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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미, 「빛멍」

  • 작성일 2022-01-27
  • 조회수 1,744




 빛멍 -이혜미 돌이켜보아도 무례한 빛이었다. 최선을 다해 빛에 얻어맞고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길이었다. 응고되지 않는 말들, 왜 찬란한 자리마다 구석들이 생겨나는가. 너무 깊은 고백은 테두리가 불안한 웅덩이를 남기고. 넘치는 빛들이 누르고 가는 진한 발자국들을 따라. 황홀하게 굴절하는 눈길의 영토를 따라. 지나치게 아름다운 일들을 공들여 겪으니 홀로 돋은 흑점의 시간이 길구나. 환한 것에도 상처 입는다. 빛날수록 깊숙이 찔릴 수 있다. 작은 반짝임에도 멍들어 무수한 윤곽과 반점을 얻을 때, 무심코 들이닥친 휘황한 자리였다. 눈을 감아도 푸르게 떠오르는 잔영 속이었다. 작가 : 이혜미 출전 : 『빛의 자격을 얻어』 (문학과지성사, 2021)



이혜미 ┃「빛멍」을 배달하며


빛에 멍이 든다는 것. “환한 것에도 상처”를 입는다는 것. 곰곰 생각해보니 알 것도 같습니다. 오래 전 선물 받은 그림 한 점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이 그림은 네모난 액자에 고이 들은 것은 아니었고 캔버스도 아니었습니다. 그해 우리는 카페에 앉아 있었지요. 유리창 너머에는 맑게 개인 하늘이 있었고 그 아래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그는 노트를 펴고 가방에서 펜을 꺼내 눈 앞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풍경을 담은 환한 그림. 이내 그는 노트의 페이지를 주욱 찢어 제게 건냈습니다. 오른쪽 하단에는 그날의 날짜를 함께 적어주었습니다.
저는 이 그림을 제 방에서 가장 잘 보이는 벽면에 걸어두었습니다. 볼 때마다 정감이 가는 그림. 문제는 그림이 점점 바래갔다는 것입니다. 얇고 연한 선부터 지워지기 시작해 한두해가 더 지나자 그 그림은 다시 백지처럼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백지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미 지워지기 전의 그 형상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희미한 잔영만으로도 원래의 그림을 재현할 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이것도 빛멍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환한 멍.


시인 박준


작가 : 이혜미

출전 : 『빛의 자격을 얻어』 (문학과지성사, 2021)



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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