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십자가의 성 요한, 『가르멜의 산길』

  • 작성일 2016-08-25
  • 조회수 1,695

"일체를 버려야만 다다르는 길..."


십자가의 성 요한, 『가르멜의 산길』


이 길은 어디까지나 도달을 위하여 항상 가야 하는 것이다. 항상 욕을 버리면서 가는 길이지, 욕을 기르면서 가는 길이 아니다. 일체를 버리지 아니하면 다다르지 못하는 길이다.
불의 도수가 한 치만 모자라도 나무 한 조각을 불덩어리로 만들지 못하는 것처럼, 영혼도 단 하나의 결점 때문에 하느님 안으로 변성되지는 못할 것이다. 영혼은 의지를 하나밖에 가지지 않기 때문이니, 이 의지가 어느 무엇에 쓰이고 헤살을 받으면 하느님 안으로 변성되는 데 필요한 자유와 고요와 맑음이 없는 탓이다.
영혼의 힘은 그 기능과 감정과 욕구에 있고, 이 모든 것은 의지로 다스려지는 것이다. 의지가 이 기능과 욕구를 하느님께 향하도록 하고, 하느님 아닌 것에서 빗나가게 하면 그때가 바로 하느님을 위해서 힘을 간직하는 때이니, 바야흐로 영혼은 제 모든 힘을 다하여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하자면 우선 의지를 일체 방향 잃은 집착에서 씻어내야 하므로 이를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데, 실상 이 무질서한 집착에서 무질서한 욕구와 감정과 작용이 생겨나고, 제 모든 힘을 하느님을 위하여 간직하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집착과 감정은 네 가지로서 기쁨과 바람과 슬픔과 무서움이 곧 그것이다. 이러한 감정이 하느님을 지향하고 올바로 부려져서, 영혼이 하느님 영광 존영만을 기뻐하고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슬퍼하지 않으며 오직 하느님만을 두려워하면, 영혼의 힘과 그 힘부림을 하느님을 위하여 간직하고 하느님께 향하게 함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영혼이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을 기뻐하면 할수록 그만큼 하느님 안에서의 기쁨이 줄어들고,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을 바라면 바랄수록 하느님께 대한 바람은 줄어들며 다른 감정에 있어서도 이와 같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감정은 의지가 피조물에 얽매여 하느님 안에서 힘을 잃을수록 더욱더 영혼을 들이치고 점령한다. 그렇게 되면 기뻐할 것도 없는 것들에 스스로 기뻐하기가 아주 일쑤이고, 이롭지 못한 것을 바라고, 기뻐할 일을 슬퍼하며, 무서워할 데가 아닌 데에 무서워하게 된다.
▶ 작가_ 십자가의 성 요한 - 사제. 아빌라의 테레사와 함께 스페인 신비신학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1542년 가난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1563년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하여 살라망카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1567년에 사제가 되었음. 아빌라 테레사의 설득으로 가르멜 수도회에 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켰으나, 개혁을 원치 않은 수도원장에 의해 9개월 동안 투옥생활을 했다.
요한의 신비적 영성은 많은 수도자들에게 관상의 길로 들어서는 등불이 되고 있다.
▶ 낭송_ 문성진 - 배우. 오페라연극 ‘햄릿’ 등에 출연.
배달하며

영혼은 욕망에 의해 맑음의 소리를 낸다.
마치 종이 외부로부터의 타종에 의해 소리를 내는 것처럼,
육체의 갖가지 욕망의 타종에 의해 영혼은 고요의 소리를 낸다.
다만 그 타종은 욕망이 영혼에 부딪쳐 맛을 잃어 고요에 삼켜지는
현상이다. 고요 속에 온전히 깃들어 보면
하늘 저 높은 곳에서 바람이 구름을 흐르게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문학집배원 서영은
출전-『가르멜의 산길』(바오로딸)
음악_ Backtraxx-classical2 중에서
애니메이션_ 강성진
프로듀서_ 김태형

서영은

추천 콘텐츠

몽테뉴, 『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

내 마음의 뒷방, 그 은둔처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다. 몽테뉴, 『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 병은 결코 자신에게서 이탈하지 못하는 마음에 있다. (호라티우스) 그러므로 마음을 끌어내어 제 자신에 돌려주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 외롭고 쓸쓸함이다. 이것은 도시의 한복판이나 왕들의 궁전에서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따로 떨어져서 더 잘 자기를 누린다. 그래서 우리는 홀로 살며 사람들과 교섭 없이 지내려고 하는 만큼, 우리에게 만족이 매여 있게 하자, 우리를 타인에게 얽매이게 하는 모든 연결을 물리치고, 정말 홀로 살며 편안하게 살아갈 능력을 얻기로 하자. 스틸폰은 자기 도시의 화재를 피해 나오며 거기서 아내도 어린것들도 재산도 잃었다. 데메트리우스 폴리오클레테스는 그가 조국의 그 참혹한 파멸에 처하여 얼굴빛도 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 손해를 본 것이 없느냐고 물어보자, 그는 없다고 대답하였다. 고마운 일로 자기 것은 잃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철학자 안티스테네스가 사람은 물 위에 뜨는 장비를 가지고 난파할 때에 헤엄쳐 나갈 차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농담조로 말한 것은 바로 이 뜻이다. 실로 이해심 있는 사람은 자신을 잃지 않으면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 놀라 시(市)가 야만족들에게 파괴되었을 때에 그 곳 주교이던 파울리누스는 거기서 모든 것을 잃고 포로가 되어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드렸다. 『주여, 이러한 손실을 느끼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왜냐하면 그들은 내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음을 주께서는 아시지 않습니까. 』 그를 부하게 만들던 재산, 그를 착하게 만들던 보배, 그런 것들은 모두 온전하였다. 이것이 진실로 손실을 면할 수 있는 보배를 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보배를 아무도 갖지 못하는 곳에 감추는 방법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도둑질해갈 수 없는 보배이다. 할 수만 있다면 아내, 아이, 재물 그리고 무엇보다도 건강을 가져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 행복이 거기에 매여 있게까지 집착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에게 남이 침범하지 않는 아주 자기 고유의 것인 뒷방을 가지고, 그 속에 진실한 자유와 은둔처를 마련해 둘 일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과의 일상의 대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사사로워서, 외부와의 어떠한 관련이나 교섭도 그 곳에는 미치지 못하게 할 일이다.아내도, 어린애도, 재산도, 다른 사람도, 하인도 없는 듯 그곳에서 혼자 생각하며 웃고 지내며, 그런 것들을 잃는 경우에 부딪혀도 그런 것들 없이 살더라도 아무런 별다름이 없게 할 일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들 수 있는 마음을 가졌다. 그것은 자기를 동무 삼을 수 있다. 마음은 공격할 거리, 방어할 거리, 줄 거리와 받을 거리를 가졌다. 이러한 고독함 속에서 할 일 없이 괴롭다고 오그라들까 두려워 말자. 고독함 속에 그대 자신이 한 군중이 되라. (티블루스) ▶ 작가_ 몽테뉴 - 목사, 문필가. 남프랑스 페리고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귀족으로 몽테뉴 성의 성주. 2세 때 가정교사로부터 라틴어 학습을 받음. 13세 때 명문 기엔느

  • 김 태 형
  • 2016-09-29
이난호, 『아홉번 떠났다, 산티아고』

산티아고로 이끈 노란 화살표들이 도미노처럼 반대로 쓰러지는 것을 본다,내가 사는 삶의 방향으로... 이난호, 『아홉번 떠났다, 산티아고』 저녁 아홉 시를 조금 넘은 시각, 마당 한켠에 내놓인 은색 탁자에 둘러앉은 국적이 갖가지인 순례객들이 캔맥주를 마시며 밝게 웃고 있다. 가게 주인 여자는 빈 맥주캔으로 넘치는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변 새 맥주캔을 가져다 은색 탁자에 놓는다. 그뿐, 마당의 나머지 부분은 씻은 듯 휑해, 은색 탁자 주변이 흡사 추상극 무대 세트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진작 집안으로 들었고 대개의 순례객들도 숙소에서 일기를 쓰거나 독서를 할 것이고 한둘은 가게 안에서 티브이를 볼 것이고 드물게는 저녁미사 끝에 오래된 레스토랑에서 약간 긴 코스의 저녁을 먹을 것이다. 나는 마을 끝까지 걸어가 나직한 성벽 너머로 천천히 지워지는 낙조를 보았다. 해가 지는 쪽은 황량한 들이었다. 낙조는 먼 들녘부터 엷은 어둠으로 조용히 스몄다. 만종이 울리지 않아도 내가 서 있는 시공을 점검하게 됐다. 2014년 10월 1일, 걷기 순례에 나선 지 딱 보름만이다. 문득 어떤 성당 제대 옆에 늘어졌던 ‘우리는 모두 나그네’라는 글귀를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순례자에게 나그네적 로망 따위 가당찮아』 하며 돌아섰다. 이번엔 좁은 뒷길로 들어섰다. 좁은 골목 역시 씻은 듯 비었다. 그곳의 적요는 음습하고 뭔가 함축적이었다. 이 또한 일체의 세트를 배제한, 생의 저편을 형상화한 무대쯤. 허술한 토벽에 착 달라붙은 알전구 아래 배우 둘이 있다. 낮은 추녀 밑에 그들 노인 둘은 쪼그리고 앉아 포도주를 마시다가 세 번째 배우로 등장한 내게 수줍게 웃어 보였다. 세 번째 배우는 단박 감격하여 흠뻑 웃어준다. 흐린 빛으로도 확연한 저들의 꼬질꼬질 때 탄 입성과 낡은 신발짝이 세 번째 배우를 확 당겨갔던 것이다. 노인이 들고 있던 포도주 주전자를 내밀었다. 주전자 주둥이가 두루미 목처럼 길다. 『긴 목은 슬프다!』 세 번째 배우는 유명 시구에 기대어 속말을 주절거린다. 긴 목은 목마름, 배고픔, 구차함, 슬픔의 다른 발음, 얼핏 카미노의 이미지일 수도 있었다. 자기 앞으로 내밀어진 주전자를 세 번째 배우는 그냥 바라본다. 기다리다 못한 노인이 『이렇게! 』하듯이 주전자를 허공에 높이 쳐들어 자기 입을 겨냥하고 포도주를 붓는다. 절묘한 순간에 주전자 주둥이가 수평이 되고 포도주를 머금은 노인의 입이 닫혔다. 세 번째 배우가 맛있게 웃는다. 노인들도 따라 순하게 웃는다. 노인이 주전자 주둥이가 청결함을 온 몸으로 증명해 보였음에도 세 번째 배우는 여전히 난감하다ᆞ. 아니 짠하다. 『저렇게 웃으면 뒤로 뒤로 밀려나는 건데...』 모성이 동한다. 『괜찮아요!』 하듯 세 번 째 배우가 주전자를 받는다. 위로 쳐드는 시늉까지는 따라했다. 더 이상은 어림없다. 고개를 홰홰 저으며 주전자를 넘긴다. 그리고 셋은 아이들처럼 웃었다. 매우 잘 웃었는데 세 번째 배우 목 아래는 여전히 아리다. 영락없이 망령스런 연상. 『뒷전으로 밀려나는 스페인!』 각본에 없는

  • 김 태 형
  • 2016-09-22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

크라우스-수수께끼, 이제부터 이 무명의 하인을 주목해 볼 일이다.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 그의 주변에는 날개를 달고 속삭여대는 지식들이 날아다니지 않는다. 그 대신 무엇인가가 그의 내면에 들어 있다. 그는 그 무엇 위에 가만히 있고, 그리고 그 무엇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는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결코 누군가를 속이거나 헐뜯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이 수선스럽지 않음을 나는 교양이라고 부른다. 수다스러운 자는 사기꾼이다. 그가 매우 친절한 사람일 수는 있지만, 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모두 뱉어내지 않으면 못 배기는 그의 단점은 그를 비열하고 나쁜 친구로 만들 것이다. (중략)그는 재능들로 빛나지는 않지만, 타락하지 않은 선한 마음의 미광을 내비치고 있다. 그의 촌스럽고 소박한 몸가짐은 거기 수반되는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아마 인간 사회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움직임과 태도일 것이다. 그렇다. 크라우스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를 재미없고 못생겼다고 생각할 여성들에게서도 그렇지만, 그를 무심하게 지나쳐버릴 이 세상사에서도 말이다. 무심하게? 그렇다. 사람들은 결코 크라우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는 그가 별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아간다는 것, 바로 그 점이 경이로운 것이고, 계획으로 충만한 것이며, 조물주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신은 이 세상에 심오하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내주려고 크라우스와 같은 인간을 보낸 것이다. 그 수수께끼는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다. 봐라, 사람들이 단 한 번이라도 수수께끼를 풀려는 노력을 보이는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크라우스-수수께끼는 너무나 훌륭하고 심오한 것이다. 다시 말해 어느 누구도 그 수수께끼를 풀고자 애태우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 숨 쉬는 그 어떤 인간도 이 무명의 초라한 크라우스에게 그 어떤 과제 수수께끼 혹은 그토록 심오한 의미가 숨어 있으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하기 때문이다. 크라우스는 진정한 신의 작품이며, 무(無)이며, 하인이다. 크라우스는 교양 없고, 매우 고된 일을 수행하기에나 적합한 자로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기이한 것은, 그런 판단이 틀린 데 없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이다. 크라우스는 겸손함 그 자체이다. 순종의 왕관이자 왕궁인 크라우스. 그는 진정 보잘것없는 일들을 수행해나가기를 원한다. 그는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또 하고 싶어 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누군가를 돕고 복종하고, 시중을 드는 일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곧 알아차리고는 그를 착취할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착취한다는 사실 안에는 환하게 빛을 발하는 자비와 광명으로 빛나는, 금빛 찬란한 신의 정의가 들어 있다. 그렇다. 크라우스는 거짓 없는, 아주, 아주 단조롭고, 단순하고 명료한 존재의 초상이다. 어느 누구도 이 사람의 단순함을 오인할 수 없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결코 성공하지 않을 것이다. 난 그것이 멋지고, 멋지고, 또 멋지다고 생각한다.

  • 김 태 형
  • 2016-09-1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