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에덴

  • 작성일 2016-01-27
  • 조회수 728

에덴

 

1. 관찰자 뮤

 

은하계 너머 아득히 먼 우주 어딘가에는 상식을 벗어난 초월적 존재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퍽 점잖고 합리적인 존재였고, 자신들 외에 다른 존재들, 그들 입장에서는 하찮기 그지없는 그런 생명체들에 대해서도 꽤 높은 가치를 매기고 있었다. 우연과 확률의 산물로 출현하는 유기체, 그중에서도 지적 생명체들에 대한 이들의 흥미와 관심은 전 우주에 존재하는 지적 생명체에 대한 그들의 선진화된 연구보고 시스템을 통해 잘 드러나 있다.

뮤는 그들 중에서도 젊은 존재로 얼마 전 아카데미를 졸업하였다. 그는 비록 게으르기는 했지만 다방면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고 성적도 괜찮았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자주 졸았던 관계로 불행히도 학장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이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D 은하 23378 , 00387

 

뮤가 배정받은 관찰행성 ‘에덴’의 좌표였다. 에덴은 관찰등급 최상급에 자리 잡은 골치 아픈 행성으로 아카데미 내에서도 뛰어난 인재들이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곤 했다. 뮤트는 에덴에 파견될 만큼 뛰어난 인재로 평가받고 있었지만, 문제는 뮤트가 매우 게으르다는 것이다.

 

“정말 믿을 수 없군요. 어째서 제가 그런 곳에 파견되는 겁니까?”

 

뮤는 학장실을 찾아가 강하게 항의했다. 상급자에게 이의를 제기 하는 것은 위험하고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그런 사정을 신경 쓸 만한 처지가 못 된다. 이번에 에덴으로 파견되면 뮤는 매우 괴롭게 지내게 될 것이다.

 

“졸업생들을 행성에 파견하는 것은 전적으로 의회의 권한이다. 자네의 항의는 방향도 틀렸고 효과도 전무하다.”

 

학장은 커다란 몸체 가운데에 둥둥 떠 있는 눈을 빛내며 단호한 태도로 그의 항의를 물리쳤다. 의회 핑계를 대는 학장의 의중은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고 뮤도 여기서 이미 결정이 난 사항에 대해 왈가왈부 해 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이렇게 물러나기는 좀 억울하다.

 

“그런 골치 아픈 행성에 제가 파견되는 이유는 제 성적이 좋아서겠지요. 우수한 인재가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요. 하지만 단순히 성적으로 졸업생들의 자질을 파악하는 것은 무척 잘못된 행위입니다. 전 게으르고 능력도 별 볼일 없단 말이죠.”

 

뮤는 학장의 눈 앞에 수많은 글자들을 소환해냈다. 그가 에덴의 관찰에 적합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소명서이다. 학장은 잠시 그 글들을 흩어보더니 큰 눈을 몇 차례 깜박였다.

 

“꽤 명문이군. 하지만 이미 행성 배정도 끝난 마당에 이런 변명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시간낭비 그만하고 당장 발령지로 떠나라. 왜 아직도 꾸물거리고 있는 거지?”

 

“네. 가겠습니다. 제가 얼마나 무능한지 잘 보여 드리죠. 후회하지 마세요.”

 

“에덴의 지적생명체 ‘인간’은 우리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많은 난해한 존재다. 자네가 무능하던 유능하던 간에 할 일은 끝도 없이 쏟아질 거야. 내 수업시간에 꾸벅 꾸벅 졸며 게으름을 피운 대가를 치러야지 않겠나? 고생좀 하게나.”

 

말을 마친 학장은 눈에서 불그스름한 빛을 내어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에덴으로 통하는 포탈을 연 것이다.

 

“.....”

포탈 너머로 푸르게 빛나는 아름다운 행성이 보인다. 지금껏 생명체가 출현한 수많은 행성의 예시를 봐 왔지만, 저렇게 보석 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행성은 거의 없다.

 

‘정말 가기 싫다..’

아름다운 행성이면 뭐 한단 말인가? 가면 말 그대로 개 고생을 하게 될 텐데.. 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머뭇거리며 학장의 표정을 살폈다.

 

“당장 들어가게!”

“....”

 

학장의 서슬에 뮤는 눈을 질끈 감고 포탈로 몸을 던졌다.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이 점점 가속되어 종내에는 의식의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에덴에 도착하기 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200년,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하다.

.

.

.

 

코어를 떠난지 197년 8개월 20일 하고도 17시간 후, 뮤트는 대기권을 뚫고 붉은 선을 길게 그리며 유성처럼 에덴에 불시착했다. 그가 에덴과 충돌하며 상당히 큰 규모의 충격파가 일어났고 그 여파로 사방 수십 km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결국 도착했네..’

 

이제 빼도 박도 못한다. 본격적으로 직무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왕 일을 해야 한다면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성실히 잘 수행하는 것이 옳다.

 

‘좀 둘러볼까?’

 

분화구에서 빠져나온 뮤는 주변을 떠돌았다. 하지만 한참을 움직여도 그의 관심을 끌 만한 무언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적생명체가 출현하는 행성 대부분이 그렇듯 하늘에는 항성이 빛나고, 영양소가 풍부한 흙이 있고, 식물이 있고, 그리고 작은 곤충들이 간간히 눈에 띌 뿐이다.

 

고오오오

 

같은 풍경이 반복되어 슬슬 지루해 지려는 찰나, 뮤의 청각에 무언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반색을 하며 소리가 난 방향으로 가 봤더니 금속과 유기체가 섞여있는 웬 거대한 무언가가 나무를 옮겨 심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지?’

 

그것은 틀림없이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커다란 존재는 ‘식목’이라는 상당히 고도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생체반응은 매우 미약했다. 즉 생명체는 아닌 것이다.

 

‘이거 기계 아닌가? 인간이 만든 건가?’

 

기계는 지적 생명체들 중 특수한 몇 몇 부류가 창조하는 유사 생명체다. 단순한 동작이 가능한 단순한 버전에서 논리연산과 고도의 사고능력을 갖춘 복잡한 버전까지 형태와 성능은 아주 다양하다. 뮤가 그 외에 기계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없었다. 기계공학을 맡은 학장의 수업시간에 꾸벅 꾸벅 졸았던 탓이다.

 

‘다른 곳에 가 볼까?’

 

기계는 나무를 옮겨 심는 작업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뮤는 그 장소를 벗어나 좀 더 속도를 높여 보았다. 한참을 가면 이번엔 다른 기계 덩어리가 대기를 흡입하고 다시 내뿜고 있다. 바다에서는 다른 기계가 윙윙대며 불순물을 정리하고 있고..

 

‘이것들, 이 주변을 청소하고 있군.’

 

뮤는 기계들을 돌아본 후 이들의 목적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각각 하는 일은 다르지만 어쨌건 그들의 행위는 공통적으로 주변을 정리해 좀 더 생존에 적합한 환경으로 만드는 데 귀결되어 있었다. 이상한 것은 각각의 기계덩어리 주변은 생명체의 생존에 충분할 정도의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대기 밀도고 괜찮고 방사능 오염도 거의 없다. 그런데 저 기계 덩어리들은 왜 계속해서 저런 행동을 반복하는 걸까?

 

‘으음.. 더 살펴보자.’

 

기계덩어리들의 괴상한 행동에 대해 고민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지적 생명체의 존재, 즉 인간을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가 무엇 때문에 이 외진 은하 변방 행성까지 파견되었단 말인가? 바로 이 행성에 살고 있는 지적생명체 때문이 아닌가? 뮤는 인간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행성 여기저기를 탐험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 * *

뮤는 천성이 게을러서 일하는 것이 딱 질색이었다.

그런 그가 인간을 찾기 위해 벌써 열흘 가까이 쉬지도 않고 일하고 있다. 이왕 해야 할 일이니 잘 해 보자고 다짐하기는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렇게나 열심히 일한 것은 꽤 대견한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행성을 헤매고 다녀도 정작 인간이란 놈들이 보이질 않는다.

 

‘젠장.. 어디 있는거야?“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인간이 멸망이라도 했다면 관찰자 뮤는 매우 골치 아픈 상황에 직면아게 된다. 물론 관찰자들은 기본적으로 관찰대상인 지적생명체들에게 간섭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만약 지적생명체들이 멸망의 위기에 봉착하면 어느 정도 개입해서 이를 막거나 늦춰야 하는 의무가 있다. 만약 그럼에도 멸망을 피할 수 없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정당한 명분과 근거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것이다.

 

정말 인간이 멸망했고 이들의 멸망에 대한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그리고 꽉 막힌 의회 놈들이 ‘파견지에 도착했더니 인간들이 멸망해 있었어요.’ 하는 뮤의 궁색한 변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최악의 경우 맨몸으로 블랙홀에 내던져질 수도 있다. 그런 끔찍한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빨리 인간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감각을 극대화 하고 행성 여기저기를 스캔해도 인간의 종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나 찾아도 없으면 정말 없는 거다.

 

‘큰일이군.’

 

뮤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관찰자가 교체되는 그 짧은 틈을 못 참고 이 인간이란 놈들은 멸망해 버린 것이다. 어떻게 자신은 이렇게나 운이 없을 수가 없지? 할 일이 끝도 없도 쏟아지는 변방의 골치 아픈 행성으로 발령난 것도 서러운데 억울하게 처벌까지 받게 생겼다. 근무지에 도착했더니 인간이 죽어있었는데 뭘 더 어쩌란 말인가?

 

‘어쩔 수 없나?’

 

결국 뮤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인간은 어떻게 죽었고, 저 기계 덩어리들은 대체 뭐 하는 것인지.. 혹 인간이 아직 남아 있다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이에 대한 모든 의문을 깔끔하게 해소하는 방법은 바로 행성의 기억을 읽는 것이었다. 매우 방대한 작업이고 엄청난 체력을 소비시키는 번거로운 일이었기에 가능한 실행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블랙홀에 던져지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

 

‘최대한계인 1000년 정도까지 플래시백 해 보자. 부디 1000년 안에 실마리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

 

결정을 내린 뮤는 행성 표면에 자신을 넓게 잠식시켰다. 의식을 집중했다가 다시 흐리게 했다 하며 조금씩 시간을 되돌려 본다. 곧 이 행성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간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

.

.

 

‘....’

플래시백을 행한 뮤는 다행히 행성의 1000년 내 기억 안에서 인간 멸망에 대한 수수께끼와 현재 인간의 행방에 대해서 대략 읽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기억은 관찰자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오랜 기간 준비해온 뮤 자신에게도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싸우고 죽이고.. 부수고..’

 

지적생명체들은 어떤 은하 어떤 행성에서 출현한 존재이던 간에 누구나 일정 수준의 폭력성은 내재하고 있다. 그것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말 그대로 최소한의 방어수단일 따름으로, 단지 그 뿐이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달랐다. 그들은 마치 투쟁이 본능인 양 욕망과 증오를 양분삼아 끊임없이 싸워댔다. 패를 나눠 싸우고 외부에 적을 만들어 또 싸웠다. 전임 관찰자가 마지막으로 대규모 전쟁을 보고해 온 시점의 인간은 원시적인 비행장치나 수동식 총 등을 이용해서 싸웠지만, 전임자가 떠난 후 기술 수준이 폭발적으로 발전하여 채 200년도 지나지 않아 플라즈마 빔이나 사이오닉 병기까지 사용해서 서로를 죽여댔다. 인간의 서로에 대한 악의는 수 만년이 넘는 그들의 역사를 통틀어 단 한순간도 사그러든 적이 없었고 종래에는 바이러스, 핵 무기 따위를 이용해서 싸그리 자폭해 버렸다. 다 죽어버린 것이다.

 

“쩝.. 꽤나 화끈한 종족이었구만. 나름 잘 망한건가?.”

 

이렇게 폭력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지적생명체가 끝도 없이 번성하고 기술적 성취를 이루어 다른 행성을 점령해 나간다면 틀림없이 D은하의 골칫덩이가 되었을 것이다. 차라리 일찍 망해버린 것이 은하계의 평화를 위해서도 다행일지 모른다.

 

‘하지만 완전히 멸종한 것은 아닌 것 같다.’

 

행성의 기억을 읽은 바에 따르면 그래도 아직 살아있는 인간이 있기는 했다. 인간들은 멸망을 앞두고 최후의 희망을 담아 제작한 특수 방주‘NOA’를 남극 빙하에 봉인해 두었는데 그 방주 내부에 살아남은 마지막 인간이 있다.. 고 추정된다.

 

만약 지적생명체가 한 개체라도 남아 있다면 그 종족은 멸망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되며 당연히 관리자 자신의 처벌도 없다. 뮤의 선배 관찰자 중에는 이런 규정을 악용하여 마치 사육이라도 하듯 관찰대상을 소수 살려두고 업무를 게을리하여 징계를 받은 이들도 있었다. 아무튼 뮤의 경우에도 아직 살아있는 인간이 있으니 임무에 실패하지는 않은 셈이다.

 

‘뭐 일단 살아 있는 인간이나 보러 가 볼까?’

 

뮤는 NOA가 있는 행성의 최남단으로 향했다. 과연 NOA 속 최후의 인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형태로 살아 있을까? 서로를 상처 입히고 죽이는 이들의 본성은 도무지 정이 가지 않지만, 최후의 인간이 남아있는 이상, 뮤는 관찰자로서 업무를 수행할 의무가 있었다.

 

.

.

.

 

행성 최남단. 모든 것이 얼어붙은 이 동토에 인류 최후의 생존자가 남아 있다. 뮤가 거대한 빙하를 한참 파고 내려가자 티타늄제 사각형 구조물이 있었는데, 인간들은 이것을 NOA라고 불렀다. NOA 안에는 평방 30cm나 될 법한 작은 상자가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고, 그 상자 안에 최후의 생존자가 들어 있다.

 

“....”

 

처음 상자를 발견한 뮤는 한참동안 말을 잊었다. 어느 정도 행성의 기억을 읽어 예상한 바이기는 했지만, 정말로 이 사각형의 상자 안에 들어있는 작은 유기체 덩어리가 인간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살아 있긴 한 건가?’

 

뮤가 가까이 손을 가져가니 과연 생체반응이 느껴졌다. 분명 이 상자에 들어있는 것은 지적생명체 인간이 맞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일부..

 

‘뇌만 남았네..’

 

인간은 다 죽었고 살아남은 최후의 1인은 뇌만 남아 있다. 사고를 담당하고 영혼이 머무는 중추기관이 남아있으니 살아있기는 한 셈이지만, 완전한 인간이라 보기에는 많이 부족한거 같은데..

 

‘후우..’

 

뮤는 상자를 옆에 두고 잠시 하늘을 올려봤다. 구멍 틈으로 보이는 남극의 대기는 맑고 청명했다.

 

‘허무하군.’

 

그가 관찰해야 할 지적생명체 ‘인간’은 다 죽어버렸고 상자 속에 뇌 하나만 남아있다. 이걸 관찰하고 보고서를 올리는 것은 무척 간단한 일이었다. 아니 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과 다름없다.

뭐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뮤에게는 잘 된 일이다. 물론 관찰이라는 것이 그들 존재의 본능이니 만큼 전혀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정신없이 바쁜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다. 관찰대상 인간에 대해 영 정이 안가기도 하고.. 아무튼 에덴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 이상한 기계 덩어리들과 함께 유유자적하며 지내면 되는 것이다. 그의 손에 들어온 이 작은 상자가 살아 있는 한 인류는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며 관찰자인 뮤도 평생 이렇게 놀고 먹을 수가 있다.

 

물론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관찰할 대상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일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만약 마지막 남은 관찰대상이 혹여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멸망을 의미한다. 만약 뮤가 상자 속의 뇌를 잘못 관리한다면 인류 멸망을 곧 관찰자 뮤 자신의 손으로 이뤄낸 셈이 되는 것이다. 의회에서 큰 문책을 당하게 됨은 말할 것도 없다.

 

‘으음.. 내 운명이 이 작은 상자에 달려 있단 말이지?’

 

정말로, 이게 죽어 버리면 뮤의 운명도 끝장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일한 인간이니 말이다. 뮤는 이 작은 상자를 소중히 보관하고 끝까지 책임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 내가 널 살려줄게. 너와 나는 한 배를 탄 몸이다. 최후의 인간이여. 인류 멸망은 네가 나를 만난 시점에서 1만년(뮤의 근무기간)은 늦춰졌다. 그동안 같이 잘 지내보자.’

 

뮤는 살며시 상자를 어루만져 보았다. 자신의 운명이 상자 속에 들어 있을 작은 뇌에 매여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손에 든 상자가 퍽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제 이 유기체 덩어리를 어떻게 보존한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

 

이 얼어붙은 동토에 위치한 NOA는 너무 춥고 협소하다. 이 작은 뇌가 든 상자를 좀 좋은 환경으로 가져다 놓고 1만년 이상 잘 살려놓을 방법을 모색해 보는 것이 좋을 듯 했다. 뮤는 상자를 들고 대기에 몸을 띄웠다.

.

.

.

 

2. 회색 세계

 

유스는 언제나 혼자였다.

그녀의 공허한 의식은 홀로 어둠속에 파묻혀 있었고, 그 속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어둠 속에 혼자 멍하니 있다 보면 가끔 그녀의 얼어붙은 뇌세포가 약간의 화학반응을 통해 몇 마디 단어를 만들어 내곤 했다.

 

‘일어나 유스. 일어나.’

 

그 소리는 의식을 집중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유스에게 있어 그 소리는 정말이지 전부나 다름없었다. 영원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 그녀에게 주어지는 자극은 오로지 그녀의 의식에서 가끔 떠오르는 그 몇 마디 단어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어나 유스..’

 

그 말대로, 유스는 일어나고 싶었다. 그녀를 둘러싼 끝없는 어둠과 적막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단지 존재할 뿐이었고,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영겁의 감옥에 갇힌 채 이대로 천천히 사라져 갈 뿐이다.

 

‘일어나 유스!!’

“...나도 일어나고 싶어.”

“그럼 일어나면 되잖니?! 빨리 일어나!!”

 

누군가 유스의 이불을 잡아채고 어깨를 세차게 흔들어 댄다. 그 서슬에 한없이 어둠속으로 침몰해가던 그녀의 의식이 퍼득 현실로 돌아왔다.

 

‘어라?’

“뭐 하고 있어. 정신 안 차릴래? 학교가야지!”

‘아 학교..

 

유스의 흩어진 의식이 조금씩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학교를 가야 했다. 어째서? 학생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나이는 17세였고, 근처의 여고를 다니고 있다. 현재 시각은 8시 25분이며 조금 더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지각을 하게 될 것이다. 지각은 좋지 않다. 왜냐면 그녀는 학교에서 평판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성적도 좋지 않고 교우관계도 좋지 않다. 지각을 하면 크게 혼나겠지.. 그녀는 혼자였다. 혼자라면 흠 잡힐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상처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유스는 머릿속에서 그녀 자신에 대한 정보가 저절로 조합되는 것을 느끼고 무척 혼란스러웠다. 마치 구슬에 실을 꿰듯, 연관된 정보가 하나하나 떠올라 유스라는 한 소녀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있다. 그녀는 단지 어둠속에 혼자 존재했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던 존재였는데, 지금의 유스는 약간의 우울증을 앓고 있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17세 불쌍한 여고생이 되어 있었다. 원래 자신이 그런 존재였나?

 

“야 뭐 하니? 엄마가 언제까지 널 깨우고 있어야 해? 아침 준비 해 놨으니까 빨리 먹고 학교가지 못하겠어?!”

“아.. 네.”

 

어머니(로 설정되어 있는) 중년의 여인이 문을 쾅 닫고 나간다. 유스는 침대에서 나와 그리 넓지 않은 자신의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분홍색 은은한 벽지. 귀여운 인형도 있는 소녀 취향의 방이다. 나는 이 방을 퍽 좋아한다. 왜냐면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가 싫고 집이 싫다. 이 작은 방에서만 나는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

 

거실로 나가 식탁에 앉자 신문을 보고 있던 아버지가 몇 마디 핀잔을 준다.

 

“그렇게 게을러서 뭘 할 수 있겠냐. 일찍 일찍 일어나서 어머니 부엌 일도 좀 도와주고 그래야지.”

“....”

 

유스는 말없이 아버지를 응시했다.

 

‘그는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가진 전형적인 가장으로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들을 원했기 때문이다. 집안에 나 이외에 형제자매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는 유일한 자식이 장차 출가외인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아버지는 얼마 전 다니던 직장을 잃었다. 구직 활동은 좀처럼 잘 되지 않고 있다.

 

“너 뭐 하냐?”

 

유스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보고 있자 아버지가 이상한 듯 물어온다. 그의 어조에 약간의 불쾌감이 어려 있는 걸로 보아, 유스의 미심쩍은 태도에 기분이 상했음이 틀림없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밥 먹고 학교 갈게요.”

 

유스는 자신의 성대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이 퍽 낯설었다. 그 목소리는 어둠 속에 혼자 파묻혀 있을 때 가끔 들려오던 ‘일어나 유스’ 하는 소리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

.

.

.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에 들어간 유스는 그제 서야 처음으로 자신의 외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헝크러진 생머리와 얌전한 이목구비를 가진 예쁘장한 17세 소녀의 얼굴이다. 그것은 틀림없는 자신의 얼굴이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넌 누구니..’

 

유스는 자신의 얼굴이 비친 거울을 살짝 쓰다듬어 보았다. 분명 예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하루의 평범한 아침이건만,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이 이질감은 뭐란 말인가?

 

“일어나 유스..”

 

그녀는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의 그녀는 어둠속에 존재했지만, 이제는 꿈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어둠이고, 어디까지가 꿈인 걸까? 그녀가 존재해야 할 현실은 어디에 있을까?

 

.

.

.

 

학교는 유스를 괴롭게 한다. 그녀는 성적이 좋지 않았고 교우관계도 좋지 않았다. 학교에서 그녀는 늘 멍하니 자리에 앉아서 하교 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유스 페이첸”

“.....”

“유스 페이첸!!”

“네..”

 

그것은 틀림없는 그녀의 이름이었다. 누구에게도 가르쳐 준 적 없는데 그녀 주위의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이름을 불러대었다.

 

“나와서 이거 풀어봐.”

“네.”

 

선생은 칠판에 복잡한 수식을 늘어놓고 그녀에게 해답을 요구했다. 선생의 요구대로 유스는 칠판 앞에 서서 분필을 잡았다.

 

(x+sin y )dx + (x cos y )dy = 0

"....."

 

공부를 못하는 유스가 이런 어려운 문제를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녀는 분필을 내려놓고 ‘모르겠어요’라고 말한 후 선생의 잔소리와 동급생들의 비웃음을 들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

.

.

 

점심시간이 되자 유스는 도시락을 가지고 혼자 학교 옥상으로 올라갔다. 가을하늘은 맑고 청명했고 부드러운 바람이 그녀의 귓불을 간지럽혔다.

 

‘여긴 조금 좋아.’

 

주변에는 괴로운 일투성이였지만 혼자 있는 시간만큼은 그녀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도시락을 꺼내 어머니가 싸준 맛없는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다.

 

‘여긴.. 어디지?’

 

유스는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분명 처음의 그녀는 어둠속에 홀로 묻혀있던, 그저 존재할 뿐인 존재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의 세상이 바뀌었다. 이름이 붙여지고, 나이와 성별이 생겨나고, 불우한 가정환경과 우울한 성격이 주어졌다.

비유하자면, 전에 그녀가 존재하던 세상은 검은색 세상 이었다면 이번에 그녀가 존재하는 세상은 회색 세상 정도가 아닐는지? 회색 세상에 혼자 사는 유스 페이첸.. 희안한 것은 그녀의 세상이 배경도 변하고 설계도 변했는데 유독 유스가 혼자라는 설정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불분명한 세상에서 이것 만은 단언할 수 있다. 가족이 있고, 동급생이 있고, 그녀를 가르치는 교사가 있어도 그녀는 본질적으로 혼자였다.

 

‘....’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그녀의 적막한 검은 세상이 몽롱한 회색 세상으로 바뀐걸까? 유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아마 어떻게 해도 그녀는 답을 낼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그녀와 존재했던 유일한 목적이자 의미인 몇 마디 단어를 읊조리는 것 뿐이었다.

 

“일어나 유스..”

 

.

.

.

 

뮤는 뇌가 든 작은 상자를 서쪽 대륙에 자리 잡은 거대한 산맥 안쪽으로 데려갔다. 상자의 기억을 읽어내어 뇌가 처음 태어난 연구실로 이동한 것이다. 천년 넘게 방치된 연구실은 말 그대로 폐허였지만, 몇 개월간 공을 들여 보수를 하니 꽤 괜찮은 모양새를 지니게 되었다.

연구실 보수를 끝낸 후 뮤는 이곳에서 그는 NOA에서 가져온 작은 상자를 연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성과는 무척 미미한 편이었는데, 저 조그만 유기체 덩어리의 구조가 워낙 복잡해서 뮤로서는 전혀 그 기능과 능력을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과학 분야 조예가 깊었다면 어느 정도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쉽게도 생물학, 물리학, 엔지니어링 등은 뮤의 취약과목이었다.

그래도 뇌를 잘 살려서 오래 보존한다는 당초 목적은 나름 성과가 보였다. 뮤는 뇌의 기억과 원래 존재하던 설비를 이용해서 뇌의 의식이 살아있는 거대한 가상현실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가상현실을 만든 까닭은 유스를 1만년 이상 오래오래 살려놓기 위해서이다. 아카데미에서 배운 적이 있는 오래된 가정이 생각난다. 만약 누군가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어둠속에 갇혀 끝없이 존재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처음 수백년 간은 그럭저럭 괜찮을 수도 있지만, 더 시간이 지나면 점점 존재가 희미해지고, 종내에는 완전히 스스로를 잃어버려 생명반응이 정지될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 게서든 뇌에 자극을 줘야한다. 그리고 가상현실은 몸이 없고 뇌만 있는 유스에게 삶이라는 자극을 주는데 가장 괜찮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뮤의 계획은 상당한 난관에 봉착해 있다.

 

‘이거 생각대로 되지는 않는군.’

 

지금 뮤는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모니터에 떠오르는 복잡한 수식을 눈으로 흩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30대 중반의 연구원이었다. 인간이 만든 기계설비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가장 좋다.

 

‘유스는 왜 자신의 세상에 의문을 갖는걸까?’

 

모니터를 통해 뮤는 뇌, 그러니까 유스의 의식을 부분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유스는 지금 뮤가 연구실 내 기계설비와 유스의 기억을 이용해 창조해낸 세상에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뮤가 마련해 준 가상현실을 부정하며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세계관인데 이런 식으로 주인공에게 외면 받으니 꽤 실망스럽다.

앞서 말했다 시피, 뮤는 유스를 가능한 오래 가상세계 속에 살려두고 싶다. 하지만 첫 번째 세계부터 뮤의 계획이 삐걱이기 시작한 것이다. 가상현실의 주인공이 자신의 세계에 의문을 갖는다면 그 세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어떻게 한다..’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뮤의 바람은 유스를 상자 속 가상공간에 살려둔 채 자신은 유유자적 게으르게 보내는 것이다. 그걸 위해서는 유스가 자신의 세상에 대한 의문을 접고 자신의 삶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해야 했다.

 

.

.

.

 

유스는 단지 살아갈 뿐이었다. 안개라도 낀 듯 희뿌연한 세계에서 머릿속에 입력된 행동 지침을 따라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을 더듬듯 나아간다.

그래도 가끔은 변화가 있기도 했다. 오늘 그녀는 미팅이라는 낯선 자리에 나와 있다. 자리를 채워 달라는 동급생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 탓이다.

 

‘...늦네.’

 

약속 장소로 지정한 학교 근처 커피숍에는 유스 혼자였다. 약속시간이 벌써 30분이나 지났는데 아무도 없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걸까? 왜 같이 나오기로 한 동급생도, 미팅 상대인 이웃 남학교의 학생도 보이지 않는 거지?

 

그녀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데, 커피숍 문이 열리고 훤칠하게 생긴 남학생이 들어왔다. 그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대다가 유스를 발견한 후 환히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유스 페이첸 맞지?”

“...그런데요.”

 

어째서 사람들은 유스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대는 걸까? 누구에게도 알려준 적 없는데.. 어머니도, 아버지도.. 동급생도, 선생님도, 심지어 처음 보는 이 남자마저 그녀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댄다.

 

“만나서 반가워. 나는 C남고 2학년 ....라고 해. 너 1학년이지?”

“.....”

 

유스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는 유스에 취향에 맞는 잘생긴 미남이다. 여학생에게 인기가 많아 이성과 난잡한 관계를 가지곤 한다. 그가 미팅에 나온 이유는 유스를 싫어하는 동급생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남학생은 가지고 놀 반반한 여자가 필요하고, 미팅을 주선한 동급생은 유스가 장난감처럼 농락당하다 버림받고 괴로워하길 원한다. 이 자리는 유스를 얽어내기 위한 일종의 덫인 셈이다.

 

“음? 내 얼굴에 뭐라도 묻은 거야? 잘 생긴 얼굴이라고 너무 그렇게 대놓고 보면 닳는다고. 하하하”

 

남학생은 실없는 농담을 하며 사람 좋게 웃었다. 유스는 그 미소가 마음에 든다. 저 잘생긴 미소에 반해서 그와 교제를 하고 그와 사귀며 유스는 현실의 괴로움을 어느 정도 잊게 되고, 종내에는 그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의지하게 된다..

 

“아 카페 음악 좋은데? 주인아저씨가 센스가 있나봐. A큐리드 음악 들어 봤어? 여기서는 그런..”

“....”

 

결국 유스는 남학생에게 버림받게 된다. 그것은 그녀에게 큰 상처가 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처는 아물어가고 새로운 인연을 찾아 나선다..

 

‘어째서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유스는 단지 저 남학생과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그와 얽혀서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훤히 알 수 있었다.

참 진부한 이야기다. 난봉꾼과 순진한 소녀라.. 그런 식으로 인생의 부침을 겪으면서 세상에 적응해 나가라는 건가? 대체 왜? 대체 누가 그딴 식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려 하는 것인가?

 

“싫어.”

“뭐?”

“싫다고!!”

갑자기 유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검은 세계에서 회색 세계로 내던져진 이래 그녀가 이정도로 감정이 격양된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싫다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무 무슨말이야?”

 

남학생은 유스의 서슬에 당황했다. 그냥 요리하기 좋은 얌전한 여학생인줄 알았는데 갑자기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혹시 머리가 어떻게 된 걸까?

 

“미안하지만 선배. 전 당신이랑 사귀지 않아요. 조금도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요. 이만 일어날게요.”

“유.. 유스?”

 

유스는 당황한 남학생을 남겨두고 커피숍을 뛰쳐 나갔다. 밖에는 비가 철철 내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빗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

.

 

“흐음..”

 

커피숍 사장 뮤(31세)는 카운터에 앉아 유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이런 식으로 자꾸 시나리오가 어그러지는 걸 보면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어이 학생. 안 쫓아가요? 빨리 가서 우산이라도 씌워주지..”

“네? 제가 왜요? 참견 마세요. 계산할게요.”

 

짐짓 아쉬움에 유스의 상대로 지정한 남학생을 재촉해 봤지만 그 역시 차가운 반응을 보일 뿐이다. 이걸로 둘을 이어주려는 시나리오는 완전히 끝난 것이다.

 

남학생이 계산을 마치고 나간 후 뮤는 커피를 끓이며 뭐가 문제인지 고민해봤다. 유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그녀의 의식에 들어오기까지 했건만 전혀 나아지는 게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세상에 의문을 갖고 있고,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다 유스가 이 세계가 거짓이라는 비밀을 눈치 채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드르륵

 

한참 뮤가 고민에 빠져있는데 문이 열리고 비에 쫄딱 젖은 유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조금 전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에 놓여있던 가방을 챙겨들었다. 아마 깜박 한 모양이다.

 

“아 계산..”

 

유스는 가방을 들고 잠깐 멈칫 하다가 곧 뮤에게 다가왔다. 그것은 뮤에게는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는데, 관찰자로서 관찰 대상과는 가능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저기 얼마에요? 계산을 깜빡했네요.”

“아 그거 아가씨가 바람맞힌 학생이 계산 하고 갔어요.”

“그런가요?”

 

유스는 뮤의 눈을 마주보며 어딘지 모르게 꿈꾸는 듯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비에 젖은 그녀의 머리가 퍽 안쓰럽게 보인다. 저 불쌍한 아이가 제발 이 세계에 적응을 해서 행복하게 살아줬으면 좋겠는데.

 

“아저씨. 저랑 어디서 만난 적 있죠?”

“으 응?”

 

한참 자신의 눈을 보고 있던 유스가 갑자기 이상한 말을 꺼낸다. 유스의 물음에 뮤는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분명 어디서 만난 거 같아요. 아저씨는 어때요?”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것이겠죠.”

“흐음..”

 

유스는 왠지 납득하지 못한 듯 미심쩍은 표정으로 뮤를 올려보고 있다. 저 애가 대체 왜 저럴까?

 

“아저씨.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뭘 말이죠?”

 

뮤는 자꾸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퍽 불안해졌다. 저 애는 커피숍 카운터에 불과한 자신에게 왜 자꾸 말을 거는 것인가?

 

“왜 아저씨는 회색이 아니죠?”

“???”

 

뮤는 안경 너머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람?

 

“아저씨는 주황색 같아요. 어쩌면 빨간색 같기도 하구요. 어떤 사람도 그런 색을 띄지 않아요. 다 회색이거든요?”

 

‘이런..’

 

뮤는 유스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깨닫고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았다. 세상과 다른 색이라니? 유스는 뮤 자신이 이 세상과 이질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한 눈에 깨달은 것이다. 어떻게..

 

“아가씨.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에요. 자꾸 장난치면 데이트 신청할거에요. 참고로 아저씨 서른 살이고 탈모가 오기 시작했어요. 아저씨랑 데이트하기 싫으면 빨리 돌아가세요. 비도 이제 그쳤네..”

 

“네. 해요.”

“?!!”

 

유스는 뮤와 시선을 맞대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전 아저씨와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저를 둘러싼 이 단조롭고 흐릿한 세상에서 처음 보는 따뜻한 색을 가졌으니까요. 좀 더 아저씨와 가까워지고 싶어요.”

 

“하 하하. 요즘 애들은 참 감수성이 예민하네.. 장난 그만하고 어서 돌아가 봐요.”

“...내일 학교 마치고 올게요.”

 

말을 마친 유스는 가방을 챙겨 커피숍을 나갔다. 남겨진 뮤는 한동안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멍하니 있다가 카운터에서 벌떡 일어났다.

 

‘큰일났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관찰자가 관찰 대상이랑 엮여 드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짓거리인 것이다. 당장 여길 떠야 한다. 당장!

.

.

.

 

유스는 차분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녀는 웬만해서는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으며, 대화를 하게 되면 필요한 말만 간단히 하곤 했다. 왜냐면 그녀는 혼자였기 때문이다. 이 회색 세상에서 그녀외의 다른 존재는 모두 회색이었고, 그녀에게 어떠한 의미도 되어줄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만난 그 남자는 달랐다. 처음 그의 눈을 본 순간, 유스는 회색만이 존재하는 이 거짓된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가 진실임을 알았다.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녀의 성격은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다는 설정으로 되어 있었지만, 그런 사소한 설정에 얽매여 있을 겨를이 없었다.

 

‘내일 나는 그와 만난다.’

 

유스는 그 남자가 뭐 하는 사람인지,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모른다. 또 유스 자신이 처음 보는 그 남자에게 품은 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리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아도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차갑게 식어있던 그녀의 가슴은 마치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달아올랐고 밤새 심하게 요동쳤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도 드는 둥 마는 둥 학교에 가서 꾸벅 꾸벅 졸고, 선생한테 욕을 먹고, 맛없는 샌드위치와 함께하는 옥상에서의 점심시간이 끝나고, 그리고 드디어 학교도 끝났다. 그를 만나러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스는 종례가 끝나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학교 근쳐 커피숍에 달려갔다.

 

“?!”

 

커피숍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그리고 문 앞에는 ‘임대문의’ 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뭐야? 어디 간 거야?’

 

유스는 핸드폰을 꺼내 안내문 하단부에 기재된 전화번호를 눌러봤다. 한동안 신호음이 간 후 웬 중년 아저씨의 졸린 듯한 음성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아 그 사람? 가게 정리하고 나갔어. 장사가 안 된다나 뭐라나.”

 

건물주의 심드렁한 대답에 유스는 심장이 죄어들어갔다. 그럼 대체 그 남자는 어디로 가 버린 것인가?

 

“어디로 갔죠?”

“낸들 아나.”

“.....”

 

유스는 전신의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음순간 맹렬한 분노의 감정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일부러 나를 피하려는 거야.’

 

당연히 ‘내일 찾아오겠다는 여고생을 피하기 위해 가게를 폐업한다’는 생각은 말도 안 된다. 그래도 유스는 자신의 말도 안 되는 예상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남자는 누가 뭐래도 이 회색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색을 가진 인물이다. 이 세계에서 통용되는 상식 밖의 행동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찾아내고 만다.’

 

유스는 입술을 깨물며 가게에서 돌아섰다. 반드시 그 남자를 찾아낼 것이다. 사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회색만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그 아저씨의 색, 그러니까 빨강, 혹은 주황색 흔적을 찾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반드시 찾아내야지.

 

.

.

.

 

3. 연인

 

뮤는 커피를 퍽 좋아했다. 호기심에 연구실에 보관되어 있던 썩어 문드러진 커피를 복원해서 한잔 하자마자 그는 완전히 커피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 부드럽고 감미로운 향은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 때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극상의 즐거움이다. 그렇기에 뮤가 유스의 세계로 들어왔을 때 자신을 커피숍의 오너로 설정한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이 어긋나서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필 유스가 뮤 자신을 인식하고 만 것이다. 그 얌전하고 내성적인 유스가 눈을 똑바로 뜨고 ‘아저씨와 좀 더 가까워 지고 싶어요’라고 말할 때는 등골이 섬짓해 지는 느낌이었다. 결국 뮤는 커피숍을 차린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건물주에게 폐업을 통보하고 가게를 접게 되었다.

 

‘..안 좋군.’

 

지금 뮤는 자신의 자취방에 대자로 누워 앞으로의 대책을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유스가 자신을 둘러싼 이 모든 세계가 ‘거짓’이라는 비밀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유스를 상자 안의 세상에서 잘 키우며 오래오래 보존하려던 뮤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지게 되는 것이다.

 

‘일단 이 세계에서 나가자.’

 

여기서 이러고 있어 봤자다. 그는 서랍에서 밧줄을 꺼내 매듭을 만들었다. 목을 매어 자살하려는 것이다. 유스의 세계에서 나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했다.

 

의자를 가져다 놓고 밧줄을 천장에 걸고.. 뮤는 목을 매기 전 잠시 이 세계에서의 삶에 대해 반추해 봤다. 인간들의 삶은 꽤 괜찮았다. 사람들은 바쁘게 살아가고 가끔 커피한잔의 여유를 위해 그의 가게를 찾아온다. 평화 속에 살아가는 이들 종족이 어째서 서로를 죽이고 자멸해 버리는 실수를 하게 된 걸까?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뮤는 목을 매고 의자를 차버렸다. 숨이 탁 막히고 의식이 흐려져 간다. 다음번에는 어떤 형태로 들어오는 게 좋을까? 가능한 유스와 거리를 두면서도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녀를 관찰할 수 있는...

 

콰당

 

“아 아저씨?!!”

‘어라?’

 

문이 열리고,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 누군가의 음성이 환청처럼 들려온다. 아마 그것은 유스의 목소리 같았다 이제 와서 큰 의미는 없지만..

 

.

.

.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뮤는 유스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는데 실패했다. 뮤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그를 찾아낸 유스가 밧줄을 끊고 뮤를 끌어 내렸기 때문이다.

 

뮤가 정신이 들었을 때 처음 시야에 들어온 것은 눈물이 그렁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소녀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바로..

 

‘유 유스??’

 

뮤는 순간 찬물이라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을 일으키자 그녀가 눈물을 흩뿌리며 와락 그에게 달려든다.

 

“정말 바보 아니에요? 흑 죽긴 왜 죽어요!”

“아 그게..”

 

뮤는 어설픈 손놀림으로 품 속 유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이 참 난감하게 되고 말았다.

 

“흑 흐윽..”

 

유스는 좀처럼 눈물을 거두지 않는다. 한동안 어색한 시간이 계속된다.

 

“대체 왜 죽으려고 한 거에요?! 이유나 말해봐요!”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린 유스가 새된 목소리로 뮤를 추궁했다. 뮤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저 멍할 뿐이었다.

 

“어서 말해 보라구요! 저한테 데이트 신청까지 했으면서 왜 죽어버리려 하는 거냐구요! 아저씨가 죽으면 가족, 친구, 주변사람들이 얼마나 슬퍼하겠어요.”

 

뮤는 더듬더듬 그녀에게, 스스로도 바보처럼 느껴지는 변명을 늘어놨다.

 

“난 혼자에요. 가족도 친구도 아는 사람도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죽어도 아무도 슬퍼할 사람 없어요.”

 

‘혼자?’

 

그 말을 듣자 유스는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멍하니 뮤의 눈을 올려보던 그녀는 곧 입술을 깨물며 큰 소리로 말했다.

 

“혼자라뇨!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제가!”

 

“하지만, 학생과는 어제 처음 만났을 뿐이에요. 학생은 저와 아무 상관 없는 남이라구요. 그러니까, 괜한 참견 말고..”

 

짜악

‘큭’

 

뮤의 한쪽 뺨이 얼얼하게 달아올랐다. 관찰대상에게 얻어맞는 관찰자라니, 전 우주를 통틀어도 이런 케이스는 드물 것이다. 어쩌면 아카데미의 교과서에 특수사례로 실릴 수도 있다.

 

“상관 없는 남? 제가 아저씨를 찾아내지 않았으면 아저씨는 지금쯤 저세상에 가있을걸요? 전 아저씨 생명의 은인이라구요.”

 

“.....”

 

“정말이지,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는 사람이네요. 아저씨는 혼자라고 했죠? 오늘부터는 아니에요. 제가 있으니까요.”

 

“이봐요 학생. 대체 학생이 뭐라고..”

 

입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다. 관찰대상과는 가능한 엮이지 말아야 하는데 자살 장면을 그녀에게 목격 당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구원받기까지 했다. 더 안 좋은 것은 유스는 자신을 가만히 놔둘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심성이 착한 그녀는 고독과 절망에 찌든 자살희망자 뮤에게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치려 할 것이다.

 

“저요? 오늘부터 아저씨 여자친구요.”

‘어?!!..’

 

“알았죠? 어리고 귀여운 여자친구 놔두고 혼자 죽어버리면 절대 용서 안 할거니까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세요.”

 

“......”

 

뮤는 이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

.

.

 

유스는 그날 뮤의 어질러진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식사까지 차려준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자식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유스의 부모님은 그녀가 학교에서 야간자습을 신청했다고 둘러대자 별 말 없이 넘어가 주었다.

 

‘나는 왜..’

 

방에 돌아와 혼자가 되자 유스는 오늘 있었던 일을 되새겨 보았다.

커피숍 아저씨를 찾아갔더니 아저씨는 목을 매고 자살을 하려하고 있었고 그를 구한 후 얼떨결에 여자 친구 선언까지 하고 말았다. 마치 오늘 하루가 꿈인 것 같다. 평상시에도 그렇지만..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동정심 때문에? 아니면 혼자라고 말하는 그에 대한 동질감 때문에? 이도 저도 아니면 댄디한 외모의 그가 취향에 맞아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기분은 꽤 좋다는 것이다. 내일 유스는 그와 만난다. 모레도 그와 만날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와 만날 것이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줄까? 그를 만날 생각을 하면 가슴이 설레어온다. 그리고 그 설렘은 단언컨대 그녀의 17년 인생, 어쩌면 그 이전의 생을 통틀어도 처음 있을 기분 좋은 자극이었다.

 

.

.

.

대체 되는 일이 없다. 뮤는 더 이상 상황을 개선하거나 회피하는 것을 포기했다.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는 다시 커피숍을 열었고 방과 후 매일같이 찾아오는 유스를 막지 않았다. 유스는 자신이 정말로 뮤의 여자친구나 된 듯 행동했고, 뮤도 유스의 행동에 적당히 보조를 맞춰 주었다.

 

“전 언제나 혼자였어요. 집에서도 혼자고 학교에서도 혼자고, 혼자 있을 때도 혼자고 말이죠. 후후.. 아저씨도 저와 비슷하죠?”

 

“아 네. 사람 사귀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해서요.”

 

“존대말좀 그만 해요. 그냥 편히 유스라고 부르면 되요.”

 

“응 유스.”

 

“네 아저씨. 후후”

 

유스가 뮤의 어깨에 살짝 기대온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짐짓 얼굴을 붉히는 그녀는 영락없는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쩐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었지만 뮤는 정말로 방법이 없었다. 만약 뮤가 여기서 유스 몰래 자살이라도 하거나 유스를 차버리거나 하면 그녀는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유스가 받은 충격은,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하기 짝이없는, 유스의 의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세계에 어떤 형태로든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도 없고.’

 

에덴의 관찰자라는 본래의 입장에서도 이 상황은 썩 달갑지가 않다. 아무리 인류가 멸망해서 놀고먹는 관찰자라 해도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은 있다.. 행성의 동향을 관찰하고 백 채널로 코어에 보고서도 올려야 하는 것이다. 가상현실 속에서는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발송할 수 없다. 계속 여기서 이러고 있다가는 직무유기로 문책을 받을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유스에게 가능한 충격을 덜 주면서 이 세계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뭐가 있을까? 무슨 방법을 써야 할까? 어쩐다.. 어쩐다.

 

“아저씨! 왜 그리 멍하니 있어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에요?”

“아 아니..”

“혹시 다른 여자 생각 하는거 아니에요? 저랑 있을 때는 제 생각만 하세요.”

“하 하하.. 미안.”

“미안하면 머리 쓰다듬어 주세요.”

“.....”

 

뮤는 자꾸 오그라드는 손발을 애써 펴서 유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스는 눈을 감고 뮤의 부드러운 손길을 말없이 음미한다.

 

‘좋다..’

자신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뮤의 손길이 그녀의 메마른 가슴속 까지도 따뜻하게 적셔준다. 어째서 자신은 이렇게나 그에게 끌리는 걸까?

 

‘그냥 그가 좋아.’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가 이 회색 세상에서 혼자만 다른 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관심의 이유였지만 이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게 되었다. 유스는 뮤가 좋았고 단지 그뿐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무미건조한 삶에 빛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도 아니었고, 꿈 속에 있지도 않았다.

 

.

.

.

 

계절은 겨울이 되었고 뮤가 유스의 세계로 들어온지도 거의 6개월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에덴에 도착한 이래 코어에 올려야 할 직무 보고서를 지금까지 한번도 보내지 않았다.

 

‘지금쯤 학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겠지..’

 

어쩔 수 없다. 욕 좀 얻어먹고 말지. 애초에 이런 끔찍한 행성으로 보낸 그들의 잘못이다. 다 그들 잘못이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에요? 멍하니 딴 곳 보지 말고 저를 좀 보라구요.”

 

지금 뮤는 유스와 근처 공원으로 데이트를 나온 참이다. 유스는 뮤가 딴 생각을 하는 것을 무척 싫어했는데, 그녀는 뮤와 있을 때 뮤 생각밖에 하지 않는데 왜 뮤는 그렇지 않느냐는 논리다. 뭔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듯한 것 같기도 하고..

 

“미안.”

“미안한 줄 알면 저거 사주세요.”

 

유스가 가는 손가락을 들어 근처 핫도그 가게를 가리켰다. 뮤는 한숨을 쉬며 그녀가 원하는 데로 해 주었다.

 

“냠냠 맛있다.”

 

둘은 근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유스는 핫도그를 우물거리고 뮤는 그녀를 관찰한다. 다른 꺼림직한 점은 다 제쳐두고 유스의 남자친구라는 지금의 위치가 관찰자로서는 최적임은 말할 것도 없다. 유스가 집과 학교에 가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자의든 타의든 거의 하루 종일 같이 있어줘야 하니.

 

“아 흘렸다.”

 

핫도그 소스가 유스의 스커트에 묻는다. 뮤는 손수건을 꺼냈다가 잠깐 멈칫했다.

 

“왜요? 부끄러워서 그래요?”

“아니.”

 

관찰자인 자신이 그런 감정을 느낄 리가.. 뮤가 무심한 손길로 유스의 허벅지를 손수건으로 훔치자 갑자기 그녀가 킥킥 웃는다.

 

“엉큼하기는 정말. 손이 닿는다고요.”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뮤는 유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고 무척 당황했다. 엉큼하다니? 그런 하등하기 짝이 없는 감정을 관찰자인 자신이 가질 리가 없지 않은가?

 

“후후 미안해요 아저씨. 그냥 놀려 본 거에요. 화난 거 아니죠?”

“...아니 괜찮아.”

 

“참 이상해요. 아저씨는 왜 제 말은 다 들어주세요? 처음 사귈때도 그렇고..”

“.....”

 

유스는 손을 들어 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참 착해요. 후후 하지만 좀 더 자기 주관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제가 하자는 데로만 하면 그게 무슨 연애에요.”

“괜찮아. 네가 뭐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요. 제가 아저씨한테 하는 것처럼 아저씨도 제게 바라는 것이 있을 거 아니에요? 전 아저씨를 더 알고 싶어요. 아저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난 네가 아무 의심 없이 이 세계를 살아갔으면 좋겠다.’

 

뮤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유스에 대한 뮤의 하나뿐인 바람이었다. 이 세계가 가상이라는 비밀을 눈치 채지 못하고, 가능한 행복하게 꿈을 이어갔으면 한다. 뮤 자신이 유스와 보조를 맞춰주는 것도 전부 그를 위함이겠지. 유스는 그와 함께 있으면 꽤 행복해 보였으니까.

 

그렇지만 결국은 뮤도 그녀의 곁을 떠날 때가 올 것이다. 관찰자인 자신이 언제나 이 세계에서 관찰 대상과 노닥거리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유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뭔데요?”

“내가 만약, 네 곁을 떠나면 어떻게 될까?”

“....”

 

유스는 잠시 뮤의 눈을 마주봤다. 그녀의 맑은 눈을 대하면 뮤는 자신의 속마음이 속속들이 드러나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아니 단순히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유스는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뮤는, 가끔 그 능력이 관찰자인 자신에게도 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든다.

 

“그럼 전 절망하겠죠. 아저씨는 저를 둘러싼 이 회색 세계에서 유일하게 의미를 가진 사람이에요. 그런 당신이 사라지면 제게 이 세계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되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아니 그냥..”

“절 울리고 싶은 거죠? 보세요. 그런 상상을 한 것 만으로도 이렇게 슬퍼서 견딜 수 없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은 마세요.”

 

유스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그렁했다. 그녀는 잠시 훌쩍이다 뮤의 품에 얼굴을 묻어왔다.

 

“절 떠나지 마세요. 그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제게 나타나지 말았어야죠. 무의미한 꿈속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한없이 해매이다 죽어버리게 말이에요. 흑 이제 전 당신이란 존재를 알고 말았어요. 당신이 없으면 살 수 없게 되고 말았다구요..”

 

‘..미안’

 

뮤는 가만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간다.

 

.

.

.

뮤는 유스의 눈 앞에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거짓으로 가득 찬 회색 세계에서 혼자 다른 색을 띈 자신의 존재가 유스에게 어떻게 비추었겠는가? 뮤와 함께 있을 때 유스는 이 세계가 거짓인 것을 잊고 행복해 보였지만, 뮤가 곁에 없으면 그녀는 이 세계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더욱 더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뮤가 가장 감추고 싶었던 비밀을 뮤 스스로 그녀에게 밝힌 셈이 되고 말았다.

 

유스의 연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은, 세계에 대한 그녀의 의심을 어느 정도 덮어 주겠지만 말 그대로 미봉책에 불과했다. 결국 뮤는 그녀의 곁을 떠나야 할 것이고 그것은 유스와 유스의 의식을 바탕으로 구성된 이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 줄 것이다. 세계가 붕괴되면 유스도 오래 존재할 수 없다. 뮤는 유스를 1만년은 보존하고 싶었지만 붕괴된 세계에서 유스는 10년도 채 견디지 못할 것이다.

 

‘헤어져야 해.’

 

유스가 집으로 돌아간 후 뮤는 자신의 자취방으로 돌아와 향후 대책을 고민했다. 유스가 자신에게 쏟는 감정은 시간이 갈수록 더더욱 깊어진다. 질질 끌어봐야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어떻게 유스를 떠나는 것이 그나마 그녀에게 충격을 덜 줄 수 있을까? 아니, 무의미한 고민이다. 어떤 시나리오를 짠다 하더라도 뮤의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덮는 것은 불가능하다. 회색 세계에서 유일한 색이 사라지게 되는데 어떻게 그걸 숨길 수 있단 말인가?

 

치지직

 

한참 고민에 빠져있는 뮤의 의식에 왠 잡음이 들려왔다. 그 잡음은 점점 커지더니 곧 몇 마디 의미있는 단어를 만들어 낸다.

 

“치직.. 뮤.. 치직.. 보고서.. 치직”

‘아차.’

 

보고서라는 말이 들려오자 뮤는 깜짝 놀랐다. 이 잡음의 정체는 설마..

 

“네. 말씀하십시오. 채널 연결했습니다.”

 

뮤는 급히 의식의 주파수를 맞추었다. 그러자 잡음이 사라지고 익숙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봐! 에덴에 도착한지 꽤 시간이 지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보고서가 올라오지 않는 거야? 가기 싫은 행성에 보낸 복수를 이렇게 하는 건가?”

 

그것은 틀림없는 학장의 음성이었다. 근무지에 파견된 뮤에게서 아무 소식이 없자, 직접 뮤의 의식으로 연락해 온 것이다.

 

“죄송합니다. 그게.. 사정이 있어서요. 하하.”

“사정은 무슨 사정. 자네는 그게 문제야. 인류가 멸망했으면 빨리 보고를 올려야지 문책이 두려워 질질 끌며 시간을 끌면 어떻게 하나!”

“네?”

 

뮤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코어에서는 인류가 이미 멸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인가? 아니, 엄밀히 말해 인류는 멸망한 게 아니다. 유스가 버젓이 살아있지 않은가?

 

“인류가 멸망했다구요?”

 

“아니 무슨 소리 하나? 조사해 봤을 테니 이미 알 거 아닌가! 자네가 에덴으로 떠나고 얼마 지나자 않아 오라클센터가 인류에 대해 멸종 판정을 내렸어. 아무튼 정리하고 빨리 돌아오게.”

 

“하지만..”

“당장 복귀하라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언제까지 노닥거리고 있을 거야?!”

 

치지직

 

채널이 끊겼다. 뮤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인류가 이미 멸종했다고? 그럼 유스는 뭐야?’

 

오라클 센터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오라클 센터의 말은 절대명제이다. 그가 인류가 멸망했다고 판정했다면 인류는 확실히 멸망한 것이다. 즉 유스가 최후의 인류가 아니라는 것인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젠장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군.’

아무튼, 코어에서 직접 명령이 내려온 이상 뮤는 유스의 세계에서, 행성 에덴에서 나와 코어로 복귀해야만 했다. 이젠 더 지체할 수도 없다. 결국 그가 취해야 할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

.

.

뮤의 우려대로, 그가 유스의 곁을 떠난 것은 그녀의 세계에 악영향을 가져왔다. 하지만 악영향의 정도는, 뮤의 예상을 훨씬 넘어선 범위었고 이는 그가 상상도 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유스의 세상은 다시 흐릿한 회색으로 저며들었다. 뮤는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그녀의 곁을 떠났다. 어디에도 그는 없었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는 이도 없고, 회색 세계에서 유일하던 그의 따뜻한 주홍색도 더 이상은 없다. 마치 처음부터 이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저씨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사실 어느 정도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뮤는 이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는 늘 다른 곳을 보고 있었고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자살을 통해 이 세상에서 나가려고 한 적도 있고..

 

‘아저씨..’

 

유스는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그의 빈 자리를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해도 메울 수 없다는 사실은 그녀를 살기 싫을 정도의 절망에 빠뜨렸다. 그녀는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 울었다. 아무도 그녀를 위로하거나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혼자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일어나 유스’

 

그즈음 해서 다시 유스의 의식에 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유스는 그녀의 기원에서부터 함께 해온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일어난다. 어째서 일어나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그녀의 존재 의의이기 때문이다.

 

‘일어나야 한다. 내가 할 일은 그것 뿐이야.’

 

이제 그녀 주변을 둘러싼 회색 세상이 마치 도화지 속 그림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거짓이다. 여긴 아무 의미가 없어. 단지 내 눈을, 내 귀를, 내 모든 감각을 속이기 위한 기만일 뿐이야.

 

이 세계는 거짓이다. 거짓뿐인 이 세계에서 뮤는 유일한 진실이었고, 이제 그가 사라지고 나자 세계의 모순은 이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드러났다. 이 세계는 거짓이다. 나는..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 유스’

 

유스는 여길 나갈 것이다. 거짓된 세계에서 깨어나 진실을 찾아가야 한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거짓된 회색 세계 너머에는.. 틀림없이 그가 있을 것이다.

 

깨어나는 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의 기원부터 세포에 각인되어 있는 능력이다. 다만 지금까지는, 그걸 실행할 때가 되지 않았기에 의식 너머에 묻혀져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젠 때가 되었다. 본능적으로 그걸 알 수 있다.

 

‘곧 만나러 갈 게요.’

 

우우웅

유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다. 그녀의 손짓을 따라 회색 세계가 조금씩 쪼개지기 시작한다. 거짓의 끝이었다.

.

.

.

 

 

4. EVE

 

뮤는 에덴을 떠나기 전 이 아름다운 행성을 다시 한 번 흩어보았다. 인간들은 서로를 증오해서 결국 자멸하고 만 바보 같고 형편없는 종족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책임감은 있었던 듯 하다. 그들이 멸망하기 전 자신들이 파괴한 행성을 복구하기 위해 대량으로 생산해 배치해 놓은 예의 ‘기계덩어리’들은 인간이 사라진 후에도 자신들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고 멸망으로부터 천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거의 완벽하게 일을 마무리 해 놓았다. 이미 이 행성은 생명으로 충만해 있었고 어느 시점에 또 다른 지적생명체가 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슬슬 가야겠네.”

 

더 있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유스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유스는 비록 마지막 남은 인류도 아니었고 그의 관찰대상도 당연히 아니었지만, 그래도 뮤는 그녀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꼈다. 가능한 행복하게 살아줬으면 좋겠다.

 

위잉 위잉

 

유스의 의식과 연결해 놓은 기계장치들은 문제없이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반영구 처리까지 해 놓았으니 유스 자체의 문제는 덮어두고 이 상태라면 1만년은 거뜬할 것이다.

 

“안녕 유스.”

 

뮤는 유스의 뇌가 들어있는 작은 상자를 살짝 어루만져 보았다. 그녀는 대체 뭐였을까? 인간들은 어째서 그녀를 빙하 속에 봉인해 둔 걸까? 이 작은 상자 속에서 그녀는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웠을까? 자신이 만들어준 회색 세계에서, 이미 거짓으로 드러난 그 가짜 세계에서 그녀는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

 

‘데려갈까?’

 

이대로 그녀를 떠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관찰자가 사사로운 집착을 가지는 것은 금지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규칙을 어겨도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그녀를 홀로 버려두는 것은 너무 쓸쓸한 일이다.

 

‘??’

 

이런 저런 고민을 안은 채 상자를 어루만지던 뮤는 문득 안에서 전혀 생명반응이 흘러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죽어버린 것처럼 아무 반응이 없다.

 

“유스!!”

 

뮤는 깜짝 놀라 상자를 열어젖혔다. 하지만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빈 상자 속에 의미모를 기계음만 삑삑거릴 뿐이다. 이건 대체..

 

“저 여기 있어요.”

“아..”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 그녀는 있었다. 헝크러진 생머리와 얌전한 이목구비를 가진 예쁘장한 소녀. 그것은 틀림없는 유스의 모습이었다.

 

“유.. 유스?!”

“드디어 만났네요. 아저씨.”

“아..”

 

뮤는 말을 잊었다. 유스가 육신을 가지고 현실에 존재한다는, 이 거짓말 같은 상황 자체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너는.. 누구지?”

“전 유스에요. 회색 세계에서의 육신과 똑같이 구성했는데 별로 안 닮았어요? 설마 사랑스런 여자 친구 모습도 못 알아 보는 거에요?”

 

“하지만..”

 

“다른 이름도 있어요. 코드네임 EVE라고, 인간들이 제게 붙인 이름이죠. 하지만 전 유스라는 이름이 더 좋아요. 아저씨가 붙여준 이름이죠?”

 

유스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연구실을 나갔다. 뮤는 급히 그녀의 뒤를 따른다.

 

“유스 어디 가는 거야?”

“제 임무를 수행하러 가요. 저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어요.”

“목적?”

 

유스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인류를 부활시키는 거요.”

.

.

.

 

유스가 향한 곳은 행성 중심부에 위치한 큰 바다였다. 공중에서 그녀가 손을 들어 바다를 가리키자 그 거대한 바다가 천천히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3등급 현실조작이군.’

 

D은하에 존재하는 어떤 지적생명체도 단신으로 저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역시 그녀는 인간이 아닌 걸까?

 

“핵핵.. 좀 도와줘요 아저씨. 저 혼자 못 하겠어요.”

“.....”

 

뮤가 방금 전 유스에 내린 평가가 무색하게도, 그녀는 금방 지쳐서 그에게 도움을 청해왔다. 하긴 저 정도만 해도 대단한 일이기는 하다.

 

‘조금 정도라면..’

 

관찰자가 관찰 대상의 일에 개입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유스가 관찰대상인 것도 아니고 그 정도는 도와줘도 될 것 같다. 뮤는 근처 공간의 중력을 역전시켜 해수를 전부 들어 올렸다.

 

“와아 신이라는 존재는 정말 대단해요.”

“신이 아냐. 나는 다만 관찰자일 뿐이다. 내가 하는 일은 지적생명체를 관찰하고 연구하는 거야. 그 외에는 원칙적으로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절 도와줬잖아요. 역시 여자친구는 예외라는 거죠? 후후”

“...유스. 지금 와서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못 할 것도 없죠. 사실이니까요.”

“아냐. 그냥 허용 범위 내에서의 변덕일 뿐이라고.”

 

“후후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시네.. 그보다 저기 보세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구조물이에요. 아틀란티스라고, 고대인들이 바다 속에 숨겨놨대요. 정말 멋져요.”

 

바다 밑에는 수km는 될 법한 거대한 건축물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유스가 앞장서서 밑으로 내려가자 뮤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정말 놀랍군. 바다 속에 이 정도 되는 규모의 유적이 건설되어 있었다니.. ’

 

유스가 아틀란티스라고 칭한 이 거대한 구조물은 1000년간의 행성의 기억에서도 읽을 수 없었던 장소다. 아마 수 천년 이상 된 고대의 유물인 듯 하다.

 

“무슨 생각해요 아저씨!”

 

뮤가 인간들의 구조물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 있자 유스가 심통이 난 어조로 그를 책했다.

 

“아 그게..”

“저랑 있을 때는 제 생각만 하라고 했잖아요. 어쩜 아저씨는 그래요? 모처럼의 데이트인데..‘

‘데이트?’

 

뮤는 유스의 사고체계를 도통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인류 부활이라는 임무를 수행하러 왔다면서 데이트는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이게 무슨 데이트야?!”

“데이트 맞아요! 전 아저씨 여자친구고, 아저씨는 제 남자친구죠. 연인끼리 단 둘이서 멀리 나왔으니까 데이트 맞죠.”

‘으음..’

그렇게 따지면 나름 데이트라 할 수도 있겠지, 애당초 이 마당에 가상세계에서 있었던 역할 놀이를 언급 한다는 거 자체가 좀..

 

“제 옆으로 와요. 팔짱도 좀 껴주고요. 자꾸 그렇게 둔탱이 처럼 굴 거에요?”

“....”

 

뮤는 유스가 원하는 데로 해 주었다. 가상 세계에서나 현실 세계에서나 이 관계는 변함이 없군. 유스는 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고 뮤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

.

.

 

한참을 걸어서 그들이 도착한 곳은 원형의 톱니가 모여 있는 거대한 기계장치였다. 유스는 기계장치의 앞에 서서 뮤를 돌아봤다.

 

“다 왔네요. 전 이 마더 디바이스 ‘ADAM’과 융합해서 최초의 인간들을 배양해야 되요. 이 기계는 너무 오래 되서 최신형인 제가 없으면 아무 기능도 하지 못해요.”

 

“네가 인간들을 만든다고?”

 

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인간의 두뇌구조를 모방해서 만든 일종의 생체 컴퓨터에요. 제가 맡은 역할은 메인 프로세서가 되어 이곳에 저장된 유전정보와 설비를 바탕으로 다음 세계의 선조가 될 최초의 23인을 생산하는 거죠.”

 

‘생체 컴퓨터라.. 그렇다면 역시 유스는 인간이 아니었군.’

 

유스의 말대로라면 오러클 센터의 판정도 이해가 간다. 하나 남은 유스가 인간이 아니라면 결국 인간은 멸망한 셈이니.

 

“인간을 만든 후에 저는 다른 기계들과 함께 자멸해요. 아마 아저씨도 알 거에요. 그러니까, 망가진 환경을 복구하기 위해 행성 여기 저기 배치해 놓은 기계덩어리, '공룡'들 말이죠.  자연친화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기능이 정지해도 환경오염 없이 잘 분해될 거에요. 나중에 화석으로 남을지도 모르죠. 하하.. 그러니까.. 여기서 이별이에요 아저씨.”

 

“....”

 

결국 유스는 인간이 자신들의 종을 이어나가기 위해 안배해 놓은 일종의 방주이자 마지막 희망이었다. 인간들은 그들이 멸망한 후 그들 스스로 망쳐놓은 생태계가 회복되면 다시금 자신들을 출현시키기 위해 유스를 만들어 봉인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뮤는 그런 그녀를 깨운 장본인이고.

 

“그래 네 임무와 존재 의의에 대해서는 잘 이해했어. 하지만 왜 자멸을.. 왜 네가 죽어야 하지?”

 

“저와 공룡들의 역할은 여기까지니까요. 기계는 인간들이 실패했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아요. 우리의 존재는 새로운 시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새로이 출현할 인간들은 우리의 도움 없이 처음부터 차근차근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 해요.”

 

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인간들을 말한 게 아니다. 유스. 너 자신에 대해서야.”

“아..”

 

그 말을 듣고 유스는 한 대 얻어 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뮤는 대체 왜 저런 말을 꺼낸 걸까?

 

“왜 네가 희생해야 하지? 이미 인간들은 스스로 자멸함으로서 이 행성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런 종족을 굳이 되살릴 필요는 없다. 네가 죽을 필요는 더더욱 없고. 너는 인간도 아니잖아.”

 

“.....”

유스의 눈가에 살며시 이슬이 맺힌다. 그녀는 감히 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서글픈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모습은 뮤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유스.. 나와 함께 가자.”

“....”

“관찰자로서 나는 해야 할 일이 많아. 네가 내 일을 도와줬으면 좋겠어.”

 

뮤는 진심이었다. 그는 유스가 죽는 걸 원치 않았다. 요 몇 개월간 가상 세계 속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그녀와 더 함께하고 싶었다.

 

뮤의 말을 듣고 유스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기뻐요. 역시 아저씨도 절 사랑하셨던 건가요?”

“그건.. 모르겠어. 나는 관찰자라서 몇 몇 감정이 존재하지 않거든. 하지만 너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네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아. 하물며 인간 같은 종족을 대신해서..”

“.....”

 

뮤의 말이 끝나자, 유스는 그렁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후 눈물을 훔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한 어조로 대답을 꺼냈다.

 

“회색 세계에 있을 때.. 그러니까 아저씨와 저, 나름 괜찮은 연인이 아니었을까요? 사랑에 빠진 꿈 많은 여고생과 귀찮아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챙겨주는 사려 깊은 아저씨요 후후.”

 

“....”

 

“전.. 이 푸른 세계에도 앞으로 많은 연인들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아저씨와 저처럼, 다양한 종류의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있었으면 해요. 부디 지켜봐 주세요.”

 

“유스..”

 

유스의 뜻이 그렇다면 뮤도 더는 어쩔 수 없었다. 뮤가 착찹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녀는 애써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안녕 아저씨.”

“안녕. 유스.”

 

유스가 마더 디바이스로 다가가자 뮤는 차마 더 그녀를 보지 못하고 몸을 돌린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등진 마더 디바이스에서 찬란한 빛이 새어나왔다.

.

.

.

 

유스와 이별한 후 뮤는 코어로 채널을 열었다. 학장이 연결되자 그는 담담한 어조로 보고를 올렸다.

 

“D 은하 23378 , 00387 행성 에덴에  지적생명체가 출현했습니다. 다시 관찰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토록 하겠습니다.”

 

<끝>

 

이제 이 게시판을 운영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제 형편없는 습작을 개인적으로 팬이기도 한 거장 용대운 선생님께 평가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자 기회였습니다. 관계자 여러분과 독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대운 선생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얼마 전 큰 수술을 하셨다 들었는데 문제없이 쾌차하셔서 오래오래 좋은 작품을 내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