이킴으로써, 언젠가 과거를 잊어버리는 날까지 고민하는 거야. 미련을 버린다고 해야 하나?”
“미련을 버린 다라…….”

라프넨은 심각한 얼굴로 술잔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자신은 죽어서는 안 되는 몸이었다.

“이번 전투만 지난다면 돌아갈 수 있다고 기뻐했는데, 제가 죽는 처참한 결과를 만들어 버렸군요. 제기랄. 공주님과 약속했었는데…….”
“공주님? 자네 왕궁까지 가봤어? 아니, 중앙 기사단이라도 했나 보군?”
“예. 어떻게 보면 저는 공주님의 호위대였습니다. 기사를 한 명이라도 더 보태야 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출정하게 되고 그대로 여러 전쟁터를 돌아다니게 됐습니다. 정말로 힘들었죠. 항상 지치고, 아프고, 피로하고, 끝내 죽을 정도로. 하지만 장담했던 약속을 지켜야 했으니까,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면 정말로 좋을 텐데…….”
“살아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나 보군. 그렇다면 영혼을 걸어야겠지?”
“당연히 영혼을 주어야겠죠. 다시 한 번 볼 수만 있다면.”

헤잔이 튀긴 감자를 씹다가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자이 친구 병 걸렸네. 확실한 상사병이야. 위험하지만, 방법이 있기야 하지.”
“얼핏 듣기로 흑 마법의 노예가 되면 다시 살아나긴 한다더군. 노예라고 부르는 만큼 절대로 추천하지 않는 방법이야. 단지 살아날 뿐이고, 모든 걸 잃었을 테니까.”

러스켈이 받은 말에 라프넨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역시 그런 짓은 못 하겠습니다. 기억을 되찾았는데, 과거를 잊는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군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공주님을 정말로 사랑했는지, 그래서 죽은 영혼임에도 잊지 못하고 여기에 갇혀있는 것인지…….”
“그래, 억지로 살아나는 것만큼 추악한 망자는 싫겠지. 한데, 자네 진짜로 정직하고 느끼한 기사로구먼.”

라프넨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마룻바닥엔 화로에서 퍼져온 불의 그림자가 둔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헤잔이 조용한 라프넨에게 작은 콩을 던지며 반응을 즐기고 있을 즈음, 누군가 계단 위에서 뒷목을 주무르며 내려왔다.

“여, 이안. 이제 일어났나?”
“다들 모여 있었군. 오늘도 즐거운 술판인가. 슬슬 저승길에서 마시는 술이 더 맛있다고 느껴지기 시작했어. 호오, 거기 새 친구도 생겼네.”
“하, 이 친구 기사야. 라프넨이라고 하지. 저 친구는 이안이야. 이안, 이 녀석 이야기나 좀 들어봐.”
“기사라, 그거 괜찮은 직업이지. 사과주를 부탁하네, 주인장.”
“알겠습니다.”

헤잔이 목을 가다듬더니, 라프넨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그의 과거를 신나게 떠벌렸다. 자신이 겪은 전쟁의 기억에 과장을 보태기도 하고, 직업을 바꾸기도 하고,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라프넨은 그가 하는 행동이 은근히 재미있어서 잠자코 듣기만 하였다. 이상하게도 이안은 설명을 듣는 내내 입을 굳게 다물더니,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 심각한 어투로 말했다.

“라프넨. 자네가 스페스의 기사라니까 기억나는 건데, 대륙 전쟁의 서막이 된 작은 성을 알고 있나? 무뚝뚝한 회색 성벽에 조금 높지만, 나는 멋들어졌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알고 있습니다. 제 기사단이 그곳을 탈환한 적이 있으니까요.”
“그럼 얘기가 빨리 끝나겠군. 나는 사실 그곳에 쳐들어간 용병이었어. 그때만 해도 거대한 전쟁의 불씨가 될 줄은 몰랐지만. 어찌됐든 그곳에 도착한 나는 주변의 언덕에서 성을 내려다보며 돌파구를 찾고 있었고, 다른 부대가 정문에서 싸울 때 측면의 벽을 타고 올라가 성을 함락했어. 그런데, 성의 병사들 중에 오크가 몇 명 있더군. 힘겨웠었지. 어쩌면, 나와 이 오크가 마주쳤을지도 몰라. 같은 날 저승에 왔으니까. 옷도 비슷하고. 분명한 건, 같은 전장에서 죽었다는 거야.”

“그 얘기는 처음 듣는구먼. 칸투, 사실입니까?”
“그래. 나는 그 성의 문지기였으니까. 전사의 표본에 맞게 장렬히 싸우다 죽은 셈이지. 이곳에 온 후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지만 자네 덕분에 알았으니, 대략 지상은 여섯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른 셈이군.”

이얀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손을 자꾸만 허공에 빙빙 돌렸다.

“우리는 서로를 깨닫게 되었지만, 칼을 겨누지 않았어. 지금도 아무렇지 않게 술을 마시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이 오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기는 해. 어,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은 일상이라고 받아들였던 거야. 내 몸의 일부이며 내 삶의 주체였지. 사랑싸움이나 가족이란 건 언젠가 겪게 될 막연한 기대였어. 그에 비해 자네는 부러울 만큼 소중한 기억을 품고 있네. 미안해. 말을 잘하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라프넨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가, 무심코 칸투를 쳐다봤다. 그는 매우 큰 손으로 돼지고기 뒷다리를 통째로 아득아득 씹어 먹는 중이었다.

“아닙니다. 하시는 말의 의미는 잘 알겠군요. 오크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신은 대단한 전사로 볼 것 같은데요?”
“그래. 적이든 아군이든 대단한 싸움꾼은 주목받는 법이지.”

칸투가 그리 말해도 이안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러스켈이 이안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일단 밥이나 먹자고. 음식은 적군처럼 도망가지 않으니까.”

향을 맡고, 입안에 흘러들어와 풍성해지는 고기의 육질과 화끈한 술의 조화. 신성한 요리의 맛은, 모든 걸 잊고 자연 속에 머무는 은거인처럼 라프넨의 슬픔을 점점 마비시켜왔다. 칸투는 취기가 도는지 큰 목소리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라프넨의 귀에는 의미모를 단어들 뿐이었지만, 불쏘시개로 화덕 안을 뒤집던 리오메르는 진귀한 풍경을 봤다는 듯이 말했다.

“움차이 쿰, 움차이 쿰. 후렴구가 재밌네요. 오크들의 즉흥곡인가요? 보통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것 같은데, 이 노래는 음이 정확하군요?”
“오크 사제들이 전사를 기리며 부르는 노래지. 꽤 오래된 노래라서 의미를 알고 있는 오크들은 거의 없다. 지금 것은 대족장에 관한 노래야. 불안한 시대, 매몰찬 죽음, 깊어가는 갈등, 뭐 그런 것들. 노래는 전부 세 구절로 이루어져 있다.”

칸투가 다먹은 뼈다귀를 흔들며 설명하자 헤잔이 갑작스레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허억! 지금 우리를 죽이려고 다짐했습니까? 오크 사제들의 노래는 전통으로 절대 발설하는 일이 없다고 했는데!”

러스켈은 앉으라는 손짓과 함께 말했다.

“이봐, 진정해. 자넨 이미 뒈졌어. 그리고 무덤 묻힌 사람들끼리 말 못할 비밀이 어디 있나? 오크의 노래는 또 처음 듣는군.”
“아, 그렇지. 어험, 리오메르! 여기 맥주 한 잔 더 주시오! 옛날 생각나서 깜짝 놀랐네. 오크들의 비밀 얘기를 엿들은 적이 있었거든.”
“전통이란 규율을 어겼는데, 오크들의 신이 노하지 않겠습니까?”
“틀려. 오크들의 신은 존재하지 않아. 오로지 죽은 전사들을 향한 예우밖에 없지.”
“헤잔, 오크에 대해서 정말 잘 아는군. 나 역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은 자들이 거쳐 가는 마을이라는 생각하니 기분이 묘한 상태지.”
“하긴, 칸투에게 있어서 평생을 믿고 온 사상과 견해가 뒤바뀌는 순간이군요.”

라프넨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곳이 그냥 잠시 쉬기 위한 곳이라면, 주점을 맡은 리오메르는 누구인가?

“이건 서비스입니다.”
“캬아, 이렇게 나눠주면 주인장은 뭘 먹고 사는가? 정말로 훌륭한 주점이야.”

리오메르가 웃으며 맥주잔과 간단한 안주를 차례차례 식탁에 올려놓았다. 감미로운 향기가 식탁을 훑었다. 라프넨은 카운터로 돌아가는 엘프를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리오메르.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저희가 이제 떠나갈 영혼이라면 이곳에 남아있는, 아마 계속 남을 예정인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라프넨의 질문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지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뜻밖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요? 당연히 저승사자죠. 사실 여러분을 데려온 것도 접니다, 하하하. 영혼을 많이 데려올수록 이 가게로 들어오는 수입도 많아지죠.”
“이렇게 상냥한 저승사자는 처음 보는군.”

리오메르의 말투는 너무 장난스러워서 진실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어쨌거나 그가 말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잘 알았다. 리오메르도 더 이상 손님들의 반응을 살피지 않고 곧장 카운터로 돌아가자, 칸투는 다시 노래를 불렀다. 움차이 쿰. 움차이 쿰.

“두 번째 절은 전사의 등장이지. 비극을 끝내버릴 사납고 용맹한 전사.”
“…그리고 마지막 절은 기도를 마친 오크들의 전투 신호와 같아요. 오크들의 사냥보다는 전쟁에 어울리는 노래지요. 후후, 오크들도 노래를 즐긴답니다.”
“정답이다.”
“그렇군…, 이 아니라 너 누구야! 어, 어, 으악!”

당황한 헤잔이 의자에서 넘어지며 큰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넋을 놓고 새로 온 손님을 쳐다봤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혹은 훤칠한 외모의 엘프가 자연스레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엘프는 몹시 미안하다는 얼굴로 헤잔을 일으켜주었다.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전부 이야기에 열중하고 계시기에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네요.”
“다음부터 인사 좀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엘프가 저승사자로 보일 지경이네.”
“정말 놀랍군요. 오크가 확인해주는 오크 노래 해석과 음…, 뭐라고 해야 하지? 엘프인 당신? 엘프가 오크어를 알고 있다는 사실? 당신은 누굽니까?”
“제 이름은 아드레나에요. 남부 지방의 도서관에서 서기로 일하고 있지요.”

아드레나의 목소리는 신비한 울림이 있었다. 헤잔은 엘프의 손을 잡으며 일어서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 감탄을 내뱉었다.

“아아, 당신이 오쿨루스 도서관의 엘프? 대륙에 엘프는 많지만 도서관의 엘프라 불리는 엘프는 남부밖에 없을 겁니다.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더니. 예전에 남부 원양에 나가 참치를 잡던 시절이 있었죠. 그때 역사를 탐구한다며 해안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닌다는 엘프가 있다고 들었는데. 당신 맞습니까? 저는 헤잔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헤잔. 그런 일도 있었지요. 그 당시에 보물선이 발견되었다는 소리와 함께 고고학적 가치가 높은 물품들의 조사를 위해 연구로 파견되었거든요. 이야기가 너무 긴 터라 전부 말하지 못하지만, 아주 재미있는 사건이었죠.”
“당신이 이곳이 어딘지 안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엘프가 살아가는 날만큼 길다는 걸 깨달을 거요. 엘프 학자가 들려주는 재밌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거지. 제 이름은 러스켈입니다.”
“하, 대화할 상대를 만나니 이제야 제 존재를 자각한 것 같아요. 이 마을 주민들은 다들 멍한 구석이 있었거든요. 기억을 잃어버린 저도 그들과 마찬가지인가 했답니다. 아, 이 주점에 들어온 건 여기 오크분의 노래가 굉장히 재밌어서 저절로 끌려오더라고요.”

칸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맥주를 마실 뿐이었다. 오크의 과묵함에도 아드레나는 옅은 미소를 보였다. 이안이 연녹색을 띤 와인과 제철 과일들을 가져왔다. 술을 한 모금 마신 아드레나는 들뜬 얼굴로 만족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이런 술을 처음 마셔 봐요. 싱그러운 과실 향에 달짝지근하군요. 그리고 뭐랄까, 제 추억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에요.”
“북부 지방에서 나는 과일로 만든 술이군. 헤잔, 네 재치 있는 말투로 이 엘프에게 설명해줘.”

이곳이 뭐하는 곳인지, 우리는 누구인지, 그렇게 헤잔의 말솜씨를 겪은 아드레나는 눈을 찡그리며 크게 웃었다.

“헤잔의 설명은 정말 재미있네요. 그렇다면 리오메르. 제가 겪은 기쁨에 대한 추억들을 술잔에 담아 주실 수 있나요? 이분들에게도 나눠드리고 싶군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런 것도 가능하단 말이야? 이제 보니 순 마법사잖아?”

리오메르가 술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가 경험했던 불가사의한 이야기에 대해 신명나게 떠들어댔다. 용을 본 이야기, 움직이는 시체를 본 이야기, 해일을 겪고 인어를 만난 이야기,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죽음을 마주한 순간이 가장 독보적이었다. 마침내 주인장의 마법이 준비되자 손님들은 박수로 환영했다.

“와, 꼭 밤하늘과 은하수를 담은 것 같아서 아름다워요. 신비한 기운의 술이네요.”

아드레나가 받은 술잔엔 짙은 남색과 은연한 보랏빛이 섞인, 그리고 매우 반짝이는 무언가가 가득 담긴 오묘한 색의 술이었다. 리오메르가 쿡쿡 웃었다.

“제조법은 영업 비밀… 이지만 아주 독한 술과 과일, 향이 강한 와인을 섞어서 만들었습니다. 최근 도시 소피아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술이랍니다. 칵테일이라고도 부르죠.”
“제가 이 술을 여러분께 한잔 돌리겠습니다. 무슨 기억이 나올지 저도 궁금하네요. 건배!”
“정말 신기한 경험으로 남을 것 같지만, 그리고 결국 잊어버리겠지만 건배!”
“건배!”

아드레나가 잔을 들자 사람들도 따라서 잔을 들었다. 칵테일이란 술은 매우 시원하고 달콤했다. 순간, 라프넨은 환영을 봤다고 느꼈다. 밝고 따스한 숲속에서 엘프들만의 작은 축제가 열렸는지, 여러 악기소리와 정다운 속삭임이 생생히 들려왔다. 지극히 평화롭고, 절로 웃음이 나오는 가슴 따듯한 풍경이었다. 라프넨은 감은 눈을 떴다. 다른 사람들또한 살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와이번을 타는 엘프라니. 하늘을 빠르게 날아다니는 느낌은 정말 신선한데. 내가 기사가 된 기분이었어.”
“햐, 엘프들의 활솜씨는 언제 봐도 대단하군. 엘프 머리 위에 있는 사과를 맞추는 대담함이라니. 서로의 신뢰가 강한 걸.”
모두가 저마다의 감상을 말할 때, 오크답게 거대한 하품을 하던 칸투가 입을 넌지시 말했다.
“대체 도서관에 박혀서 서류 베끼는 기억이 어디가 즐겁다는 건지. 죽어서도 엘프들은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단 말이야.”

결국 모두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은 생명을 가진 양 주점 안을 울리며 떠다녔다. 주점의 시간은 매우 길었고, 바닷속을 유유히 떠다니는 거북이만큼 나긋했다. 자랑스레 밝히는 추억들은 비밀을 공유하는 아이들의 장난같이 우스웠다. 라프넨은 자신만이 가진 특별한 추억이 없다는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 남들보다 비교적 일찍 죽은 탓도 있지만, 어쨌든 그랬다. 사람들은 어느새 흔들의자를 끌고 와 몸을 뉘었다. 라프넨은 슬슬 졸음이 쏟아지는 걸 느꼈다. 몹시 편안한 기분이었다. 눈을 감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윙윙 울렸다. 라프넨은 실눈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아드레나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칸투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엘프들이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당신처럼 독특한 엘프라서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매우 홀가분해 보이는군.”
“이승과 죽음의 경계에서, 저는 새로운 친구들인 여러분과 한잔 기울이는 것으로도 충분한 운명을 맞이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모두 안녕.”

아드레나는 옷매무새를 가볍게 추스르더니 가벼운 인사와 함께 문을 열고 주점을 나섰다. 처음 왔을 때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에, 뒤늦게 상황을 인식한 라프넨은 재빨리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람에 떠다니는 나뭇잎처럼 자유로운 여행자. 자신만이 볼 수 있었던 생애의 흔적들을 고작 하루 만에 정리하다니. 진정으로 삶에 대한 미련 따윈 없는 것일까? 하지만 주위는 소란스럽거나 당황하지도 않은 채 여전히 침묵을 유지했다.

“나도 슬슬 갈 때가 됐어.”
“칸투도 이제 환생할 마음이 드신 겁니까?”
“지금은 조금 나른하니 한숨 더 자고 떠나야지. 사람은 늘어날 테니, 굳이 내가 남아있을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면 우리도 슬슬 눈을 붙일 때가 됐군. 그런데 아드레나는 어디로 갔을까? 산꼭대기? 아니면 지하 동굴?”
“혹시 모르지. 생명은 물에서 태어난다고들 하잖아? 이 마을의 안개가 온통 해무일지도 모르지.”

러스켈과 이안이 스스로 식탁을 치우고 있는데, 그릇 떨어지는 소리가 모두의 주의를 끌었다. 이안이 리오메르의 얼굴을 살피며 떨어진 그릇을 대신 주웠다.

“주인장, 괜찮습니까? 무슨 일이에요?”
“누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주 강렬한, 밝은 색채의 손님이….”
리오메르는 곤혹스럽지만, 어두운 표정은 아니었다. 라프넨은 리오메르의 시선을 따라 출입문을 노려봤지만 누군가 들어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살아있는 생명 특유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아 곧 고개를 저었다.
“입구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느껴지지도 않고요.”
“그러게 말이야. 뭐, 어차피 새로운 동반자 아닌가?”
“아뇨. 확실히 한 사람을 향해 찾아오고 있군요. 이 짧은 시간으로 봤을 때, 연연할 수 있는 사람은 라프넨, 당신을 찾아온 것 같습니다. 시대를 초월하는 마법사이거나, 원한을 품은 미치광이가 죽어버렸다던가. 어떤 인물인지 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문제네요.”
“뭐라고요?”

라프넨은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을 생각했지만, 도저히 추려낼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여기까지 건너온다는 소리인가. 마침내 여관의 문이 조심스레 열리고,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 밑까지 차분히 가라앉은 분홍색 머리카락, 앳되고 귀여운 외모에 아담한 드레스. 소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사람들을 발견하곤, 그 중에 라프넨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라프넨은 경악한 표정을 금치 못했다.

“루인 공주님…!”
“공주님이라면, 비투스의? 와, 내가 살아가면서 왕족을 다 보네. 아 참, 죽었지.”
“흐음, 술 냄새가 여기까지 풍기네요. 예, 맞아요. 제가 비투스의 루인 공주입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라프넨은 떨리는 마음으로 공주에게 다가서려고 했지만, 어깨를 붙잡은 칸투를 보고 움찔했다. 일어선 칸투의 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두껍고, 거대했다. 이안이 그 의도를 깨닫고 황급히 말했다.

“가까이 가지마. 혹 저 공주님이 가짜일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여신을 음해하는 악마가 모습을 속이고 기사를 꼬드기려고 온 거지. 안 그래, 러스켈?”
“그 말도 일리가 있네. 공주님, 혹시 전쟁에서 비투스가 패배하였습니까? 그리고 공주님은 전장에 계시지 않으셨고요? 아니면 잠이 들 때 막 죽은 군인들의 혼령이 튀어나와 공주님과 함께 가자고 하던지?”
“그 말은, 제가 죽어서 여기에 왔거나 죄책감에 이성을 상실해 악마가 된 비운의 소설 주인공 같다는 건가요? 안타깝게도 비투스는 건제해요. 전쟁은 승리했고, 죽은 기사들은 화장을 마쳤고, 시민들은 성대한 축제를 열어 비투스의 행복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어요. 지금 당신의 말을 저희 아바마마가 들으셨다면 목이 날아갔을 텐데….”
“어, 저도 이미 죽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데, 공주님은 도대체 무슨 수로 찾아오신 겁니까?”“당연히 흑 마법이죠.”
“가짜가 확실하다!”
“당신을 재물로 잡아먹을지도 몰라요. 크앙.”
“히이이!”

공주가 성난 짐승처럼 팔을 높게 쳐들자 헤잔이 더욱 부산스럽게 반응했다. 작은 연극을 보는 것 같아서 리오메르는 쿡쿡 옅게 웃었다. 러스켈은 자신의 지식을 동원하여 천천히 말했다.

“흑 마법이란 신을 상정하고 나서, 신으로부터 주어진 운명이란 섭리를 거부함으로써 생기는 괴리를 말합니다. 신을 믿지 않은 대가는 죽은 육체가 영원히 유지되어 살아가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흑 마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매우 위험한 행위 아닙니까?”
“네, 위험해요. 흑 마법의 시초를 꽤 잘 알고 있군요.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갈래일 뿐이죠.”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하셨습니까? 비투스는 현재 안정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시민들을 다스리고, 언제까지나 평화를 지켜나가셔야 하실 텐데, 흑 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다면 왕가가 발칵 뒤집히지 않을까요?”
“아, 그런 위험들이라면 괜찮아요. 이거 합법이니까. 여기 있는 이 반지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공주는 왼손을 치켜들었다. 손가락에는 은으로 세공된 반지와 전체적으로 까맣지만, 푸른빛을 띠는 보석이 박혀있었다. 공주는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건 시전자가 목표물에게 소환되는 일종의 마법이 걸린 반지에요. 어떤 재료로 만들어진 것 같아요? 라프넨에겐 미안하지만, 그의 시체에요. 영혼이 떠나가고 남은 유골에서 고압과 고열, 그리고 빛의 마법으로 재구성한다면 하얀 사리대신에 천연의 아름다운 다이아몬드가 남게 되죠. 세상에서 아직 하나뿐인 반지랍니다.”
“제 육신이 매개체가 된 거군요….”
“와, 공주님 취향 정말 독특하시네요. 전쟁과 연인에 대한 애증입니까? 악!”
“입이 건방지다. 헤잔.”

칸투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헤잔은 쓰러지는 척 의자에 앉았다. 루인 공주는 그 상황을 지켜보다 짐짓 고개를 기울였다.

“여러분의 행동을 보면 죽은 자들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유쾌하시군요? 마을은 또 다르지만. 누군가 나올 기미도 안 보이고, 집에만 꽁꽁 틀어박혀 있어 대화도 안 되고, 숲은 나갈 수도 없고.”
“저희도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긴 하지만, 혹시 마을을 전부 둘러보셨습니까?”
“예. 숲으로도 나가봤는데 곧장 마을 입구로 돌아오더군요. 매우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이 공주님 진짜로 간이 부…, 매우 활달하고 용감하시군요. 저희도 해보지 못한 일을 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헤잔이 칸투를 힐긋 보더니 재빨리 말을 골라냈다. 러스켈은 공주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쨌든, 반지가 대단히 신비로운 힘이란 건 알았습니다. 죽은 자들까지 소통할 수 있다니. 하지만 공주님이 진짜 공주님이라는 것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제 이름은 러스켈입니다.”
“여러분이랑 저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있어요. 바로 이것이죠.”

루인 공주는 손거울을 자신의 머리 위로 올렸다. 사람들은 거울을 통해 루인 공주의 뒷머리를 봤지만, 정작 자신들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이안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생자를 증명하는 도구는 정작 자신들을 거슬려 했다.

“허, 그렇군. 이 주점에는 거울이 없어. 있다고 해도 우리들은 눈치 채지 못할 거야. 모습은 보여도 실체는 없으니까. 우리가 유령이란 걸 확인할 가장 좋은 수단이지.”
“너무 슬퍼하진 말자고. 우리는 거울 너머의 세계에 도달했잖아? 좋아했던 시절은 지나갔지만, 시간의 희미한 경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잖아. 방금 내 말 굉장히 멋진 것 같았어. 죽어서 깨달음을 얻었나?”
“당신들은 감동할 정도로 올바른 사람들이네요. 다시 소개해 드리겠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비투스의 루인 공주입니다. 이 세계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이야기하고 싶네요.”

치마 끝자락을 잡고 묵례하는 공주. 짧은 소개로 답하는 손님들. 루인 공주는 할 말을 잃어버린 라프넨의 곁에 앉았다. 공주는 어린 나이답게 호기심이 왕성했고, 그녀의 질문들은 교양적이어서 우리들은 많은 애를 먹었다. 칸투가 맥주를 벌컥벌컥 입안으로 털어 넣더니 사뭇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공주님, 어렵게 이곳을 찾아오셨겠지만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나쁜 소식으로.”
“뭐죠? 말해보세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엔 엘프 한 명이 앉아있었습니다. 엘프가 건네준 술에 의해, 저는 그의 특정한 기억 두 가지를 엿보았습니다. 하나는 됐고, 다른 하나는 엘프들이 오크나 인간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죽은 자들을 해석하는 장면입니다. 그것은 제게 인상적인 부분으로, 엘프들은 죽은 영혼들이 가끔 현세에 보이는 이유가 인간이 얻고자 했던 욕망과 타고난 의지가 사후의 영혼을 얽어맨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즉, 악의에 사로잡힌 망자는 생명의 그릇이자 깨어있는 원천인 인간의 육체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정신이 텅 비어버린 공주님의 육신은 지금 세간을 떠도는 영혼들이 기웃거리거나 악한 마법사들이 공주님의 몸을 강탈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이윽고 칸투가 크게 한숨을 쉬자 사람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칸투가 원래 이렇게 말을 잘하는 오크였나? 아니,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오크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서 제게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무엇인가요?”
“공주님의 합법은 이곳으로 오는 조건을 만족한 것이지, 보호는 아니라는 겁니다. 이 논리를 좀 더 실질적으로 표현하자면, 공주님의 눈으로 저희를 보시는 것같이 영혼이란 존재를 입증하셨고, 머지않아 여신이란 존재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신은 영혼들을 위한 공간에 ‘살아있는’ 인간이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공주님이 간접적인 위험에 처해있다는 얘깁니다. 그에 대한 근거로 사후세계를 돌아다닌 ‘살아있는’ 이는 없었으며, 그런 인간이 있다한들 후세까지 전해진 이야기도 없습니다. 공주님의 행동은 자칫하면 죽음보다 더한, 저희들은 절대 알지 못할 나락으로 빠질 수도 있다는 겁니다.”
“와우, 칸투. 당신의 뻐드렁니가 매력적으로 보일 지경인데요?”

헤잔의 익살과 감탄이 섞인 웃음에 루인 공주 또한 해맑게 웃었다.

“맞아요. 저는 매우 위험한 행위를 저질렀어요. 육신과 정신을 분리시켜서 잠깐의 먼 거리를 여행하고 있죠. 하지만 섣부른 판단은 아니었답니다. 제 육체와 영혼을 걸고 내기해서라도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가치가 있었더라면, 그리고 예외의 흑마법이라는, 실로 뛰어난 안전장치가 달려있어 충만한 가능성을 지녔다면 도전해볼만하지 않겠어요?”
“안전이 확보되면 뛰어드는 도박의 원리…….”

학자들에게 교양을 배우던 루인 공주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올랐다. 항상 당당한 얼굴로, 자신의 삶 속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소녀. 그리고 라프넨은 루인 공주와 시선이 마주쳤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공주의 눈동자에 라프넨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루인 공주는 천천히 라프넨에게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마법이든 주술이든 강제적으로 영혼을 건드리지 않을 경우, 망령은 인간의 무엇 하나 건드릴 수가 없답니다. 그런 강렬한 힘이 주어지지 않을뿐더러 해를 가할 실체적인 현상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니까요. 그리고 본디 죽은 영혼이 살아있는 생명에 관심을 갖는 경우란, 그들에게 공통으로 갈망하는 소원인 넋을 달래는 것입니다. 오크 분이 보았던 기억과 비슷하지만, 저는 연구를 위해 엘프들에게 설명을 들었어요. 넋을 달랜다,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루인 공주는 잠시 틈을 두었다. 이윽고 그녀의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인간을 대상으로 호오를 가르겠습니까? 불특정한 다수의 눈에 밟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위로를 받고 싶다는 것뿐, 공허한 세상에 놓인 길 잃은 영혼들이에요. 저처럼 살아 있는 인간이 모름지기 앞서서 그들에게 애도를 표하는 것. 그렇게 사람들에게 위안을 얻을 때, 천천히 진혼 되는 것이죠.”
라프넨이 공주의 손을 잡았다. 술기운인지는 몰라도, 루인 공주의 손은 따스하고 정겨웠다.
“훼손될 가능성을 간과할 순 없지 않습니까? 세월의 흐름에 의해 마모되는 것이 아니라 지독히 타의적인 행위 때문에 지워지는 것이죠. 예를 들면 전쟁으로 희생된 이름 없는 용병들이라던가. 그들은 누가 기억해줍니까?”
“죽음은 누구에게나 유보 없이 찾아와요. 사람들은 고통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기사가 전쟁에 출전하는 이유는 자신이 죽음을 받아들일 용기가 있다는 것도, 살아남은 이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오열할 힘이 남아있다는 것도, 하나의 생명이 위험을 무릎 쓰고 저승길에 오른 것도. 저들의 각오를 위해 희생된 자들을 누가 욕하겠습니까?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것 또한 의미 없는 집착이에요. 허나 부질없는 짓은 아닙니다. 인간은 서로의 존재를 강하게 끌어들여요.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혹은 지탱하기 위해서. 단지 그뿐입니다. 이안, 할 말 있어요?”
“내 얘기를 해준 것 같아서 고맙네, 라프넨. 우리는 어린 공주님에게 옳고 그름을 논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공주님이 자기 자신에게 존엄을 요구한다면, 말리지 않아야겠죠. 공주님은 대체 무엇을 하시려고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이곳까지 와야 할 목적. 그야 당연히 제가 이 사람의 존재를 필요로 한 게 아니겠어요?”
“그게 무슨…… 읍.”

라프넨은 말을 잇지 못했다. 루인 공주가 라프넨의 멱살을 잡아당기더니 순식간에 입을 맞춘 것이다. 근질 거리는 느낌과 함께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서로의 혀가 얽히고,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와우! 도발적이고 영특하고 매력적인 공주님에게 박수!”

옆에서 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도 라프넨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뒤엉키고, 사고가 정지해버렸으니까. 몇 분간의 황홀감 끝에 공주가 먼저 입술을 떼었다.

“이 무슨….”

루인 공주는 입술 끝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숨을 약간 들이쉬었다.

“내가 당신이 돌아오길 그토록 고대했는데, 말 없는 인간의 옆에서 목메어가며 울어버리는 것은, 한 연합의 대표로서 수치가 아닐까요? 제가 힘겹게 고생해서 얻은 이별 선물이에요. 공주로서의 권위니까 거절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루인 공주는 손을 뻗어 라프넨의 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공주는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라프네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공주님을 그대로 껴안았다.

“자칫하면 우리는 아니,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요. 거의 확실하겠죠. 저는 죽을 수 없는 몸이고, 당신은 이미 죽은 몸이니까…….”
"공주님, 죄송합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다시 만났으니까.”
“어우, 저 닭살.”
“야, 헤잔. 내 팔 봐봐. 소름이 돋았어. 목에 칼침 맞았을 때 징조였는데.”

헤잔과 이안이 서로를 쳐다보며 몸을 떨었다. 루인 공주는 배시시 웃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마냥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시끄러운 게 분명했다. 공주는 똑똑했고, 그녀가 해주는 이야기는 여러 시인들보다 뛰어났다. 흙 속에 파묻혀 끊임없이 쏟아지던 그들의 졸음은 달아난지 오래였다.

“……공주님이 말씀하신 앤틀러스는 아쉽게도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워낙 오래된 구전이기도 하고, 그가 용을 부려서 바다를 수호했다는 점 하나만 해도 굉장한 은거인이거든요. 용 그 자체라는 설도 있으니 말입니다. 어, 공주님. 조금 피곤해 보이십니다.”

러스켈의 걱정에 루인 공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루인 공주는 라프넨의 어깨에 몸을 기대었다.

“하아암. 미안해요, 그 이야기는 재밌었어요. 저는 이제 좀 쉬어야겠어요. 여러분과 달리 제 졸음이 마구 쏟아지네요. 모래 해변에 누워 저녁바다를 감상하는 느낌이에요. 라프넨, 내 손을 잡아줘요.”
“돌아가실 시간이 되었군요. 제가 공주님을 기다렸듯이, 사람들도 공주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겠죠.”
“조금 감상적이게 되었군요. 만나서 정말 기뻤어요. 저, 또다시 올 테니까.”

루인 공주는 흔흔하게 웃으며 소중히 반지를 쓰다듬었다. 공주의 모습이 투명해지면서 소리 없이 사라지자, 그제야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루인 공주의 웃음소리는 마치 여운처럼 남아 감도는 듯했다. 라프넨은 그녀가 마시던 잔을 손에 쥐더니 쭉 들이켰다. 칸투가 라프넨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자네의 고민은 전부 날아가 버렸나.”
“예, 저도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하하하, 만일 공주님이 오신다면 저는 벌써 가버렸다고 해주십시오.”
“자네가 기다리면 될 것 아닌가? 죽은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있으니 공주님은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할 텐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산 사람이 언제까지고 죽은 자를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요? 공주님은 앞으로 비투스를 지탱해야 하실 분입니다. 제 존재는 그녀의 마음을 힘들게 하겠죠. 뻔합니다. 보고 싶을 때 도망치면 언제든지 기다려 주리라 믿을 테니까. 공주님은 의외로 약하신 부분도 있으시니, 제가 마음 한편을 차지하게 놔둘 순 없는 노릇이죠. 제 존재는 그녀 안에 남은 안식처이지만, 그런 행위가 반복될 때마다 그녀가 느끼는 현실의 감각은 티끌처럼 사라져버릴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저는 떠나겠습니다."

이안이 두 손을 얼굴 옆에 두고 흔들었다.

“그럼 작별이로군. 하루 동안이지만, 자네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
“그리고 너무하는데. 우리보고 여기에 남아있으라는 뜻이잖아. 하하, 하지만 또 그 예쁘신 공주님을 봐서 나쁠 건 없겠지.”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모두, 인연이 닿는다면 꼭 찾아뵙겠습니다.”
“잘 가요.”

리오메르가 마지막으로 웃으며 작별인사를 하자, 라프넨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주점을 나섰다. 마음이 이끄는 데로 온 것처럼 마음 가는 데로 걸어가리라. 그는 담 없는 마을을 넘어 수풀 속으로 걸어갔다.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렸지만, 나무뿌리에 발이 걸리거나 하진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라프넨의 눈앞에 한 사람의 등이 보였다. 그는 바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프넨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 엘프는 고개를 돌렸다.

“라프넨.”
“아드레나. 아직도 계셨군요?”
“이걸 보니 도저히 떠날 수가 없더군요.”

언제나 흐려 보일 것 같은 하늘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새벽을 몰랐던 주홍빛 여명이 세상을 밝히고, 깨끗하고 거대한 강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숲을 반으로 가로지르며 끝 모를 경계선까지 흘러가고 있었다. 강가로부터 생명력이 가득 담긴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와 라프넨의 머리카락을 한껏 흩뜨리고 지나갔다. 무척이나 상쾌하고 시원한 바람이었다. 아드레나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돌아보았다.
“물새의 등선같이 매끄러운 강이에요. 수만 가닥의 하얀 수염을 엮은 폭포일까요? 살아생전에도 이런 풍경은 본 적이 없었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강이라니, 거대한 마법 같군요.”
“라프넨도 다시 여행하는 건가요? 한 사람의 마지막을 곁에서 함께하니 매우 영광이네요.”
“영광이라니, 고작 한 사람인데 너무 거창한 표현이십니다.”
“아닙니다. 그 어느 생명이든 탄생과 숭고함은 영원히 귀속되어있는 것이죠. 가실까요?”
“강을 건너는 건가요? 하긴, 다리가 있을 것 같진 않네요. 깊은 것 같지는 않고.”

라프넨은 아드레나를 뒤따라 강을 건너려고 했다. 그런데 강에 들어간 다리가 움직이지 않더니, 그대로 몸이 수면에 뉘어졌다. 그것은 아드레나도 마찬가지였고, 둘은 중심을 잃고 빠른 속도로 떠내려갔다.

“아드레나! 내 손 잡아요!”
“세상에! 뭐가 일어난 걸까요? 상당히 재밌네요!”
“정말 태평하시네요! 사람은 물에서 태어난다더니!”

몸이 물속으로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물살이 너무 거세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라프넨은 저 멀리에서 이상한 것을 포착했다. 눈 주위에 힘을 잔뜩 주고 노려보자 다른 폭포와 함께 그 끝에서는 밝은 광채가 자리한 것이 보였다.

“폭포 끝에 무언가 있어요! 태양을 만드는 도구일까요!”
“설마요! 아니, 이곳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우리가 모르는 세상이니까!”

강물은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라프넨은 이것이 참으로 희한한 작별이라고 생각했다. 아드레나가 다리를 크게 움직여 수면 위로 튀어 오르더니, 라프넨에게 안겼다. 아드레나는 즐거움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거울이네요! 세상으로 연결시켜주는 출구 같아요! 모든 걸 잃어버릴 텐데, 두렵지는 않나요?”

“그렇다면 저희는 벌써 세계의 끝에 도달한 거군요. 빛이 포근해서, 다른 생각 따윈 치웠어요!”

아드레나는 싱긋 웃어 보인 다음, 거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직까지 거리는 남아있다. 라프넨은 주위를 둘러보며 숲의 정경을 오래토록 지켜보았다. 이제 정말 세상 속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구나.
공주님, 마지막까지 어설퍼서 미안합니다. 제가 반드시 곁에 닿을 테니, 언젠가 먼 미래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다음 세상으로. 라프넨은 거대한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울에서 찬란한 빛줄기가 뿜어져 둘의 모습을 감싸 안았다. 라프넨은 더없이 황홀한 감각에 휩싸였다. 그렇게 라프넨의 영혼은 세계에서 완벽하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