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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와 함께 하는 화요일 네 번째 이야기 마니또 게임 2화

  • 작성일 2016-01-15
  • 조회수 143

<추리와 함께 하는 화요일 네 번째 이야기> 마니또 게임 2화

안익래 형사는 탐문에 나섰다.
수광여고 1학년 2반 담임에게서 받은 주소록을 가지고 개호 방문을 했다. 댁을 찾아 뵙겠다는 말에 대부분의 부모들이 거부감을 나타냈지만, 막상 기다리겠다고 하면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타나는 부모들이 많았다. 대부분이 여고생들의 엄마였고, 맞벌이였다.

-안녕하세요?

사복차림의 형사가 이렇게 물으면 아무리 친절한 표정을 지어도 부모들은 똥씹은 얼굴이 되곤 했다.

-죄송합니다. 실종 신고가 있어서요.

이런 식의 수사 방식에 익숙치 않은 부모들은 잔뜩 긴장해 있다가 익래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이 부근에서 사라진 실종자가 어떤 인물인지 알게 된 공포감때문에 적극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내놓기 마련이었다. 대부분 자기 딸이 어떻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눈빛들이었다. 심유화라는 인물은 모두의 혐오 대상이었다.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익래도 그렇게 생각했다.

탐문은 별 소득이 없이 끝이 났다. 대부분 부모들이 마니또 게임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자기 딸이 그런 쓸데없는, 그러니까 공부와 전혀 상관없고 한눈을 팔 우려가 없는 남몰래 남을 도운다는 소득없는 짓거리를 적극적으로 했을 리가 없다고 말했고, 딸의 손글씨를 좀 볼 수 있냐는 말에는 인권침해라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서 누구누구가 행실이 좋지 않다는 말을 흘렸다. 거의 동일한 패턴이었다.

안익래 형사는 그럴 때마다 학교에서 배웠던 님비 현상이라는 용어를 떠올리곤 했다. 내게 이득이 되지 않는 것들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심리는 이제 사람 사이에서도 적용되는 원리가 된 것이다. 익래는 조금 씁쓸했다.

단 한 아이의 필체도 확인하지 못하고 서로 돌아온 안익래 형사가 수광여자고등학교 홈페이지 1학년 2반 게시판을 확인하고 있을 때 2반 담임에게서 메세지가 도착했다. 입학할 때 아이들이 직접 손으로 작성한 학생 명부를 찍은 캡쳐 사진들이었다.

안익래 형사는 홍가희 학생에게서 건네 받은 스크랩 파일을 펼쳐 필체들을 대조해 보았다. 여고생들의 글씨체는 안익래 형사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 여자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글씨체와 크게 다르니 않았다. 희한하게도 큰 특징이 없었다. 모두 비슷한 것도, 모두 다른 것도 같았다. 이런 일로 필적 감정을 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안익래 형사는 한숨을 쉬었다.

다음 날 전날 만나지 못한 여고생들의 부모들과 바쁘게 일정을 잡아 역시 방문 수사를 했지만 역시 소득은 없었다. 무슨 심산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에선 안익래 형사에게 심유화 실종 사건을 전담하게 했다. 신경 쓸 다른 사건이 많았지만 심유화가 위험인물이라는 이유로 안익래 형사가 수사 중이었던 다른 사건들은 모두 다른 형사들에게로 넘겨 졌다.

서로 돌아온 안익래 형사는 서내 인트라넷을 이용해 범죄자 검색시스템으로 심유화가 저지른 살인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다운 받았다.

심유화가 동급생에 대한 살인을 저지른 건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유화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익래가 취재하고 있는 여고생들과 같은 나이였다. 당시 심유화의 보호자였던 심유화의 아버지가 선임한 변호사는 경찰 조사에서부터 시종일관 심유화가 살인한 권오익이 평소 심유화를 무척 괴롭혔다고 주장했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법정에서도 이런 정상 참작 요건을 인정되지 않았고, 미성년자였음에도 심유화는 이례적으로 징역 20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심유화는 소년법의 혜택을 받지 못했고, 특처법 가중범 적용 대상이 되어 20년 형에 처해진 것이었다.

감옥에서 심유화는 철저하게 격리되었다. 독방 수감 횟수가 일반 수감자들의 10배 이상이었다.

심유화가 저지른 살인 사건은 우발적인 범행으로 인정 받지 못했다. 보고서를 보다 안익래 형사는 평소 심유화가 권오익의 지갑을 자주 훔쳤다는 사망자 유족 측 주장이 가중범 처벌 요건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고서에 기록된 심유화 측 주장과 유족 측 주장이 완전히 달랐고, 가정법원이 아닌 일반법원에서는 거의 일방적으로 유족 측 입장을 판결 주문에 적용했다. 한동안 뉴스를 장식할 만큼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었지만 논란을 덮는 식으로 수사부터 판결까지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안익래 형사는 당시 심유화의 보호자였던 심유화를 부친을 만나 보고 싶어 졌다. 하지만 알아 본 결과 심유화의 부친은 심유화가 수감되고 난 후 얼마 안 있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안익래 형사는 왠지 사건에 점점 더 흥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좀 더 알아 보고 싶었다. 심유화 실종 사건에는 익래가 현재 생각하지 못하는 뭔가 다른 요소가 개입돼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안익래 형사의 머리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심유화와 함께 있던 여자와 심유화가 권오익을 죽이는 장면을 지켜 봐야 했던 권오익의 여자 친구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안익래 형사는 왠지 그들이 이 번 사건과 관계돼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감. 단지 예감이었다.

***

16년 전 사건 당시 범인이었던 심유화와 함께 있었던 여자의 이름은 차유정이었다. 올해 32살인 그녀의 최근 행적은 비교적 쉽게 파악되었다. 그녀는 강남에 위치한 한 법무법인에서 경리로 근무 중이었다.

-차유정 씨시죠. 뭐 좀 여쭤볼 게 있어서요?
-네?

전화를 받는 차유정의 목소리는 당황한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변호사 사무실에서 경리를 찾는 전화가 흔할 일은 없을 것이었다.

-안익래 형사라고 합니다. 심유화 아시죠?

차유정의 숨이 멈췄다.

-무슨 일이신데요?

한참 후에 차유정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흘러 나왔다.

-만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몇 시쯤 끝나시나요?

차유정은 심유화가 출소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익래는 저녁 7시에 차유정의 법인 사무실 근처 카페에서 만날 약속을 잡았다.

***

-유화와는 연락하지 않고 지낸 지 꽤 되었습니다.

주문하고 앉자마자 차유정은 이렇게 말했다. 10분 전부터 기다린 안익래는 덕분에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물어 볼 수 있었다.

-심유화는 어떤 친구였습니까?

익래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차유정이 탁자에 올려 둔 페이저가 울렸다. 유정이 커피를 가지고 돌아 왔다.

-유화는...뭐랄까...

익래는 살피는 눈으로 유정의 얼굴을 바라 봤다.

-관심이 가는 아이였어요. 볼품없이 작고 맨날 놀림을 받고 그랬는데 어딘가 달라 보였다고 할까? 생각이 깊어 보인다고 할까? 외모도 그렇고 왠지 지켜 주고 싶게 하는 친구였죠.
-사귀는 사이였습니까?
-아니오.
-고1이면 이성에 한창 눈을 뜰 나이 아닙니까? 그런 시간에 함께 으슥한 산밑 벤치에 앉아 있을 정도라면.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있긴 했었던 것같아요. 근데 그땐 유화나 나나 또래보다 순진했었거든요.

익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권오익이 다가왔던 상황을 좀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차유정은 한참 뭔가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차유정은 테이크 아웃 커피잔에서 비닐로 된 용기 뚜껑을 떼어내고 검은색 휘핑 스트로우를 휘저었다.

-그때 손을 잡고 있었는데...유화의 몸 안에서부터 떨림이 느껴졌어요. 정말 이렇게 떨 수 있나 싶게 덜덜거리는 거예요. 그제사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권오익과 그 여자 친구를 보게 됐죠. 보자마자 알 수 있었어요. 유화한테 그 권오익이라는 애가 어떤 존재인지...
-그냥 지나쳐 갔습니까? 권오익이? 두 사람을 말잊니다.

차유정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형사님도 뉴스나 신문 보셨겠죠? 아, 나중에는 제대로 보도가 되지 않은 걸로 아는데, 권오익 측에서 언론 쪽을 마사지하기 전까지 보도된 내용 그대로였어요. 아는 척을 하려고 그랬는지 우리 앞에 섰을 때 누구냐고 물어 보는 여자친구한테 권오익이 유화를 가리키면서 '병신'이라고 말했어요. 그 말 듣고 유화가 완전히 확 돌았던 것같애요. 형사님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여자랑 같이 앉아 있는데 반친구한테 그런 말을 들었다고 생각하면...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죠"

익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유정이 고개를 숙였다. 익래는 한참 무슨 말을 더해야 할 지 모른 채 앉아 생각을 곱씹고 있었다. 그러다가 뭔가가 생각난 듯 익래가 차유정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참, 그때 권오익이랑 함께 있던 여자친구, 누군지 혹시 아십니까? 사건자료를 아무리 뒤져 봐도 도무지 그 때 같이 있었던 여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차유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저도...그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 여자애는 다시 볼 수 없었어요. 왠일인지 참고인이나 증인으로도 조사를 받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익래는 털썩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상했다. 권오익 측에서 신변보호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때 권오익과 함께 있던 여자의 존재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 들자 안익래 형사는 왠지 그 여자가 이번 실종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같은 예감이 들었다. 물론 단지 예감이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또 여쭤볼 게 생기면 다시 연락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아주 잠깐 미간을 찌푸린 후 차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온 익래는 소태라도 씹은 듯 입이 썼다. 올 때의 기억을 되짚으며 익래가 정류장 쪽으로 걸어갈 때 메세지 알림벨이 울렸다. 익래는 주머니에서 스마트 폰을 꺼냈다.

'아저씨'

홍가희 학생이었다.

'할 말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