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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造花)

  • 작성일 2016-01-26
  • 조회수 330

 

차라리 못난 꽃이길 바랐습니다. 꽃봉오리 속에서 여린 잎 전부 추스르지 못한 채 피어, 구겨진 잎 살살 펴며 비구름에 근심하는, 그런 꽃이길 바랐습니다. 목련, 철쭉, 해바라기, 장미, 어떤 것도 상관없었습니다. 한 계절 피었다 비바람에 시달리며 시들겠지만, 그런 것도 괜찮았습니다. 징그러운 벌레가 꼬이는 것도, 재수 없게 누군가의 신발에 밟히는 것도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아름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형수술 광고판을 봤습니다. 거리를 오가며 자주 봐오던 것에 불과했지만 자꾸만 시선이 갔습니다. before, after. 추녀와 미녀. 그것을 전부 믿은 건 아닙니다. 수술은 마법이 아니고, 잡초를 잘라 붙여도 그건 조화이지 꽃이 될 순 없었습니다. 포토샵으로 손을 대 놓은 인공적인 미인. 그런데 그 사진이 며칠이 지나도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진 속 추녀가 저와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겁쟁이였던 제가 수술을 결심한 계기는 남동생의 사소한 한 마디였습니다. 못난이라는 말이 그날따라 왜 그리 마음을 후벼 팠는지, 눈물이 쏟아져 눈가를 닦아도 멈추질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얼굴에 칼을 대겠다는 자식에게 말없이 날짜만 물으셨습니다. 반대하는 말도, 걱정하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셨기 때문에, 순간 어떻게든 웃어넘겨보려 했지만 흘러넘친 감정과 말을 주워 담을 순 없었습니다.

 

의사선생님은 연예인들의 사진이 붙어있는 카탈로그를 건네주셨습니다. 한참동안 바라보았지만 누구하나 못생겼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치 꽃집의 카탈로그같이. 모난 구석 없는 예쁜 사람들.

“마음에 드는 얼굴이 없나요?”

저는 너무 예쁜 사람들뿐이라 제가 고를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의사선생님은 웃으며 제게 주눅들 것 없이 용기를 내라 말씀하셨습니다.

“걱정할 것 없어요. 학생이 어떻게 살아왔던 간에, 학생은 수술을 통해 다시 태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제야 가슴이 뛰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말이 숨죽인 심장을 건드렸습니다. 다시 태어난다. 새로 시작할 수 있다. 조용히 그 말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심호흡을 하며 다시 카탈로그를 살펴봤습니다. 어떤 얼굴이 되더라도 좋을 것 같았지만 아무거나 짚어내는 건 불안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다 마음속에 떠오른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구겨진 잎. 꽃이지만 부족함을 품은.

그래서일까요. 저는 그 카탈로그에서 가장 못생긴 사진처럼 되길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의사선생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의사선생님은 수술이 아주 성공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교묘하며, 그 이유는 제가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조건 유명한 연예인처럼 만들어 달라는 게 대부분이지요. 그런데 사람 골격이랑 얼굴이 다 제각각인데 그게 말처럼 쉽게 됩니까? 전지현처럼 시술해야 잘 될 사람 있고, 한효주처럼 해야 잘 될 사람 있는 건데, 난 이 사람이 좋으니 무조건 해달라 참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학생은 절 믿고 따라주셔서 제가 마음 놓고 아주 잘 빚어놨습니다. 하하하.”

거울 속에 있는 사람은 제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손을 들면 따라 들고, 한쪽 눈을 감으면 따라 감습니다. 그렇게 마치 실로 연결된 인형들처럼 한동안 신기한 듯 몸을 움직였습니다. 동작에 우아함이 있고 분위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였습니다. 분명 저 자신이었습니다.

병원 밖으로 가족들과 함께 나오는데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갑자기 두려웠습니다. 거울을 봐야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얼굴 윤곽을 따라 손으로 짚어봐야 했습니다.

어머니의 손을 뿌리쳤습니다. 무작정 병원 건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때 동생이 반대쪽에서 걸어왔습니다.

“와! 정말 우리누나야? 엄마아빠랑 같이 있는 걸 보면 누나가 맞는데?”

저는 입을 열고,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동생의 말을 듣고만 있다가 꼭 껴안았습니다.

“누나 진짜 예뻐졌다. 울 누난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품안에서 동생은 계속 질문하고, 혼자 감탄하고, 신기해했습니다. 저는 그제야 정말 수술이 끝났고, 긴 겨울을 보냈으며, 정말로 다시 태어났다는 걸 알았습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고 생각한 겁니다.

 

눈을 뜨면 그날 꿈을 적으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꿈을 선명하게 꾸기 위해 노력하고, 기억하다보면, 꿈속에서 자신을 자각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때는 원하는 일을 전부 할 수 있습니다. 큰 기대를 걸었던 건 아닙니다. 자각하는 환상은 무의미했습니다. 꿈은 꿈으로, 현실은 현실로 나누어진 채 존재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매일 밤 꿈으로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일기를 적은 건, 영원한 꿈을 꾸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꿈을 자각하고 계속 연습하면, 꿈을 한없이 길게 할 수 있다는 그런 말을 인터넷 어딘가에서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걸 전부 믿은 건 아닙니다. 기계적으로 일기를 작성하긴 했지만 그 일에 목을 맨 건 아니었고, 그걸로 구원받을 거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꿈이라는 말이 허황됐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신앙을 가지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기도하지만, 지옥에 가기 싫은 마음에 한 다리 걸쳐놓을 수도 있는 겁니다. 자각하는 꿈은 제게 천국이 될 순 없었지만, 지옥을 피하는 하나의 방책이 될 순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아보였습니다.

퇴원 후 다른 동네로 이사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됐습니다. 아침마다 공책을 들고 그날 꿈을 생각해보려 해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계속 일기를 써나갔습니다. 대신 쓰는 시간은 저녁으로 바뀌었습니다. ‘꿈 일기’라고 적힌 공책에 일상을 적었습니다. 지금부터 살아갈 삶 자체가 이미 기적이고 환상이었습니다. 이번 꿈은 영원히 깨지 않을 거라 믿었습니다.

 

바람이 웃자란 수풀을 흔들었고 민들레 홀씨가 휘날렸습니다. 색색의 꽃들과 구부러진 나무들이 길가에 가득 자라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전학 수속을 밟기 위해 학교에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엄마와 저는 서로 말없이 걷고 있었습니다.

옆을 자전거를 탄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어머니가 인사하자 한쪽 손을 들어 올려 인사하곤, 급한 일이 있다는 듯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누구야?”

“……앞집 사는 아저씨. ……괜찮니?”

어머니는 제가 수술을 한 후로 괜찮니 란 말을 자주하셨습니다. 붕대를 풀기 전에는 제 손을 꼭 붙잡고 괜찮아 라고 매일같이 말씀해 주셨는데 막상 붕대를 풀고 나자 괜찮니 란 말을 계속 하셨습니다.

“괜찮아.”

많은 걸 억지로 구겨 넣은 듯, 도시의 거리에서는 숨 쉬는 것마저 불편할 때가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나 제게 보여주는 단순한 시선과 행동은 말보다 확실한 진실이었습니다. 생리적 혐오감. 거미, 바퀴벌레, 송충이, 그리고 나.

“아주 괜찮아.”

지금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이 슬쩍 시선을 보내거나 하면 무의식적으로 움츠러듭니다. 뼛속까지 새겨진 타인에 대한 공포였습니다.

엄마는 조용히 걸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예전에 말씀하셨던 게 떠올랐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내뱉곤 하는 거짓말이 미워 입이 너무 싫을 때가 있다고. 그래서 마음 내키지 않을 땐 입을 봉해버린다고.

엄마는 참 자주 웃으셨습니다. 뭐가 그렇게 행복해서, 목청 터져라 웃는지 모를 만큼 웃는 걸 좋아하셨습니다. 그 탓에 눈가의 주름이 철필을 이용해 새긴 것 마냥 뚜렷했습니다. 그러던 엄마가 웃지 않게 됐습니다. 세상이 싫다고, 사는 게 힘들다고, 그렇게 불평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분이, 슬픔이 저렇게나 안 어울리는 사람이. 전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요.

“난 누구보다 예쁜 딸이잖아. 엄마, 난 괜찮아.”

제 차례였습니다. 얼굴의 상처 아물도록 괜찮다 손잡아주신 엄마처럼, 엄마 마음에 뚫린 구멍 속에 말할 차례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말을 쌓아야 거길 다 채울 수 있을까요.

엄마는 한참을 말이 없으셨습니다. 가슴속 넘치는 생각들을 우아하게 엮어 내뱉을 수 있을 정도로 요령 좋은 부모가 아니었습니다. 찢어지는 마음에 물어보고픈 수천가지 질문, 전부 구겨 넣은 한 마디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정말로 괜찮니?”

“응. 나 정말로 이제 괜찮아.”

손깍지를 끼고 학교까지 걸었습니다. 정문을 지나 운동장 한가운데를 걸으면서도, 우리는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고, 직접 보지 않아도 그곳에 담긴 감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심장을 조이는 폐쇄감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둘둘 감은 사슬이 한 꺼풀 벗겨진 것 같았습니다. 선선한 바람이 체온을 조금씩 빼앗아갔고, 우리는 추위를 느껴 서로 팔을 엇걸어 몸을 밀착시켰습니다. 맞닿은 손과 팔, 온기가 무척 따뜻했습니다.

 

겨울부터 봄까지 제 신장은 부쩍 자랐습니다. 겨울잠을 자듯 쉬었기 때문일까요. 축 늘어졌던 교복 치맛자락이 무릎 언저리까지 올라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교복을 맞춘 직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엄마는 사복을 입을 땐 못 알아봤는데 교복을 입혀놓으니 많이 자란 것 같다며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옷이 사람을 입은 것만 같았는데 이제야 사이즈가 좀 맞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전신거울을 보며 신체의 굴곡을 살펴봤습니다. 선이 가늘긴 했지만 분명 여자다웠습니다. 절 둘러싼 외부의 모든 것이 변해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식탁에는 아빠가 계시지 않았습니다. 늘어난 출근 시간에 맞추기 위해 아빠는 늘 일찍 나가셨습니다. 매일 밤 피곤한 모습으로 돌아오시지만 결코 내색하지 않으셨습니다. 반쯤 감긴 눈으로 입꼬리를 잔뜩 끌어올린 채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방으로 들어가 주무셨습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제 삶과 바꿔 아빠의 삶이 희생된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여유를 부릴 만큼 넉넉했던 건 아니지만, 매일 밤 돌아와 좋아하는 바둑을 두며 소일거리 할 시간은 있었던 아빠입니다. 아빠의 삶에 있던 여백이 사라지고 처음과 끝이 달라붙어 바퀴 굴러가듯 하게 된 건 제 탓이었습니다.

“밥 먹어, 네 아빠도 다 생각이 있는 분이야.”

식탁의 빈 구석에 시선을 두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엄마는 생선을 발라서 제 밥에 올리며 말했습니다.

“투정 한 번 안 부리며 자라줄 때, 엄마는 네가 정말 잘 자라고 있는 줄 알았어.”

“내가 알아서 먹을 게, 엄마 먹어.”

“그런 말 하지 마. 나도 네가 알아서 잘 하고 있는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어느 날 네가 눈물 펑펑 쏟으며 말했을 때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엄마는 또 생선조각을 제 밥그릇에 올렸습니다.

“말하지 않는다고, 다 괜찮은 게 아니었구나. 오히려 얘가 그동안 이 많은 걸 마음속에 다 집어넣고 있었구나. 마음이 깨져버릴 때까지 억지로 계속 그랬구나.”

이제 밥그릇에는 생선이 가득했습니다. 저는 밥과 생선을 한 숟가락 퍼서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었습니다.

“아빠도 나도 너무 놀라서, 그리고 너무 미안해서 할 말이 없더라. 머릿속은 문장으로 꽉꽉 들어차있는데 정작 나오는 말은 괜찮아? 뿐 인거야.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동안 그것도 물어본 적 없더라.”

“…….”

“엄마 아빠한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마. 부모로써 십팔 년을 빵점짜리로 살았어. 앞으로 십팔 년을 백점짜리 부모가 되도 평균 오십 점이야.”

“……빵점이 아니야.”

“점수 듣기 무서우니까 밥이나 먹어. 생선 줬다고 계속 그것만 먹니? 콩자반이나 나물도 좀 먹어. 너 너무 핼쑥해 보인다.”

“엄마답지 않아. 말도 많고.”

“필요할 때, 필요한 말을 했을 뿐이야. 정수 얘는 깨운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일어난다니. 야, 이정수!”

엄마는 식탁에서 일어나 동생 방으로 갔습니다. 엄마 앞에 놓인 밥그릇은 손도 대지 않은 것처럼 처음 그대로였습니다. 그 꽉 찬 밥그릇이 왠지 모르게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습니다. 생선이 무척 짰습니다.

 

“이화정입니다. 취미는 독서이고 근처로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심호흡을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를 감출 수 없었습니다. 마음을 진정시켜 보려 입 꼬리를 억지로 올려봤지만 어색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반복된 학습의 결과였고, 의식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얼굴이 예뻐져도, 부쩍 신장이 자랐어도, 예전과 똑같았습니다. 세상의 시선이 달라졌다 하더라도 제가 작년의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이 머릿속에 눌러 붙어 도저히 떨어질 생각을 안했습니다. 현실에서 쫓겨나 환상에 달라붙은 것처럼, 과거의 자아는 그림자처럼 의식의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리에 앉았고, 뭐 하나 달라진 것 없는 제 소심함에 우울해하며 다른 아이들의 자기소개를 들었습니다. 조용한 가운데 분단을 돌아가며 아이들의 말이 이어졌습니다. 조곤조곤 속삭이듯 말하고 앉는 아이도 있었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지만 공부는 못한다며 웃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아이들이 새로운 학기에 어울리는 활기찬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렇게 자기소개가 진행되자 너무 짧게 말해버린 게 후회됐습니다. 떨리는 목소리에 당황하는 바람에, 모두에게 다가갈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하고 싶었습니다.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와 많이 미숙하고, 그래서 더욱 많은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어째서 제겐 그런 용기가 주어지지 않은 걸까요. 그 아이를 처음 본 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장해주입니다. 작년 말에 가정 사정으로 이 주변으로 이사 와서 이곳엔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외로움을 많이 타니까 많이들 친하게 지내주면 고맙겠습니다.”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제가 차마 내뱉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두던 말이, 자연스럽게 반에 퍼져나갔습니다. 중간 분단 뒤쪽에 앉아있는 여자애였습니다.

그 애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개구쟁이 아이처럼 보여 무척 어울렸습니다. 저와 비슷한 체구에 어깨 길이로 다듬은 머리카락이 가지런했습니다. 반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줄 만큼 능청스럽고 여유가 있어보였지만, 그 행동이 전혀 과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무척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의자에 다리를 걸치고 책상에 앉는 일련의 동작이 무척 가벼워 고양이 같았습니다.

간단히 자기소개를 끝낸 그 애는 옆자리 아이와 떠들었는데, 둘은 서로 처음 만난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할 정도로 친해보였습니다. 뒷자리 아이가 자기소개를 시작하자 그 애는 의자에 기대앉았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제 집처럼 편안해 보였습니다.

부러웠습니다. 그 애의 자연스러운 행동과 표정은 확고한 자신감이 깃들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 애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슬을 먹고 햇볕을 쬐며 살아온 생화였습니다. 삶이 만들어낸 특유의 향기를 가진 꽃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전 조화에 불과했지요. 천 조각을 엮어 만들어 아무런 향기도 가지고 있지 않은 모조품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 제가 아름다워졌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거울을 보지 않은 채 몇 시간이 지나면 거울을 보고 싶다는 강박감이 생겨납니다. 그 감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마침내 주변의 풍경과 소리를 무뎌지게 만들곤 했습니다.

의사선생님은 심리적인 문제일 뿐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너무 노력하지 마세요. 사람은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 존재지요. 주변 사람들의 달라진 태도가 분명 학생에게 답을 가르쳐줄 거예요.”

주변 사람들의 달라진 태도. 전 그것에 대해 지금까지 경험해볼 계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외모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호의적이었습니다. 같은 반, 그리고 다른 반 아이들까지. 일 교시가 끝났을 뿐인데 교실 뒷문과 창문에 수많은 아이들이 고개를 내민 채 이리 저리 힐끗거렸습니다. 제게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습니다. 평생을 이와 비슷한 정도의 관심도 받아본 적 없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언제나 혼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뭔가 불쾌했습니다. 타인이 제게 주는 한없이 긍정적이기만 한 시선이, 갑자기 너무 혐오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체 저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요.

힐끗 해주 쪽을 바라보니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여러 아이들로 둘러싸인 그들 무리에서는 간간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해주는 책상위에 걸터앉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무척 즐거워보였습니다.

타인의 호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제가 가짜이기 때문일까요? 선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의심의 시선을 주는 것일까요? 잘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다잡으며 불쾌함을 억눌렀습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저도 오랜 시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바닥을 기는 애벌레 같은 삶을 살다가 붕대로 칭칭 감은 번데기 속에서 몇 달을 보냈습니다. 그 후에야 어렵사리 손에 넣은 삶이었습니다. 새로운 삶은 모든 고통을 보상할 수 있을 만큼 행복해야 했습니다. 그걸 위해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과거의 제가 끌어안고 죽었습니다.

괜찮다고 머릿속으로 계속 되뇌었습니다. 엄마를 생각했고, 아빠를 생각했습니다. 불만을 가질 건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제게 쥐어주는 호의를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웃었습니다. 있는 힘껏 활짝 웃었습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열심히 웃어본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노력이 결실을 맺은 걸까요. 다행히 자기소개를 할 때와 달리 제대로 미소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도 웃는 얼굴로 답했습니다. 그렇게나 멀리 있는 것 같았던 행복이, 손 뻗으면 닿는 곳에 있었습니다.

전 그걸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나 쳇바퀴 돌 듯 비슷했습니다. 어제와 오늘을 구별해 주는 건 휴대폰 액정의 날짜표시와 계절 정도였습니다. 행복은 분명 존재했지만, 그걸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불행의 기억이 강렬했습니다.

일 더하기 일은 이. 그러나 한 사람과 두 사람은 수식으로 표현할 수 없는 차이를 갖고 있었습니다. 개인이 가진 고정된 세계를 움직이게 만드는 건 타인의 존재였습니다.

많은 게 변했습니다. 쌓아온 추억보다 더 많은 것들을 일주일 남짓한 시간동안 얻었습니다. 함께 등교하는 친구가 생겼습니다. 쉬는 시간에 책상에 앉아 책을 읽을 필요가 없어졌고,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 순 없었지만 친구들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순 있었습니다. 취미를 공유할 수 있었고, 수업 내용에 대해 함께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카페에 가서 파르페를 먹기도 하고, 이성에 대해서도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마음 깊이 좋아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성에 대해서 생각해본 경험은 살면서 한 번도 없었습니다. 타인이란 말이 의미하는 건, 저와 완전히 격리된 개인이라 생각했습니다. 제겐 타인의 세계로 들어갈 자격이 없었고, 누군가 제 세계로 들어온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동성 친구들을 사귀면서 제가 쌓아온 높은 벽은 바닥에 스며들 듯 형체 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방벽이 없었다는 듯.

그것 때문일까요. 전 너무나 쉽게 사랑에 빠졌습니다. 첫 눈에 반했다는 말이 어울리도록.

“여기, 떨어뜨렸어.”

심장이 달음박질 쳤습니다. 저는 지우개를 받아들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 애는 칠판에 시선을 둔 채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옆자리 애가 자고 있는 모습과 무척 대조적이었습니다. 머리를 덥수룩하게 기른 다른 애들과 달리 짧게 친 단정한 머리가 시원해 보였습니다. 아마 이름이 정우라고 했지요.

저는 사랑을 해본 적 없지만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아아, 이게 사랑이구나.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마치 인간으로써 가져야 할 감정들을 하나씩 되찾는 것 같았습니다. 부족한 것들을 채워 넣어서, 언젠가는 세상을 기죽지 않고 마주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씩 해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미안, 조금 이른 것 같아.”

깜빡 잊고 놓고 간 미술 교과서를 챙기기 위해 교실로 돌아갔을 때. 그곳에는 해주와 한 남학생이 있었습니다. 남학생은 해주의 대답에 고개를 푹 숙였고, 저는 교실 안으로 들어가지도 그렇다고 떠나지도 못한 채 문 옆의 벽에 등을 기대고 서있었습니다.

“구차하지만, 물어봐도 될까? 네게 이르지 않은 시기가 언제쯤일지. 기다릴게.”

다른 반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윽고 헛기침 소리가 들리고, 해주가 웃었습니다. 조금 텅 빈 것 같은 소리였습니다.

“아하하. 으음, 글쎄?”

저는 이때부터 슬슬 불쾌했던 것 같습니다. 타인의 소중한 마음을 대하는 해주의 태도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진지하지 못했고, 가벼웠습니다.

남학생의 굳어진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습니다. 얼버무리려는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남학생은 말이 없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 되는 것 같았습니다. 공허한 웃음이 조용한 교실에 울려 퍼지다 그 소리도 곧 멎어버렸습니다. 그 자리에 없는데도 무척 불편했습니다. 차라리 교실로 들어가서 아무것도 못 들은 척 하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뒷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반으로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있는 해주와 움찔하는 태호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제 자리로 걸어가 가방을 열었습니다.

태호는 빠른 발걸음으로 열려있는 교실 뒷문을 통해 나갔습니다. 발걸음 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올 때쯤 해주가 한숨을 쉬었습니다.

가방 안에는 미술 교과서가 없었습니다. 사물함에 넣어두고 깜빡 잊은 것 같았습니다. 다른 교과서와 함께 섞여 들어갔을지도 모릅니다. 가방입구를 닫고 교실 뒤편의 사물함으로 걸어가는데 옆에서 해주가 말했습니다.

“고마워.”

저는 고개를 돌려 해주를 바라보고 사물함으로 걸어가 자물쇠를 열었습니다. 비밀번호를 맞추고 사물함을 열자 넣어둔 교과서들 사이로 미술 교과서가 보였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뭐가.”

“굳이 말하자면 태호를 쫓아내 준거? 완전히 몰렸었거든.”

교과서를 꺼내고 다시 사물함을 잠갔습니다. 해주가 말했습니다.

“너도 요 근처로 작년에 이사 왔다며? 너랑 인사하고 싶었는데 학기 초에 다가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우리 비슷한 처지에 친하게 지낼래?”

저는 사근사근한 해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한 눈에 마음을 빼앗길 만큼 매력적인 애였지만,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더 딱딱하게 대꾸했습니다.

“처음부터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자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해주는 당황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착실하고 잘 웃는 애가 되지 않을까?”

저는 교과서를 들고 교실 뒷문으로 걸어갔습니다.

“마음이 가치를 잃는 거야. 한 없이 싸구려가 되는 거야. 난 너 같은 애 싫어.”

자신을 좋아한다 말해주는 사람에게 애매한 반응을 보이는 게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마음을 줄 생각이 없어도 확실히 끊어내지 않는 태도가 미웠습니다. 그건 기만이고, 비겁한 행동이었습니다. 상대방이 절대 자신을 향한 호의를 거둘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해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복도로 나왔습니다. 창밖에서 들어온 햇살이 복도 끝까지 머물러 있어 무척 밝았습니다. 계단참을 향해 걸었습니다. 삼 층으로 올라가 건물의 중간쯤으로 가면 미술실이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발자국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교실 쪽에서 해주가 달려왔습니다. 한손에는 미술 교과서를 들고 있었습니다. 계단참에 다다르자 해주와 저는 함께 계단을 올라가게 되었고, 해주는 제 옆을 함께 걸었습니다. 해주가 말했습니다.

“오늘은 한 번 차고, 한 번 차이는 날 인가봐. 그런데 난 한 번 차인다고 포기하는 여자가 아니거든.”

“포기해.”

“난 너랑 엄청 친해지고 싶은데.”

해주는 학기 초 자기소개 시간에 보여줬던 것 같은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지었습니다. 가벼운 발걸음을 통통 튀며 걷는 모습이 역시 고양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존재만으로 사랑받는 아이.

“햇볕이 들어와서 그런지 무척 밝지 않니? 학교생활도 우중충하지 않고 항상 밝았으면 좋을 텐데.”

“그럼 아까 사귀지 그랬어.”

실수로 대답을 해버렸습니다. 아, 미술실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연애한다고 무작정 삶이 반짝거리나? 그런 우중충한 애 만나면 내 인생도 같이 컴컴해질 거야.”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새어나갔습니다. 저런 말을 하는 애가 저와 함께 걷고 있단 사실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웃으니까 좀 낫다 얘.”

그 후로 해주의 일방적인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걸었습니다. 해주는 무표정으로 대꾸조차 않는 제게 참 열심히도 많은 걸 말해줬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자꾸만 귀 기울이게 돼서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그 애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더라도, 만약 모두가 해주를 좋아하고 저만 그 애의 친구가 아니게 된다 해도, 저는 해주와 친해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 해주를 미워해야 했습니다. 실수로라도 그 애를 좋아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했습니다.

 

“숨 한 번 쉴 때마다 헤모글로빈이니 미토콘드리아니 이런 걸 전부 신경 써야 돼? 아씨, 그냥 때려 치고 놀자!”

해주는 제 책상 앞자리에 앉은 채, 과학 교과서를 오른손 중지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이 언제나 해온 일인 듯 능숙해 보였습니다. 태호를 걷어차는 모습을 저에게 보인 뒤로, 해주는 아무리 무시해도 굴하지 않고 다가왔습니다.

“화정아~”

“…….”

“이것봐봐. 종이 한 장으로 접은 불사조야. 피닉스!, 주작!”

“…….”

“우연히 미술시간 준비물을 두 개 가져와 버렸네. 어라? 화정아 혹시 준비물 놓고 왔어?”

“…….”

“하하하, 우연히 너랑 나랑 청소당번이네.”

정말, 껌딱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만큼 끈질기게 달라붙었습니다. 그 탓에 반의 다른 애들은 저와 해주를 참 독특한 형식의, 그러나 엄청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참다못해 화를 내더라도, 해주는 특유의 능구렁이 같은 태도로 너무나 간단히 분위기를 무마시켰습니다. 저는 마치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복서를 만난 선수의 기분이 되어 점차 지쳐갔습니다. 그에 비해 해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벼운 발걸음이었습니다.

“이런 혈액 순환, 산소 호흡에 대해서 공부할 바에야 차라리 멸치 한 마리 더 먹고 심호흡 한 번 하는 게 낫지 않아?”

“……후우.”

“봐봐. 지금처럼.”

차라리 그냥 친구가 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은 건 아닙니다. 이렇게까지 절 좋아해 주는 것에는 감사함마저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미안해.”

“……뭐?”

해주에게 사과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동안 정말 많이 무시했고, 화내기도 했지만, 한 번도 미안하단 말을 한 적은 없었습니다. 해주는 무척 혼란스러워보였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습니다.

“정말, 어떻게 하더라도 난 너와 친구가 될 수 없어. 그래서 미안해.”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선을 그어 어정쩡하지 않은 관계를 맺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날이 선 말들을 내뱉었습니다. 푹 찌르는 날붙이에 놀라, 더 이상 다가올 생각을 하지 못하길 바랐습니다.

“왜……. 왜 나랑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건데.”

놀랐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기를 잃지 않던 해주가, 지금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차라리 언제나와 같이 가볍게 받아 넘겼다면 마음이 편했을까요. 그런데, 해주는 너무나 슬퍼보였습니다. 마치 절망적인 것만 같이.

“……대답해주지 않는구나.”

점점 무표정해지는 해주를 보면서도 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애에게 뭐라고 말해줘야 하는 걸까요. 태호를 걷어찼을 때 진지하지 못한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것만을 해주를 미워한 건 아닙니다. 자신에게 납득 할 수 있을 만한 말을 만들어주기 위해 이용한 것뿐이었습니다.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그 무슨 말도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단어는 문장을 만들지 못한 채 입속에서 맴돌았습니다.

해주의 떨리던 입술이 잠잠해졌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무겁게 말이 가슴을 쳤습니다.

“넌 말이야. 참 잔인한 애야.”

해주는 그 말을 끝으로 교실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교실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후 해주는 제게 다가오지도 않았고, 말을 걸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일방적이었던 관계는 깨졌습니다.

 

하나의 톱니가 빠진 일상이 새로운 궤도를 만들며 반복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같이 해주가 매우고 있던 자리를 같은 반의 다른 아이들이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거기서 이어지는 새로운 관계를 맺어갈 수 있었습니다.

해주 또한 다른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원래 친화력이 좋은 애였기 때문에 그동안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했는데도 금방 사람들 속에 섞여들었습니다. 그런 당연한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겉으론 아주 문제없는 것처럼 학교생활이 이어졌지만, 저는 뭔가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뭐가 잘못됐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엉킨 실타래와 같은 생각을 하나씩 풀어나가면서 생각에 잠겨 있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형체가 없는 것에 대한 불안이 불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뭔가 잘못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면 다시 무척 불안해졌습니다.

정우가 고백해온 건 그 무렵이었습니다. 지우개를 주워줬던 바로 그 아이입니다. 제 바로 앞자리인 정우는 그동안 해주가 매일같이 자리를 뺏으러 오는 탓에 무척 곤란해 했었지만, 그걸 막지는 않았습니다. 정우와 저는 그 탓에 서로 대화할 계기도, 친해질 계기도 없었지만, 해주가 제게 다가오지 않게 된 후로 서로 친해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나랑 사귀어줘.”

정우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로맨틱한 준비를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 책상에서 함께 수학문제를 풀며 머리를 맞대고 있다가 느닷없이, 이 문제의 정답은 엑스의 제곱이야 라는 말을 하듯, 그렇게 조용히 고백했습니다.

“응.”

저는 고백을 받아들였습니다. 짧은 대답이었고 풀던 수학문제를 계속 풀면서 한 대답이었습니다. 정우는 무척 의외인 눈치였습니다.

“정말 이걸로 괜찮아?”

“응.”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낮췄습니다. 화끈거리고 부끄러워 정우를 바라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말없이 수학문제를 풀었습니다. 저는 방금 나온 정답을 체크하고 답안지를 확인했습니다. 제가 쓴 해답은 정답과 완전히 무관한 숫자였습니다.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나쁘지 않네.”

정우가 제 해답을 보며 웃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귀었습니다.

 

학교 앞 정문에서 저는 정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따사로운 햇볕에 잔잔한 바람이 부는 괜찮은 여름날이었습니다. 바깥활동하기 좋은 날씨였지만 사람들은 적었습니다. 아마 다들 번화가로 나갔을 겁니다.

저와 정우는 데이트 약속을 잡았습니다. 첫날 서로 사귀기로 한 직후 바로 잡은 약속이었습니다. 정우는 제게 물었습니다.

“어디갈래?”

저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데이트란 걸 해본 적이 없으니 어딜 가야할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습니다. 한참을 고민에 빠져 있다가 저는 정우에게 말했습니다.

“이 동네.”

정우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소리를 줄인 웃음으로 웃었습니다.

“도시에서 시골마을 여행 온 것 같네. 좋아, 까짓 거 하자.”

그래서 저는 지금 정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로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장소가 학교였기 때문에 학교를 약속장소로 정했습니다. 약속 시간은 한 시였고 지금은 십 분 전이었습니다.

저 멀리서 정우가 보였습니다. 짧은 소매의 시원해 보이는 옷차림에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옷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진 않았지만 무척 단정했습니다.

“이런 젠장, 늦어버렸잖아.”

“아직 약속 시간 십 분 전이야.”

“남자의 약속 시간은 여자친구 오기 십 분 전이야.”

정우는 투덜대듯 말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안 어울려서 그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습니다.

“……내가 정장이라도 입고 왔어야 했을 것 같은데.”

정우는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제가 입은 건, 옷장 앞에서 전전긍긍 하고 있을 때 엄마가 골라준 흰색의 화사한 원피스였습니다. 전 그런 옷이 옷장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칙칙한 옷은 그만 입어. 이것도 괜한 거니?”

아니, 나이스 어시스트야 엄마.

 

우리는 함께 걸었습니다. 목적지를 정하지도 않은 채 그냥 걸었습니다. 동네 구석구석에는 제가 모르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돌 벽에 새겨진 알록달록한 꽃그림. 이웃 아저씨의 아직 초록빛을 띄고 있는 감나무. 누군가 쌓아놓은 돌탑과 근처에 놓인 꽃. 꼬마 아이들의 놀이터.

동네 아이들이 전부 모인 것처럼 놀이터는 무척 북적거렸습니다. 아이들은 다 같이 얼음땡을 하고 있는 듯 보였는데, 그중 한 아이는 혼자 모래로 작은 성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한 아이의 발길질에 모래성이 부서졌습니다.

“왜 그래?”

정신을 차려보니 정우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기 아는 애라도 있어?”

“아니, 모르는 애들이야.”

우리는 놀이터를 지나쳐 다시 걸었습니다. 정우는 동네에 대해서 많은 걸 알려줬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 귀 기울일 수가 없었습니다. 방금 전에 본 부서진 모래성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겠지만 해주의 굳은 얼굴이 자꾸 뇌리에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분식집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주인아주머니가 정우와 친해보였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같은 반 성민이네 부모님이라고 합니다. 이 마을은 모든 게 촘촘히 엮어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고, 여자친구가 참한 게 제대로 골라잡았네. 그런데 이 동네서 괜찮겠니? 아줌마들 입이 싸서 금방 온 동네방네 다 퍼질 텐데.”

“온 동네 사람들이 인증해주는 관계다 뭐 그런 거죠.”

저는 그제야 정우가 왜 처음 데이트 약속을 잡을 때 웃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숨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 동네에서 함께 손을 잡고 걷는다는 게 어떤 건지 그제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정우는 씨익 웃으며 냉면위에 얹어진 계란을 집어먹었습니다. 저도 계란을 집어먹었습니다. 냉면은 시원했고, 무척 맛있었습니다.

 

점심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산책을 계속 했습니다. 여름 햇살을 피해 그림자가 우거진 장소를 찾아다니며 천천히 걸었습니다. 나무가 드리우는 그늘은 간간히 비어있는 공간이 있어서 참 좋습니다. 꽉 찬 어둠과는 다른, 바람이 송송 통하는 티셔츠와 같이 포근했습니다.

매미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추잠자리와 샛노란 나비. 특별하지 않은 것을 이 동네는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높지 않은 건물들 탓에 탁 트인 하늘은 파란빛이었습니다. 나비의 날개 짓 같은 미풍이 무척 기분 좋았습니다.

“이제 좀 괜찮아 보이네.”

정우는 모자챙을 잡아 누르며 말했습니다.

“무슨 생각을 그리 심각하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생각 속에 나도 조금만 집어넣어줄 순 없을까?”

“내가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았어?”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을 떠안고 있는 것 같았지.”

정우는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눈치더니 천천히 운을 뗐습니다.

“나 있잖아. 너한테 고백할 게 하나 있어.”

“이미 고백은 했잖아.”

“뭐 그거랑 관련된 일이긴 해.”

정우는 담담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백한 날. 그날도 넌 고민하고 있었어. 내가 네 앞에 있는데도 넌 나란 놈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어. 그래서……괜한 오기가 생긴 거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지, 날 바라보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고백한 거야?”

“널 좋아하는 마음은 장난이 아니야. 그렇지만 네가 그런 고백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었어. 네가 놀라며 날 바라보면, 난 웃으며 장난이라 말하고, 그렇게 네가 날 의식하게 되면, 천천히 제대로 고백해야겠다고 생각했지.”

저는 정우를 바라보았습니다. 정우는 시선을 피한 채 길가의 꽃들과 풀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별로 다를 게 없었구나.”

태호를 진지하게 마주하지 않는 해주에게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제가 정우를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정우가 말했습니다.

“뭐랑 다를 게 없다는 건데?”

“그런 게 있어. 부끄럽게, 부끄러운 그런 일이.”

정우는 생각에 잠긴 듯 보였습니다. 아마 제가 한 말의 의미를 되새기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것이었습니다. 깊은 생각에 잠긴 정우를 말없이 바라봤습니다. 그 애의 진지한 마음을 바라봤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걸었습니다. 꽃과 그림자, 길가에 떨어진 반짝이는 동전과 햇빛 따위를 보며 계속 걸었습니다. 이윽고 정우가 말했습니다.

“해주는 좋은 애야.”

“여자친구 앞에서 딴 여자 얘기를 꺼내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그렇게 매일같이 찾아오던 애가 안 오면 당연히 그쪽으로 의심하지 않겠어? 친구랑 싸웠겠구나 하고.”

“친구……해주랑 내가 친구 같았어?”

정우는 제 말에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 후 대답했습니다.

“……아마 적어도 해주는 널 친구라고 생각했을 거야.”

 

긴 대화를 나눌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학교 밖 놀이터 근처의 벤치에 캔 음료를 두 캔 뽑아서 앉았습니다. 커다란 나무 그늘이 햇볕을 가려주고 있지만 달아오른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신발을 벗고 두발을 흔들며 구름을 바라봤습니다. 캔의 차가운 부분에 손등을 식히며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해주가 저 멀리서 걸어왔습니다. 벤치 한쪽에 놓아 둔 캔을 건네주자 해주가 말했습니다.

“……비락식혜? 취향 참 고상하네.”

“너에게 듣고 싶은 얘기도, 하고 싶은 얘기도 많아. 그러니까 우선 목부터 축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해주는 캔을 몇 번 흔들고 입구를 따서 단숨에 마셨습니다. 땀방울이 목을 타고 흐르는 게 보였습니다. 얼굴이 무척 붉었습니다.

“그것 참 다행이네. 난 너한테 따지고 싶은 게 엄청 많으니까.”

“마음대로 해.”

저는 캔을 따서 조금씩 목을 축였습니다. 주변에서 매미소리가 들렸습니다. 해주가 캔을 구겨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내가 싫어?”

“아니.”

해주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습니다.

“지금 장난하자고 부른 거야?”

“장난이 아니야. 난 네가 싫지 않아. 오히려 좋아해. 처음 봤을 때부터 널 동경했고, 너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럼 왜 나랑 친구가 될 수 없다고 그렇게 까지 군건데.”

“널 질투해야 했으니까. 질투조차 못하고 계속 동경해야만 했다면 그걸 견딜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해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로 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곧 벤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망할, 동경이고 질투고 그딴 게 뭔 개소리야. 앞뒤 뚝 잘라먹고 그렇게 말하면 내가 독심술을 써야 돼 아니면 머리를 쪼개서 뇌라도 꺼내봐야 돼.”

해주는 짜증스럽게 바닥을 신발로 긁다가 거기 놓인 신발을 보고는 자기 신발을 벗어 옆에 놓았습니다. 그러곤 말했습니다.

“말해봐.”

조금 남은 식혜를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천천히 마셨지만 금방 바닥이 드러났습니다. 생각을 정리하며 캔을 조금씩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습니다. 캔은 입구 쪽을 맞추고 바닥에 떨어져버렸습니다. 신발에 발을 대충 구겨 넣고 캔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습니다.

“긴 얘기가 될 거야.”

“듣기 싫어지면 중간에 듣지 않으면 그만이야.”

“그건 안 돼. 일단 듣기 시작하면 넌 반드시 이 얘기를 들어야 해.”

전 캔을 집었습니다. 해주가 짜증스레 말했습니다.

“웬만하면 들어줄 테니까 질질 끌지 말고 말해.”

쓰레기통 앞까지 걸어가 캔을 떨어뜨려 넣었습니다. 한 번에 한 걸음씩, 욕심 부리지 않고 천천히,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왜 마음으로 이해하는데 이렇게나 시간이 걸렸을까요.

저는 천천히 입을 떼며 말을 시작했습니다.

 

한 볼품없게 생긴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그럼에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바깥에서 뛰노는 것을 좋아하는 활기찼던 아이는 또래 아이들과 놀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아이가 말했습니다.

“못난이.”

여자아이는 대꾸했습니다.

“못난 놈.”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간단히 대꾸하고는 다시 축구공을 차러 뛰어갔을 뿐이었습니다. 여자아이에게 욕했던 남자아이도 금방 여자아이와 함께 축구를 했습니다. 여자아이는 행복했습니다.

여자아이는 오랜 시간을 그렇게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목소리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얘 잘생기지 않았니?”

“어휴 못생긴 것 봐.”

“자기 관리 좀 하고 다녀.”

여자아이는 점점 그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게 됐습니다. 또래 아이들이 화장을 하고, 외모에 관심을 갖지 않던 여자아이가 뒤늦게 화장을 시작했을 때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습니다.

“쟤는 여자 맞냐?”

“참 생각 없이 산다.”

여자아이는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소리를 막을 수도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여자아이는 점차 외모에 신경 쓰게 됐지만 외모 때문에 계속해서 목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여자아이의 볼품없는 외모는 아주 커다란 결점이 되었고 그녀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점차 집착하게 됐습니다. 길을 걷다가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느끼면,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유심히 관찰하면서도 이내 마음을 놓지 못하고 도망쳤습니다. 아이의 삶은 무척 불행해졌고, 바깥으로 나가는 걸 두려워하게 됐습니다. 아이는 책속의 환상 속으로 도망쳤습니다.

아이는 점차 예뻐지고 싶다고 바랐습니다. 그리고 예뻐지면 이 모든 불행이 사라지고 예전처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뻐지기만 한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저 tv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언제나 웃음 지으며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녀는 성형수술을 했습니다. 수술은 대성공이었습니다. 그녀는 평범함을 넘어선 특별한 외모를 얻었습니다. 겨울을 보내며 볼품없던 작은 신장도 부쩍 자라 그녀는 이제 남자라면 한번쯤 눈 돌릴 멋진 여성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불행에 찌들어 처음에는 고통스러워했지만, 조금씩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토록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던 목소리가 이제 들리지 않았고, 그 자리를 매운 건 그녀를 향한 경탄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녀의 특별한 외모에 모두가 호감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호감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어째서 내게 호감을 보일까. 나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을까. 나는 고작 이것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워했던 걸까.

그녀는 복잡한 생각을 그만 뒀습니다. 머릿속을 메우는 질문들에서 눈을 돌렸습니다. 어차피 과거에 불과한 일입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행복할 수 있었고 그걸 마다할 이유도 마다해서도 안됐습니다.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은 다른 사람이라고. 다른 현실을,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믿자 마법처럼 그녀는 행복해졌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문제였습니다. 그 애는 무척이나 예쁘고, 자신에게선 다신 볼 수 없을 자연스러운 자신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애를 보는 순간, 그녀는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그 애의 존재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애는 독이었습니다. 거짓을 드러내고 진실을 환하게 비추는 거울이었습니다. 그 애를 보고 있으면 자신이 만들어진 가짜 꽃에 불과하단 사실을 계속 느껴야 했습니다. 향기를 동경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미워하기로 했습니다. 그 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순 없었지만, 최대한 멀리 그 애와 다른 곳을 보며 외면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행복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날 미워했다?”

“응.”

“진짜, 넌…….”

해주는 구름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습니다.

“네가 그렇게 부러워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사실 뻥이라면, 좀 위안이 되겠냐? 사람들은 겉을 보고 내게 잘해줬어. 깊은 관계를 맺은 적은 한 번도 없지. 나는 그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그게 네가 그렇게 동경하던 향기의 정체야.”

해주는 제게 시선을 주지 않고 말했습니다.

“니가 말했잖아. 처음부터 사랑받고 자라면 마음이 가치를 잃는다고, 한 없이 싸구려가 된다고. 정곡이야. 날 좋아해주는 사람이야 길가의 돌멩이만큼 흔하니까. 적당히 기분 좋게 대꾸해주면 끝이라고.”

저도 알 것 같았습니다. 아니, 알고 있었습니다. 제 외모를 보고 다가왔던 그 많은 아이들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해주가 말했습니다.

“넌 말이야.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 네가 한 말이 내 가슴을 푹! 하고 찔러서 전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버렸어. 그리고 너라면 괜찮은 관계를, 진짜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너한테 수없이 차였지만 지금도 그 생각은 변치 않아. 그래서 이렇게 가감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거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학교에서 다른 애들을 대하는 해주의 태도가 생각났고, 지금 해주의 태도가 보였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걸까요.

“야, 웃어? 이 치사한 뇬아, 너는 한 번도 나한테 잘 대해 준 적 없잖아. 나는 네가 전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니가 나한테 그렇게 대할 때마다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는데, 그 고통을 니가 느껴봤어야 하는데, 지금 웃어? 이제 보니까 진짜 잔인한 애였네. 와 진짜…….”

 

해주와 저는 그 후 화해했습니다.

“친구? 개풀 뜯어먹는 소리 하고 있네. 이제 와서 뭔 소리야.”

아주 오래전부터, 우린 친구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 애를 동경하고, 그 애가 저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을 때부터. 그 관계를 부정하던 긍정하던, 우리는 예전부터 이미 친구였던 것입니다. 친구란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해주는 이제 학교에서도 제게 험한 말을 곧잘 합니다. 제가 냉정하게 대했던 만큼의 시간동안 똑같이 갚아주겠다면서 매일 달라붙어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그러다가도 반 아이들이 놀란 반응을 보이면 해주는 다시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대꾸해줍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배우로 진출해도 지장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정우는 제 모습이 예전과 조금 달라 보인다면서, 보기 좋다고 합니다. 다른 친구들과 있을 때와는 좀 다른, 인간성이 느껴진 다나요. 해주를 제 무릎위에 앉혀놓고 저희 셋은 함께 자주 떠들게 됐습니다. 저 멀리서 해주를 힐끗거리는 태호가 안쓰러울 뿐입니다.

결국 아름다움은 행복으로 향하는 열쇠가 아니었습니다. 진실과 거짓이 뭔지 그런 게 있긴 한 건지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많은 것들이 해결되지 않았기도 합니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실을 직시하며, 앞으로의 삶에도 고통스러운 일이 있겠지만, 분명 괜찮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며 한 걸음씩, 그렇게 천천히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그 길은 분명 많은 사람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서로 다른 꽃들의 향기로 가득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