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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국

  • 작성일 2016-01-13
  • 조회수 256

*

 

인부들이 모두 나간 식당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노인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남겨진 육체의 열기가 엉덩이로 느껴졌다. 온기는 좋았지만 마냥 좋아만 할 수도 없었다. 잠시 한 여자가 선지국과 반찬을 챙겨 나왔다.

온 몸에 살이 잔뜩 오른 늙은 여자는 이집 주인으로 보였다. 얼굴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화장이 화려했다. 노인은 묵묵히 숟가락을 들었다.

 

선지는 피와 살을 만드는 거야. 남기지 말고 전부 잡숴봐.

 

주인 여자는 노인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곤 고개를 카운터에 놓여진 작은 TV쪽으로 돌린 채 말했다. 노인은 선지 덩어리를 씹었다. 맛은 훌륭했다. 길 건너 건물이 지어질 때까지 인부들은 이 식당에서 밥을 대놓고 먹었다. 그런 말을 들었다. 인부들이 가는 식당이 가장 싸고 맛있다고.

시간은 오후 2시. 아무리 분주하던 식당도 이시간이 되면 침묵 속에 묻힌다.

 

소주 한 잔 하실라우?

 

노인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여자는 소주 한 병에 술잔 두개를 들고 노인이 있던 테이블로 옮겨 앉았다. 그리곤 술을 따랐다. 처음에 여자가 원샷을 했고 국물을 뜨던 노인이 천천히 소주잔을 들었다.

소주 한잔이 들어가자 노인은 감회가 새로웠다. 그래도 한 때는 학생들을 가르쳤던 내가 이런 곳에서 이런 여자와 술을 마시고 있구나.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여자는 분명 자기가 먼저 들이대긴 했지만 조금 민망했던지 얼굴을 TV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나마 자신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노인은 생각했다.

아내가 죽고 아이들은 모두 떠났다. 여자와 이렇게 마주 앉은 게 도대체 얼마만이지.

노인은 쉬이 셈이 되질 않았다. 아직 수컷으로 보이긴 하는 건가. 노인은 숟가락을 들었다. 다시 선지 덩어리와 밥을 씹기 시작했다.

남기지 말고 전부 잡숴.

다시 한 번 주인여자의 퉁명한 권유를 받고 노인은 픽 웃었다. 뭘 잡수라는 건지. 노인은 밥과 국을 모두 먹고 소주까지 반병 비우고 일어섰다. 카운터 앞에 서서 지갑을 꺼내자 주인 여자가 말했다.

 

국밥에 소주 하나. 팔천원.

 

순간 약이 올랐다. 소주는 지가 먹자고 한 건데. 만원을 내고 이천원을 손에 쥔 노인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하긴 술값은 남자가 내는 거지.

 

*

 

식당을 나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노인은 허름한 빌라 단지로 발길로 옮겼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냉기가 코끝을 스쳤다. 다행히 마신 술 때문에 추위는 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노인은 한숨을 쉬고는 소파에 앉았다.

 

저런 여자라도

매일 마주 앉아서 소주 한 잔이라도 할 수 있다면 나쁠 거 없지.

 

노인의 이성은 딱 거기까지만 상상하려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아직도 화장을 포기 하지 않은 늙은 여인의 일그러진 욕망이 떠올랐다. 노인의 머릿속엔 식당 밖에서 만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려졌다. 심지어 옷을 벗은 둘의 모습까지.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두려움이 솟았다. 혹 이 빌라를 노린 걸까? 하나 남은 이 걸?

 

노인은 찬찬히 옷을 벗었다. 그에게 남은 자존심이 있다면 외출한 땐 언제나 정장차림을 하는 것이었다. 이젠 거동도 불편해 와이셔츠의 단추를 잠그는 것도 넥타이를 매는 것도 노동에 가까웠다. 하지만 따로 할일도 없었다. 그것도 운동이라면 운동이 되는 것이다.

양말을 벗고 벨트를 풀어 놓고 와이셔츠를 벗었다. 벗어놓은 정장은 옷거리에 걸고 와이셔츠는 혹 묻은 것이 없는 지 꼼꼼히 살피곤 정장 옆에 걸었다. 마지막으로 정장 윗주머니에 넣어둔 지갑을 꺼냈다.

지갑을 손에 쥔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다. 지갑에 긴 머리카락 한 올이 붙어있었다. 양복의 안주머니에 있던 것이 지갑에 붙어 나왔던 것이다. 머리카락은 한 눈에 보아도 30센티는 될 것 같았다. 노랗게 염색이 된 머리칼은 파머를 한 것인지 웨이브가 져있었다. 젊은 여자의 머리카락이었다. 옷을 모두 갈아입은 노인은 불을 켜고 머리카락을 바닥에 놓았다. 그리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주위에 저렇게 길고 노랗고 구불구불한 머리칼을 한 여자 있었나?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최근 본 여자라곤 저 식당의 여주인뿐이었다. 검거나 혹은 흰 색에 꼬불꼬불하게 말아놓은 머리칼. 노인이 본 여자의 머리칼은 그것뿐이었다.

그때 노인은 식당 여주인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곤 낮게 한 숨을 쉬었다.

 

*

 

선지는 피와 살을 만드는 거야.

 

주인 여자는 이틀 전과 똑같은 말을 했다. 노인은 묻고 싶었다. 혹시 선지가 피와 살만 만드냐고. 노인은 꼼꼼히 선지 덩어리를 씹었다. 오늘도 여자가 소주를 권했다. 노인은 손을 들어 단호히 저었다. 하지만 여자는 막무가내로 소주병과 잔을 가지고 노인 앞에 앉았다. 이번엔 TV도 틀지 않았다.

 

어이그. 소주값 받을까봐서 그런 거야?

 

여자는 자신이 무안해 지는 것을 느끼고는 말을 꾸몄다. 노인은 약이 오르는 것을 간신히 누르고 밥과 선지를 씹었다. 자신 앞에 놓인 술잔에 입도 대질 않았다. 밥을 거의 다 먹었을 즈음 노인은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언제부터인가 여자는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모골이 송연했다. 노인은 어서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갑자기 떠오른 뭔가가 노인의 생각을 수정하게 했다. 노인은 다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소주잔을 꺾었다. 잔뜩 심술이 오른 여자의 표정이 조금은 풀린 듯 보였다. 여자가 소주잔을 채우자 이번에도 노인은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 젊었을 때를 생각하면 이정도 술은. 노인은 연거푸 잔을 비웠다. 잔을 비우는 숫자가 늘어날수록 여자의 표정도 함께 살아났다. 노인은 애써 미소도 한 번 지어 보냈다. 노인은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카운터 위에 놓고는 식당 밖으로 나갔다.

 

노인은 그날과 똑같이 옷을 벗었다. 그리고 꼼꼼히 옷을 살폈다.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와이셔츠와 양복 상의와 하의를 들여다봤다. 그 어디에도 머리카락은 없었다. 마지막에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봤지만 지갑 속에도 그것은 없었다. 노인은 한동안 술기운을 느끼며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리곤 잠시 자신의 행동을 떠올리며 망연자실 웃었다. 목욕한 지가 오래된 노인은 실내복으로 갈아입지 않고 그나마 걸치고 있던 런닝과 팬티를 벗었다. 벗은 속옷을 집어든 순간 노인은 바닥에 거의 주저앉을 뻔했다.

 

낡고 늘어진 사각 팬티 위로 그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길고 노랗고 웨이브가 진 젊은 여자의 한 올.

노인은 길게 한숨을 쉬고는 부엌으로 갔다.

그리곤 지퍼 백 하나를 열어 조심스레 머리칼을 넣었다.

투명한 지퍼백 안으로 두 가닥의 머리칼이 반짝였다.

 

*

 

테이블 위로 여자가 새 병째 술병을 놓았다. 노인은 순간 움찔했다. 만원을 훌쩍 넘길 밥값 때문은 아니었다. 술을 못이길까봐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주인 여자는 오늘부터는 자신의 과거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드라마의 오랜 클리쉐가 아니던가. 국어를 가르쳤던 노인은 이런 여자의 행동양식을 처음 경험하긴 했지만 전혀 새롭지 않음을 그리고 앞으로도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살아보니 인생,

뭐 털끝만큼도 새로울 게 없지.

 

여자는 푸념을 쏟아내며 술을 마셨다. 반면 노인은 쉽게 취하질 않았다. 망상에서 한 치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혹 오늘은 머리카락이 아닐지도 모른다. 손톱 조각은 어떨까. 빨간 매니큐어가 발라진 손톱 조각 말이다. 생전 아내가 칠했던, 그렇게도 자신이 혐오했던 그 색을 지금 자신이 떠올릴 줄이야.

노인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여자를 봤다. 긴장을 놓쳐선 안 된다. 혹 여자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다시 이 선지국을 먹지 못한다면. 노인은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갑자기 노인은 스물스물한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두툼하고 거친 그러나 그다지 크지않은 손 하나가 자신의 무릎 위에 올라온 것이다.

미소에 너무 힘을 줬나 보다. 멍청하긴.

 

노인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기분은 곧 반전되었다. 다시 노인은 힘차게 술잔을 꺾었다. 그리곤 머릿속으로 달콤한 생각이 한 가닥 피어올랐다.

 

혹 오늘은

희고 가는 손가락 하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