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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극장 5화

  • 작성일 2016-01-13
  • 조회수 153

[시간극장/5]

홍가희가 카페 시간극장을 찾아온 것은 지난했던 안드라스 퀴마스가 지나가고 안드라스 칼티스 새해가 밝아 올 무렵의 어느 겨울 날이었다. 검은 피부에 풀기없는 머릿결의 홍가희는 지쳐 보였고, 보라와 바를 마주하고 앉자 마자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담배를 피워 댔다. 보라는 선반에서 '마음'이라고 적힌 믹싱주를 꺼내 홍가희에게 따라 주었다. 안드라스 칼티스 새해를 맞아 디자인을 새로 한 나무 선반은 거꾸로 된 무지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홍가희는 잔에 그려진 에바 알머슨의 그림 'queen of house'와 보라를 번갈아 보며 역시 웃음을 터트렸다.

-맘에 들어?

홍가희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홍가희는 믹싱주 '마음'을 한 잔 마시고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바 아래에서 꺼낸 '짱구'를 뜯어 유리대접에 담은 보라가 한 손으로 봉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대접을 홍가희 쪽으로 밀었다.

-준비됐어?

홍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보라가 언제나처럼 바 한 쪽 끝에 앉아 있는 오익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조명이 꺼졌고, 역시 언제나처럼 오익이 케잌 모양의 초를 가져와 홍가희의 앞에 내려 놓았다. 케잌초 불빛에 비친 짱구가 마치 살아 있는 벌레들처럼 보였다. 케잌초로 담배를 붙인 홍가희가 연기를 뿜어 냈다.

-11년 전,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면 이진 이진 년 전 얘기야. 막 의료업에 글로벌 바람이 불던 시기였지. 하지만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어. 외국계, 다국적계 병원 기업과 공립 의료원 간 의료비 차이가 두 세 배 정도였던 때니까 말야.
-지금은 한 열 한 배, 그러니까 이진 이진 배 정도 하나?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아무튼 그때 아빠가 허리가 아프다고 하는 거야. 집 안에서 일하던 사람이 아빠 밖에 없었는데, 청천벽력같은 얘기였지. 평소 그런 내색을 잘 하지 않는 아버지였기 때문에 가족 모두 아버지가 정말 많이 아프시다는 걸 알았지만 괜찮을 거라는 아빠 말을 그냥 믿는 척하고 가끔 안마나 해드리면서 계속 일하시게 했지. 아빠가 일하지 않으면 정말 대책이 없었거든. 그렇게 시간이 흘러 갔다. 한 두 달인가 아버지 안색이 변했어. 황달도 아니고 검은빛도 아닌 자줏빛이 아빠가 미소를 지으려고 할 때마다 드러났지.
-피치병
-맞아. 지금 피치병이라고 부르는 감염병에 아빠가 걸렸던 거지. 병원에 갔어. 물론 공립의원이었지. 공립의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아버지가 죽었어.
-뭔가 사연이 있다는 거야? 당신 아버지가 죽게 된 과정에 뭔가 이상한 점이 있어?

홍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공립의원 쪽에서는 제대로 진단을 못했어. 우리한테 다른 병이라고 얘기했지. 물론 다른 병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지. 신종 감염병일 가능성이 있다고도 얘기를 하긴 했어. 확률이 90퍼센트 대 10퍼센트 정도라고 했지. 그러면서 다른 병(무슨 화농병이라던가?)에 맞춰 치료를 할 것인지 신종 감염병일 경우에 대비해 치료를 진행할 것인지 우리보고 선택을 하라고 했어. 당연히 확률이 높은 쪽으로 선택을 해야 하는 거 아냐? 우리는 그 화농병 뭔가인가에 맞춰 치료를 해달라고 했지.
-그건 좀 이상한데? 가족들이 전문가도 아닌데 치료과벙을 선택하라고 하다니.
-맞아.

홍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때는 하도 경황이 없었고, 또 화농 뭔가라는 병이 훨씬 예후가 좋은 병이었으니까 가족들은 당연히 좋은 쪽으로 선택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거지. 인간이란 게 그런 존재잖아. 늘 희망적인 것, 자기한테 유리한 게 더 진실처럼 느껴지는 법이잖아. 게다가 90퍼센트 쪽이 그 병이라고 하니 덥썩 물어 버린 거지. 그게 진실이라고 믿고 오히려 우리가 적극적으로 그쪽으로 치료를 진행해 달라고 떼를 썼어...
-...
-...
-...아니었구나.
-그래. 치료가 반응이 없자 그제야 의사들은 우리 가족들한테 아버지가 앓고 있는 병이 신종 감염병일 가능성이 높다고 얘길 해주었지. 치료를 시작한 지 한 달, 아버지가 병을 앓고 난 지 삼 개월이 넘어간 시점이었어. 예후가...좋지 않았지.
-얼마 뒤에...
-그리고 두 달 뒤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홍가희가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근데 그때도 아버지는 살 수 있었어. 우리 가족들 모두들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다국적 기업계열의 병원에 모셔갔다면,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에라도 모셔 갔더라면...살 수 있었어...살 가능성이 있었어...
-돈이 없었어?

홍가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절박한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든다고 얘기들 하잖아. 근데 그때 우리 눈에 띈 지푸라기는 황금으로 만든 지푸라기였어...
-후회되겠네. 그냥 용기내서 잡을걸...

홍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그 다음부터 죽어라고 공부했어. 겨우 취직을 해서 온갖 모욕을 참으면서 일을 했어. 이제 나...아버지를 고칠 돈이 있어.

에바 알머슨의 그림을 닮은 보라의 얼굴이 한참동안 아이같은 얼굴로 홍가희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기회는 한 번 뿐이야, 알지? 다음에 또 후회되는 일이 있어도 여기 다시 찾아오지 못해. 그땐 이 카페 자체가 당신 눈에 보이지 않을 거야.

홍가희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 뒤에 엄마가 돌아가셨어. 그때 당신이 우기는 바람에 아빠한테 잘못된 치료를 받게 했다고. 아빠를 데려오면...엄마도 살아나는 거야?

보라는 고개를 저었다.
홍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할 수 없지. 엄마는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아빠한테 데려오라고 해야 겠다.

홍가희가 처음으로 활짝 미소를 지었다.

-준비됐어?

홍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술을 선반에서 꺼낸 보라가 다른 잔에 따라 홍가희의 앞에 내밀었다.
심호흡을 하고 홍가희가 잔을 들었다.
목젖을 따라 술이 넘어가는 동안 홍가희의 몸이 파도를 쳤다.

-조심해.

보라가 덧붙였다.

-그리고 명심해. 아빠를 데려올 때까지 안심하면 안 돼.

보라의 마지막 말과 함께 홍가희의 모습이 두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홍가희가 공립의료원 18인 병실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이진, 그러니까 그때의 시간으로 새벽 한 시 무렵이었다. 보호자와 환자 모두 잠들어 있는 병실에서 아무도 벽 밖으로 엎질러져 나온 홍가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병실은 홍가희에게 친숙한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당연했다. 그때 그 시간이 홍가희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는 것처럼 시간여행이 가능하기 전까지 누구도 볼 수 없고 아무도 가닿을 수 없는 그때 그 시간의 풍경은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라는 장벽을 건너지 못하는 인간과는 별개로 말이다. 홍가희는 친숙한 환자들과 친숙한 보호자들을 지나 아버지가 누워 있는 침상으로 다가갔다. 보조침대에 이제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등이 곱은 자세로 누워 있었다. 홍가희의 눈시울이 울컥해졌다. 엄마의 이불을 잘 덮어 주고 나서 홍가희는 아버지의 침상 맡으로 다가갔다. 고요한 곡선들이 아빠의 얼굴 위에 떠있었다. 홍가희는 뺨을 닦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젖은 손으로 아버지의 이마를 닦아냈다.

***

홍가희의 아버지 홍승조가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 들어 온 건 천장의 흰벽이 아니었다.
꿈이라기엔 눈이 너무 따가웠고, 천장의 조명불빛들은 넘 아름다웠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머리맡에 서 있는 홍가희를 살펴 보던 홍승조는 눈을 깜빡였다. 딸이 십 년은 늙어 보였다.

-얘야, 고생이 많구나. 내가...죽지도 못하고...

홍가희는 웃다가 눈물을 흘렸다.
홍승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얘야, 네 엄마는 어디 갔니? 그리고 여긴 어디냐?

설명하지 않고 홍가희는 무너진 채 아버지의 가슴을 끌어 안았다. 홍가희의 얼굴이 한참동안 홍승조의 가슴을 적셨다. 보라가 미리 불러 둔 엠뷸런스가 카페 밖에서 연신 사이렌 소리를 울리고 있었다.

-어서 가. 안 그러면...

보라가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도 늦을 수 있으니까.
머리를 들고 홍가희가 보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보라가 미소를 지었다. 진짜 에바 알머슨의 그림처럼 아주 환한 미소였다.
***

홍가희와 홍가희의 아버지가 떠나고 난 카페 시간극장에 또다시 보라와 오익 두 사람이 남았다. 두 사람은 바를 마주 한 채 술잔을 나눴다. 창문 밖으로 먼지와 바람이 떠다녔다.

-무슨 생각해?

오익이 창가로 향한 보라의 얼굴을 바라 보며 물었다.

-당신 생각.

보라가 미소를 지었다.

-옛날의 당신 생각.

오익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 올랐다. 오익은 고개를 돌려 보라가 쳐다 보는 먼지 낀 세상을 함께 바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