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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문둔갑(2부: //조한풍의 장편 소설

  • 작성일 2018-09-06
  • 조회수 387

 



기문둔갑 //2부: 노루능선


*


6월 21일 19시 59분이었다.


연천군 도연골 추가령 능선 아래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모든 지상의 죄악을 태양의 불씨로 다비하려는 천상의 노을은 하루


를 절반으로 나누는 경계였다. 지금은 낮이 변하여 밤의 경계로 어두움의 지배를 받는 생명들이 이승의 문을 열고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형체가 일그러지며 사라지는 칠흑. 이 어두움 속에서는 다시 이승으로 귀환할 티켓조차 태워서 어두


움을 밝히고 싶다. 먹장 같은 구름 속에서 이승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또 다시 세차게 내 철모를 노크했다.


아직은 살아있다. 살아있는 나의 모든 신경이 살갗 밖으로 촘촘히 돋아난 솜털조각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내 귀는 잠수함의


소나처럼 숲속을 향해 음밀하게 음파를 탐지하고 두 눈으로는 381고지 북쪽 노루능선의 여광을 주시하고 있었다.


손목시계의 야광 시침과 분침이 20시와 06분을 가리켰다.


그리고 일일 명령 제 06-21은 매복좌표였다. 귀환을 보장 받지 못한 매복좌표 되로 능선 아래 개인 참호를 팠다. 그리고 판초


우의로 몸을 덮었지만, 빛살 한 자락 새어들지 않는 참호 속은 흙구덩이로 질퍽거렸다. 그래도 우린 20m 전방에 북쪽 추가


령 노루 능선을 향해 9시 방향에서 3시 방향까지 대원들을 사수할 클레이모아를 설치해 놓았다. 그리고 30m 전방에는 조명


지뢰와 발목 플라스틱 지뢰를 매설했다.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참호에서 50m 전방의 비무장지대는 우리 야간 매복조 지원을 위해 801GP의 박격포 탄두가 떨어질 탄착지점이다. 그 지점


에 150m 전방이 일명 노루능선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실상의 선상 휴전선이 능선으로 지나가는 381고지가 있다. 그 선의 위


쪽은 북쪽이요. 그 능선 아래 남쪽은 우리 지역이다. 노루능선은 남쪽 나의 참호에서 전방 200m 거리에 있다.


웅크린 노루능선은 둘칠삼 포병 차리중대의 105mm포 6문의 사정거리에 있었다. 6km를 포물선으로 날아 올 장약의 탄두는


상공 20m 지점에서 폭파된다. 하향 분사되는 파편은 산개된 적을 살상시키는 시한신관으로 포문이 방열되었을 것이다.


나는 등에 매었던 P77 FM무전기를 벗어서 판초 우의로 덮었다. 비무장 지대 우리 수색대 매복조가 모든 매복 준비를 완료했


을 때는 무전기는 국화꽃 하나로부터 국화꽃 칠둘까지 침묵 대기 상태로 22시 16분이었다.


‘탕-’


일발의 총소리가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사실은 그 총성보다 탄착점의 금속성 쇳소리가 먼저 났다. 그래서 총격은 200m 전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탄착점에서 낸


소리. 분명 내 머리 앞 20m 지점이다. 클레이모아 알루미늄 박스 어디엔가 맞았을 것이다. 그것이 적의 오발이 아니라면, 우


린 모두는 죽음을 각오해야할 것이다.


그 한발의 총성은 우리가 북쪽 아이들이 침투할 예상 루트에서 두 시간 넘게 매복한 쇠북 같은 긴장이 깼다. 그리고 북쪽이


나 남쪽이나 동서로 길게 그어진 155마일 휴전 중인 전선에 소름 돋는 악마의 비명소리가 매달릴 것이다. 밤의 모든 정령들


도 악마의 비명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바람소리 하나 미동하지 않았다. 주춤 주춤하던 빗발도 뚝 그쳤다.


AK소총의 총소리는 북쪽 12 방향. 거리는 약 200m였다. 개인 화기인 소총의 유효 절대사거리다. 북쪽 아이들은 이미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었다. 내 옆에 있던 자동화기 사수 윤상병과 부사수 이일병의 M60 총구에서 불을 뿜었다. 그 소리는 지금


도 매미처럼 나의 청신경에 매달려 울고 있다.


탕 – 메엠- 메엠--- 메멤----.


소대장 김소위와 무전병인 나는 개인 참호에 있고, M60 사수와 조수의 참호 좌우 옆은 소총수 6인이 3명씩 2조가 되어 두


참호에 매복 되어 있었다. 그리고 참호는 교통호로 서로 길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 매복조 6인의 M16 총구에서도 일제히 불


꽃이 튀었다. 소리에 놀란 것은 이때였다.


어린 때 콩을 서리해 몰래 짚단에 구어 먹다가 콩이 연달아 튀어 놀라고는 처음이다. 심장이 꿍꽝거리며 제 멋대로 튀어서


밖으로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나의 총구에서도 저승사자의 불꽃이 일자,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던 심장은 이내 가슴 아래


로 잦아들었다.


“국화꽃 하나, 여기는 국화꽃 칠둘.”


“여기는 국화꽃 하나, 국화꽃 칠둘은 송신.”


“여긴 국화꽃 칠둘, 22시 16분 적과 교전 발생. 좌표 818-1819,


2814-1617로부터 위로 200. 적으로 보이는 정체불명으로부터 일발을 총격을 받은 후, 현재 교전 중.”


“국화꽃 칠둘은 침묵서 대기하라.”


1분 후였다.


김소위가 당겼던 조명지뢰가 터지자. 분대장 신하사와 송병장도 반사적으로 조명지뢰의 뇌관 줄을 당겼다. 그래서 점화된 3


발의 조명지뢰가 대낮처럼 밝아졌다가 전부 어두움 속으로 타들어 갔다. 다시 저승의 어두움이 덮쳤다.


‘펑-’


내 머리 위 상공 100m 지점에서 조명탄이 터졌다. 801GP에서 우릴 지원하는 81mm박격포 조명탄이었다.


판초 우의 속으로 얼굴을 묻고 엄폐하면서 한쪽 눈을 감고 다른 한쪽 눈으로 적진을 살폈다. 그들도 조명탄의 불빛 아래서는


머리를 내밀고 총을 쏟지는 않았다. 하지만 북쪽 아이들이 어느 능선에 매복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 매복조와 마주한


12시 방향이다. 조명 불빛 아래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박격포 조명탄은 상공에서 땅 밑으로 떨어질 때까지 불빛을 낸다. 바


람을 타지 않는다면 그 시간은 약 2분 30초 정도다. 조명탄 발사는 하나의 조명탄이 땅으로 떨어져 빛이 사라질 때쯤 또 한


발이 허공에서 터진다. 다섯 번째의 조명탄은 바람 때문인지, 장약 때문인지, 너무 가까이, 그리고 너무 빨리 우리 매복조의


근처로 떨어졌다. 땅위에서 약 30여 초 동안 불꽃놀이를 했다.


‘아차, 이제 큰일이다.’우리 매복조가 적으로부터 노출 되었을 것이다. 저들은 우리 매복조의 위치를 좌표로 따고, 곧 박격포


탄을 퍼 부를 것이다. 우리는 위치를 이동해야 한다. 그러나 매복조의 위치는 사단장의 일일 명령에 의한 것이다. 사단 정보


과에서 적군이 남으로 침투 하려는 정보를 얻으면, 적이 침투할 예상 루트를 좌표로 딴다. 우린 그 좌표대로 매복하고 지킨


다. 매복의 이동 명령은 다시 사단에서 연대로, 연대에서 대대로 하달 받아야 한다.


“국화꽃 하나, 여기는 국화꽃 칠둘.”


“국화꽃 칠둘은 침묵서 대기하라!”


에이라- 염병할-! 목숨이 경각인 전투 중에 교신하지 말고 대기라니, 어쩌자는 건가?


‘꽝-탕, 꾸꽝-탕, 꽝꽝.’


녀석들의 박격포탄이 우리 매복조 앞, 뒤, 옆, 사방으로 떨어졌다. 우리가 매설한 지뢰까지 터져서, 소리는 더 요란했다. 흙더


미와 흙탕물, 돌조각이 함께 튀었다.


“조일병! 조일병-! 무전기!”


김소위가 옆으로 구르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무전기의 송수화기를  달라고 하는 것이다.


“국화꽃 둘팔, 여기는 국화꽃 칠둘.”


“칠둘은 잠시 대기, 상황실로 연결하겠다.”


무전기의 수화기에서 삐- 음이 울렸다. 24시간 대기했던 둘칠삼 무전반의 유선 무전기 전선코트가 포대 상항실로 연결되는


것 같았다.


“국화꽃 칠둘은 송신.”


“여기는 국화꽃 칠둘, 좌표 818-1819, 2814-1617. 위로 200. 참호 속의 적, 시한신관 대대 두발. 사격-!”


김소위가 GOP지역 내의 105mm 273포대에게 포사격 지원 요청한 것이다. 좌표가 휴전선 우리지역 내라 해도 적이 대대병


력 정도로 밀고 들어오거나, 아니면 신이 한눈을 팔거나, 악마가 재채기를 하기 전에는 사단으로부터 아니 연합군 합참본부


는 우리의 포사격 요청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105mm포탄이 휴전선에 떨어지는 것은 전쟁을 각오하는 행위이기 때문이


다. 그러나 그런 일이 발생한 일이 있었다. 우리 우측 옆 사단 비무장지대를 지키는 백골부대에서였다.


 


1973년 3월 7일.


적군 GP559를 곡사포 155m와 105mm로 초토화시켜 박살낸 적이 있었다. 북측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우리 측 비무장 안


에서 경계표지판을 보수하던 백골부대의 수색대원들에게 사격을 가해 왔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곡사포 포격은 고립되어 있


던 백골 수색대원들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포사격 명령을 내렸던 백골사단 3사단장 박정인 준장은 한 달도 안 되어


서 군복을 벗었다. 그래서 군사령부는 쉽게 곡사포 사격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을 매복조 소대장


김소위가 얼마나 급했으면 한번도 교신하지 않던 포병에게 사격 요청을 했겠는가? 대대 두발이라는 것은 포대대 18문의 포


가 각각 2발씩을 연속으로 퍼 붓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36발의 105mm 포탄이 같은 장소에 거의 한꺼번에 쏟아진다.


“여기는 국화꽃 하나, 국화꽃 칠둘!”


“여기는 국화꽃 칠둘, 송신 바람.”


국화꽃 하나는 1975년 6월 당시 28사단 사단장 소준열 소장의 무전기 호출번호다. 직접 사단장이 무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망리를 중심으로 좌우 6Km씩, 12km 철책 최전방 GP와 GOP지역을 방위하며 전투작전을 할 수 있는 최정점의 군지휘소


무전기 호칭 번호였다.


국화꽃 칠둘은 우리 매복조의 무전번호이고, 국화꽃 둘팔은 105m 포대의 무전연락소의 호출번호다. 사단에서 상황보고 하


라는 것이다. “여기는 칠둘. 칠둘은 현재 적과 교전 중. 12시 방향, 적으로부터 일발의 사격을 받고 즉시 응사. 지금은 적으로


부터 박격포 사격을 받고 있음. 적군의 현재 좌표, 818-1819, 2814-1617로부터 위로 200.”


“여기는 국화꽃 하나, 국화꽃 칠둘!”


“여기는 국화꽃 칠둘, 이상.”


“여기는 국화꽃 하나. 반복하지 않는다. 5분 후, 노루 등허리에 국화꽃이 피면 칠하나로 빽. 이상.”


“수신했음. 국화꽃 칠둘, 이상.”


FM 무전무병은 숫자로 된 음호를 사용하기로 되어 있으나, 전투시나 위급 시에는 평문으로 교신한다. 국화꽃 하나에서 송


신한 내용은 이러한 것이다. ‘5분 후, 노루능선에 포탄이 떨어지면 칠하나인 801GP로 철수하라’는 뜻이다.


5분 후였다.


801GP에서 발사된 81mm 박격포 포탄 수십 발이 빨갛게 달구어진 아궁이 잿불 속에서 알밤이 튀듯 노루능선에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적들이 사격하지 못하는 틈을 타서 801GP로 철수 했다. 801GP는 우리 측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우리 지하


초소 벙커다.


801GP로 철수한 우리 매복조는 김소위가 유선전화로 수색대대 상황실로 상황을 보고 했다. 아마 5분 안에 청와대에 보고될


것이다.


‘801GP에서 2시 방향. 거리는 1.2km. 좌표 818-1819, 2814-16 17에서 위로 200m. 적의 매복조로 보이는 소대병력, 30명 정


도와 우군 매복조 간의 대치 중, 적군의 조준격발로 보이는 일발의 총격을 받고 즉시 응사. 22시 16분 교전 시작, 22시 47분


교전 종료. 적군 전사자는 미확인. 우군병참 상황, 사상자 없음, 부상자 없음, 격발된 클레이모아 3기 미회수, 적의 박격포탄


으로 피격된 클레이모아 3기는 금일 회수할 것임, 조명지뢰 3발 소모, 발목지뢰 10기 미회수, 지뢰는 박격포탄으로 모두 격


발된 것 같음. M60 실탄 600발, M16 실탄 1560발 소모, 이상.’ 군에서는 병사도 보급품인 병참에 속했다.


*


“이보시래요, 이보시래요-! 51호실 동무!”


아-, 머리가 좀 아팠다.


“주체격술을 한, 보위부 출신 다섯 명을 한 순간에 쓰러트린 동무가 아니, 총소리에 그렇게 맥없이 쓰러짐네까? 51호실 동무


는 아무래도 군인은 아니었던 것 같소.”


지금 내 머릿속에서는 기록영화 한 씬이 커트 없이 유성기처럼 돌아갔다. 언제적일인가? ‘1975년 6월 21일’, ‘조일병’, ‘비무


장지대에서의 적과의 교전’, ‘28사단,’ ‘국화꽃 하나.’ 어쨌거나 나의 성은 분명 조씨가 맞는 것 같다. 또 평양에서의 링 장내


아나운서가 나를 소개할 때, 분명 ‘조풍림’이라고 했다. 나는 평양에서 가명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내 이름은 조풍림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 분명하다. 그런데 북한의 격술대회에는 왜? 참가했으며, 그때는 또 언제쯤인가? 그리


고 더 이상한 것은 도대체 내 나이가 얼마인가 하는 것이다. 봉래 요양병원 사망진단증’에 내 추정 나이는 40~45세로 기록되


어 있었던데, 1975년에 일병이었다면, 보통 대한민국에서 군에 입대하는 나이는 대략 21-22세이었다.


‘올해가 2011년, … 그럼, 내 나이는 57-58세 정도? 그렇다면 지금 떠오른 영상은 35년 전 이야기다.’


“괜찮습네까?”


오정희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총소리 듣고 무엇이 떠오르는 것이래요?”


“에이고, 머리만 아프다오.”


이제서야 오정희에게 좀 의심이 가는 것이 있었다. 오정희는 의사로서 내 기억이 돌아오기를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


다. 내 기억력 회복에 나보다도 더 집착하고 있는 것 같다. 왤까? 오정희는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이 분명


하다. ‘아- 그보다도 나는 누구며, 무엇 때문에 이곳이 와 있는가?’ 그것도 죽은 시체로 말이다.


“천동무! 이리 와 보시래요.”


오정희가 부른 천동무라는 자는 50대 후반,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고 등이 꾸부정한 자였다. 오정희가 먼저 암송을 시킨 자다.


“과장동무, 부르셔써래?”


“어서. 51호실 동무, 좀 부축하시래. 그리고 51호실로 좀, 보셔다 주시래요.”


“알가씁니다.”


천동무라는 자가 나의 오른 팔을 자신의 목덜미에 얹고 나를 부축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작았다. 그래서 그냥 내 팔을


자신의 목덜미에 얹은 꼴이 됐다. 오정희는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보위부 출신 요양소 요원들에게 향했다.


“51호실, … 동무?”


천동무라 하는 자가 자신의 입술을 내 오른 쪽 가슴에 묻으며 아주 나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어?… 저를 알세요?”


나도 아주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저를 모름랩까?”


“저는 기억을 상실했습니다. 저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말해 주세요?”


“지도, 51호실 동무에 대해서래는 잘 모르지요. 그런데래, 얼마 전에 위원장 동지 아들과 같이 와써래, … 위원장 동지를 여기


서 만났드래잖소?”


“그 위원장 동지가 누구요?”


“강원도 노동당 위원장, 김장수 도당 위원장이래요, 정말 모르시갓소?”


“강원도 노동당 위원장 김장수? 육이오 전에 말이요?”


“그렇지요. 그때서부터 쭈-우-, 지금은 아니지만, … 위원장 아드리래는 상장 군단장이래요. 왜, 며칠 전에 같이 오고서래?”


“그래요? 그럼 김장수 위원장이 이곳에 있소?”


“내래 그분을 오래 전부터 모셔드래써요. 55년에 위원장 동지는 큰 아들만 데리고 공화국으로 와드래써. 작은 아드리와 부


인이래는 남쪼기 철원에 그냥 남아 있었드랬고요. 그래서래 위원장 동지는 철원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평강에서 강원도 도


당 위원장을 자청해 맡아가지고서래 이곳에 그대로 있었드랬지요.”


그리고 김장수는 풍을 맞아 10여 년 전부터 평강 봉래요양소에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아까 암송하던 것이 김장수 위원장 아들의 수기요?”


“그렇지요. 군단장이 된 도당 위원장의 아드리 업적을 우리도 똑같이 받들면 그분과 같이 영웅적인 투사가 된다고 해서래요.”


“김장수 위원장이 이곳에 있다고 했는데, 몇 호실에 계시오?”


“59호실이래요. …, 위원장 동지도 치매와 우울증이 심해서래.”


“59호실은 이 복도 끝인데? 그럼 59호실에 들렸다 갑시다.”


“과장동무가 무어라 하지 않을래라?”


“괜찮을 것이요?”


천동무라고 하는 자가 59호실의 문을 노크하며 김위원장을 불렀다.


“위원장동지래?”


물러도 대답이 없자. 천동무가 59호실 문을 열었다.


“위원장동지래.”


김장수 위원장은 의자에 앉아 탁자에서 무엇을 보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그는 탁자 위에서 무슨 책인가를 보고 있었는데, 머리가 아주 하얀 백발이었다. 그는 족히 90살


이 넘어 보였다. 그런데도 안경을 끼지 않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그렇게, 그의 시선을 머물게 한 것은 책속의 흑


백사진이었다. 사진은 책 하단에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는 울고 있었다.


“아, 위원장 동지래, 또 우신다래? …, 위원장 동지는 얼마 전, 51호실 동무와 같이 왔을 때래, 아들이 보여 준 반쪼기 사진을


보고 저렇게 울었드래소. 지금 보고 있는 것도 강원도 도당지에 실린 사진이래,… 김위원장 네 식구 사진 중에 절반인 반쪽만


이 실려 있지요.”


나는 가까이 다가가 책에 실린 흑백사진을 들렸다 보았다. 반쪽이 잘려나간 사진이었다. 가로 10cm에 세로가 6cm쯤 되는


크기의 사진이었다. 4x6 국판 크기의 책 하단에 실려 있었다. 위원장이라는 그가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말없이 책을 나에게


넘겨주었다.


나는 그와 마주 놓인 의자에 앉으면서 탁자 위에서 책을 바로 놓고 보았다. 책속 반쪽사진은 의자에 앉은 여인이 아기를 무


릎에 앉힌 사진이었다. 의자에 반듯하게 앉은 아주 앳된 여인은 짧은 파마머리에 한복 저고리에 땡땡이 치마를 입은 여인으


로 아마 갓 돌은 넘긴 듯한 아기를 무릎에 앉혀 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이 온전했다면 사진 오른 편 옆에는 여인의 남편


이 나란히 앉아있을 것이고 한 아이가 서 있거나 남편 무릎에 앉아 있을 법한 구도의 사진이었다.


“천동무, 위원장님 아들이 가져왔다는 사진과 이 책에 실린 사진은 같은 사진이었소?”


“맞다래. 군단장이 가존 사진이는 없었진 반쪼가리 사진이었서래.”


찢겨져 나간 반쪽 사진을 어디서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군단장이 없어진 반쪽짜리 사진을 들고 왔었다는 것이다.


“내래 위원장이 가지고 있던 사진 쪼가리와 위원장 아들이 가지고 온 사진을 함께 투명테이프로 부쳐 들렸지요. 위원장 동지


는 책속 반쪼가리 사진을 늘 품고 다녀 드랬는데, 지금은 내가 테이프로 부쳐준 사진을 품고 다니지래.”


나는 도당지의 발행연도를 찾아보려고 맨 뒷장을 열었다.


1976년 8월 18일이었다.


‘아-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일? 아, … 아?’


*


“신고합니다. 군번 12356927 일병 조풍림은 1976년 3월 20일부로 자대 복귀를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필승.”


사단으로부터 FM무전병 지원을 요청을 받아 내가 갔다 왔다.


사단 직할 DNZ수색대 매복조에 FM무전병의 결원이 생겼었다. 그래서 내가 갔다 오게 된 것이다. 우리 자대가 GOP지역에


근무하는 대대라는 것. 그것도 그랬지만, 내가 갔다 오게 된 결정적인 것은 대대 본부 무전중개소의 FM무전병 중, 유일하게


비밀취급인가가 나온 병사는 나까지 2명이었는데, 내가 더 후임병이었기 때문이었다. 고참병은 위험지역의 지원 같은 것은


몸을 사려 꺼리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대 본부중대 통신소대 무전반 근무에는 FM 4명, AM 모르스 부호병인 CW무전병 2명, 무전차량 시동 운전병 1명, 등 7명


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전반은 부대가 위치한 곳의 가장 높은 지역에 별도의 내무반을 차려서 근무한다. 그때 나는 FM무전


병 중, 가장 졸병이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궂은일을 내가 다 맡다시피 했다.


그리고 나는 대대 본부중대 5분대기조 무전병을 몇 개월 동안 맡은 적도 있었다. 분부중대 FM무전병은 한정된 인원이었기


에 타 분대원보다 자주 5분대기조 무전병이 임무가 돌아왔다. 한번은 자대에 탈영병이 생겨서 5분대기조가 집합된 적이 있


었다.


“아-, 아-, 지금 말번 보초를 선, 병사 한명이 실탄 15발이 튼 탄창을 가지고 탈영한 것 같다. 한- 5분 전이다.”


대대 당직 부사관의 말은 삑삑거리는 스피커 잡음과 함께 빨간 핸드 확성기에서 분산됐다. 그런데, 대대 5분대기조를 전부


집합시킨 것이 아니었다. 본부중대 5분대기조 9명만을 상황실 앞으로 집합시킨 것이다. 알파, 브라보, 차리, 중대는 본부중


대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산재해 있기에 출동시키지 못한 모양이었다.


당직 부사관인 이중사는 얼빠진 놈처럼 빨리 뒤쫓으라고만 했다. 수색지역이라든가, 탈영병을 보게 되면 어떻게 대처할 것


인지를 지시하지 안했다. 무전기를 믿고 그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군대에서도 정신 나갈 정도로 급해지면, 대개 자기


가 생각하고 있는 상황 판단을 타인도 동일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계획적인 지시나 명령이 전달되지 못


하고 급하게 행동지침만 내리게 된다. 지금 이중사가 그런 꼴이다. 다만, 당직 사령을 보좌하는 부책임자로써 책임을 추궁당


할 것 같으니까. 당황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라는 대응지시가 없었다.


탈영병은 ‘정문 보초를 섰다가 5분 전에 도주했으니까. 빨리 쫓아가 잡으라.’고만 했다.’ 이런 군발이 같은 놈이 다 있나. 저런


자식이 전방부대 당직 부사령을 맡았다니 기가 찼다. 기합 주고 병사들 구타할 때는 지옥에서 방금 나온 미친놈처럼 워커발


로 차고 철모로 병사의 가슴팍을 내려치고 개발광을 떨며, 진짜 애국하는 군발이처럼 주둥아리를 까더니만, 지금은 사색이


되어 그 까맣든 얼굴이 다 창백하게 보였다.


“야- 마, 어서 뛰어-!”


‘지랄하고 자빠졌네. 뛰어간다고 탈영한 놈이 기어들어 오냐.’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분대, 뛰어- 가!”


본부중대 5분대기조 분대장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구령하며 분대를 인솔했다.


나를 속으로 ‘바- 보- 같- 은- 이- 중- 사-’를 속으로 중얼 거리며 땅바닥을 딛는 왼발에 박자를 맞추어 뛰었다.


본부중대 5분대기조 분대장은 신참 오하사였다.


오하사는 대학 3학년 재중에 군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학도호국단 간부후보생 1년차 교육을 받고 하


교 중에 데모대에 휩쓸려 있다가 경찰 체포조에 붙잡혀 집에 연락도 못하고 그대로 군대로 끌려왔다고 했다. 6개월간 하사


관 훈련을 마치고 1주 전, 자대에 배치되자마자 5분대기조 분대장이 된 것이다.


5분대기조란, 항상 전투준비를 하고 5분 안에 출동할 수 있게 대기 상태인 9명으로 이루어진 1개 분대를 말한다. 그러나 비


무장지대 안에 있는 GP는 말할 것도 없고, 철책선 밖에서 근무하는 GOP부대에게는 5분대기조가 없다. 전 부대원이 전투 비


상상태로 근무하니까 그랬다. 그런데 우리 대대가 올 봄에 GOP지역을 교대하고 지오피 바깥 후방이라는 FEBA(페바)지역


으로 나오니까. 일반 부대처럼 초병근무도 하고 5분대기조도 편성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탈영병 때문에 5분대기조가 집합된 날자는 1976년 8월 2일 06시 15분이었다. 우리 본부중대 5분대기조는 탈영한 김일병을


쫓아, 정문을 통과하고 하고 있었다. 지금 김일병은 부대장의 허가 없이 자대를 이탈했기에 탈영상태였다.


“조상병, 어디로 가지?”


‘아, 벌써 나의 군대생활이 16개월이 흘러갔구나.’ 오늘 충동한 본부중대에 새로 편성된 5분대기조를 보니까. 내가 잘 모르는


이병과 일병들로 구성된 졸병들이었다. 내가 분대원 중에서는 최고 고참병이었다.


“근데, 어제 내무반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당직 부사관 이중사가 탈영한 김일병을 구타했어.”


“그래서 탈영했구나. 왜?”


“술을 먹었는지, … 이중사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내무반으로 들어온 거야. 다들 피하고 도망치니까. 닥치는 대로 발길질하고


총기를 내던지고 하다가 김일병 하고 눈이 마주쳤나 봐?”


“마주쳤다고 패? 그 자식, 미친개한테 물린 것 아니야?”


“물린 것은 김일병이지.”


선임자들이 미친개처럼 날뛸 때는 광견병에 걸린 놈이라고 했다. 나는 28무전반에서 24시간 대기 근무를 하고 있었기에 본


부중대 내무반에는 간혹 들릴 뿐이었다. 그래서 본부중대 내무반 생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다. 그런데, 오하사는 신


참이라 부대 내무반 생활을 나보다 더 몰랐다. 특히 부대 근처의 지형지물을 모르는 것이다.


“난, … 이 지역 지리를 잘 모르니까. 조상병이 분대를 인솔해 줘.”


“그럼, 상황판은 오하사가 들어.”


빗방울은 5분대기조가 출발하기 전부터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었다. 맹꽁이배처럼 희멀겋게 부풀었다가 한 번에 터져버릴 것 같은 동이 트는 여름날의 아침이었다.


큰 비가 올 것 같다. 부대 정문에서 좌측은 오솔길로 고갯길이다. 부대 정문 좌측 길로 단독군장을 하고 구보로 한 10분쯤 가


면 교실 2개와 작은 운동장이 달린 초등학교 분교가 나온다. 그 분교가 우리 부대의 정문 앞에서 보이는 민간인 건물로는 정


문 앞 구멍가게와 함께 유일했다.


부대 좌측 산자락의 오르막 오솔길을 넘어 내리막길로 500m쯤을 내려가면 신망리로 빠지는 비상도로가 나온다. 군용 지프


가 겨우 다릴 수 있는 작은 삼거리 길. 좌측 길은 신망리로 가는 군비상도가, 우측 길은 군자산을 끼도 도는 연천읍으로 가는


비상도로다. 그 삼거리에 민가 한 채가 있다. 그곳에 70세가량의 노부부가 담배와 술, 라면, 안주될 과자류를 팔고 있었다.


부대 정문 앞길 좌측 길은 연천군 읍내로 나가는 길인데, 군자산자락을 끼고 돈다. 그 길로 2km를 가면 차리중대가 나온다.


차리중대 정문 앞에서 2km 더 가면, 연천 읍내다. 그리고 3번 국도와 연결된다. 부대 정문 우측 길도 군사도로다. 우측 길도


정문에서 1.2km를 가면 알파중대가 나온다. 알파중대 마주 편이 우리 포대가 지원하는 보병연대 본부가 있은 곳이다. 알파


중대 정문 앞을 지나면 바로 임진강의 지류인 역곡천 하류다. 역곡천 하류의 다리를 건너 2Km을 더 가면 전곡 읍내로 연결


된다.


우린 탈영한 김일병의 뒤를 10~15분 간격을 두고 쫓고 있는 것 같았다. 김일병은 차리중대나 알파중대가 포진한 군사도로를


택하지 안했을 것이다. 비포장이지만 길이 넓어 쉽게 노출될 수 있고, 중대 간의 연락으로 차리중대나 알파중대가 병사를 출


동시켜 수색하거나 매복시켰다면 연천읍이나 전곡읍까지 탈출은 불가능한 길이다. 그리고 08시가 되면 영외 거주하는 부


사관들과 장교들이 부대로 들어오는 길이다. 부사관들은 주로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자가 많다.


김일병은 분명 북쪽 신망리로 통하는 정문 좌측 비상도로인 고갯길을 택했을 것이다. 열심히 30분을 가면 충분히 가슴치고


개를 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슴치 고갯마루부터는 고갯길 양옆으로 군자산자락으로 둘러싸인 곳이기에 그 숲으


로 들어가 숨어버린다면, 그리고 또 먹을 것만 조달된다면, 8월 초의 기후라서 산에서 야영이 가능할 것이다. 군자산 일대는


한, 9월 말까지 숨어있을 만큼 산세가 깊고 넓다.


“분-대, 좌로- 구보.”


내가 분대장 오하사 대신 분대원을 인솔했다.


하사들은 하사관 훈련받은 가락이 있어, 단독군장 구보라면 자신을 하는데, 오하사는 영 그렇지 못했다. 뒤로 쳐지고 있었


다. 상황판 때문이었다. 상황판은 A3용지 4장의 크기다. 반으로 접은 것을 펼치면 A3용지의 8장의 넓이가 되는 셈이다. 그것


이 분대장 상황판이라는 것인데, 그 안에 3급 군사지도가 있다. 부대 일대의 등고선 표고와 지역의 좌표를 볼 수 있는 지도


다. 그래서 5분대기조에게는 꼭 필요한 자대 근처의 군사지도다. 그런데 좀 큰 것이 문제였다.


“분대- 제자리-에~ 서!”


분대원을 세워놓고 오하사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빗방울이 제법 굵어졌다. 뛰어오는 오하사의 어깨 견장이 파랗다 못해 푸


르죽죽했다. 빗물에 젖은 군복은 군청색으로 변해 가고 어깨 죽지는 흠뻑 젖어 있었다. 지금 분대가 서 있는 고갯길 중턱에


서 바로 아래의 논둑길은 따라 50m 내려가면 연천초등학교 분교다. 이 분교는 울타리가 없었다. 논 가운데 그냥 세멘벽돌


건물로 시멘트를 바르고 흰 페인트에 스레드를 얹은 지붕이었다. 그래도 푸른 논 사이에서 맨땅의 운동장 속살은 뽀얗다 못


해 하얗다. 그래서 텅 빈 운동장은 더 적막하게 보였다.


김일병은 비를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분대의 추격을 목격했다면 분명 저 분교로 들어갔을 것이다. 분교는 1학


년에서 6학년을 전부해 봐야 고작 7명뿐인 학교였다. 그러나 그것도 지금은 여름 방학 중이다. 2명의 교사들도 휴가 중일 것


이다. 교실은 비어 있다. 그렇다면 비 오는 날. 숨어 있기에 안성맞춤이다.


“오하사, 김일병은 저 분교에 있을 거야.”


“그럴까?”


“틀림없어.”


내 뒤를 일렬종대로 따라오던 분대원 모두가 운동장에 들어서도 마찬가지로 일렬종대를 유지했다. 잘못하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는 수색보행법이다. 그러나 설마하며 교실 현문까지 다가갔다.


내가 오하사 보고 교실 안을 수색해 보라고 턱으로 교실 현관문을 가리켰다. 이것은 상병인 내가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


하사가 분대장이니까 당연 선두에 서서 수색해 보라는 뜻이었다.


오하사가 들어가지 않으려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분대장으로서 직무유기다. 뭐라 하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은 탈영병


이 격발한다면 조준사격을 하지 않고도 반자동사격만으로도 사상자가 날 수 있는 거리로 접근되어 있었다.


M16을 자동이나 반자동에 놓고 멜빵거리사격만 해도 위험한 상황이다. 무어라 소리 낼 수가 없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오하


사도 계급장만 분대장이지, 군생활이 6개월 밖에 안 된 졸병이나 마찬가지다. 분대장이 못하겠다면 고참 순으론 난데, 괜히


오하사한데 김일병이 이곳에 있을 것이라 이야기했나 싶었다.


동물들은 위험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전방에 근무를 하는 군인들도 그런 동물적이 감각이 몸에 배어있다. 위험에 대한 기감이 체질적으로 몸에 밴다. 선임병일수


록 더 그렇다. 이것이 때론 정확히 작동한다. 나는 일단 교실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 세멘바닥엔 신발이나 발자국 같은 것은


없었다. 그리고 나무 목판이 깔린 복도가 나왔는데, 복도를 따라 두 교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복도에도 발자국 같은 것은


없었다. 탈영병이 아무리 졸병이라고 해도 건물 내부로 몸을 엄폐할 때 발자국을 남기겠는가?


나는 DMZ 매복조로 근무했을 때 몸에 배어 있었던, 살기를 느끼는 촉이 되살아났다. 김일병은 군화를 벗고 들어갔을 것이


다. 이럴 때는 군화의 양쪽 끈을 매고 목에 거는 방법이다. 그리고 두 번째 교실에 숨어있을 것이다. 나라면 그렇게 할 것이라


는 것이다. 그리고 교실 문을 열면 그는 분명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방아쇠를 당기며 문을 열 수는 없다. 그는


적이 아니다. 근원적인 적을 따져본다면 북쪽 아이들 때문이 이런 난감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김일병을 잘


모른다. 난 그와 같은 내무반 생활을 하지 못했다. 또 근무처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대대 본부원이라 해도 1개월 이상은 되어


야 상급병사는 하급 병사를 알아볼 수가 있다. 하지만 김일병과 나는 어쩌다 본부중대 식당 같은데서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김일병은 나를 알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김일병의 얼굴도 모르고 김일병이 사회에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 전혀 정보가 없


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습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김일병의 행동과 심리는 전적으로 나를 기준으


로 해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린 서로를 모른다는 것이다. 모르기에 전우애를 느끼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는 그냥 실탄을 가지고 탈영한 병사였다. 그가 분풀이 대상을 우리에게 돌린다며 위험하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내가 다행이


라고 생각되는 것은 그가 모르는 나에게 적의를 품지는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다. 하지만 김일병은 지금 미친개한테


물린 상태다. 자신에게 위험을 느낀다면 전우애를 느끼지 못하는 나에게는 망설임 없이 M16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그가 나


를 향해 발사한다면 나 역시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우린 어쩌다가 적도 아닌 자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되었는가?


나는 전투수하를 쓰기 시작했다.


M16을 오른 손은 들고 왼손으로 안전장치를 풀어 방아쇠가 반자동으로 격발되는 위치에 놓았다. 내 뒤에 쪼그리고 앉은 오


하사와 분대원이 나를 따라 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왼손을 들고 손바닥을 아래로 세 번 내려저었다. 모두들 자세를 낮추었


다. 훈련 받을 때는 손발이 안 맞더니 실전에서는 비겁할 정도로 침묵하면 바싹 긴장들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낮은 보복자세를 취하면서 첫 번째 교실 미닫이문을 엎드린 상태로 M16에 착검한 대검으로 교실 문에 집어넣고 옆으


로 밀었다. 다행히 소리는 나지 않았다. 책상 밑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책상이나 의자도 가지런히 오와 열이 맞춰


져 있다. 첫 번째 교실로는 그가 들어오지 안했다. 김일병도 상당히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다시 낮은 보복으로 복도마루를 기어서 두 번째 교실 문 쪽으로 갔다. 또 같은 미닫이문이었다. 오하사와 분대원들은 교실


복도와 현관, 현관 추녀 밑바닥에 바싹 엎드려 있었다. 두 번째 교실 문도 대검 끝을 집어넣고 열려고 할 때였다. 순간, 교실


문틈으로 담배 냄새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분명 두 번째 교실 안에 김일병이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도 초조했기에 담배


를 피웠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훈련이 덜 되었구나.’생각했다.


담뱃불의 불빛은 밤에 800m를 간다. 담배냄새는 바람을 타면 1km를 난다. 그는 특수훈련을 받은 요원이 아니다. 참을성이


좀 부족한 것이다. 담배를 피우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이 순간. ‘난 무엇 때문에 김일병에게 총구를 겨누어야 하는가?’하


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의 행동은 적을 상대로 하는 훈련받은 행동이었다. 김일병이 북에서 우리를 해치러 내려온 적군인가?


이것은 미친개인 얼빠진 이중사가 저지른 일이다. 얼빠진 놈 때문에 적을 상대로 뭉쳐야 하는 전우들이 서로 총을 겨누는 사


태로까지 번진 것이 아닌가? 김일병은 고작 군생활 5~6개월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있는 곳을 알고 있는 이상, 김일병


은 독안에 든 쥐다. 그를 생포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살상하며 잡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중사는 어떻게 하라는 명령이 없었


다. 바보 같은 놈. 전쟁이 터지면 그런 놈들 때문에 우군의 피해가 막대할 것이다.


김일병을 사살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투항하라고 권했을 때, 그가 저항한다면 아무런 사상자 없이 순조롭게 제압하기는 어


렵다. 김일병은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순순히 투항할 자라면 두 번째 교실까지 깊숙이 숨어들어 가지는 않


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분대가 대대 정문을 나와, 좌측 능선 비상도로로 접어든 것을 교실 창문을 통해 관측하고 있었을


것이다.


담배를 피우면서 우리가 이 분교를 수색하려고 논두렁길로 접어들 것인지, 그냥 신망리 쪽 고갯길로 갈 것인가를 눈여겨보


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논길로 접어들어 분교 쪽으로 오니까. 그는 담배를 끄고 각오했을 것이다. 교실 문을 열면 이판


사판으로 한판 붙겠다는 각오로 웅크렸을 것이다.


내가 만약 문틈으로 연막탄의 안전핀을 뽑아 굴린다면, 그리고 연막탄이 터졌을 때, 그가 웅크리고 있을 책상 밑을 향해 두


세 발 총격을 가하다면, … 그도 총소리가 난 쪽을 향해 M16소총을 반사적으로 발사할 것이다. 그러나 우선 앞이 안보이면


몹시 불안하다. 그리고 투항하지 않는다면 수류탄을 던지겠다고 겁주면서, 무전 교신으로 이곳 위치를 알리고 김일병과 대


치한다면, 지원군은 20분 내에 도착할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는 자살을 택하던지 교실 창문을 부수고 탈출 할 것이다. 수색대 매복조에서는 적의 총소리를 세는


훈련을 받는다. 그가 불안해서 여기저기 총을 쏴대면 탄창 안에든 15발 실탄은 금방 소진된다. 그러나 탈영병이라 해서 굳이


적군 대하 듯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부대 상황실로 보고 하기에도 난감했다. 눈으로 직접 확인했냐고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실 문을 열고 확인 한 다음에 상황실로 보고 해야 한다. 그리고 지시를 받아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확인하려는


순간,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는 죽는다. 그 다음에는 김일병이 사살되던지, 아니면 5분대기조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


다. 군인들은 지시나 명령이 없으면 훈련받은 대로 행동한다. 지금의 5분대기조는 분대장 이하 전원이 무장 탈영병에 대해


서는 대항수칙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밖으로 나가 현재의 상황을 부대 상황실에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왼손을 들었다. 어깨 너머로 대원들에게 물러서라고 뒤로 여러 번 손짓을 했다. 우리 5분대기조는 소리 나지 않게


교실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조상병, 왜 그래? 수색 안 해?”


오하사는 개미 씨알 굴리는 소리로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안에 없어.”


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오하사, 현관 밑바닥 봤어? 비가 왔는데, 발자국이 없잖아?”


이렇게 말하면서 검지손가락으로 교실 끝을 가리켰다. 그리고 중지를 하나 더 펴서 두 번째 교실이라는 것을 알렸다.


“아, …”


오하사는 알아들었다.


그는 내가 어디 있다 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비무장지대 수색대 매복조에 있다가 온 나를 부대에서는 아무도 건드리지 안했


다. 꼭 매복조에 있다 온 것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그때 나는 부대장인 대대장을 비롯해서 장교들에게 수박도라는 고려시대


에 유행했던 전통무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수박이라는 무술은 원삼국시대 때는 백제에서 맨손으로 하는 무술 유희라고 해서 수박희라 부른 돼서부터 유래되었다고 본


다. 그러나 고려 때 들어와 무인시대가 되면서 무인들이라면 꼭 수련해야 하는 무인의 필수 덕목 중의 하나인 무도였다. 그


러나 태권도가 한국의 무도 스포츠로 대표 되면서 수박도는 대부분 태권도에 흡수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거의 사라진 무술


이다. 대대장은 전통적 고대 무술인 수박도 익히는 것을 좋아했다. 오하사도 내가 부대장 1호차 무전병을 한 것 이외에도 개


인적으로 부대장과 친한 사병이라는 것을 알고 그래서인지 모르겠으나 나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면서 어떻게 할까 궁리했다.


분대원을 엄폐시켜 분교를 포위하고 무전교신으로 대대 상황실에 알린다면, 쉽게 투항시킬 수가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김


일병은 정당하게 조사받게 될까?


대부분의 병사들이 탈영하는 것은 부대 내에서의 구타 때문이다. 나는 군대 내에서 단체기합 받는 것은 가만히 있었지만, 선


임병이 개인적으로 때리려 하면 끝까지 저항했다. 나처럼 이렇게 행동하는 졸병은 거의 없다.


한번은 본부중대 내무반장 김하사가 전 본부중대원 140명 정도를 집합시킨 적이 있었다. 28무전반은 GP나 GOP와의 비상


무전망 때문에 24시간 대기상태였다. 그런데 포병 전술을 잘 모르는 내무반장이 무선전투대기망인 FM 무전병 1명만 남기


고 전부 집합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28무전반의 고참병들은 24시간 철책 GOP무전망을 핑계로 집합하지 않는다. 제일 졸


병인 나와 나보다 2달 더 빠른 CW 무전병만이 산꼭대기에서 죽어라 뛰어서 중대 집합 장소인 본부중대 연병장으로 왔다. 그


러나 늦게 집합한 병사들은 양손을 깍지 끼고 흙바닥에 엎드려뻗친 자세로 있었다. 그리고 늦게 집합한 순서대로 엉덩이에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있었고, 가장 늦게 도착한 나 역시 깍지를 끼고 엎드렸다. 내무반장 김하사가 휘두르는 몽둥이 대열에


나는 그렇게 맨 마지막으로 엎드렸다. 그런데 마지막에 엎드린 나를 때리는데, 김하사는 내 위의 상급자인 무전반 고참병들


이 집합 안했다는 것을 곱씹으면 나를 타작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인가? 그들 몫까지 나의 엉덩이는 계속


해서 타작되었다. 그러나 한 순간 그가 잘못 때려서 내 옆구리 쪽 골반 엉치뼈를 때리고 말았다. 맞는 그 순간 ‘짝-’하는 파열


음과 옆구리 골반 뼈의 신경이 도화선처럼 등골을 타고 올라와 뇌 중앙에서 폭발했다.


당구대의 손잡이로 만든 큐대가 갈라지면서 나는 그 자리에 쓰러져 땅바닥에서 몸부림을 쳤다. 그런데, 나를 열 받게 한 것


은 아픔보다도 김하사의 말 때문이었다.


“시- 팔! 쪼게 졌잖아.”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자신이 때린 병사의 골반 뼈보다 당구 큐대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김하사가 사람 같지 않았다.


김하사는 우리 GP를 향해 욕설을 퍼붓는 북한병사보다도 더 얄미웠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붉게 칠한 방화용 삽을 뽑아들고


달려가 내무반장 김하사를 후려쳤다. 김하사는 쓰러지면 내가 휘두른 방화용 삽을 용케 피했다. 그리고 내가 다시 삽날로 김


하사의 가슴을 찍으려 하자. 김하사는 잽싸게 일어나 줄행랑을 쳤다. 나는 쫓아가면서 삽자루 중앙을 잡고 투창을 던지듯이


김하사의 등짝을 향해 죽으라고 온힘을 다해 던졌다.


그 삽자루의 삽날은 김하사의 발뒤꿈치 바로 못 미쳐서 떨어져 바닥에 꽂혔지만, 그가 조금만 늦게 뛰었어도 등짝이나 발목


에 꽂혔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철창신세를 각오하고 살았다. 그러나 인사계인 김상사가 이러한 내 행동을 목격했다. 그런데


도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안했다. 그는 나의 분노의 레벨지수를 간파한 것 같았다. 나도 그 자리에 더 머물 수가 없었다. 그 길


로 28무전반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내 등 뒤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야- 왜, 집합한 거야. 중대- 해산-!”


김상사는 내무반장 김하사가 집합시킨 중대병력을 해산시키고 있었다. 그 이후로는 대대에서 나를 건드리는 놈들이 없었


다. 그리고 김하사는 내무반장을 내놓고 알파중대로 전출을 갔다.


나는 그후 고참병들의 기피병사 1호가 되었다. ‘에이’, 잘된 것이고 아주 편했다. 그러나 부대 고참병들에게서 나는 적이나 다


름없이 간주 되었다.


대개의 경우는 병사들은 심하게 구타를 당하게 되면, 군대 집단을 증오하거나 불신임하게 된다. 그러나 믿을 것이 없어, 극


도의 두려움과 증오가 겹치게 되면 탈영하거나 나처럼 계급질서에 저항한다.


탈영병은 대개 잡히거나 스스로 부대로 복귀하지만, 김일병처럼 총기와 실탄을 가지고 탈영하면 대개 사살된다. 왜냐하면,


군대는 내부의 비리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김일병의 탈영 사실은 현재까지 우리 부대 대대장이나, 연대 상황실이나, 보안대에 보고되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그런데 시


간을 보니,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06시와 57분을 가리켰다.


지원군이 온다고 해서 1시간 안에 김일병을 완벽하게 투항시킬 수 있을까? 대대장 출근시간은 08시. 적어도 08시 전까지는


김일병을 순순히 투항시켜 상황이 종용되어야 한다. 그래야, 대대장 선에서 일이 마무리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


일병의 징계는 크게는 15일 사단 영창이나, 적게 본다면 야간보초 대신 돼지우리 당번 정도로 보직이 변경되는 선에서 끝날


수 있다.


“둘둘. 둘둘. 여기는 하나하나.”


묵음으로 스피치 해 놓은 P77무전기 수화기에서 우리 5분대기조를 호출하는 소리가 났다. 대대 당직 부사관 이중사의 목소


리였다. 묵음으로 전환해 놓았던 무전기의 수화기에서 이중사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제 교실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김일병도 우리가 있는 위치를 감 잡은 상태일 것이다.


“여기는 둘둘, 이상.”


“어떻게 됐나?”


“지금 분교를 수색하고 있습니다.”


“야-! 이 새끼야-! 탈영한 놈이 분교에 왜 숨어있겠어-마.”


“비가 오니까- … 요.”


“이 새끼가! 야- 분대장 바꿔!”


“여기는 둘둘 하나, 이상.”


“야- 이 새끼야! 니가 분대장이냐. 왜 이렇게 머리가 안돌아 가! 이 새키야! 왜, 분교에 있는 거야. 이 새끼들이, 비가 온까 들


어갔지-!”


“아니다. 이상.”


“아니다. 이상? … 이 새끼가, 너 돼질 래!”


“조, …, 조상병이 이곳이 좀 이상하다고 해서, … 이상-!”


“까고 있네. 야-! 이 새끼야-! 너희들은 돼지처럼 다 까질 줄 알아, 캐-시키들-! 야, 어서 연천읍 쪽 가봐! 이 새끼야-!”


이중사는 안달이 났다.


책임 추궁 당할 것 같은 것이다. FM무선 교신도 교신규칙이 있다. 즉 통신보안이다. 무전교신도 군대의 룰이 있는 것이고,


무전병도 짬밥 수만큼 숙련된다.


둘둘이라는 것은 본부중대 5분대기조 호출 부호였다. 하나하나는 대대 상황실 무전 호출부호였고, 오하사가 둘둘 하나라고


했는데, 하나라고 한 것은 분대장인 자신을 밝히기 위함이다. 무전교신에서 보통 ‘하나’라는 것은 그 집단의 최고 책임자를


말한다.


군대의 기강라든가 전투력 등은 그 부대 부대장의 레벨이라 할 수 있다. 군대는 부대장의 지시나 명령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


문이다. 우리나라 부대가 단독 전투를 할 수 있는 최소 단위는 대대 단위다. 대대 최고 지휘관의 계급은 중령이다. 미군들은


중대 단위로 단독 전투를 할 수 있다. 중대의 최고 지휘관은 위관 장교인 대위다. 그만큼 우리군대 지휘관의 전투작전 능력


은 미국에 비해 레벨이 낮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부대는 대대장이 복귀하지 않은 상태다. 현재의 모든 상황 판단은 당직 사령인 이대위가 할 것이다. 군대는 예나


지금이나 최고 지휘관의 판단능력에 따라 좌우된다.


분대장 오하사가 나를 끌며, 어서 가지고 했다.


“어디로 갈 건데?”


“연천 방향으로 가라고 하지 않아.”


우리 5분대기조는 왔던 길을 터덜터덜 걸어서 되도록 천천히 부대 정문 앞으로 왔다.


시간을 끌었다. 아침식사 시간이 거의 다 되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상황실로부터 부대로 철수하라는 무전이 왔다. 밥을 안


먹인 부대의 장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바로 영창이다.


3일 후였다.


탈영한 김일병은 신망리로 가는 비상도로 삼거리길, 70세 노부부가 살고 있는 가게에서 라면을 먹던 중 자살했다. 그런데 김


일병 사건은 산불처럼 불똥이 꺼지지 않고 나에게로 튀었다.


나는 연대보안대에서 5분대기조 출동부터 상황 종료까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시간별로 마분지 같은 종이에 파란색 볼펜으


로 깨알같이 쓰고 있었다. 왜 이런 지랄을 하고 있지, … 군대의 조직은 합의체가 없다. 의견을 모아 합의하여 결정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지휘관 한 놈이 판단하고 결정한다. 그래서 군대는 똑똑한 지휘관을 만나야 한다. 똑똑한 지휘관을 만난다


는 것은 군대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의 최고의 행운이다.


“야, 이 개끼야! 이제 그만 쓰고! 니가 자대로 복귀하고 김일병 하고 만난 날짜, 시간, 장소, 이야기 한 내용을 토씨 하나 빼먹


지 말고 말로 해 봐- 이 새끼야!”


‘말로 해 봐-, 이 새끼야? …’


무언가 꼬였다. 오하사가 불었나? 오하사가 불었어도 그렇지, 거짓말을 하지 않은 다음에야. 이 자식이 어떻게 오하사도 모


르는 내 마음을 속을 알 수 있을까?


난 김일병을 만난 적이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데, 더구나 김일병과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김일병 자살 사건이 왜?


보안대 사항인가? 헌병대 사항인 것 같은데? 왜, 보안대에서 이 사건을 맡았을까? 이상했다. 그래서 좀 더 생각하려고 대답


하지 안했다.


“이 새끼, 이거, 물고문 좀 해야겠는데, …”


그래도 대답하지 않자. 뒤통수에서 불이 번쩍했다. 보안대 병장 계장을 단 녀석이 내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후려친 것이었다.


보안대 녀석들은 이등병이건 일등병이건 다들 계장을 자신의 계급보다 두어 서너 단계 위인 병장 계급장을 달고 다닌다. 그


러나 저러나 나는 누구건 개인적으로 적개심을 가지고 나를 구타하면 타 부대에서도 가만있지 안했다.


바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돌아서면서 그 자식 명치 깊숙이 내 주먹을 꼬자 넣었다. 쟈-식은 ‘윽’ 소리도 못 지르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인마, 한방에 갈 놈이 때리긴 왜 때려- 마.”


녀석은 연대 보안대에서 나를 혼자 신문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리고 나는 연대 연병장을 나와서 연대 정문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야- 인마, 어딜 가!”


‘이건 또 무언가?’


연대 정문 바리케이드 앞으로 나온 위병이었다. 그 녀석은 위병완장을 찬 헌병인 병장이었다. 혁대의 버클이 빤짝거리고 바


지 아랫단에 링을 넣어 바지의 칼주름에 구김 하나 없었다. 위병 완장을 찬 헌병 녀석이 양 허리춤에 엄지와 검지의 호구를


끼고 서 있었다.


“야-! 상병, 어딜 가나!”


“자대로 돌아간다. 왜?”


“이 새끼가, … 말 따위 좀 보게?”


정문위병 병장이 워커발로 내의 가슴팍을 찼다.


그 발길에 맞으면 며칠 가슴을 쥐고 허허거릴 것이다. 나는 두 손으로 그녀석의 발을 끼어 잡고 옆으로 돌았다. 그리고 그자


의 등 뒤로 돌아 들어가자. 그는 한 발이 들린 상태에서 뒤로 밀리며 정문초소 옹벽에 뺨 싸대기를 비볐다. 나는 즉시 녀석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그리고 돌아서는 녀석의 가슴 정중앙 명치끝에 내 팔꿈치를 꽂아 넣었다.


“윽-”


녀석도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나는 연대 위병소 정문 안으로 들어갔다. 정문 위병소 안에 있던 병장 한 놈은 내가 들어오자, 벌떡 일어났다. 그런 것을 발길


로 가슴팍을 걷어찼다. 놈은 바로 쓰러졌다. 그러자 선임하사 한 놈은 위병소 옆문을 열고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군인도 겁을 먹으면 한 없이 약해진다. 더구나 개인적으로 상대하면 그렇게 무력할 수가 없다. 나는 자대로 돌아와 28무전반


에 누어있었다. 무전반의 이병장도 하병장도, 김상병도, 내 안색이 이상했는지, 나를 보고도 아무 소리 안 했다. 나는 영창 갈


각오를 했다. 아- 두 끼를 굶었는데도 배가 고프지 안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했다.


김상병이 수화기를 들었다.


“통신보안, 28에 김상병입니다.”


“야- 조상병 보고, 더플백 싸가지고 내무반으로 내려오라고 해!”


전화 수화기의 목소리는 인사계 김상사였다.


“필승!”


“더플백은 중대본부 내무반에 놓고 와!”


중대본부 내무반은 본부중대 일자 막사의 중앙 한쪽에 있었다. 일자 막사의 중앙에는 중대본부 사무실이 있고. 한쪽 막사는


대대 참모부 인원들의 내무반이요. 다른 한쪽은 중대본부 참모들의 내무반이었다. 그리고 막사 앞은 중대 연병장이고. 막사


뒤편은 야산인데, 뒤편 야산에 새로 지어둔 돼지막사가 있다.


중대본부 내무반이라는 것은 이름은 거창해도 중대 서무계, 중대 일종계의 보급반과 식당 요리반원들이 취침하는 장소이


다. 식당 요리반은 과외시간이 많기에 수고한다는 명목으로 야간보초가 없다.


중대본부 내무반에 더플백을 놓고 오라는 것은 영창대기라는 뜻도 있었다.


“니는 오늘부터 목동병이다. 체력은 국력이다. 군인의 체력으로부터 국가의 안전이 시작된다. 알았나 -! 사단장님께서 우리


대대에 하사한 돼지를 니-,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다행이었다. 영창이 아니라, 돼지 키우는 목동병이었기 때문이었다. 돼지가 우리 중대에 온지는 한 열흘쯤 되었다.


“돼지 키우던 윤이병이 휴가를 갔다. 니는 오늘부터, 니 쫄병들을 잘 기르도록, 알겠나-!”


“네. 알았습니다. 필승!”


보병연대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탈출한 것에 대한 벌칙이 아니었다. 아마, 5분대기조에서 김일병을 잡지 못하고 분교에서 철


수한 것 때문에 그에 대한 벌쯤으로 알았다. 그리고 이중사는 그날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가 어디로 이송되었는지는 아무


도 몰랐다.


난 그날로 그렇게 13마리 돼지목동이 되었다.


사단장은 ‘체력은 국력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부대원들의 체력을 돼지를 번식시켜서 부식으로 보충하라는 것이었다. 그


렇게 사단에서 온 돼지는 3개월짜리도 있었고 1년생 짜리도 있었다. 13마리 돼지는 중대 식당 짬밥으로 키워야 했다. 이틀이


지나니까. 내 몸에는 어느새 시큼한 냄새가 배어있었다. 씻어도, 씻어도 돼지냄새와 시큼하게 짬밥 썩어가는 냄새는 내 몸에


서 가시질 안했다. 그리고 연대 보안대 사건과 위병소 사건은 의외였다. 뒤끝이 예상 외로 조용했다. 하지만, 김일병 자살사


건은 나에게 문제를 몰고 왔다.


김일병은 아마 굶주리다 못해 군자산을 내려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70세 노부부의 민가 가게로 들어와서는, ‘할아버지, 전


탈영병입니다. 해치지 않겠습니다. 총을 여기 내려놓겠으니, 라면 좀 끓여 주세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끊인 라면에 찬밥


덩이를 넣어주었더니, 라면에 밥을 말아 먹으면서 탈영한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저의 아부지는 월북자에요. 저를 낳고 아부지는 20년 전에 4살 된 형을 데리고 북으로 간다고 하시면서 사라지셨다는데, 저


를 맡은 엄니는 데리러오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다가 편지 한통만을 남기시고 위암으로 돌아가셨고 저는, …”


김일병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바로 영장이 나와 군에 입대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탈영한 거야? 지금 이래두 부대로 돌아가지.”


“이제 늦었어요. … 조상병이 사단 수색대 매복조에 있다 왔다고 해서 아부지를 찾아가려면, 지오피나 지피가 있는 비무장지


대 안의 사정을 알아야겠다 싶어서 조상병과 친해지려고 했지만, 좀처럼 기회가 나질 않았어요.”


그래서 김일병은 탈영하기 하루 전날. 저녁 먹고 점호 취할 때까지 잠시 짬을 내어서 조상병인 나를 만나려고 했다는 것이


다. 그래서 김일병은 점호 준비를 미리 해 두려고 관물대를 정리하는데, 갑자기 당직 부사관인 이중사가 들어와 발길로 걷어


차고 총 개머리판으로 가슴팍을 내려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일병은 나를 만나러 오지 못하고 그날로 아부지가 계시다는


북으로 월북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김일병은 탈영시간을 말번 보초시간으로 정한 것 같았다. 페바(GOP 후방 전방)지역에서도 외각 보초나 야간 정문보초는 2


명의 복초가 실탄을 가지고 2시간 경계근무를 한다. 말번 보초는 새벽 04시부터 06시까지이다.


김일병은 실탄과 총기를 가지고 탈영할 계획으로 행동시점을 말번 보초를 서는 시간대로 잡은 것 같았다. 그런데 가게 노인


의 말에 의하면 김일병은 ‘착각한 것이 있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5분대기조가 그렇게 빨리 자기 뒤를 쫓아올지 몰랐다고 한다.


부대 정문에서는 세 가래길이 있었는데, ‘하필 신망리로 가는 가슴치고개를 택하다니,’하면서 분교로 들어가 숨었다는 것이


다. 그런데 5분대기조가 분교를 수색하려고 분교 교실 안으로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혼자 교실을 수색하던 조상병은 2번째


자신 있는 교실 문을 열지 않고 의아하게 5분대기조를 철수시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상병이 자기에게 기회를 주는 것으


로 알고 하룻밤을 분교 교실에서 묵고 다음날 새벽에 군자산 남쪽 능선을 타고 산속에 숨어있게 되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런데 김일병은 굶주리다가 배가 고파서 민가인 노부부 가게로 내려오게 된 같았다.


“하- 그런데야. 대대장 찦차와 보안대 찦차가 비상도로를 타고 가슴치고개로 넘어오는 것을 보더니, 옆에 놓았던 M16을 턱


하니, 턱에 대고 엄지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기더라고, …”


민가 길노인의 말이라 했다.


김일병의 M16 탄창받이에 끼어 있던 15발 실탄은 1발만 남아있었다. 14발이 모두가 머리고 몸통이고 난사되어서 밥풀과 라


면까지 다 튀어나왔다고 했다.


아마 이 말은 민가 길노인이 부대장과 보안대에 진술한 말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왜 연대 보안대에서 신문을 받게 되었


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에게 얻어맞았던 보안대 병장이나 연대 정문에서 위병을 섰던 헌병대 병장들은 나의 위법을 고


소할 창구가 없었나 보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조용했다. 내가 저지른 일은 병들 간의 구타다. 보안대 병장은 아마 병장이 아


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상급자 구타로도 취급되지 못했고 보안사병으로서의 체면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목격자나 증


거도 없다. 그러나 그가 앞으로 보안상의 이유로 나를 엮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려면 오기가 발동해야 한다. 위병소도 그


렇다. 그자들도 병장 계급장은 자신의 계급보다 높게 위장 되었을 것이다. 마이갈이 계급장이 그것이다. 그런 마이갈이 계급


장은 위병을 서는 자들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위병 구타나 위병근무 방해죄보다는 무장하지 않은 1명의 병사를


3명이 제압하지 못한 것이 더 큰 문제다. 그리고 위병소 선임하사는 도망까지 쳤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나를 선임병 구타


로 신고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보안대에서 나를 잡아 간 것은 우리 부대장에게 보고하지도 안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연대 보안대에서 취조를 받다


가 그대로 자대로 복귀한 문제는 거론되지도 않고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벌은 내 몸을 시궁창 냄새로


향불처럼 사르고 있었다. 다들 나에게 접근하려고 하질 안했다. 식당에서 보면 그랬다. 6명이 앉는 식탁에 나 혼자 밥을 먹었


다. 그래서 난 늦은 식사 시간에 맞추어 갔다. 그리고는 병사들이 식사를 하고 남은 짬밥을 버린 짬밥 통을 리어커에 실고 돼


지우리로 간다.


김일병은 철원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엄니가 돌아가시자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고아였다. 그래서 김일병 시신은 사단 의무대로 실려 갔고, 관물대에 있던 편지


는 문제가 될 것 같아 인사계가 빼돌린 모양이었다.


“야- 조상병, 목동 짓 할만 해?”


인사계였다.


“필승-!”


“야- 돼지들이 왜 이래? 온 지가 이 주도 안 됐는데, 왜, 비실비실한 거야? 너- 잘 들어. 쟤들 죽으면 사단 영창이야. 알지.”


“네, 필승!”


우리 사단은 돼지를 키우는 것도 필승이다. 필승은 싸워서 이긴다는 뜻의 사단 구호다. 군에서는 돼지를 키우는 것도 전투


다. 적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다. 그럼 돼지들의 적은 무엇인가?


나는 적과 싸우기 전에 돼지들과의 싸움에서 필승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돼지의 적은 어디에 있었는가?


김일병은 죽었다. 그도 적이었는가? 어쩌면 적이란 존재는 나에게 우호적이 아니면 모두 나의 적으로 간주 될지 모른다. 그


래서 군대는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특히 전방 사단은 그 선이 더 뚜렷하다. 외부의 적은 눈에 보이지


도 않는 선 하나를 놓고 총부리를 겨누며 이성적 판단으로써의 대한민국이라는 존재를 적대시하는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


다. 또 조국에 대해서 위해를 가하려는 자도 적일 것이다. 그러나 내부의 적이란 나에게 위해를 가하고 나에게 우호적이지


못한 적대감을 일으키는 자일 것이다.


“조상병, 김일병과 친했나?”


“아닙니다. 얼굴도 모릅니다.”


“그래? 그럼 김일병이 혼자 생각하고 있었나? 이 편지를 읽고 바로 소각해. 내가 지금 소각하려고 했는데, … 조상병은 한번


읽어 봐야 할 것 같아서,… 다 끝난 일이니까. 보고 바로 소각해 버려!”


“네, 필승!”


“그리고 니 새끼들 잘 먹여라!”


김일병의 관물대에서 발견된 글은 이랬다.


‘조상병님께,


하늘같다는 고참들은 다 악마 같습니다. 다 죽이고 싶습니다. 그러나 조상병님만은 늘 형님 같이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만


나서 말씀 드리고 싶지만 뭐라 하실지 몰라, 글이라는 매체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못난 졸병을 바로잡아


주신다는 심정으로 지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반쪽뿐이 낡은 흑백사진이 편지 안에 있었다.


낡은 사진 뒷면에는 삼단으로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하며 우리 가족과 함께’ 그리고 그 아래는 ‘55년 4월 15일’. 또 날짜 하단 아래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첫째 평주, 둘째 승주’라


고 쓴 푸른 잉크가 핏줄처럼 가늘게 흘김 체로 쓰여 져 있었다. ‘하며’와 ‘55년’, ‘첫째’ 앞자리가 잘려져 나가, ‘무엇을 하며 김


일병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55년’ 앞 글자는 분명 ‘19’였을 것이다. 그리고 ‘첫째’ 앞 글자에는


김일병의 아버지 이름과 아내의 이름이 쓰였을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 1955년 4월 15일이라는 것은 기념촬영을 한 날일 것


이고 ‘~하며’라는 앞 구절에는, ‘~을 기념하며’일 것이다. 그러니까.


‘하며 우리 가족과 함께


‘55년 4월 15일


‘첫째 김평주, 둘째 김승주’였다.


기념하는 것은 ‘둘째 김승주의 돌을 기념하며’일 수도 있다. 만약 한쪽 면이 찢겨 나가지 안했다면, 어린 김승주 일병을 어머


니가 안고 있는 사진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김일병이 나와 같은 1954년생이니까, 1955년은 김일병의 한 돌을 맞았을 때일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사진에 남은 것은 김일병 아버지로 보이는 청년하고, 그 청년 앞에 서 있는 3~4살 정도로 보이는


계집아이가 있었다. 그 계집아이 가슴께로 띠 줄이 아래위로 그어지고 중앙에는 5각 별이 있는 북쪽의 인공기를 양손으로


펼쳐든 사진이었다. 그리고 인공기의 띠 줄 하단에는 흰색으로 ‘김일성 만세’라고 흘려 쓴 글씨체가 선명했다. 그러니까 이


와 다른 반쪽의 사진은 김일병과 어머니의 모습으로 찢겨져 어디론가 사라졌거나 누군가가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가슴치고개 아래의 길노인의 말에는 김일병의 아부지는 4살 된 형을 데리고 월북했다고 들었는데, 이 가족사진


이 김일병 것이 맞는다면, 사진에 단발머리를 한 여자아이는 누굴까? 김일병의 누나 같은데? 가게 길노인 잘못 들었거나, 이


사진이 김일병의 가족사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의 돼지 목동생활에도 문제가 발생되었다. 잘 먹지


도 못하고 비실비실하기만 했던 돼지 새끼들이 하루아침에 13마리가 몽당 다 죽어버렸다.


06시에 기상해서 아침 점호를 취하고 돼지우리로 가보니 돼지 새끼들은 전부 뻗어 있었다. ‘짜 -식들, 내가 학대한 것도 아닌


데, 왜 죽었을까?’ 내가 돼지우리에 도착하면 모두 꿀꿀거리고 내 앞으로 몰려오던 녀석들이다. 그런데 오늘은 모두가 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것도 13마리 모두가 말이다.


불룩한 배가 움직이질 않는 것을 보니, 숨을 안 쉰다는 것이고. 숨을 안 쉰다는 것은 곧 죽었다는 것이다. 막대기로 배를 쿠쿠


찔러 봤다. 움직이질 안했다. 나는 우리에 들어가서 돼지를 살폈는데, 외상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콧잔등부


터 두개골 정수리를 타고 등허리에서 꼬리까지 바늘로 콕콕 찌른 것처럼 바늘자국 같은 곳에 핏방울 딱지가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13마리 전부가 그랬다. ‘에고, 이제 큰일 났다.’ 이 사건은 전적으로 돼지목동이 지어야 할 판이다. 우리 대대의 돼지


목동은 나 하나였다. ‘제기랄!’


“필승! 중대장님께 보고 합니다.”


“야- 이 새끼야. 냄새난다. 씻고 와서 보고 해라.”


“네- 보고하고 씻겠습니다.”


“근데, 이 새끼가 대대장인 봐 주니까. 기고만장을 했나.”


그때 알았다.


대대장은 육사 출신으로 독일 대사관 무관으로 갔다가 전방부대 지휘관을 하고 국방대학원에 가려고 우리부대에 온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삼국시대 백제에서 시작돼 고려시대에 완성을 본 수박도를 가르치고 있었다. 백제시대나 고


려시대의 수박도라는 말은 무기를 들지 않고 맨손으로 하는 모든 무술을 총칭했다. 그러나 맨손으로 하는 무술을 백제에서


는 수박희라고 하였고 신라에서는 택견이라 했다.


고대 무인들은 무기를 다루는 병장기훈련을 많이 했지만, 마음을 닦기 위해서는 맨몸으로 수련하는 무술을 택했다고 한다.


수박도에 ‘도’자를 쓰는 것은 몸을 단련하여 마음을 닦는 수련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무인들은 근원적으로 몸의 고통을 인


내하며, 명상하는 마음수련에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그런지 무인들은 자기가 수련하는 무술에 딱히 명칭을 정해서 부른 것


은 아니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또 하나의 우리나라 맨손 무술이 탄생되는데, 자연의 만물에서 큰 힘을 빌려온다는 뜻의


차력이 그것이다. 그 차력이라는 무술의 시조는 고려 때의 명장 강감찬 장군으로 되어있다.


차력이라는 무술은 삼국시대에는 큰 힘이라는 말로 ‘한풀’이라고 하는 무술로 한민족 무술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어찌 되었


건 조선말기까지는 맨손으로 하는 무술을 수박도니, 택견이니, 차력이니, 한풀이니, 하는 등으로 불러지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무도인들이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일인들의 무술과 함께 야와라, 합기도, 공수도, 당수도, 수박도, 택


견 등으로 불러지게 된다. 그런데, 일본의 가라테는 그 무술의 원조가 고려의 수박도라 할 수 있다.


고려의 삼별초가 원에 끝가지 대항하면서 탐라도인 제주도로 그 거처를 옮겼다가 려•원의 관병의 추격을 뿌리치고 삼별초


의 이상향인 이어도를 찾게 된 것이다. 삼별초가 찾은 이어도는 지금의 오키나와였고 삼별초군은 오키나와에서 류큐왕국을


건국하게 된다. 그리고 1879년 가라데가 일본 본토에 퍼질 때, 오키나와에서 온 맨손무술이라 해서 오키나와 카라데라 불렸


다. 그리고 1899년에 중국 산동에서 일어난 북청사변인 단비의 난이 1900년에 진압되면서 의화단에 속해 있던 중국 무술고


수들은 체포되는 것을 피해 한국으로 피신하게 된다. 그때 들어온 주요 중국무술로는 산동의 당랑권, 호북의 팔패장, 영남의


태극권, 영춘권, 형의권, 하남의 소림권, 장권, 강소의 육합권, 등이다. 이러한 현상 속에서 조국이 광복이 되자. 남쪽에서는


8.15광복절을 기념하는 행사가 동대문 운동장에서 있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모시고 당수도(唐手道는 唐나라 맨손 무술이라는 뜻이다. 당수도의 모든 동작은 중국의 장수 이름으


로 되어 있었다) 시범을 보였다. 이때 이승만은 ‘택견 잘 한다.’하고 박수를 쳤다. 옆에서 들고 있던 꼴사나운 아첨꾼들은 이


승만이 좋아하는 꼴을 보자,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무술에 대해 ‘武’자도 모르는 자들이었나 보다. 그


래서 이승만 대통령이 뱉은 ‘택견’이라는 말이 한자어인줄 알았다. 아첨꾼들이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그들은 맨발과 맨손을


사용하는 무도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그래서 태권도跆拳道라는 명칭이 유래된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한민국의 건국초기였기에 우리의 고유무술을 새롭게 탄생시키고자 하는 우국충정의 발로가 있었나보다. 그때는 조국 땅


에 외세의 무술이 더 설치는 형국이어서 해방을 맞은 조국에 전통무술이 꼭 필요하다고 느낀 우국지사들도 태권도를 탄생


시키는데 한몫했다. 그런 호응에 한국 무술인들도 태권도로 명칭을 개칭하는데 동참했다.


우리 대대장도 한국 무술의 내력을 잘 알고 있는 군인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태권도가 스포츠 무술로 변신하기 이


전인 무술 원형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대대장은 날 시험하고자 했다. 그래서 나는 군에서도 매일 수박도라든가, 중국무술, 태권도 등을 수련해야 했었다. 부대 내


에는 있는 무술 유단자라면 사병인건 장교건 가리지 않고 나와 대련을 시켰다.


대련에서 전승을 거두고 있었던 내가 대대장 눈에 들었는지, 대대장은 나를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는 모르겠는데, 유독 본부 중대장은 나를 미워했다. 내가 대대장 무전병으로 있을 때, 중대장은 보병연대 연락장교였다. 연


대의 연락상황은 평시에는 유선 전화이고 훈련 시에는 무선으로 하게 된다.


우리부대에서 보병연대에 파견 나가있는 연락장교는 보병연대를 지원하는 포병대대의 지원사격 때문이다. 훈련 시에 보병


연대에 파병된 연락장교는 포 지원요청을 대대장 무전병을 통해서 한다. 그런데 대대장은 연락장교의 역할을 좀 못마땅하


게 생각했다. 그리고 연락장교는 대대장에게 잔소리를 듣고 나면 나에게로 와서 ‘잘 좀 전해 줘!’했던 군발이었다. 중대장은


그때의 감정이 있었던 것 같았다.


사실 연락장교의 역할은 별개 아니다. 연대의 상황을 신속 정확히 전달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매일 타 지원부대 연락


장교보다 늦게 보고 해서, 부대장에 찍힌 것이다.


“열세 마리 돼지가 다 죽었습니다.”


“근데, 이 새끼가, …”


중대장 군화의 앞날이 내 정강이를 강타했다.


쪼인터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앞날로 차질 않는다. 보통은 안쪽 옆 날로 차는 것인데, 이렇게 앞날로 세게 들러오는 것은 정


강이를 부러뜨리겠다는 것이다. 나에 대한 악감정이 아직 남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왜, 죽었는가?”


중대본부 사무실로 들어오던 인사계였다.


김상사는 내가 중대장한테 보고하는 것을 듣고 있었나 보다. 중대장보다 서너 살 위인 김상사가 열린 문 안으로 들어오면서


내게 묻는 것이었다.


“모기한테 물려 죽은 것 같습니다.”


“히-야- 이 새끼가 구라를 쳐도 그렇지. 인마, 돼지비계를 모기가 어떻게 뚫어? 이 새끼가, … 김상사, 안 그런가?”


돼지를 모르는 중대장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나도 그랬으니까.


FEBA 지역이나 GOP 지역의 모기는 정말 대단하다. 일단 수적으로 당할 수가 없다. 말로 들었던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유사


한 것 같다. 죽어도, 죽어도 계속 나타나 침을 꽂는다. 어떤 피부의 땀구멍에는 두 마리가 한꺼번에 침을 꽂고 빨고 있는 경우


도 목격된다.


페바지역의 군대에서 가장 겁나는 것이 ‘팬티바람에 집합’인데, GOP지역이나 FEBA지역에서는 겨울보다 여름철이 더 겁난


다. 얼음판 위에서 낮은 포복으로 기는 것보다 여름철 팬티 바람에 부동자세가 더 무섭다. 일명 ‘모기회식’이다. 한 여름 취침


전에 팬티바람에 집합하면 활동 중인 인근의 숲속 모기들이 다 모여든다. 그리고 팬티만 입은 병사들이 연병장에서 차렷 자


세를 취하는데, 단 5분 안에 양팔 안쪽과 겨드랑이 사이에서 아래로 배 옆구리까지 새빨간 피로 범벅이 된다. 팔로 비벼서 흡


혈하던 모기가 압사해서다. 이런 것도 기합라고 착안한 고참병들 몇 명은 팬티만 입은 병사들 주위를 돌면서 움직이는 병사


의 등짝이고 허벅지고 탄창벨트로 후려치지만, 그래도 가려움을 참을 수가 없다. 팔을 비틀면서 옆 가슴팍과 배 옆구리를 비


벼댄다. 그렇게 10여분 동안 피의 향연인 모기회식을 끝내고 내무반으로 들어와 등불 밑에서 옆구리를 쳐다보면 모두 흡혈


귀가 핥고 간 핏자국들이다.


살가죽의 모공 사이사이로 머리를 처박고 흡혈했던 모기들이 압사 당한 것이다. 거머리처럼 통통하게 부풀러 올랐던 모기의 배가 터져서 흘린 소화가 안 된 혈액이다. 그래서 새빨갛게 선혈이 낭자한 것이다.


돼지들은 온 몸을 비계로 엎어 싼 것 같아도 약점이 있었다. 콧등과 등뼈의 한복판은 모기가 빨대기모양의 대롱 주둥이를 꽂


고 흡혈하기 매우 좋은 위치다. 돼지 등뼈 사이사이는 털이 듬성듬성하고 비계도 없고 혈관이 많이 지나간다. 모기가 돼지를


만나면 최고의 만찬거리를 발견한 거와 같다. 그리고 돼지는 소처럼 꼬리를 휘두를 수도 없고 혀로 콧등을 핥을 수도 없다.


집돼지는 도망치는 전술뿐이 없는 동물이고 야전에서는 진흙 목욕을 해야 하는데, 우리에 갇혀 있으니, 모기의 어마어마한


떼거지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모든 피를 내어주고 돼지들은 이곳에 온지 이십 여일 만에 전부 죽었다.


나는 28무전반에서 기르는 토끼들을 살펴보았다. 토끼는 온몸을 푹신하고 촘촘한 털로 감싸고 있기에 괜찮겠지 했다. 그러


나 토끼들도 수난을 당하고 있었다. 역시 털이 안 난 곳을 골라 관모양의 빨대기 주둥이를 꽂아 흡혈한 것이다. 토끼의 빨간


눈까풀과 콧등에 돼지들처럼 방울방울 피딱지가 맺혀 있었다. 숲속의 모기를 상대하는 야생에서는 집돼지보다는 집토끼가


더 기문둔갑에 철저했다. 하지만 토끼도 밤마다 모기약을 분사시켜야 했다.


한번은 야간 내무반 동초를 보는 병사가 막사의 방충망을 살펴보다가 ‘으-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모기들이 방충망 사각 채


구멍에 머리를 디밀고 들어오는 있는 것이었다. 내무반 동초를 보던 병사가 기겁을 하고 모기약을 분사시켰다. 그리고 가을


날에 찬바람이 불 때까지 내무반에서는 신선한 공기 맛을 보지 못했다. 모기들이 방충망 코에 걸려 고사했기 때문이다. 모기


의 사체로 방충망이 전부 막혀 있었다. 그 이후로는 부대에서 모기회식은 없어졌다.


사단에서 돼지사체를 검시하려 왔다. 검시장교는 의무관 같았다.


“대대장님, 돼지는 돼지콜레라로 죽은 걸로 합시다.”


“발생하지도 않은 병명을 보고서에 써도 괜찮겠소?”


“어찌 합니까? 다른 전방 부대도 다 그렇게 했으니까 그렇게 합시다. 모기한테 물려 죽었다면 사단장이 그걸 믿겠습니까?”


“하지만, 전염병으로 죽었다면 누군가가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소?”


“그건 대대장님이 목동병을 자대 징계 위원회에 회부해서 정당히 기록을 남겨 보고하면 되지 않소?”


‘이런 우라질 일이 있나?’ 소설을 쓰자는 것이다. 사실 여부보다는 그럴 뜻한 일로 보고서를 꾸미고 책임한계도 최소화시키


는 방향에서 마무리 짓자는 것이다. 군발이들의 사고방식은 위건 아래건 다 이렇다. 이렇게 되면 나 정도의 선에서 끝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시 의무관도 중령이었다. 군대는 대개의 자체 감사를 하게 될 경우 같은 계급이 감사를 하고 평가


를 한다. 아마 계급사회에서의 형평성 문제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사단장의 하사품인 13마리의 돼지사체는 생석회가 뿌려


지며 매장되었다. 이 사건으로 자대 징계 위원회가 열렸다. 나는 그때까지 군부대 내에 자대 징계위원회가 있다는 것도 몰랐


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징계위원회 위원장이 본부 중대장이었다.


포병대대의 중대장급 위관장교 중에 대위 계급은 인사업무와 회계 업무를 맡는 1과장, 정보계통인 2과장, 상황실의 작전과


장인 3과장, 3과장은 소령이나 소령 진급을 앞둔 대위가 맡는다. 그리고 4과장인 병참과장, A포대장, B포대장, C포대장과


수송부의 중대장 등이 보통 대위인 위관장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대장은 중령, 부대장은 소령 계급이다. 그렇게 징계 위원


회의 위원들은 대대의 과장급인 대위들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위원회에서는 아마 조상병을 사단 영창을 보내야 하느


니, 요새화하는 군자산 갱도 작업병으로 보내야 하느니, 뭐 그렇게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그런 것을 대대장이 보류하고 있


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군으로써는 휴전 이후 가장 거대한 사건이 터졌다.


6.25동란 이후론 처음으로 전쟁 준비단계인 데프콘 3가 발령되었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이 터진 것이다.


**             ............................................>> 3부: <<테프콘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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