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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

  • 작성일 2008-03-21
  • 조회수 1,001

문학동네

 

연애는 요리처럼, 요리는 연애처럼!
이 세상 누구도 만들 수 없는 오직 나만의 요리, 나만의 사랑!

  연애도 사랑도 인생도 요리처럼 레시피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재료는 무엇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만약 재료 중에 없는 게 있으면 다른 것으로 대체해도 되겠지만 이것이 빠지면 요리가 안 된다는 걸 명심하고, 처음에는 어떻게 해놓았다가 시간이 얼마쯤 지나면 어떻게 하고, 불 높이는 이렇게 조절하고, 재료는 이것부터 넣어야 하며, 뚜껑을 덮어둘 것인가 말 것인가, 혹은 조리시간은 어느 정도가 적당하며,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고, 어떤 그릇에 어떻게 담아서 내고, 먹을 때 이렇게 하면 더 맛있다, 까지!
  ……욕심부리지 말고 차근차근 하다보면 어느새 내가 원하는 요리가 신기하리만치 맛있게 완성되어 있는 것처럼, 사랑 또한 언젠가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

                                                              *

  문제는 사랑을 어떻게 하면 되는 건지, 그 방법을 도무지 모르겠다는 거다. 나는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내가 자신을 하나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나는 이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자 했는데 그 옆의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해오거나, 그가 이제 드디어 나를 사랑하는구나 여기고 안심했는데 그는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거나…… 대개는 타이밍이 안 맞았고, 처음부터 착각을 했거나 도중에 뭔가 착오가 있기도 했고, 잘되어간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남은 것은 처음에 생각했던 것이 아닐 때도 있었다.

                                                              *

  사춘기 시절은 모든 꽃미남 연예인이 곧 내 남자가 될 것만 같더니, 스무 살이 되어선 제일 가까이 있던 아무개와 멋도 모르고 곧장 연애로 직행하더니, 그렇고 그런 연애도 몇 번쯤 경험하고, 어느덧 이십대 후반……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연애와 결혼이더라.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도 꽃미남 댄스가수들도, 그저 잠시 잠깐 흐뭇한 미소를 흘려줄 뿐, 더이상의 사적인(?) 감정은 없다. 선도 보고 소개팅도 해보지만 이 사람은 이래서 별로고 저 사람은 저래서 별로다. 에잇,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그때 아무개와 결혼해버릴걸.


이별 예감

  지훈은 공식적으로는 내 여자 친구인 유리의 애인이고, 나의 초등학교 동창이며, 그리고 내 첫사랑이다.
  사람들은 우리 셋을 두고 도대체 누가 누구랑 어떻게 되는 사이인지 알 수가 없다고들 했다. 유리와 내가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다녔고, 내 왼쪽이나 유리의 오른쪽에 지훈이 서 있었다.
  어쨌든 나는 내 친구 지훈보다도 내 친구의 애인 지훈을 앞에 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훈이 내 첫사랑이라는 사실은 영원히 털어놓기 힘든 나만의 비밀이 되었다.

  매사에 낙천적이고 먹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나에겐 삼 년간 사귀어온 남자친구 성우가 있다. 어느 날, 성우가 데려간 맛집. 어, 여긴 얼마 전에 지훈이랑 와봤던 데잖아?

“여기도 지훈이랑 온 적 있니? ……지훈이랑 너, 음식도 나눠먹냐?”
“지훈이는 뭘 잘 안 먹잖아.”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시켜서 둘이 나눠먹은 거지.”

  예감이 좋지 않다. 그날 이후, 하루에도 몇 번씩 오던 성우의 전화가 뚝 끊겼다. 성우가 멀어지고 있다. 아무리 둔감한 나이지만, 그 정도는 느낄 수 있다. 새삼스럽게 왜 이러는 거지? 지훈과 내가 같이 영화도 보고,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식사도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성우가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지훈과 안 하던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에이, 모르겠다. ……그런데, 이러다 정말 헤어지는 거 아냐?


이별, 그후

  성우와 헤어졌다. 갑자기 성우가 지독히 싫어하던 프라이드치킨이 먹고 싶어진다. 이제는 닭고기를 참을 필요가 없다. 좋아, 너랑 있을 때 못 먹었던 닭이나 실컷 먹으며 몸보신하지 뭐. 그런데 이놈의 살은 왜 자꾸 빠지는 거야? 보기 좋게 살이 쪄서 너와의 이별쯤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보여줘야 하는데…… 참, 이젠 성우 만날 일 없지.
  성우랑 헤어졌다고 했더니, 가장 친한 대학 친구인 수진과 유리, 이 둘의 낌새가 이상하다.

“금방 유리랑 통화했는데, 걔 도대체 왜 그러니? 너랑 성우 일에 왜 그렇게 신경을 쓰냐고! 게다가 다 끝난 일인데.”
“무슨 말이니?”
“나더러 성우랑 너랑 그렇게 되는데 왜 가만있었느냐고 묻더라. 너랑 성우랑 헤어지면 안 될 내가 모르는 무슨 큰 이유라도 있는 거니? 하도 열이 받쳐서 난 둘이 정말 잘 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랬더니, 알겠다면서 전화 끊더라.”

  성우와 헤어졌다는 말에 이렇다 할 논평도 없이, 괜찮으냐는 의례적인 말 한마디 하지 않았던 유리. 그런 유리가 요즘 내게 자주 전화를 걸어 어디서 누구하고 무얼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시시콜콜 챙기며 안 하던 짓을 한다. 게다가 수진은 유리에게 혹시 전화 오지 않았었냐며 내 눈치를 살피질 않나, 분명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입 꾹 다물고서 공연히 심술만 부리질 않나…… 도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영화는 여전히 로맨틱코미디가 최고고,
콘서트는 꽃미남 댄스그룹이 나오는 게 좋고,
웬만한 연주회는 졸리는 게 당연한,
대한민국 ‘표준 여성’들의 상큼발랄 사랑 레시피!

  사랑을, 이를테면 요리라고 생각한다면 처음부터 성급하게 요리할 필요는 없다. 있는 그대로 본래의 맛을 느끼고 아는 게 먼저다. 이건 무슨 맛일 거야, 라고 기대하고 그 방향으로 끌고 간다면 재료의 참맛을 충분히 살릴 수 없다.
  요리에 신경을 써야 할 때는 본격적으로 연애가 시작되는 시점부터이다. 처음 데이트 약속을 정하는 순간부터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배려도 하면서 서로를 조절해나가야 한다. 거기까지는 아무 문제 없었다. 분명히 그랬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맛을 보고 간을 맞추는 그 시점에, 상만 차려서 내면 되는 바로 그때, 나는 다 된 요리를 망쳐버린 건 아니었을까. 혼자 끓어서 넘치도록 멍하니 있었거나, 다 끓지도 않았는데 속은 안 익고 겉만 익었는데 성급히 불에서 내려놓은 건 아니었을까.

                                                              *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요리를 한다. 폼나게 푸짐하게 째깍째깍 신나게 요리하는 이도 있고, 별로 어렵지 않게 간단한 재료를 써서 손쉽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쓰싹 요리를 만들어내는 이도 있고, 차곡차곡 준비해서 라면 하나를 끓여도 그릇까지 제대로 세팅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도 있고……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에 어울리는 인생이 있는 것처럼 요리도 그렇다. 무엇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 같다.
  오늘도 나는 요리노트에 레시피를 기록하는 걸 잊지 않는다. 세상 모든 문제를 해결할 처방전 같은 건 없지만 나와 비슷한 누군가와 함께 나눌 만한 조언 같은 것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준비할 수 있는 최상의 재료를 준비하자.
  2. 처음부터 너무 욕심내지 말자.
  3. 돌이켜보고 반성하자.
  4. 느낌, 감각, 습관,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믿자.


▶ 박주영 |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대 정치외교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시간이 나를 쓴다면」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2006년 『백수생활백서』로 제30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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