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 「생각하면 좋은 것」 중에서


생각하면 좋은 것 중에서 - 박연준

좋아하는 이의 옷을 입고 외출하는 일은 좋다. 그의 체취가 깃든 스웨터나 품이 넉넉한 셔츠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일은 좋다.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일은 좋다. 볕이 따듯한 겨울 날씨는 좋다. 파주에 눈이 내릴 때, 발이 푹푹 빠져 기우뚱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은 좋다. 향이 진한 드립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더 좋다. 

밤에 혼자 깨어있는 일은 좋다. 물구나무를 서거나 오래된 책을 뒤적이는 일, 그러다 반짝이는 문장을 발견하는 일은 좋다. 모르는 고양이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눈키스’를 해주는 일은 좋다. 선잠에 들었는데 누가 이마를 쓸어주고 가는 일은 좋다. 그 상태로 모른 채 조금 더 자는 일은 좋다. 까닭 없이 당신에게 쓰다듬을 받는 일은 좋다. 

처음 본 사람과 비밀을 나누는 일은 좋다. 의무감 없이 하는 모든 일은 좋다. 순전히 ‘재미로 쓰는’ 글은 좋다. 시 쓰고 싶은 마음 상태는 좋다. 쓴 시가 스스로의 마음에 꼭 들 때는 더없이 좋다. 당신의 글을 읽고 생각이, 마음이, 생활이, 어쨌거나 무언가가 변했습니다, 말해주는 독자는 좋다. 그가 건넨 손 편지는 더 좋다.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데 지루하지 않은 소설을 읽는 일은 좋다. 존 버거, 아모스 오즈, 마르그리트 뒤라스, 파스칼 키냐르, 언어로 춤추는 작가들의 책을 읽는 일은 언제나 좋다. 

봄날, 강릉 바다에 가는 일은 좋다. 허난설헌 생가에 가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일은 좋다. 일주일에 한 번 베란다 화분에 물을 주는 일은 좋다. 한곳에서 오래, 식물을 바라보는 일은 가장 좋다. 여름에 버드나무 아래를 걸어가는 것, 그해 첫 팥빙수를 먹는 순간, 호텔 조식에 멜론이 나오는 것은 좋다. 몸에 맞는 청바지를 발견하고 사는 순간은 좋다. 당신이 먼 곳에 갔다 선물을 들고 돌아오는 일은 좋다. 고전적인, 옛 말투로 쓴 메일을 읽는 일은 좋다. 

봄날 새순처럼 기지개를 켜는 일은 좋다. 치마를 입고 외출하는 일은 좋다. 재미로 타로 점을 보는 일, 여행할 때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좋다. 책을 읽다 놀라운 생각을 만나는 순간은 좋다. 드디어, 책의 초고를 끝내는 순간은 좋다. 여러 번 교정을 보고, 최종 교정지를 넘기며 손 터는 순간은 좋다. 

섬세하고 자상한 남자를 만나는 일은 좋다. 옆모습이 아름다운 여자를 보는 일은 좋다. 튼튼하고 견고한 물건을 만지작거리는 일은 좋다. 흰 옷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멀리서 걸어올 때 좋다. 질이 좋은 스웨터를 입고, 비 오는 카페에 앉아있는 일은 좋다. 

몽우리 진 목련을 처음 발견하고 감탄하는 일은 좋다. 사월의 은행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풍경, 모퉁이를 돌 때 훅 끼치는 라일락 냄새는 좋다. 동물을 사랑하는 노인을 보는 일은 좋다. 당신을 막 생각하는데, 당신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는 좋다. “사랑을 나누다”라는 말은 좋다. 어젯밤에 시를 썼어요, 하고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 거기에 묻은 ‘물기’는 좋다.



작가 : 박연준
출전 : 『쓰는 기분』 (현암사, 2021) p.90-p.92

 

 

박연준 ┃「생각하면 좋은 것」을 배달하며

 

    이 글을 읽는 동안 ‘생각하면 좋은 것’들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러셨을 테지요.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 나무 그늘에 놓인 의자, 바람에 일렁이는 느티나무 잎사귀, 밤 늦게 눈이 쌓이는 소리, 천천히 걸어가는 할머니의 뒷모습, 한겨울의 마가목 열매, 강가의 반짝거리는 윤슬, 같은 곳을 보고 나란히 앉아 있는 사람들…… 이런 것들이요.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는 것으로도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세상이 조금 더 반듯해 보입니다.
작가는 이 글 바로 옆에 ‘시를 쓰는 방법 중 한 가지’라는 작은 제목의 페이지를 배치해 놓았습니다. 그 중 첫번째가 ‘생각하면 좋은 것의 목록을 작성해’보는 일이에요.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작성한 후에, 작가는 그것이 왜 좋은지, 어떤 마음으로 좋은지 생각해 보라고 권합니다.
그러고 보면 시의 마음, 즉 시심이라는 것은, 좋아하는 것을 가만히 떠올려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모양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생각할 때의 마음의 무늬를 세심히 살펴보고 그 마음에 어울릴 만한 말을 가만히 곁에 놓아두는 일. 그것이 시를 쓰는 첫번째 순서일 겁니다.

 

소설가 편혜영

 

작가 : 박연준

출전 : 『쓰는 기분』 (현암사, 2021) p.90-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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