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기문둔갑//조한풍의 장편 소설

  • 작성일 2018-08-30
  • 조회수 245

조한풍의 장편 소설


기문둔갑


 


□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


『기문둔갑』는 가장 비밀스러운 삶을 산 사람의 이야기다.


그러나 그는 비밀스러운 삶을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픽션이라는 배면에 진실성이 드러나는 매체로 여과하고자 했


다.  오늘도 태양이 뜨고 있다.


양지쪽에서는 찬란한 빛의 향연으로 축제를 벌인다. 하지만, 그 양지에서 빛나는 영광스러움, 즐거움, 희망, 사랑 등의 열매


의 씨앗은 음지에서 일구어온 제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음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양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움직이고


양지쪽의 눈물 때문에 목숨을 바친다. 그리고 양지쪽 사람들의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자신의 희생을 수행자처럼


행동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다.


1945년 우리 국토에 그어진 38선은 우리의 요구에 의해서 그어진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힘을 가진 타인들의 이해관계 때문


에 그어진 일종의 국경선이었다. 그리고 그 타인들의 이해관계의 배설물 속에서 배양된 권력자가 전쟁을 일으켰고, 이 희생


을 막기 위해서 피의 제물로 쌓여진 휴전선은 또 다른 세상을 구축해 놓았다. 진실로 누구를 위하여 그 죽음의 사선을 넘나


들었던가?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다.


이직도 밝히기 어려운 것들과 몇몇 인물들은 이야기의 구성을 위해서 픽션으로 처리되었음 밝힌다. 끝으로 북파 되어 아직


돌아오지 못한 공작원들과 국가의 이념 때문에 희생된 고인들에게 이 글을 바치고자 한다.


버드내 곡류에서 지은이 조 한 풍 記


 


기문둔갑


1.  --- 시체동무 ---


*


“36병장기 무술 중에서 제일은 36계 줄행랑이요, 기문둔갑의 병법에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다는 것이 제일의 은신술이요,


둔갑술이니라, 이 놈아.”


“으-으- 악-!”


어린놈이 살짝 미는 통에 연화봉에서 수천 벼랑길 협곡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육중한 몸이 바람에 날리면서 흰 공작의 깃


털처럼 움직였다. 곧 회오리바람에 빨려 들어가 화과산 바위틈에 낀 원숭이 꼴이 될 것 같았다.


‘꾸ㅡ당’


끝내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벼랑 아래로 떨어져 돌 틈에 낀 것이다. 소리는 몸에서 난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난 것이다. 그리고는 정신이 들었다. 앞이


캄캄했다. 눈을 뜬 것은 아니었다. 아니 눈을 뜰 수가 없다. 암흑이다. 전혀 빛을 볼 수가 없다. 캄캄할 뿐이다. 무엇 하나 눈에


잡히지 않았다. 이렇게 막막할 수가 있을까? 눈은 물론이고 귀에도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바람도 없다. 모든 신경이 다 정


지되어 있었다.


‘도대체 어딜까?’


나는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다. 왜 이러고 있을까? 도대체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전혀 기억나질 않는다. 그런데


어디선가 희미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뭘까? 발자국소리? 문이 열리는 소리?’ 나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찰크락.’


드디어 소리가 일어났다.


앞이 환해졌다. 그러나 무엇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환할 뿐이다. 이번에는 ‘딸칵’하는 플라스틱에서 마찰되는 금속


성 소리가 났다. 귀는 열인 것 같았으나 아직은 눈을 뜰 수가 없다.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와 벽에 붙은 전등 스위치를 켠


것 같다. 그리고 내 귀에선 매미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김동무. 시체 옷 좀 벗기래.”


“원장동무, 이 노마가 입은 옷은 산자락을 전문적으로 타는 사람이 입는 옷이 아니래요?”


“나도 모르갓서. 날래 벗기라우.”


“엇, 원장동무, 이것 보시래요? 속에다 우리 병원복을 입고 투명한 비닐로 온몸을 칭칭 감았어래?”


“그럼, 이 노마는 우리 병원에 있든 자 드래는가?”


“원장동무래. 신분도 모르는 송장인데, 어디에 있던 놈 따져서 뭘 하자는 기래요?”


“기래, 김동무. 그 옆에 있는 일자 칼 좀 주구래.”


“이것 마랩네까?”


“기래, 주시구래.”


“원장동무가 직접 하시게?”


“어카갓소. 어서 빨리 보고서 작성하고 치우자래. … 이 노마가 왜 죽었는지, 김동무는 짐작 가는 거래도 있소?”


“원장동무래, 제가 어드러케 알가씨오. 그냥, 소각실로 보냅시다. 이 시신이 들어온 지가 삼일이나 되지 않았소. 이 노마가


왜 죽었는지는 원장동무가 적당히 밝히고 마랩네다. 이자래, 신원도 모르잖소?”


“그니까네 더 좋지 않소. 장기는 다 상했을까네. 무릎 물렁뼈만 띠어내는 거래, 비닐통투에 넣어 냉동실에 보관하시구. … 그


리구 소각실로 넘기자래.”


“원장동무 이것 보기요. 장기도 상하지 않은 것 같소. 보시래요?”


“보긴 그런데? …, 이 노마는 그래도 착한 짓만 하다가 가꾸만 기래.”


“어드러케 아시오?”


“사람이 죽으면 원래 영혼과 몸이 이별할 시간은 주는 기요. 그래서래 죽은 사람의 시신을 막- 다루지 않고 최소한 삼일 동안


은 그대로 두는 기래. 그래서 염도 삼일 후에 하지 안 카소 . 영혼은 그 삼일 동안에 이승의 모든 인과응보 선악출납부를 염마


대왕에게 감사를 받아야 하는 기래. 그래서래 염마대왕이 ‘니는 잘못 왔다.’ 그러면 다시 혼백이 자기 몸속으로 기어 들어와


야 하니까네. 시신은 삼일 동안 그대로 놔두는 기라요. 우리처럼 막- 째고 띠어내고 하면 안 되는 긴데?”


“그러면, 영혼이 명부에서 다시 돌아왔는데, 자기 시신이 없거나 훼손 되었으면 어찌 되는 기요?”


“그래서래, 귀신이 생기는 거 아니 같소.”


“아-, 근데 이 송장은 이미 죽은 지가 삼일은 벌써 넘지 않았소?”


“그래서래, 그게 이상한 거래? 보통 시신은 영혼이 떠나고 삼일이 지나면 썩기 시작하는 긴데, 이 송장에서는 냄새가 전혀 나


지 않는다는 거 아니갓소.”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으니까네. 그렇지 않소?”


“혈액순액이 안되면, 혈액에는 썩을 물질이 많아서 썩는 거시래.”


“그래도 아직은 살아있는 것 같아래라?”


“옛말에도 맑은 영혼이 머물다 가는 시체는 썩지 않고 그대로 굳는다잖소?”


“그런 게 있갓소?”


“왜? 중국 구화산에서 등신불이 된 김교각 스님도 그렇고. 여기 눈으로 확인하고도 모르갓소.”


“아, 천신이 좋아 하갓소. 품질이 좋다하면서래. 헤헤. 근데래 원장동무, 이번에도 있을래까?”


“봐야 제, 천신이 그러는데래, 남쪽 아드리 많이 찾는다는 군만, … 날래 하자구래.”


“원장동무는 이 노마가 무얼 하다가 뒈진 것 같습네까?”


“내래 알가시까. 군의관 동무 말에는 남쪼기 아가 아니겠는가? 하드래는데? … ”


“남쪽 아? 남쪽 아가 어드러케 이쪽으로 넘어와 죽는단 마립네까?”


“내래 어드러케 알까씀네. 우리는 물렁뼈만 넘기고 딸라만 받으면 되는 기래요. 히히, 아니 그럿쏘?”


“허기야, … 근데, 남쪼기 아드른 무릎 물렁뼈를 어디에 씀네?”


“김동무, 그쪽 아드른 축구를 지병 나게 좋아한다잖소. 그래서래 이노마나 기노마나 다 축구를 하드랬잖소. 기래 저래 무릎


이 많이 상한다 하오. 남쪼기 아드른 상한 지 무릎 물렁뼈에 시체의 물렁뼈로 갈아 끼운다잖소. 어서래, 시체에 각 뜰 자리를


푸른 유필으로 그리시래. 내가 쨀테니까래. 날래 하기요.”


‘아- 시체?’


시체는 나였다.


이들은 나를 화장하지 전에, 나를 째서 무릎의 물렁뼈를 띠어내어 팔겠다는 것인데? … 내가 죽어 있었단 말인가? 어디서?


어떻게? … 그리고 여긴 어딘가?


지금 내 몸에서는 감각이 돌고 있다. 김동무라는 자가 유성펜 같은 것으로 내 가슴과 팔에 선을 긋고 다리 쪽으로 옮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피부에 무엇이 닿는 느낌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나의 오른 쪽 무릎 슬개골 주위를 동그랗게 그리고 있을 때였다. 감각이 내 몸속으로 물테처럼 펴지고 있었다.


“원장동무래, 이 노마 물건은 참 실한데요. 히히.”


“김동무래, 그것도 잘라 버리자래.”


“원장동무래, 질투하시는 기래요. 히히. 어디래 쓰시랩니까?”


“뒈진 놈의 물건을 어디다 쓰겠소. 쪼그라든 기래 저드래만한데, 발기되면 어드러카소. 날래 각 뜰 자릴 그리라우.”


“어-! 원,…원, 원장동무래-! 송장두 발기하는가래?”


“어? 이 노마래, 물건이 우뚝하니 돋았네. 어, … 심장도 뛰네? 어드러케 된 거시래? … 엇, 이 기래 …?”


내가 눈을 뜨자. 육십 정도 먹은 원장이라는 자의 눈과 딱 마주쳤다. 원장이 뒤로 자빠지며 내가 누어있는 알루미늄 침대를


발로 밀쳤다. 그 바람에 침대다리에 달린 바퀴 장금장치가 풀리면서 침대는 한쪽 벽에 가서 부딪쳤다. 그리고 내 몸은 침대


에서 세멘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전라의 몸이었다.


“엇, 송장이 살아났다!”


나는 누어있었던 시체였다. 내가 왜 시체가 되어 나체로 있는가?


“김동무래, 어서 저 동무 옷 좀 갖고 오래, 영 볼성 사납구만.”


“와야, 얼마나 보기 좋소? 히히, 커드막한 게. 히히.”


“야- 이 여성동무래. 석상의 코까지 구해다가 갈아먹더니 남자만 보면 완전히 실성하는 기만 기래. 또 한번 사상검토 바드라키래?”


“예- 알갑서래.”


김동무가 가지고 온 옷은 검은 고어텍스 재질의 바지와 군청색 재킷, 그리고 짙은 회색 셔츠였다. 등산복이었다. 검은 회색


등산화는 발에 잘 맞았다.


“고맙소. 이 옷과 이 신말, … 내가 입고 있었던 것이요?”


“얼레래? 이 동무 남쪼기 말을 쓰네 기래.”


“남에서 왔소?”


“모르겠소. 난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소. 이름도 모르겠구?”


“시체동무는 잠시 동안은 그럴 기군만, 뇌 활동이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말이외다. 얼마간은 안정을 취해야 하는 데래, 죽었


다가 살아나서래. … 어디 이상한데 없소. 머리가 아프다던가?”


“아? 귀에서, … 아니 머릿속에서 매미소리가 나요?”


“그것은 어떤 충격으로 뇌 청각신경에 장애가 일어나서 그런 기요.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면 없어지는 수도 있소만, … 회복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기래.”


“제가 얼마동안 잠들어 있었소?”


“잠든 게 아니라. 죽어 있드래소. 경비대 아드리, 동무를 이곳에 놓고 간지가 사흘이 넘어써래. 동무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는 정확히 모르오. 기니까, 내가 아는 것은 동무가 이곳에 들어온 지, 사흘이 넘었다는 거래.”


그는 자기가 군의관 생활 25년에, 화장원 생활 10년을 했는데, 이렇게 송장이 되살아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라 했다.


‘내가 죽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그렇다면 내 몸에 피는 돌기 시작했는데, 아직 정신까지는 온전히 돌아온 것이 아니구


나.’했다.


“동무는 완전히 죽은 사람이드래서, 숨도 멎고 심장도 머졌드랬지. 그리고 병원장이 시체를 화장해도 좋다는 허락이 3일이


나 지나서야 떨어졌으니까네 그렇지. 그렇지 않았으면 크날 번 했기만 기래.”


김동무라는 자는 조선무처럼 퉁퉁하고 장신인 데, 30대 중반쯤 되는 여성이었다. 그녀가 파일 철을 뒤적이더니, A5용지 한


장을 빼어 내게 주었다.


“보시래요.”


사망진단증이었다. 작성자란에는 강원도 평강 봉래 요양병원 원장 대좌 김수봉. 이름 옆에는 탁구공만한 붉은색 둥근 스탬


프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둥근 도장 원안 가로 칸에는 서명 날짜가 있었다.


죽은 자 이름란에는 미상, 나이는 40~45세로 추정, 죽은 날은 2011년 10월 25일. 특이 작성란에는 공민증 없음. 신원미상. 발


견 장소는 평강 오리산 남쪽 역곡천 상류에서 시신으로 발견, 등이었다.


“그럼, 오늘이 2011년 10월 29일이요.”


“그렇소.”


“이 기록이 내가 죽어서 이곳으로 온 날짜요?”


“이- 햐. 이 동무래 머리 좋구만, 척하니 날짜를 계산하는 기래. 기래도, 죽은 날짜는 모르지래. 이 기록은 이곳으로 들어올 때


래, 그렇게 기제 되어쓰니까네, 나도 시제 보관증에 그러케래 게재한 것이래. 내래 이곳 봉래 요양병원 화장원 원장 서병수요.”


봉래병원은 평강군 봉래호수 남쪽 댐 옆에 평평한 언덕에 있었다. 봉래병원은 인민군 5군단 내의 요양병원이었다. 이곳에


병원과 요양소, 그리고 인민군이 죽으면 화장하는 화장소가 같이 붙어 있는 곳이었다.


“동무는 5군단 방위지역 내에서 시체로 발견 되어써래. 그래서래, 화장시키라는 지시가 있어드래써. 수색경비대 동무들이


실어 왔으니까네. 신원을 알려문 수색경비대 동지를 찾아서 물어보시래. 혹시 그들은 알런 지도 모르니까네?”


“그들이 언제 오는데요?”


“시체가 또 생기면 오지 안 케쏘? 요즘이래는 자주 죽은 자가 발생하니까네. 곧 올끼요.”


답답했다. 무슨 궁리를 할 수가 없다. 과거가 없어진 것이 이렇게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인가? 내가 돌아갈 둥지가 없다


는 것은 지금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또 무엇을 더 생각할 수도 없었다. 암벽에 맞닿아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느낌이었


다. 그저 막막했다. 태어난 둥지에 대한 기억조차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로서는 나의 기억을 복원할 수 있는 재생처가 어


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살아난 것이 이렇게 답답할 수가 있을까?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하는 형벌. 이것도 신들이 모여 논의한 결과인가?


희망이 없다는 것조차 생각할 수 없게 하는 형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의 바위를 안고 지옥의 산정을 오르는


시시포스. 그러나 희망이 없어 보인 형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승에서 과거를 잊게 한 형벌인 것 같았다.


시시포스는 3500년이 지나 후에, 신이 내린 ‘영원하리라.’했던 형벌로부터 구원받는다. 알베르 카뮈에 의해서다. 알베르 카


뮈의 소설 ‘시시포스 신화’에서 시시포스에게 신을 부정하는 방법을 알려주어서 이지만, 난 나를 부정할 수 있는 과거조차


없었다.


노인성 치매는 그래도 가장 근래의 과거부터 지워져 본성에 붙어있는 어머니의 품이라든가 가족들, 자식들의 기억은 맨 마


지막에 지워진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나를 낳아주신 부모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할 수가 없다. 부모를 모른다는 것은 나의


기억을 복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곳이 강원도 평강이라면 휴전선 북쪽 땅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나의 신분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남쪽 사람인가? 그러나 나는 남쪽에 대한 기억이 전혀 생각나질 않았다.


희망 없는 저주가 영원하리라 생각했던 시시포스에게 알베르 카뮈는 3500년 전의 형벌로부터 행방시켜 주었다. 알베르 카


뮈는 소설에서 신으로부터 자유를 얻어내는 방법을 제시했다. 시시포스처럼 절대적인 신을 부정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나


는 운명을 부정하는 알베르 카뮈의 처방전도 취할 수가 없다. 나는 시시포스처럼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과거조차 없는 사람이


었다.


인간에게서 자신이 살아온 과거의 기억이 지워졌다는 것은, 저 하늘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내린 최대의 형벌인 것만 같았다.


반성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냉혹한 형벌이었다.


아-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


여닫이문을 발길로 박찼다. 문이 열리자. 내가 누어있었던 곳은 지하실이었다. 시멘트 계단을 뛰어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캄


캄한 밤이었다. 지상의 바깥도 내 머릿속 같았다. 방향도 알 수 없었지만 어디로 가야할 지 목표도 없었다. 그리고 밖은 아주


차가웠다. 어두운 얼음 속이었다.


나는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다시 지하실로 들어가기도 싫었다. 나라는 존재를 확인시켜 주어야할 좌표인 과거의 극점이


사라진 것이다. 과거의 극점이 사라졌다면 분명 미래의 극점도 사라진 것이다. 과거의 극점이 없기에 내가 가야할 미래의 지


침은 방향을 잃고 말았다. 내 몸속 인생의 좌표의 극침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이다. 현시점에서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가


리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좌표라는 말이 계속 떠오는가?


*


연어는 수년 동안 북극해의 얼음 밑 광활하고 차고 어두운 바다 속에서 생활한다. 그리고 다시 자신이 태어났던 숲속의 개울


로 돌아와 산란하고 자신의 몸을 묻는다.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둥지로 다시 회귀할 수 있는 것은 몸속에 입력된 좌표 때문


이다.


연어가 5-6년이 되면 몸속의 자명종이 울려 본능을 깨우고 태양과 달과 별이 주는 빛과 자성의 에너지로 몸속 나침판을 돌


린다. 연어는 그렇게 몸속에 각인된 좌표 읽는 것이다. 별들의 자성과 지구의 자성으로 거리를 계산하고 측정하여 자신의 태


어난 둥지로 방향타를 잡는다. 기문둔갑의 생문이라는 갑문을 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떠한 난관이 닥쳐도 수천


킬로의 여정을 소화해 낸다. 그러나 나는 지금 과거의 극점을 잃고 미래의 좌표를 분실한 상태였다. 고향이라는 둥지의 어머


니 품속 같은 향내가 지워진 것이다. 머리에 입력된 지식이라든가, 그 지식을 활용하는 방법이라든가, 몸으로 익힌 에너지를


사용하는 동력의 기능은 잃지 않은 것 같았다. 아- 그렇다. 나는 이제 연어처럼 내가 돌아가야 할 과거의 극점을 찾아 나의 인


생좌표를 찾아야 한다. 내 몸에서 분실된 ‘나’라는 존재의 기록. 가족이나 내가 아는 사람이 기억에서 통재로 사라졌다. 그 동


안 살아온 나의 인생좌표가 없어진 것이다. 나의 과거가 송두리째는 분실된 것은 앞으로의 미래를 건설할 터전이 없어졌다


는 거와 같다. 과거가 사라짐으로써 나를 지탱해주던 사람들, 나로 인해 지탱되었던 사람들이 사라진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으로서는 치명적은 상태였다. 나는 나의 과거의 뿌리를 찾아 영혼을 보수해야 한다. 과거가 없다는 것


은 나의 본질을 이루고 있었던 뿌리가 사라진 것이다. 앞으로의 나라는 존재도 완성될 수가 없다. 과거의 기억이 없다는 것


은 나를 인식시켰던 내가 사라진 것이다. 과거의 자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나를 인식시켰던 극침도 지워졌다.


현재라는 중심축이 있다 해도 과거가 없어졌기에 과거와 대칭되는 미래의 극침이 중력을 잃고 계속 헛돌고 있는 것이다. 앞


으로의 삶도 무의미할 것이다.


지금 내가 돌아갈 갈 수 있는 곳은 나를 깨어나게 했던 시체 보관실이었다. 나는 내가 깨어난 지하실로 돌아왔다.


“원장동무, 저 시체동무가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우리 화장원에서 뼛가루를 빻고 뿌리는 일을 시킵시다래?”


“하기래. 저 동무래, 지금은 우리 공화국에서도 없고, 저승사자 명단에도 없으니까네. … 어히, 이보라우. 시체동무는 당분간


김동무의 지시를 따르시오.”


‘시체동무?’


나는 이름도 알 수 없었다. 정말 움직이는 시체였다. 나는 시체보관실에서 내가 죽어있었던 침대를 내 둥지로 삼았다. 그리


고 김동무가 가져다주는 강냉이와 감자로 배를 채우며 수통에 떠온 물로 목을 축였다. 그런데 그렇게 이틀째 되는 저녁 무렵


이었다. 지하실 위에서 급하게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났다.


몇 명이 시체보관소의 지하계단으로 급하게 내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덜크덕’하며 여닫이 시체보관실 문이 열렸다. 유리창


이 끼어있는 창문틀이 공기 저항에 치받치며 덜그럭거렸다.


“저- 자이구만 그래?”


“그러씁네다.”


“다시 살아났다구?”


“아, 예. 예.”


급하게 들어오는 짙은 카키색 군복을 입은 자는 어깨 견장에 왕별 2개를 단 중장이었다. 그가 봉래화장원 원장과 지하실 시


체보관소로 들어와 내게로 다가오며 하는 말이었다. 그 뒤로는 역시 작은 별 4개를 단 대좌, 그리고 흰 가운을 걸치고 청진기


를 윗주머니에 꼽은 의사와 김동무가 서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계급장을 보는 순간, 그들의 계급과 남한의 군 계급이 동시


에 떠올랐다. 북한의 왕별 2알은 중장으로 남한의 별 2개인 사단장 급이요, 중간 크기의 별, 4알은 남한의 대령으로 연대장


급이다. 나도 군인인가?


“상태가 좀 어드랜가?”


“아직, 기억이 행불인 것 같습네다.”


“기억이 행불 돼? 그래, 시체동무는 지금, 기억이 좀 돌아왔소?”


왕별 2알이 나에게 묻고 있었다.


“모르겠소. 내가 누구지 좀 알려주시오?”


“어? 말투가 남반부 아드이래 말툰데? … 동무들 아니 그렇소?”


“사단장 동지. 며칠 더 두고 봐야 될 것 같습네다. 심장까지 멎은 채로 있다가니 깨어났으니까, … 제 정신이 다 돌아오려면


며칠은 더 걸리지 않겠습니까? 사단장 동지.”


이렇게 말한 것은 흰 가운을 걸친 군의관 같은 자였다.


“그럼. 김대좌 동무와 서소좌 동무. 두 동지들이 이 동무래 정신이 돌아오면 즉시 내게 연락하시래. 그리고 기억이 돌아오게


끔 김원장은 모든 협조를 아끼지 마시라요.”


“알가씁니다. 사단장 동지.”


“부탁하오. 군단장 동지의 특별 지시오. 그리고 일체 비밀로 하라 하셨소.”


그날로 나는 시체보관소 옆 동, 노병들의 정신병 요양소으로 보내졌다. 이곳은 6.25동란 전 무렵부터 있었던 야전병원이라


했다. 6.25때의 중증인 부상자나 정신질환자를 치료하는 군관 요양소이었다.


군관 정신병동은 5층짜리 건물인데, 나는 5층, 한쪽 끝 방 51호실에 입실되었다. 아마 도망치기 어려운 위치라 그런 것인지,


환자들의 접촉을 막으려는 방법인지 모르겠지만, 화장실 안에 세면기가 붙어있는 1인실, 6평 남직한 방이었다. 그런데 낮에


보니 낯익은 건물에 병동 구조도 낯설지가 안했다.


요양소 건물이나 병원 건물이나 대체로 병동과 병실이 다 비슷비슷하다. 그래서 더 신경 쓰지 않고 51호실에서 창밖을 내봤


다. 병실 창밖의 앞은 동남쪽이었다. 눈이 내린 것 같았다. 저녁노을 빛이 짜릿짜릿하게 흰 눈에 반사되어 내 눈에 들어온 세


상은 온통 붉은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소나무와 전나무를 제외하고 나무들은 나처럼 과거의 잎인 낙엽을 다 떨구고 있었다. 산속 속살은 침실의 휘장이 걷힌 것처


럼 환히 들어다 보였다. 그런데 한 5km쯤 떨어진 앞산을 보는 순간이었다. 내 머릿속에서는 동시에 숫자가 떠올랐다.


‘8-04-24-5735, 27-14-24-5706’


내 머릿속에 떠오른 숫자는 과연 무얼까?


“똑똑, 똑똑,”


“들어오시오.”


“제 51호 담당자 과장 오정희 대위입네다.”


서른 초반쯤이라 생각되는 아주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단단하게 마른 균형이 잡힌 위관 여성장교였다.


“필요한 것이 있습네까? 말씀해 주시래요. 51호실 동무?”


이런 말투가 여성답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거부감도 들지 안했다. 내가 남쪽에 살았었다면 이런 말투가 낯설게 느껴져


야 당연한 것이 아닌가?


“이곳 지도 좀 가져다주시겠소?”


“51호실 동무. 기억이 돌아왔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곳 지형을 보니, 지도를 보면 무언가가 기억이 나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요?”


“아-? 그렇지요. 우선 51호실 동무. 혈압부터 재고 채혈도 좀 하겠소. 그리고 난 다음에, … 지도는 군사기밀 사항이기에 김원


장 동지 허락을 받으면 구해다 드리겠소?”


봉래 요양병원 원장는 김수봉였다. 김원장이 봉래요양소 소장을 겸했다. 계급은 대좌로 남한의 대령급이었다. 서병수 소장


은 봉래요양병원 화장소 소장이었으며 소좌로 남한의 소령급이다. 이 봉래 요양병원은 요양소, 병원, 화장소가 통합된 북한


5군단 내에 있는 야전군 종합병원이었다. 특히 북한 강원도에서는 제일 큰 병원이라 했다.


“백이십에 팔십. 혈압은 정상이오. 저를 본 기억이 없소?”


흰 대리석 조각 같은 얼굴을 한 오정희는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회색 요양소 의복으로 갈아입은 나의 왼팔 소매를 걷어 올


리고 찰싹찰싹 내 팔 오금을 때렸다. 금세 꿈틀거리는 지렁이처럼 푸른 정맥이 툭 불거졌다. 그녀는 자신이 찾아낸 내 정맥


혈관 속으로 30cc짜리 플라스틱 통이 달린 굵은 주사바늘을 삽입했다. 그리고 계속 주사기통을 가라 끼우면서 5통이나 채혈


했다.


그녀의 얼굴이 내 가슴으로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그녀의 몸에서 빨갛게 달구어진 열기와 여인의 향내가 내 몸속으로 저며


들어왔다. 감각은 완전히 다 살아난 것 같았다.


“과장동무. 죽었던 자의 몸에서 피를 그렇게 많이 뽑으면 어찌하오?”


“누가 죽었던 자래요? 동무래요?”


“내가 어떤 자인지 모르시오?”


“내래 모르지요. 과거의 정신이 안 돌아온다는 환자라는 것 밖에는?”


“그래요?”


“채혈한 결과는 일주일 후에 나올 거래요. 나는 내일 오후에 또 들리겠습니다. 그때 환자동무들 재활치료 하는데 같이 가봅


시다. 그럼 쉬시래요.”


*


다음날.


요양소의 점심으로 강냉이 죽과 백김치, 무말랭이 조림, 콩장, 등이 반찬 메뉴로 나왔다. 맛있고 없고 보다는 먹고 나도 배가


고팠다. 그러나 더 먹을 것이 없었다. 빈 식기 쟁반을 문 밖에 놔두고 51호실 안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했다.


세면기 앞에 달린 겨울을 보며, ‘과연 저 얼굴이 난가?’ 했다. 그리고 습관은 기억이 사라졌어도 이곳저곳의 몸속을 자율신경


이 자꾸 건드렸다. 그리고 매미가 맴맴거리는 머릿속에서는 ‘지금은 12시 40분이다.’했다. 그리고 무엇을 먹으면 자꾸 시간


이 떠올랐다.


“똑, 똑, 똑,”


“들어오시오.”


“시체동무. 식사 마쳤소?”


세 번 노크를 하고 들어온 사람은 김동무였다.


“찰크닥.”


김동무는 51호실로 들어오면서 문을 잠가버렸다.


“아니, 김동무 아니오. 어떻게 오셨소?”


“어떻게 오기는요? 내래 시체동무 나체 한번 더 보고 싶어서 왔소.”


“그날 실컷 보았으면 됐지. 또 보시려고요?”


“히히, 어떻소. 이제는 둘뿐인 데래? 열두 시부터 한 시까지래, 점심시간이래. 아무도 병실을 안 찾지래. 어서 벗으시래요. 안


그러면 내래 벗기 갔소.”


“아- 동무 왜, 이러시오.”


“동무! 왜 이러기는, … 히히,”


“엇, 김동무!”


그녀는 육중한 몸으로 나를 밀쳤다.


“히히, 이 짓 싫어는 남성이래 못 봐시요. 자- 보시래요. 동무 물건이 이러케니 우뚝 솟아 있잖소? 그리고 또 지옥에도 갔다


왔드래잖소.”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마음이 늘 몸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몸이 마음을 지배할 때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이 몸을


지배한 것도 아니요. 몸도 마음을 굴복시킨 것도 아니었다.


몸과 마음이 합일체가 안 되었다. 섹스가 싫은 것이 아니라 이 여자가 싫었다.


“동무는 행복한 줄 아시오. 죽었다가 살아나서래, 곧장 이런 행운을 누린다는 생각이나 하시래요.”


“그건 김동무 생각이잖소. … 어!”


김동무가 갑자기 달려들어 양팔로 내 허리를 꼭 끼어 잡고 나를 침대로 쓰러트리려 했다. 나는 그녀의 왼쪽 관자놀이를 오른


손의 손가락을 모아 세게 쳤다. 그녀는 내 몸에서 아래로 미끄러지며 힘없이 쓰러졌다. 그리고 내 머리가 띵했다.


*


‘아-’


“홍모서리 선수는 난징 육합문 출신으로 조풍림 선수. 청모서리 선수는 조선인민군 15호실 주체격술연구소의 리홍기 선수.”


사각의 링이 설치된 곳은 평양시 조선인민군 4.25호실 국방체육관이었다. 일격필살의 특기가 있다는 리홍기 선수는 북한의


전국 대학생 격술대회에서 우승하고 인민군 15호 주체격술연구소로 들어와 주체격술 사범이 된 선수였다.


그는 나를 링 중앙에 놓고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야, 야, 사각으로, 야- 사각으로 몰아!”


상대 세컨드 코치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내 세컨드 코치가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다만 리홍기가 ‘휘-이’하


며 허공으로 떠서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내 머리 정수리를 팔꿈치로 가격하려는 것이다. 나는 양손을 교차해 태극문양으


로 원을 그으며 옆으로 돌았다. 그러다가 잽싸게 리홍기의 등 뒤로 섰다. 리홍기도 잽싸게 돌아서며 오른 발등으로 내 허벅


지를 공격했다. 나는 그가 공격해 오는 그의 오른 발 장딴지를 그보다 더 빠른 속도 걷어찼다.


나는 방어를 하기 위해 공격을 한 것이다. 리홍기는 나의 방어술이 의외였는지 뒤로 물러났다. 세 걸음 뒷걸음질 친 후에 바


로 뛰어 들어오며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리홍기는 다시 팔꿈치로 내 머리 정수리를, 무릎으로는 얼굴 정면을 타격하려는 공


격을 취했다. 만일의 경우 이 타격이 실패하면 내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떨어지면서 무릎으로 얼굴을 가격할 것이다.


나는 오른 손으로 허공에서 내려치는 리홍기의 팔오금을 낚아채며 몸을 오른쪽으로 회전시켜 뒤틀었다. 그리고 왼손가락을


모아서 허공에서 떨어지는 리홍기의 관자놀이를 쳤다.


이 세 번의 연속적인 사마귀 공격법은 파워가 실린 상대의 힘을 앞으로 끌어당겨 빼내며 가격하는 수법이다. 팔보 당랑권의


정통적인 타격술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매일 이 동작을 익혀왔다. 나의 왼손가락 검지, 중지, 무명지의 끝이 상대의


관자놀이를 적중되자. 리홍기는 더 일어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


오른 발을 까치발로 딛고 앞으로 들어가며 오른 손으로는 리홍기의 팔오금을 낚아챈 것이 주요했다. 그리고 내 몸을 뒤로 회


전시켜 돌리자, 리홍기는 허공에 떠 있는 상태였기에 중심을 잃고 말았다. 그런 그를 돌아들어가는 회전의 힘으로 왼손가락


끝을 모아 휘두른 것이었다.


한 순간에 연속적인 세 동작이 다 적중했다. 그렇게 리홍기가 쓰러진 것이다. 오랜 수련의 결과였는지, 운이 좋았는지는 모


르겠다.


*


이렇게 잠깐 스친 기억의 퍼즐 한 조각.


깊은 무의식 속에 내장 되었던 기억이 기포 방울처럼 의식세계로 떠올라 터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의 파편은 텅 빈 의식


세계의 공허한 공간을 떠돌아 다녔다.


‘내가 남경에서 왔다? 그럼 중국 사람인가? 그러나 중국말은 몇 마디 정도 밖에 떠오르질 않았다. 그리고 또 내가 무술시합이


나 격투기를 했단 말인가?’ 무어가 무언지 모르겠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김동무를 안아서 침대에 눕혔다.


“똑똑, 똑똑,”


이번에는 두 번씩 두 번의 노크소리가 났다.


나는 잠긴 문 도어를 열었다. 오정희였다.


“아니 문을 잠그게, 점심 먹고 잤소. 어? 침대에 저기 누구요?”


“김동무요.”


“김동무? 시체보관소 김중사? 김중사와 무얼 하드래쏘?”


“무얼 하긴요. 그녀에게 물어보시오?”


“김중사! 발딱이래 일어나지 못하게쏘-!”


오정희가 소리를 질러도 김중사가 일어나지 않자, 오정희는 김중사의 귀뺨을 후려쳤다.


“아 이- 머리- 야.”


시체실 김동무는 김중사였다.


오정희가 뺨을 후려치자 그때서야 김중사는 머리가 아프다며, 왼쪽 관자노리를 손바닥으로 짓누르면서 일어났다.


“동무는 아침 조례시간에도 참석 않고 지금 예서 뭘 하는 거요?”


“머리에 아파서래, …”


“머리가 아프면 시체실에서 쳐 자든가, 약을 쳐드셔야지, 지금 예서 뭐하는 기래.”


“과장동무, 죄송합네다.”


“오늘 저녁, 보위부실로 오라 야!”


“알가씁니다. 과장동무.”


김중사가 내 병실에서 나가자. 오정희는 침대에 앉으며, 지도를 내 놓았다.


“평강군 군사지도야요. 대좌동무 몰래 갔고 왔소.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아니 되오.”


오정희가 가지고 온 군사지도는 능선과 계곡이 등고선으로 고도가 표시가 되어있다. 그래서 등고선의 모양을 보고 실제의


산이나 계곡의 지형에 맞추어서 도표의 좌표를 읽어보고 싶었다.


“저쪽이 북쪽이오?”


도표의 좌표를 읽을 때는 지도를 북쪽 지형의 방향과 나란히 놓고 본다. 오정희는 하얗고 마른 긴 손가락을 들어 북쪽을 가


리켜주었다.


오정희가 가져온 지도는 군사지도다. 모든 지형을 좌표로 읽을 수 있게 세세한 부분까지 잘 나와 있었다.


군대의 지휘관은 지도를 볼 줄 모르면 전쟁을 할 수 없을 정도다. 특히 현대전은 미사일 공격이나 장거리 포사격으로 적진을


먼저 초토화시켜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병기를 가지고 있다 해도 현대전에서는 선제공격해서 파괴시켜야할


포인트를 모르면 결과는 분명하다. 보병들의 야전싸움도 그렇고 시가전도 마찬가지다.


현대전에서는 군사위성이 전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어느 곳을 어떠한 방법으로 선제공격을 해야 할지를 정확히 판단


할 수 있는 좌표를 딸 수 있기 때문이다.


빠르게 이동하는 물체도 좌표로 읽어낼 수 있다. 움직이는 방향과 속도를 계산하면 이동하는 좌표가 정확히 계산된다. 또는


센서의 기기에 좌표와 물체감지 도표를 입력시키는 방법도 있다. 그래서 군사지도는 위도와 경도의 좌표를 딸 수 있게 미세


한 부분까지 그려져 있다. 군사지도는 군사기밀문서다.


군사 첩보원들은 적국에 들어가 새로 신설된 주요 군사시설과 국가공공시설의 좌표를 따오는 것이 주 업무였다. 그런데, 내


가 이 평강 봉래요양소의 동남쪽에 있는 산을 보고 좌표가 떠오르는 것이 이상했다. 이 산은 평강의 남산으로 불리는 오리산


이었다. 고도가 453m로 용암이 분출하여 산이 된 용암산이다. 그리고 오리산 동쪽으로는 해발 608고지의 왕재봉이 있다.


왕재봉과 오리산 사이로 3번국도과 경원선 철도가 나란히 지나간다.


오리산 북쪽 위로는 마식령산맥이, 남쪽으로는 광주산맥이 시작되는 곳이다. 이 양대 산맥을 끼고 동에서 서남으로 길게 누


운 침식된 종곡형 평야에 평강시가 있다. 이 종곡의 이름이 추가령 열곡대다.


길게 남서진하는 지구대 사이의 넓은 평원에 있는 철의 삼각지대는 북쪽으로 평강, 남쪽으로 철원, 동쪽으로 김화를 잇는 삼


각형태의 분지형 평원을 말한다. 그리고 한탄강은 평강 북쪽 하북리 호수에서 발원하여 마식령 계곡을 따라 흘러내려 철원


아래서 직탕폭포, 삼부연폭포, 제인폭포를 거쳐 전곡읍을 지나 북에서 내려오는 임진강과 합류한다. 그리고 평강 봉래호에


서 발원하는 역곡천은 김화, 평강, 철원의 지류를 끌고 철원군의 휴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연천군


백산리까지 북상해 임진강과 합류한다. 그리고 다시 남으로 물머리를 튼다.


역곡천의 큰 지류는 임진강과 한탄강을 어우르며 합류하는 평균 25m의 직벽 아래 화강암 계곡으로 흐르는 72km 곡류의 물


줄기다. 그리고 역곡천의 작은 지류는 봉래호 댐 아래서 남쪽 협곡을 따라 가곡리 서남쪽을 지나, 남쪽으로 북방한계선으로


들어온다. 이 역곡천의 작은 지류는 비무장 지대에서 한 줄기는 서쪽으로 진행해 임진강과 만나고, 하나는 남방한계선을 나


와 남서로 흐르다가 연천에서 한탄강과 합류한다. 역곡천은 6.25 때, 철의 삼각지대로 놓고 남북 간의 엄청난 희생을 치른 땅


으로 흘러가는 핏강이다. 그런데 왜, 내가 이곳에서 죽어야 했는가?


“동무. 무엇이 생각나오?”


“왜? 내가 이곳이 있는지, 떠오르지가 않소? 그런데, 저 앞산이 오리산 맞소?”


“그렇소. 무언가가 생각나오?”


“8-04-24-5735, 28-34-24-5706이라는 숫자가 떠올라 이상했었소. 그래서 내 머릿속에서 떠오른 숫자가 오리산 지형의 좌


표와 얼추 비슷할 거라 생각하고 지도를 좀 갔다 달라고 한 것인데,… 다행히 군사지도라 내 머릿속에 떠오를 좌표를 확인할


수 있었소. 머릿속에 떠오른 숫자는 오리산 남쪽 능선 어느 계곡일 것이요.”


“머릿속에 떠오른 숫자가 오리산 근처 좌표라는 것을 어케 알았소?”


“8이라면 북위 38도요. 04는 북위 38도에서 북쪽으로 십분의 사를 더 올라왔다는 것이고. 28은 세로로 가르는 경도 128인


데, 34라는 숫자는 동쪽으로 0.34도 더 동진했다는 것이 아니겠소. 그리고 평지 같으면 초 단위 밑으로 그렇게 세분하지 않


는데, 초 단위 밑으로 숫자가 많다는 것은 계곡이거나 산등성이 비탈이라는 뜻이 아니요?”


“오리산이라 하면, 최전방 철책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인데래?”


“철책? 북방한계선 말인가요?”


“그러습네다. 그럼, 51호실 동무는 남반부에서 월북한 장교인가래?”


“아니, 잘 모르겠소. 내 모습을 보니, 나이가 꾀 들어 보이는데, 아직까지 군대에서 몸을 담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 안 되오.”


“내가 보기에는 한,… 사십 초반 정도로 보이는데래?”


“그럼 여기서는 사십 초반까지도 군복무를 한단 말이요?”


“군관이나 부사관들은 다 그런 나이지래.”


“아. 그러나 난 모르겠시다.”


“그럼, 저와 함께 재활병동으로 가 봅시다.”


오정희와 함께 간 재활병동은 정신병동이었다. 빙-둘러 놓인 의자에 환자들은 앉아 있었다. 이야기하는 곳이 같았다.


“자- 동무들. 자- 여기, 여기. … , 오늘은 여기 온, 51호실 동무를 소개하겠습네다. 이 동무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래요. 그


래서 옛날 일들이 전부 지워져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동무인데, 동무들이 도아 주시래요.”


정신병 환자라고 하는 자들은 전부 우울증에 걸린 환자들 같았다. 실실 웃는 자들이 없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들은 정신적


스트레스의 보상심리 때문에 보통사람보다 잘 웃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웃음은 인간 본능에서 유발되는 두려움과의 타협


이다. 그런데, 이 환자들은 공포에 질려 있지만, 그 두려움과 타협하려는 본능적 행동까지도 상실한 것 같았다. 가해를 당한


것 같다.


한 20여명 정도의 환자들이 빙-둘러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 뒤에는 서너 명씩을 건너서 흰 가운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사나이들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자-, 천동무가 먼저 말해 보실래요?”


오정희가 내 우측 옆으로 앉아 있는 50대 후반 정도의 좀 꾸부정해 보이고 목이 작달막한 자를 지목했다. 그러자 그자는 곧


바로 일어나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철원에 살아 드랬습니다. 우리 식구는 에비와 어미니, 나, 동생이 있었는데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던 수령님


의 땅이 미제와 남쪼기 아드리래 점령해, 나와 에비는 먼저 평강으로 오고 동생과 어미니는 철원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습니


다. 우리는 빼앗긴 철원 땅을 빨리 빨리 빨리 빨리,”


천동무라는 자는 자기가 외우던 대목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지, 빨리 빨리에서 중단 되었다. 그러자 내 뒤에 서있던 흰 가


운을 입은 사나이가 앞으로 나와 천동무라는 자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자 다시 말을 이었다.


“미제 앞잡이 놈드리로부터 다시 뺏아 와야겠습니다.”


“자 – 그럼, 이번에는 백칠호 동무.”


“나는 철원에 살아 드랬습니다. 우리 식구는 에비와 어미니, 나, 동상이 있었는데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았던 수령


님의 땅에 미제와 남쪼기, … 남쪼기, 남쪼기, 남쪼기,”


또 다시 내 앞쪽에서 일어난 요양소 요원이 천동무처럼 암송하던 107호 동무의 어깨를 뒤에서 손바닥으로 딱 치면서 잡았


다. 그도 역시 자동이었다. 암송했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다.


“남쪼기 아드리래 점령해, 나와 아부지는 먼저 평강으로 오고 동생과 어무니는 철원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


리는 빼앗긴 철원 땅을 빨리 미제 앞잡이 놈드리로부터 다시 빼앗아 와야겠습니다.”


이들이 암송한 이야기는 평강 노동당 위원장 아들이 쓴 ‘남반부 빨치산과 나’라는 강원도 노동당지에 실린 이야기였다. 그


책은 51호실 비치 품목 중에 하나였는데, 식사를 하면서 잠깐 책머리의 목차와 지금 암송한 내용을 한 두어 장 넘겨보았다.


그러나 재미도 없고 나의 기억을 찾는 데는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보다 말았다.


그런데 봉래요양소에서는 ‘빨치산과 나’라는 김평주의 수기를 가지고 봉래요양소 정신질환자들을 통제하고 질서를 유지하


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 나가서는 정신질환자의 재활교육이라는 것도 인민공화국 입맛에 맞는 이야기 하


나를 샘플로 하여 다 똑같은 정신적 유형의 틀로 찍어내는 인조인간 재활운동이나 다름없었다. 즉 과거를 상실한 정신질환


자들에게 공화국 입맛에 드는 정신적 개조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나도 내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저렇게 될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51호실 동무가 이야기해 보시래요.”


오정희가 이번에는 나를 지목했다.


“무엇을 이야기 해보라는 거요?”


오정희가 나를 ‘51호실 동무’라 부를 때, 의식의 바다에 외롭게 떠있는 내 이름 한쪽에서 울컥하며 울화가 치밀었다. 오정희


가 나를 의도적으로 이곳을 끌고 온 듯해서였다.


“생각나는 것을 전부 이야기해 보시래요.”


“나는 시체였습니다. 나는 지옥에 갔다가 염마대왕이 보기도 싫으니, 다시 니가 뒈진 지상으로 가서 세상의 때를 말끔하게


씻고 다시 오라 해서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즐겁지가 않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면 정말 즐거워야 할 텐데, 그


렇지가 않습니다. 왜냐면 살아 있을 때, 나의 잘못을 씻으려고 해도 생각나질 않습니다. 나는 나의 과거를 모르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누구의 아들이었으며, 누구의 아버지였는지. 또 누구를 사


랑했으며, 누구의 사랑을 받았는지를 알아야겠습니다. 내가 목숨을 걸고 한 일은 과연 무엇인지도 알고 싶습니다. 오늘, 조


금 전까지는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보다 더 불행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다른 사람의 과거로 자신의 행적을 바꾸려는 사람들


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자신의 과거를 다른 사람이 남긴 과거로 꾸며야 영웅이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해야 만족감을 얻


습니까? 반성을 모르는 사람은 살아서는 발전이 없고, 죽어서도 갈 곳이 없는 불행한 영혼이 될 것입니다. 자식들조차 아버


지가 아니라고 생각할 데니까요. 그런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당신들은 지금 무엇 때문에 자신의 과거를 바꾸며 살


아야 합니까? 나는 지금 이상한 나라에 온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과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의 과거를 바꾸어


살고 싶습니까? 누구를 위해서 그래야 합니까?”


“아니, 이 까나 새끼래, 말을 막하는군 기래- 이- 쌍!”


나에게 욕을 해 되며, 뒤에서 내 어깨를 잡는 놈이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내 어깨 잡은 놈의 손을 더듬어서 가운데


손가락 하나만을 잡았다. 그리고 비틀어 꺾어서 돌려버렸다.


“아- 으악!”


소스라치며, 놈은 내 앞으로 곤두박질치며 꼬꾸라졌다.


이번에는 환자들 등 뒤에 서 있던 녀석들이 서서히 내에게 몰려들었다. 그들은 어느 정도의 무술로 단련된 자들 같았다. 몸


도 건장했으면 참착하게 그리고 천천히 서둘렀다.


내 등 뒤로 다가온 자는 들고 온 몽둥이로 내 어깨를 내려치려 했다. 나는 뒤로 쓰러지며 앞으로 다가 온 놈의 턱을 오른 발등


으로 가격하면서 뒤로 다가온 놈의 앞가슴에다가 내 등을 붙였다. 그리고 바로 돌아서며 왼손의 엄지와 검지 사이의 호구 날


로 아직 몽둥이를 내치지 못한 자의 목을 가격했다. 또 한 놈은 달려오면서 옆차기 발날로 나의 목을 날려버리려 했다. 나는


놈의 옆차기를 몸을 돌려 피하며 뺏은 몽동이로 공중에 떠 있는 놈의 정강이를 내리쳤다. 그리고는 가장 멀리서 달려오던 놈


을 향해 그 몽둥이를 힘껏 내던졌다. 가까이 다가와 내 허리를 잡는 놈에게는 앞이마로 놈의 광대뼈를 들이받았다. 다섯 명


의 감시원들이 다 나동구라지자 정신질환자들이 다들 일어나 박수를 치고 낄낄거리고 뛰는 자, 나는 자, 뒹구는 자, 별에 별


짓이 난무하는 난장판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자는 ‘해방이다.’했다. 이때였다.


“이- 가나이 새끼덜! 당-짱, 멈추라- 야!”


카랑카랑한 오정희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옆에 찼던 체코슬로바키아 CZ형, 북한산 최신 백두산 자동연발 권총을 꺼내어


병동 천정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그러나 ‘핑-’하며, 내 머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귀에서는 매미소리가 다시 요란하게 소용돌이치면서 내 앞, 병동의 천


정이 빙글거리면 내려앉았다. 병동 천정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있는 것이었다.


‘아, 그 총소리.’


매미소리처럼 맴맴거리던 머릿속 소리는 총소리였다. 내가 군시절 비무장지대 노루능선에 매복했을 때였다.  **


>>>>>>> '2부: 노루능선'에서 계속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