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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렬, 「거미의 생에 가보았는가」

  • 작성일 2018-11-22
  • 조회수 3,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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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caption]




고형렬|「거미의 생에 가보았는가」를 배달하며…


시인들은 종종 아버지 흉을 봅니다. 실비아 플라스는 시에다 “아버지, 개자식”이라고 쓰기도 했어요. 이 시의 늙은 학생 같은 남자 역시 좋은 아버지는 아닙니다. 아버지, 장남이라 귀하게 여기고 막내라서 이뻐하는 일도 없이 참으로 공평하게 내다버리셨군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시에서 미움 대신 슬픔이 느껴집니다. 찢어진 벽지 속으로 들어갔던 ‘나’는 아버지처럼 늙은 학생 같은 아버지가 되었어요. 식구들은 내다버리고 검은 책만 챙겼던 아버지, 검은 책으로 혼자만의 집을 짓던 아버지처럼. 그러고 보니 거미는 참 쓸쓸한 곤충이네요. 늘 뿔뿔이 흩어져, 바람에 자기의 실이 가닿는 대로 집을 지으니 말입니다. 거미의 생에 가보니 혼자 집을 짓는 일이 우리의 숙명인 듯 느껴집니다. 그리고 아버지, 당신의 생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인 진은영


작품 출처 : 고형렬 시집,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창비, 2010.



문학집배원 시배달 진은영

▪ 1970년 대전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
▪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상담 교수
▪ 2000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저서 『시시하다』,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 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를 향하여』, 『문학의 아포토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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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8건

  • 후추

    밖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줄이 흔들리는 백열등 하나 걸고 책을 보는 한 남자도 마치 거미같은 생을 살고있는 것 같다. 그래서 7연의 두번째 행이 그 남자가 먼지처럼 날아갔다는 듯이 들린다. 손으로 꼭 눌러죽이는 잔인함 없고, 소리로 들리지는 않지만 둘째 거미의 앙 하는 울음을 마음에 그려보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니 이 남자도 마음 한구석 꽃잎 같은 부분 있었으리라 생각해본다. 황토로 만든 집, 벽지가 찢어진 집에서 이 남자가 읽던 검은 책은 무엇이었을까. 바람이 방 안으로 부는데 옷은 따뜻이 입었을까. 왠지 아닐 것 같다. 거미의 이야기는 '미래사'라는 말로 마치는데, 남자는 거미가족들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나 싶다. 그것이 꼭 그 남자의 미래가 되리란 법은 없다. 그러나 이 시가 섣불리 희망을 말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 자리 그 마음에 같이 머물러주는 것이 때로는 필요하니까..

    • 2018-12-06 17:47:51
    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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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른상아

    우리에게 왜 생이 주어지는 것일까...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이 생은 어떤 의미일까... 이 시 속의 거미 가족에게만 문지방이, 슬픈 소리를 내는 것들이 존재하지는 않는 것 같다. 긴 고통의 순간, 짧은 순간의 희열. 또 다른 난관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생은 비극에 가깝다. 그래서 욜로나 소확행같은 말들이 유행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젊은 시절에는 그것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이 남자가 보고 있는 검은책이 나에게는 성경책으로 보였다. '늙은 학생'같다는 표현이 여전히 책 속에서, 이론 속에서 이 생의 이유를 찾으려는 태도로 읽혀졌다. 나도 많은 시간 종교에서, 학문에서 그 대답을 찾으려 노력했던 것 같다. 물론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뭔지 모르게 공허해 지는 지점이 있었던 것 같다. 그에 반해 치열하게 삶의 현장에 놓여있는 거미 가족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생을 향해 분투하는 그들의 태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슬프다는 생각조차" 끼어들 틈이 없는 가족의 비극적 미래사도 받아들이며,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그들의 삶이 지금 나에겐 더 와 닿는 것 같다.

    • 2018-12-02 23:07:36
    푸른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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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곡안개

    이 시를 읽으면서 문득 20대 때에 부모로부터 독립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독립하기 전 유교적인 정서가 몸에 가득 하신 나의 아버지를 나는 아버지라고 잘 부르지도 못하고 함께 생활했다. 하루에 단 한 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은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저 가끔 마주치는 서로의 눈빛 하나로 대화할 뿐이었다. 자식에 대한 정을 절대 표현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해서 나는 치쳐갔다. 지치다 못해 때론 버림받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중엔 기대하지도 않았고 나 또한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자라서 날개가 굳건해진 새끼 새가 스스럼없이 둥지를 떠나듯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독립하였다. 독립한 곳은 바로 고시원 쪽방이었다. 누워서 양팔을 다 벌릴 수 없는 쪽방에 누워있으면 마치 관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옆방에 있는 사람의 숨소리 까지 들리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자유로웠다. 나의 육신은 관속에 있었지만, 나의 정신은 태평양바다를 가로지르는 한 마리 갈매기였다. 떳떳하고 자유로운 날갯짓으로 .......

    • 2018-12-02 19:47:25
    계곡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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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alm

    나의 첫 원룸에 이삿짐을 풀었던 날, 엄마 아빠가 떠나는 차를 배웅하던 나는 목 끝까지 무언가 차올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사 전 날까지 난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늙은 나의 엄마 아빠에게 그렇게 소리를 질러야 했을까. 방을 구할 때부터 시작되었던 아빠와 나의 긴 다툼은 이삿날 아무래도 아빠차가 필요한 이유로 임시 중단되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나답게, 나로서 살아도 괜찮다고 나 스스로에게 오롯이 증명해내고 싶어 부모님의 집을 나오는데도 부모님은 계속 부모님의 방식으로 나를 도우셨고, 나와 부딪혔다. 부모님의 방식이 틀려서가 아니라, 나는 내 뜻대로, 내 방식대로 하고 싶었다. 그게 부모님 생각에 비효율적이고, 답답할지라도. 하지만 부모님은 내가 아무리 밀어내어도 나를 위하고, 또 위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퉜다. 이 방에 오기까지 다사다난했지만, 결국 모든 게 다 괜찮아서 다행이라고, 첫날 밤 나는 일기를 썼다.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 맨몸으로 우왕좌왕하다 끓인 물을 섞어 샤워를 해야했지만, 괜찮았다. 여행 온 기분이 들기도 했다. 독립의 둘째날은 사실 아팠다. 밤새 심한 복통에 시달렸고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그렇게 온 몸으로 울었다. 몸 속 수분을 다 짜내고 박스로 둘러쌓인 방바닥에 널부러져있다가, 열이 오르고 손발이 떨려오는 데 죽을 끓여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외투를 걸쳤다. 집 앞 문을 연 어떤 가게에 들어가 약국이 어디냐고, 죽은 어디서 살 수 있냐고 물었다. 누군가는 저 거미처럼 마음의 준비 없이 가족과 생이별을 당했을테고, 나는 수년을 벼르고 벼르다 가까스로 이렇게 떨어져 나왔다. 결국은 다 그렇게 각자의 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리라.

    • 2018-12-02 15:34:40
    ba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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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살토끼

    '거미의 생'이라는 단어를 읽으면서 제일 먼저 떠올랐던 건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봤던 루이스 브루주아의 '마망'이다. 마망 탓인지 나에게 거미는 모성애를 먼저 떠올리게 하는 곤충이다. 거미의 종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거미는 사마귀처럼 교미 후 암컷이 수컷을 잡아 먹는다고 한다. 그리고, 처음엔 애거미끼리 모여 있거나 어미거미 곁에 있지만 나중에는 흩어져서 독립생활을 하는 특성이 있다. 아버지를 잃고, 어미와 함께 새로운 방으로의 삶을 시작하는 거미 가족의 이야기. 시 속의 '늙은 학생같이 생긴 남자'는 나에겐 무심한 듯 하지만, 다정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곤충을 싫어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발견되었다면, 아마도 그 자리에서 거미가족의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어야만 했을 꺼다. 남자의 손길로 인해 독립생활의 시작이 예상보다 빨리 시작되었을 수는 있지만, 어찌되었건 '나'도 새로운 방의 흙 속으로 자신만의 집을 지으러 들어가게 된다. 삶이란 어쩌면 거미처럼 혼자 집을 짓고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숙명이라면, 삶에서 나같이 매정한 손길이 아닌 무심한 듯 해도 다정한 '늙은 학생같이 생긴 남자'의 손길을 만날 수 있기만을 기대할 뿐이다.

    • 2018-12-02 10:08:03
    햇살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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