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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 「비둘기에게 미소를」 중에서

  • 작성일 2022-04-28
  • 조회수 793


비둘기에게 미소를 중에서 - 이경

비둘기가 온 후 온라인 강의에 과제까지 적잖게 밀렸다. 코 점막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배설물 냄새와 시도 때도 없는 날갯짓 때문에 도무지 집중하기 어려웠다. 휴무일에 보충하려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새 학기 교육대학원에 진학하려면 늦어도 한 달 안에 필요한 학점을 전부 이수해야 했다. 내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류는 다친 비둘기와 새끼 고양이를 돌보는 일에 날 끌어들였다. 간호사들에게 들키면 곤란해지니까 갖은 핑계를 대며 떠맡긴 건지도 몰랐다. 
“이 녀석 상처는 이제 거의 다 아물었을 겁니다. 넉넉잡고 다음 주면 날릴 수 있을 거 같아요. 비둘기가 여기 있는 한, 고양이는 제가 책임지고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서 비둘기만 봐주시면 됩니다.”
류는 희미하고 온유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배운 적도 없는 내게. 
“간호사들이 사무실에 내려와 비둘기를 발견하게 되면 어떡해요. 날 고용한 회사 입장도 곤란해진다고요.”
지하 사무실로 내려온 후 접수대에선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았다. 박도 없는 지금, 이 병원에서 내게 용건이 있는 사람은 류가 유일했다. 
“걱정 말아요. 간호사들은 지하로 내려온 적 없거든요.”
류의 미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혼자 남게 되자 더욱 신경이 곤두섰다. 놈은 가슴 깃털을 한껏 부풀리더니 구르륵구르륵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앓는 것처럼 들려서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서랍에서 새 붕대를 꺼냈다. 날개를 감은 붕대는 더러워지다못해 삭아서 원래 색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비닐 장갑을 끼고 케이지 앞에 쪼그려앉았다. 팔을 깊숙이 넣어 한쪽 날개를 잡았다. 다른 손으로 등을 세게 누르자 위협을 느낀 비둘기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회색 깃털이 사방으로 날렸다. 솜털이 코와 입으로 들어왔다. 기침이 발작적으로 쏟아졌다. 알레르기가 생겼는지 눈물, 콧물까지 줄줄 흘렀다. 손아귀에 비둘기를 곽 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악!”
놈이 손등을 사정없이 쪼았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나자바진 사이, 비둘기는 매서운 발톱으로 이마를 할퀴고 공중으로 차올랐다. 미간이 얼얼했다. 통증인지, 충격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오물로 얼룩진 붕대가 정수리 위로 펄럭였다. 말라 바스러진 배설물이 비듬처럼 공중에 날렸다. 주체할 수 없는 환멸이 온몸을 우그러뜨렸다. 비둘기가 아니라, 류가 아니라, 간호사들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환멸이었다. 
이제 아무도 내게 미소 짓지 않을 것이다. 
회사에 전화해 그만두겠다고 했다. 매니저는 알겠다고 했다. 로비에서 책상도 /뺐는데 사람마저 없으면 난처하니 후임이 올 때까지만 자리를 지켜달라 했다. 홀가분했다. 이제 비둘기도, 고양이도 누군가 돌볼 것이다.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교육대학원 진학은 늦춰야 할지도 몰랐다. 
후임은 오지 않았다. 사람이 좀처럼 구해지지 않는다고, 매니저가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다. 한 달 급여치곤 너무 적은 게 문제였다. 근무 시간을 늘리면 될 테지만 회사 입장에선 인건비가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케이지도 여전히 그 자리였다. 어제 류가 산책로에서 비둘기를 날려봤지만 도통 날개를 펼치지 않았다. 나는 법을 잊은 것 같다고 했다. 




작가 : 이경
출전 : 『비둘기에게 미소를』 (문학동네, 2021) p.28-p.31
비둘기에게 미소를 중에서 - 이경

비둘기가 온 후 온라인 강의에 과제까지 적잖게 밀렸다. 코 점막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배설물 냄새와 시도 때도 없는 날갯짓 때문에 도무지 집중하기 어려웠다. 휴무일에 보충하려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새 학기 교육대학원에 진학하려면 늦어도 한 달 안에 필요한 학점을 전부 이수해야 했다. 내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류는 다친 비둘기와 새끼 고양이를 돌보는 일에 날 끌어들였다. 간호사들에게 들키면 곤란해지니까 갖은 핑계를 대며 떠맡긴 건지도 몰랐다. 
“이 녀석 상처는 이제 거의 다 아물었을 겁니다. 넉넉잡고 다음 주면 날릴 수 있을 거 같아요. 비둘기가 여기 있는 한, 고양이는 제가 책임지고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서 비둘기만 봐주시면 됩니다.”
류는 희미하고 온유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배운 적도 없는 내게. 
“간호사들이 사무실에 내려와 비둘기를 발견하게 되면 어떡해요. 날 고용한 회사 입장도 곤란해진다고요.”
지하 사무실로 내려온 후 접수대에선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았다. 박도 없는 지금, 이 병원에서 내게 용건이 있는 사람은 류가 유일했다. 
“걱정 말아요. 간호사들은 지하로 내려온 적 없거든요.”
류의 미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혼자 남게 되자 더욱 신경이 곤두섰다. 놈은 가슴 깃털을 한껏 부풀리더니 구르륵구르륵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앓는 것처럼 들려서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서랍에서 새 붕대를 꺼냈다. 날개를 감은 붕대는 더러워지다못해 삭아서 원래 색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비닐 장갑을 끼고 케이지 앞에 쪼그려앉았다. 팔을 깊숙이 넣어 한쪽 날개를 잡았다. 다른 손으로 등을 세게 누르자 위협을 느낀 비둘기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회색 깃털이 사방으로 날렸다. 솜털이 코와 입으로 들어왔다. 기침이 발작적으로 쏟아졌다. 알레르기가 생겼는지 눈물, 콧물까지 줄줄 흘렀다. 손아귀에 비둘기를 곽 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악!”
놈이 손등을 사정없이 쪼았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나자바진 사이, 비둘기는 매서운 발톱으로 이마를 할퀴고 공중으로 차올랐다. 미간이 얼얼했다. 통증인지, 충격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오물로 얼룩진 붕대가 정수리 위로 펄럭였다. 말라 바스러진 배설물이 비듬처럼 공중에 날렸다. 주체할 수 없는 환멸이 온몸을 우그러뜨렸다. 비둘기가 아니라, 류가 아니라, 간호사들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환멸이었다. 
이제 아무도 내게 미소 짓지 않을 것이다. 
회사에 전화해 그만두겠다고 했다. 매니저는 알겠다고 했다. 로비에서 책상도 /뺐는데 사람마저 없으면 난처하니 후임이 올 때까지만 자리를 지켜달라 했다. 홀가분했다. 이제 비둘기도, 고양이도 누군가 돌볼 것이다.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교육대학원 진학은 늦춰야 할지도 몰랐다. 
후임은 오지 않았다. 사람이 좀처럼 구해지지 않는다고, 매니저가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다. 한 달 급여치곤 너무 적은 게 문제였다. 근무 시간을 늘리면 될 테지만 회사 입장에선 인건비가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케이지도 여전히 그 자리였다. 어제 류가 산책로에서 비둘기를 날려봤지만 도통 날개를 펼치지 않았다. 나는 법을 잊은 것 같다고 했다. 




작가 : 이경
출전 : 『비둘기에게 미소를』 (문학동네, 2021) p.28-p.31

 

 

이경 ┃「비둘기에게 미소를」을 배달하며

 

    거리에서 다친 비둘기를 종종 보게 됩니다. 발을 다친 비둘기는 비교적 흔하고, 몸통에 상처가 난 비둘기도 드물지 않습니다. 그런 비둘기는 다른 비둘기와 먹이를 두고 하는 다툼에서 늘 밀릴 수밖에 없지요. 그러다 보니 상처는 아물지 않고 점점 더 야위고 왜소해지기 마련이고요.
도시에서 비둘기가 워낙 흔한 새이다 보니 아무리 다쳤다고 해도 연민과 인정을 느끼기는 쉽지 않습니다. 비둘기가 다가올라치면 아예 다른 곳으로 피해 버리거나 가까이 오지 못하게 발을 굴려 일부러 쫓아버리기도 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비둘기 돌보는 일을 합니다. 본래 옆 사무실의 류 계장이 돌보던 비둘기인데, 어쩌다 보니 떠안아 맡아 키우게 됩니다. 류 계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서 급한 사정이 생겼으니 ‘잠시만’ 비둘기를 봐 달라고 부탁합니다.
잠시면 된다고 하지만 비둘기 케이지를 찾아갈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이대로라면 아마도 주인공은 어영부영 계속 비둘기를 돌보게 될 것 같습니다.
약자에게 다른 약자의 돌봄을 부탁하면서 내보이는 '희미하고 온유한 미소’. 이 미소가 가식적이고 위악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다정함이 짓는 웃음이 아니라 힘이나 권력이 짓는 웃음이기 때문이겠지요.

 

소설가 편혜영

 

작가 : 이경

출전 : 『비둘기에게 미소를』 (문학동네, 2021) p.28-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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