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원, 「불펜의 시간」 중에서


불펜의 시간 - 김유원

혁오는 진호뿐만 아니라
프로가 되지 못한 수많은
아마추어 선수들에게도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강박의 진화였다.
야구복을 입은 중고교 야구부원의 환상들이
떼 지어 나타났고,
혁오는 그들 모두에게 볼넷을 줄 수밖에 없었다.
계속된 볼넷으로 2군에서도 방출될 위기에 처하자
혁오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를 느꼈다.
볼넷을 주는 정도의 벌로는
진화한 강박을 해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작가 : 김유원
출전 : 『불펜의 시간』 (한겨레출판, 2021)

 

 

김유원 ┃「불펜의 시간」을 배달하며

 

    야구를 잘 모르지만 친구를 따라 야구장에 가본 적 있습니다. 응원하는 무리에 섞여 타자가 친 공이 떠오르는 걸 지켜보노라니, 야구는 공이 그리는 아름다운 포물선을 보기 위한 경기가 아닐까 싶어졌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 파울볼이나 뜬공을 보는 것도 좋더라고요. 아무래도 야구를 잘 모르기 때문에, 딱히 응원하는 팀이 없어서 해본 생각이겠지요.
프로 스포츠니까 당연히 야구는 승부를 내야만 합니다. 이긴 팀이 있으면 지는 팀이 있고, 동점이 되면 연장전에 돌입해서라도 승패를 결정 짓습니다. 당황스럽게도 주인공 혁오는 경기에서 이기는 것을 피하고자 일부러 볼넷을 던져왔습니다. 남들은 선발투수가 되고 싶어하지만 혁오는 계투가 되고자 했고요. 아시다시피 계투는 경기 중간에 한 두 이닝 던지고 들어가는 투수를 가리킵니다. 승리 투수도, 패전 투수도 될 수 있지만 가급적이면 자신이 승부를 결정짓지 않으려고 이런 선택을 했습니다. 혁오는 이기거나 지지 않는 방식으로 승부의 이분법에 균열을 내고자 합니다. 처음에는 죄책감과 강박감 때문에 시작한 일이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는 시스템의 관습에 환멸을 느낀 탓이겠지요.
이기거나 지는 것 말고 다른 방법도 있다고, 작가가 세계를 향해 던진 센 직구를 받아들었으니, 이제 독자인 우리가 이 공을 어디로, 누구에게, 어느 속도로 던질지 궁리해야 할 차례입니다.

 

시인 박준

 

작가 : 김유원

출전 : 『불펜의 시간』 (한겨레출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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