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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와 정념

  • 작성일 2016-10-01
  • 조회수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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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김해경), 서정주, 박목월, 김종삼, 김수영, 최승자의 시를 통해 인간과 정념의 문제를 진하게 통찰하는 문학평론가 엄경희의 신작 『현대시와 정념』. 이 책은 정념이 의지나 이성과 대립하지 않는다고 봤던 데이비드 흄을 위시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바흐친, 베르그송, 에릭 프롬, 앤서니 기든스 같은 서양철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를 규명하여 정리하고, 그 결과를 다시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정념의 문제로 수렴해서 분석한다.

특히 분석에 앞서 '감정'과 관련 용어들을 '정념Passion', '파토스Pathos', '정동(情動)Affect', '감정(정서情緖)Emotion', '감정(느낌)Feeling'으로 분류하고 구분하여 그것들의 사전적 어원을 밝히는 이 책은 정념이라는 개념이 지닌 의미의 진폭을 구체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도구를 제시한다.

어떤 감정은 일생을 풍요롭게 하지만 또 어떤 감정은 일생을 파멸로 몰아가기도 한다. 누구나 타고나는 너무나 인간적인 이 자질은 즐거움의 근원인가 아니면 넘어서야 할 장애인가?


1. 왜 정념인가?

정념(情念)이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에서는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억누르기 어려운 생각”이라고 설명된다. 이런 사전적 설명도 감정의 실체를 확연하게 드러내기에는 부족하다. ‘감정’이 지칭하는 바의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에서 희로애락의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고, 그것을 직간접으로 표출한다. 감정에서 촉발된 억누르기 어려운 생각으로서 정념은 이성의 제어를 받아야 한다고 보편적으로 인식된다. 이성적 존재가 인간이라면, 자신의 행동(정념의 분출)을 이성으로써 제어해야 한다는 것이 합리주의철학의 금과옥조이다. 그래서 합리주의철학은 감정과 이성의 불필요한(비생산적인) 대립과 싸움을 유발하여 인생의 풍요로운 시간을 이성의 황량한 들판으로 내몰아간다.

‘이성’만이 절대적이라는 합리주의 철학의 ‘거만함’에 대해, 정념이란 이성과 상충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논증을 통해 정념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한 철학자가 바로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다. 흄은 정념과 이성의 논박이란 엄밀하지도 않고 철학적이지도 않다는 진단을 바탕으로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고 또 노예일 뿐이어야 하며, 정념에게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외에 어떤 직무도 탐낼 수 없다.”(『인간본성론2-정념』)는 (다소 격해 보이는) 주장을 내새운다. 이성이 정념의 노예라는, (본인 스스로도 밝힌 바처럼) 다소 “의외로 여겨질 수 있는” 그의 주장은 “정념이 거짓 가정에 기초를 두거나 또는 의도적 목적에 불충분한 수단을 선택했을 때가 아니라면, 어떤 의미에서든 정념을 결코 불합리하다고 할 수 없으므로, 이성과 정념은 결코 상반될 수 없으며 의미와 행동을 지배하기 위해 싸울 수도 없다.”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정념을 이성의 테두리에 가둬 억압하려는 것은 이성이 모든 생각과 행동의 원천이라는 위험한(?) 독단으로 귀결될 수 있다. 정념이란 의지를 훼손하는 걸림돌이 아니라 의지의 유력한 동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흄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정념에 주목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저자는 “이천 년대 이후 시의 서정성이 급격히 축소되는 현상은 시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풍요로운 감정은 다양한 관계로부터 생겨난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은 관계의 매개가, 우리들의 관계가 축소되고 있음을 뜻한다. 적어도 내게 이러한 현상은 쓸쓸한 일이다. 아주 먼 미래에 정념론은 이미 낡은 인간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직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라 믿고 싶다.”라고 강조한다. 정념의 축소는 인간의 왜소화를 야기한다. 저자가 『현대시와 정념』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바는 현대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 전반에 대한 점검일 것이다.


2. 감정은 진정 해소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사랑은 무엇이며, 억제할 수 없는 슬픔과 기쁨·분노·우울·공포·연민·외로움·질투심·시기심·존경심은 어디로부터 생겨나는가? 그리고 이 다양한 감정들은 왜 나 자신의 의지나 지성 능력과 상관없는 행동을 낳는 힘으로 작용하는가? ‘앎’이 도움이 되지 않는 당혹스러운 내면의 사태 앞에서 의지와 이성은 왜 패배를 선언하는가? 그런데 감정은 진정 해소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제기를 토대로 해서 『현대시와 정념』은 이상의 육친(肉親) 시편과 수필에 내포된 ‘연민’의 복합적 성격과 소외의 양상, 서정주 시에 나타난 성애(性愛)의 희극적 형상화 방식과 시적 의도, 박목월의 생활시편에 담긴 ‘긍지’와 ‘소심’으로서 정념, 김수영 시에 내포된 자발적 소외와 ‘설움’의 정념, 최승자 시에 내포된 열정적 사랑의 역설과 존재의 비극성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다.

저자가 『현대시와 정념』에서 다루는 시인들과 그들의 작품은 예술과 인간이 어떻게 접목되고 있는지를 일상의 다양한 정념의 양태를 통해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움을 준다. 저자는 분노와 억울함, 슬픔, 죄의식 등과 같은 정념의 다발 속에서 세계에 대한 연민으로 괴로워했던 천재 시인 이상, 도덕적 절제의 위선을 벗어던진 본능적 방출을 통해 경직된 삶을 이완시킨 서정주 시인, 가난한 생활 현실을 긍지와 소신의 정념으로 돌파했던 박목월 시인, 생활에 좌우되지 않는 자기만의 소외 위치를 만들어 '서러운 긍지'를 내면화한 김수영 시인, 세계로부터 추방당하고 소외된 자로서의 수치를 아름다움을 통해 도덕 감정으로 승화시킨 김종삼 시인, 생산과 소비로 점철되는 자본주의적 삶의 논리와 자기파멸로 향하는 최승자 시인의 열정적 사랑이란 개인의 특수한 정념이라기보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니 삶을 영위해가야만 하는 인간의 고유한 보편의 정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3.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정념

정념의 문제는 자연과학의 연구처럼 논리와 논증으로 엄밀하게 해명될 수 없다. 그렇다고 완전하게 비과학적인 영역의 문제는 아니다. 이래서 정념연구가 어렵다고 저자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시의 연구 영역에서 정념은 주로 ‘서정’이라는 말로 막연하게 서술되거나, 아니면 정념이 시의 행간에 너무도 당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오히려 미흡하게 처리된 면이 없지 않다. 아울러 외로움과 부끄러움·분노감·사랑 등을 언급한 경우는 무수히 많지만 그것의 실체를 끝까지 추적해보고자 했던 논의 또한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개별 시인의 시에 내재된 정념을 정확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의 정념은 유일한 것이고 그것을 다른 말로 대체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념의 실체에 육박할 수 있는 설명의 틀을 만들어보려 했던 것이 여기에 실린 몇몇 글인데, 고백하자면 이 글들은 의도만큼 만족스럽다고 할 수 없다. 정념에 관한 철학적 논의들을 읽어가면서 그것의 실체를 밝힌다는 게 쉽지 않은 일임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대의 마음을 완벽하게 읽어낼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정념을 규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대상의 정념을 완벽하게 해석하는 일 또한 가능하지 않다는 게 솔직한 결론이다. 따라서 각각의 글에 내린 결론은 완결된 결론이라기보다 유보적 맺음말이라 할 수 있다. (중략) 아주 먼 미래에 정념론은 이미 낡은 인간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직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라 믿고 싶다.”

정념들은 각기 유일한 것들이고 그것들을 다르게 별칭하려는 시도자체마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념은 끊임없이 연구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완벽할 수 없지만 지속적으로 탐구되어야 하는 정념의 의미와 역할은 인간의 숭고한 의지와 삶을 밝혀주는 등대 같은 것이다. 『현대시와 정념』은 문학의 영역에만 고립되었던 문학비평의 협소함에서 벗어나 인간과 문학의 접점을 찾으려는 참신하고 진지한 노력을 시연하므로 주목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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