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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연, 『광장의 곡예사』

  • 작성일 2016-03-10
  • 조회수 1,218


“닭과 돼지들이 우리를 ‘님’으로 부르고 있다.”



이재연, 『광장의 곡예사』


어느 날 나는 광장에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곡예사를 보았다. 그는 보통 집에서 키우는 닭과 오리와 새끼 돼지들 몇 마리를 데리고 곡예를 했다.
이름난 마술사가 달리는 말의 등을 잔인하게 탁탁 치며 곡예를 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어린 자식을 대하듯 동물들을 하나하나 부드럽고 따뜻하게 다루었다.
『자아, 닭님들은 이리로 나와 보세요. 이제 일할 시간이에요. 』
어린 닭들은 호기심 어린 눈을 굴리며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구경꾼들은 곡예사의 도무지 곡예 같지 않은 자연스러운 태도에 되레 웃음을 터뜨렸다. 두터운 가면을 쓰고, 익명의 존재로 이 도시에서 외롭게 떠돌아다니는 마술사를 보고, 사는 것이 피곤한 구경꾼들은 오랜만에 마음의 문을 열고 웃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쌓아올린 담으로 소외의 밀실에서 고독하게 지낸 사람들이 어깨에 긴장을 풀고 동물들이 귀엽다는 듯이 웃어댔다.
『자아, 이리 와서 저 널빤지를 한 번 건너봐요. 귀여운 닭님들, 어서요. 』
곡예사가 부르는 소리에 닭들은 꼬꼬댁대며 사람들 속에서 하나씩 빠져 나와 그 곁으로 모여들었다. 닭들의 곡예란 몇 개의 작은 나무상자 위에 걸쳐진 널빤지를 외줄로 서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는 것이었다.
곡예사는 꿀꿀거리는 새끼 돼지들도, 꽥꽥거리는 오리들도 모두 이런 식으로 다루었다. 그는 우리들의 각박하고 삭막한 삶을 어린 동물로 비춰주는 곡예를 하였다.
나는 자신이 넘어서야 할 벽과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없는 내 속의 굳은 그 무엇이 나만 옳다고 여기는 그 고정관념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선택이 자신을 괴롭힐 때, 나는 중심을 잃고 신음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내 자신의 한 부분을 버리고 싶지만 나는 여전히 내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곡예를 마치자 그는 길다란 모자를 벗어들고 돈을 걷으러 다녔다. 구경꾼들은 기분 좋게 지폐나 동전을 그의 모자 속에 넣었다.
그는 밀실에 갇힌 인간들의 소외와 절망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참으로 훌륭한 곡예사였던 것이다.


▶ 작가-이재연-소설가. 전라남도 목포 출생. 이화여대 독문과 졸업. 최정희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소설 데뷔. 신학 공부하는 남편과 함께 스위스 바젤에서 유학생활. 귀국 후 한신대 교수 사택에 머물며 소설 창작. 『창밖으로 시선을』 『황혼 무렵엔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간다』 등을 출간.

▶ 낭독_ 강애심 - 배우. 연극 '나무위의 군대', '육쌍둥이', '달팽이의 별' 등에 출연
유병훈 - 배우. 연극 '고제', '슬립', '살짝넘어갔다 얻어맞았다' 등에 출연.


배달하며

닭-너는 저 아저씨들이 우리를 왜 구경하고 있는지 아니?
오리-줄을 잘 맞추니까.
닭-아니야, 저 아저씨들은 소스가 뿌려져 접시에 놓인 우리 다리만 봤기 때문에
저게 뭘까, 궁금해 하는 거야.
돼지1-맞어.이 세상에서 ‘닭님, 오리님, 돼지님들’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은 우리뿐이야.
돼지2-‘님’자가 붙으면 모두 사랑받는다는 뜻이래. 주인님은 우리에게 저 아저씨들을 모두 ‘님’이라고 부르게 하는 거야.

문학집배원 서영은

▶ 출전- 『누군가 나를 부른다』 이재연 (샘터사 2004년 6월)
▶ 음악_ tune ranch /miscellaneous 중에서
▶ 애니메이션_ 김은미
▶ 프로듀서_ 양연식

서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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