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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네 사이에르스타드, 『카불의 책장수』

  • 작성일 2016-03-31
  • 조회수 1,025


“저기, 저기라고 손가락이 가리킨 폐허가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오스네 사이에르스타드, 『카불의 책장수』


찌그러진 탱크들, 부서진 군용차들, 어디에 쓰이는지 짐작만 갈 따름인 고철 파편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한 남자가 외로이 쟁기질을 하고 있는 밭 한가운데에 커다란 탱크가 누워 있다. 남자는 고생스럽게 탱크 옆으로 돌아간다. 옮기기엔 너무 무거우니까.
자동차는 깊게 구멍이 팬 길 위로 빠르게 달린다. 만수르는 어머니의 고향을 찾으려고 애쓴다. 대여섯 살 때 이후로는 가본 적이 없는 곳이다. 만수르의 손가락은 계속해서 폐허들을 가리킨다. 저기! 저기!
하지만 이 마을이나 저 마을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어린아이였을 때 들렀던 어머니의 친척집은 이 폐허 더미 중 어디든 될 수 있다. 예전에는 길로, 들판으로 얼마나 자유롭게 뛰어다녔던가. 하지만 지금 이 평원은 세계에서 지뢰가 가장 많이 묻힌 곳이다. 안전한 곳이라곤 도로뿐이다. 땔나무를 든 아이들, 물동이를 든 여자들이 길섶으로 걸어간다. 그들은 지뢰가 있을지도 모르는 도랑을 조심스럽게 피해간다. 순례자들을 태운 자동차는 지뢰 제거반을 지나간다. 지뢰 제거 요원들이 조직적으로 지뢰를 찾아내어 폭파하고 있다. 하루에 몇 미터밖에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이 죽음의 덫 바로 위에는 줄기가 짧은 검붉은 야생 튤립이 도랑에 한가득 피었다. 하지만 이 꽃들도 멀리서만 감상해야 한다. 꽃을 꺾다가 팔이나 다리가 날아가 버릴 수도 있으니까.
아크바르가 아프가니스탄 관광협회에서 1967년에 간행한 책자를 보며 재미있어한다. 그가 소리 내어 읽는다.
『어린이들이 길가에서 분홍색 튤립 목걸이를 판다. 봄이면 벚나무, 살구나무, 아몬드와 배나무가 관광객의 관심을 끌려고 서로 다툰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장관은 카불까지 내내 관광객의 뒤를 잇는다. 』
세 사람은 깔깔 웃는다. 올해 봄, 폭탄과 로켓포와 3년간의 가뭄과 독우물을 견디고 살아남은 외롭고 끈질긴 벚나무는 한두 그루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지뢰를 밟지 않고 벚나무까지 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 작가-오스네 사이에르스타드-종군기자 겸 작가. 1970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에서 태어남. 오슬로에서 러시아어와 철학을 공부. 5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실력으로 체첸 공화국, 세르비아, 코소보, 아프카니스탄 전쟁에서 종군기자로 활약. 국내외에서 다수의 저널상을 받았다.

▶ 낭독_ 서진 - 배우. 연극 '까베세오', '사멸을 향하여', '안티고네' 등에 출연.
유병훈 - 배우. 연극 '고제', '슬립', '살짝넘어갔다 얻어맞았다' 등에 출연.


배달하며

탱크와 로켓포, 지뢰, 부서진 집들의 잔해가 널려 있다 해도
대지는 항상, 영원한 생명의 품이다.
표시나 흔적이 지워졌어도, 그리워하며 가리키는 손짓만으로도, 그것은
고향의 놀이터, 튤립이 만발한 꽃밭, 연인과 입 맞추던 밀밭이 된다.
영원하라, 대지여. 내 죽은 뒤에 돌아갈 신의 품.

문학집배원 서영은

▶ 출전-『카불의 책장수』 권민정 옮김 (2005년 11월)
▶ 음악_ song bird av212 중에서
▶ 애니메이션_ 강성진
▶ 프로듀서_ 양연식

서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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