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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벤자민

  • 작성일 2008-03-06
  • 조회수 903

문학동네

 

백수라도 괜찮아!

2005년 소설집 『노는 인간』을 통해 ‘변두리적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 백수들의 모습을 그려낸 바 있는 구경미가 첫 장편소설 『미안해, 벤자민』을 선보인다. 각 등장인물들이 시점을 달리하여 이야기를 서술해나가다가 결말 부분에서 이르러서야 사건 전체의 인과관계가 밝혀지는 추리적 구성과 ‘4차원 정신세계’의 독특한 캐릭터들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작가가 전작들에서 보여줬던 백수들 혹은 경제적 무능력자들의 무기력하고 무목적적인 일상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이어가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시대 자본주의의 사회경제적 작동원리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삶에 대한 탐구를 지속하고 있다.

                                                              
*

벤자민, 미안해 ― 이연주의 이야기

점심시간, 회사 주변 식당에서 항상 마주치는 그 남자.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들에 둘러싸여 밥을 먹는 그는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은 듯한데 누구를 닮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작은 단서라도 얻을까 싶어 휴대폰 카메라로 그의 얼굴을 찍어 대학 동창에서 보냈더니 돌아온 답변은 오래 전에 죽은 선배와 닮았다는 것. ‘그 선배, 죽었어’라는 말 한마디에,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기억이 다시 돌아왔다. 그뒤로 밤마다 가위에 눌리거나 불면증에 시달리지만, 그래도 정신과에서 받아온 약은 먹지 않는다. 물에 녹인 그 약을 나 대신 먹어주는 벤자민 화분에게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그런데 죽은 선배를 닮았다는 그 남자가 나에게 전화를 해왔다.

어쩌다 이지경이 된 거야 ― 조용희의 이야기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았다. 누군들 좋아서 사채를 써 페인트가게 열고, 빚더미에 올라앉고, 혹시나 도망갈까 사채업자가 붙여놓은 덩치들에게 하루 종일 감시당하고, 바람난 아내에게 하루 용돈 오천원씩 구걸하듯 얻어쓰겠냔 말이다. 장비며 재료도 다 가져가버렸으니 별수 없이 가게나 지키고 있는데 가게 앞을 스쳐지나가는 한 여자의 얼굴. 어디서 봤더라……?

아내에 대한 소심한(!) 복수로 경매사이트에 아내를 매물로 올려놨더니, 어라? 아내는 오히려 좋아라 하고, “단돈 삼백만원에 팔려갈 위기에 처한 부인의 사정”을 알게 된 사채업자는 덩치들을 시켜 나에게 린치를 가한다. 아내의 외도 상대가 누구인지 이제야 알겠다.

그리고 그 순간 떠올랐다. 가게 앞을 지나간 여자를 어디서 봤는지.

무수한 얼굴들, 무수한 몸뚱이들 ― 이연주의 이야기

이 남자 , 만나자고 끈질게 졸라댄다. 못 이긴 척 만나기로 한다. 퉁퉁 부은 얼굴로 나타난 조용희는 자기가 왜 맞았는지, 두번째 복수는 어떻게 할지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러더니 불쑥 내 가게 볼래요, 한다. 남자의 가게, 아니 ‘작업실’이라 부르기로 마음먹은 그곳에서 뭔지 모를 기운에 휩싸인 나는 붓 하나를 집어들고 벽에 그림을 그린다. 몸뚱이 없는 얼굴들, 얼굴 없는 몸뚱이들.

그뒤로 조용희와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던 어느 날, 조용희의 아내 김선숙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녀는 단호했다. “내 남편 괜히 들쑤시지 말라, 너도 같이 감시당하고 있다.” 그 말에 온몸이 떨리는 건 왜일까? 내가 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지? 극도의 공포감에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한 가지 해결책을 떠올렸다.

납치 감금 전문업자인 대학 동기 안수철, 그에게 전화를 건다.

가는 게 있으니 오는 걸 바라는 법 ― 안수철의 이야기

사채업자 김길준을 감금시켜달라는 연주의 부탁,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를 내 아내로, 두 아이의 새엄마로 점찍어두었으니까. 김길준을 납치해 산속의 별장에 가둔다. 이미 별장에는 여섯 명의 남녀가 감금되어 있다. 이들은 타인의 사랑에, 자존심에 생채기를 냈기 때문에 갇혀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연주와 가까워지기만 하면 되는데…… 그녀가 나를 피한다. 그럴수록 순수했던 내 감정은 점차 야비하고 집요해진다. 이제 나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감시를 시작한 지 보름째, 그 동안 한 번도 집 밖에 나온 적 없던 그녀가 외출을 한다. 그녀 뒤를 몰래 따라가다 무심코 한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던 순간 깜짝 놀랐다. 설마…… 설마 김길준의 집으로 가는 건 아니겠지?

나도 가족이에요 ― 이연주의 이야기

많은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미리 준비해온 거짓말에 김길준의 가족들이 알아서 살을 붙여 완전한 이야기를 만들어버렸을 따름이다. 이들은 내가 내민 돈봉투를 못 이긴 척 받아든다. 나는 그 집을 일주일에 두 번, 늘 같은 시각에 찾아간다. 그때마다 나는 돈봉투를 내밀었고, 그들은 그때마다 못 이긴 척 받아든다. 이곳에서 나는 이들의 가족이 된다.

무뇌아가 되지 않으면 된다는 거죠? ― 김세준의 이야기

나는 형이 소유한 빌딩의 야간 경비원이 되었다. 사채업으로 돈을 버는 형을 경멸하면서 “형처럼 돈을 버느니 차라리 굶어죽겠다”고 선언하고 줄곧 백수로 지내왔던 내가 일을 하기로 한 건 그녀, 이연주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나는 내 삶을 바꿔야 했다. 보다 생산적으로. 그리고 우리는 결혼하기로 했다.

이제야 알았다, 잊고 있던 진실을 - 다시, 이연주의 이야기

집요하게 연락해오던 안수철에게선 더이상 연락이 없고, 김세준과의 결혼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결혼 일주일 전, 택시 안에서 기사가 건네준 요구르트를 마시고 깜박 잠들었다 깨어나보니 나는 손발이 묶인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안수철의 별장이다. 그는 말로 나를 괴롭힌다. 무심코 툭툭 던지는 말,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 그 말들이 나를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진실의 한가운데로 몰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결국…… 나는 내가 잊고 있던, 아니 잊으려 했던 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안수철이 별장을 비운 사이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결혼예물은 현금으로 바꿔서 김길준에게 필요한 것을 넣어달라고 별장 관리인에게 부탁한 뒤 나는 별장을 떠난다.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어도, 아무튼 떠난다……

*

그들은 말하자면, 2008년 대한민국,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낙오자들이다. 이연주도 조용희도 김길준이나 안수철도, 그리고 조용희의 아내 이선숙까지, 하루하루 열심히 일을 해서 성실하고 평범한 삶을 꾸려나가는 이 시대의 소시민들은 아니다. 모두가 어딘가 한구석이 부족하고 모자랄 뿐이다.

하지만 이들은 찡그리지 않는다. 내 삶이 힘들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모자라고 부족한 자신을 담백하고 깔끔하게 받아들인다.

어찌 보면 이들은 ‘괜찮다’고, 이 정도면 됐다고 스스로를 포장하고 위로하는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모자라고 엉뚱하고 돌발적인 그리고 순진하기 그지없는 또다른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 주인공들은, 실제로 우리 곁에 함께 있다면 멀리하게 될지도 모를 이들은 모습은, 귀엽기만 하다. 얼추 짐작해봐도 이십대 후반~서른을 훌쩍 넘겼을 이들의 모습은 스무 살 언저리, 혹은 그 아래의 엉뚱한 소년 소녀, 어른아이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어른아이들은 결국에는, 김길준의 별장을 떠나는 이연주처럼 갇혀 있는 자신을 깨고 어른이 된다.

교환원리의 전일적 지배가 불러온 지옥도

『미안해, 벤자민』이 더욱 문제적인 것은 이 시대의 핵심적인 사회경제적 작동원리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탐구는 희미한 모습으로나마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비전을 그려보는 데까지 이어진다. 구경미의 소설은 다소 과장된 캐릭터와 상황설정 그리고 아이러니한 사건 전개 등으로 인해 희극적인 느낌을 주지만, 작품이 담고 있는 문제의식은 대단히 진지하고 본질적이다. 2000년대 소설에서도 ‘지금-이곳’의 가난한 풍경은 펼쳐질 만큼 펼쳐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러한 풍경을, 단지 풍경이 아닌 현실로서 그려내고, 나아가 그러한 풍경을 끊임없이 떠오르게 하는 이면에까지 시선을 던지는 것이다. 구경미의 『미안해, 벤자민』은 이러한 과제를 떠맡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작품 중의 하나라고 감히 말할 수 있으며, 그러하기에 무척이나 소중한 작품이다. _이경재(문학평론가)

 

구경미  
1972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경남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했다.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동백여관에 들다」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노는 인간』과, ‘작업’ 동인의 테마소설집 『거짓말』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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