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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옷 예찬가

  • 작성자 탈퇴 회원
  • 작성일 2015-07-13
  • 조회수 644

고전문학 교수가 같이 교직원실에서 김밥을 까먹다, 문득 말을 꺼냈다.

 

“자네, 요즘 작가 중에 윤중빈 어떻게 생각하나?”

 

김밥에서 이상한 게 씹힌다. 대충 혀로 어금니 쪽에 대충 붙여놓고서야 간신히 입이 떨어졌다.

 

“문장도 위트 있고, 복선의 배치와 회수가 제법인 것 같더군요.”

 

“윤중빈이가 등단을 2020년도에 했던가? 그때 반짝 주목 받다가 묻혀가는 줄 알았건만, 다시 떠오를 모양이더군. 그, 이번에, <백의>가 괜찮긴 했지.”

 

“누가 뭐래도 이상문학상에서 뽑은 거니 볼 만 하지 않겠습니까, 뭐. 저 잠깐 화장실이 급해서…….”

 

더 이상 이 이물감을 못 참겠다. 급하게 교직원실 구석에 있는 자외선 소독기에서 컵 하나를 꺼내 들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컵에 물을 받아 우걱우걱 입을 헹구고 거울을 보니 교직원 이름표를 목줄처럼 달랑달랑 매달고 남색 정장을 입은, 거울을 흐린 눈으로 응시하는 자신이 보였다.

 

“하아.”

 

왜 서글퍼지는 것일까. 셔츠까지 하얀색을 거부하고 군청색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어째 초라해 보인다.

문득 고등학생 때를 추억했다.

 

“정환아.”

 

지난 겨울방학부터 문예특기자 실기 준비를 봐주시던 과외 선생님은 여느 때와 같이 써온 글을 읽어보시다 갑자기 뜬금없이 내 이름을 부르셨다.

 

“정환이는 참 공부도 잘하고, 착실하고, 애도 괜찮지. 근데 글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다.”

 

태연하게 허허 거리며 말을 받았지만, 입이 잘 열리지 않았다. 잊을 만 하면, 그냥 네 재능을 살려 공부 쪽으로 가보라고 운을 띄우시곤 하셨지만 그런 그의 말은 들을 때마다 예상치 못한 소설의 결말처럼 내 심장에 날카롭게 꽂혔다.

 

“처음엔 니가 글을 만만하게 보고 더 좋은 대학교 가려고 하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너가 글을 얼마나 좋아하는 지 아니까 나는 응원을 해주고 싶어.”

 

“……네.”

 

그는 지나가는 말로라도 나를 끝까지 칭찬하며 격려하신 적이 없으셨다. 열심히 하면 될 거라는, 그 단물 빠진 말조차도 건네지 않으셨다. 항상 “응원한다.”가 그가 내게 건넨, 최대한의 격려였다. 평소와 같이 넘기려던 참이었다.

 

“내가 가르치는 애들 중에서 너랑 같은 나이인데 공부는 학교에서 중간인데, 작년에 대산에서 은상, 마로니에에서 차상 받은 애가 있어. 너는 걔한테 공부 자극 좀 주고, 너도 걔 글 쓰는 거 보면서 어떻게 구상을 해놓고, 얼 만큼 공을 들여야 글이 잘 나올지 생각해보고. 같이 수업 듣는 거 어떻겠냐?”

 

선생님의 말을 듣자마자 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못 쓰지는 않아요. 같은 학년 애한테 배우라뇨? 하는 목소리가 목젖까지 울컥 튀어나왔다. 아직 대회를 많이 나가보지 않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일명 같학친-같은 학년 친구-의 얘기가 참을 수 없이 거슬렸다. 지금에서야 솔직히 그것이 시기심과 부러움, 좌절감이었음을 인정하는 그 감정이 따갑게 치고 올라와 눈 밑이 쿡쿡 쑤셔왔다.

 

너무 직설적이라고 속으로 욕했던 그 과외 선생님은 큰 재능이 없어 보이는 나를 항상 안쓰럽게 여기시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노력하셨다는 것을 나는 철없었던 고교 시절이 한참 다 지나갔을 때야 깨달았다.

 

그때 그의 제안 역시 내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을 거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어리고 어렸던 나는 오기에, 마치 전교 6등이 내게 던졌던 도전장처럼 여유로운 척, 태연하게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네. 언제부터요?”

 

그 아이와 같이 배우게 시작한 것은, 막 여름방학이 시작된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그리고 그 날은 유난히 습기 찼던, 비 오기 전날의 날씨였음을 기억한다.

 

“쌤, 쌤, 이 부분 괜찮지 않아요? 아니, 여기 왜 빨간 줄 그으셨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막연히 책과 노트만 들고 다닐 거라 생각했던 그 아이는 생각보다 시끄럽고, 생각보다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다. 정정한다. 나는 그가 꽤 시끄럽고, 꽤 장난기 많은 아이였음에 확신한다.

 

“야. 묘사가 이렇게 길면 난잡하지. 너 같으면 네 줄짜리 문장, 공들여서 읽고 싶냐?”

 

“근데 이 표현 괜찮지 않아요? 저도 길면 안 좋은 거 아는데, 이 묘사 진짜 확 당기잖아요!”

 

“그럼 네 맘대로 해라! 그러면서 왜 물어보냐?”

 

“음……, 그러면 두 문장으로 자르고 수식어구 좀 자를까요?”

 

실실 웃으며 선생님의 빨간 줄 위로 파란 볼펜을 굴리며 그가 중얼거렸다. 나는 늘 선생님이 고쳐주신 부분을 밑줄 치며 읽어보며 그가 선생님과 기 싸움 아닌 기 싸움을 하는 것을 눈길질로 훔쳐보곤 했다.

 

과외 선생님이 잠깐 화장실을 나가시고, 방이 정적에 휩싸였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자꾸 그를 흘겨보게 되었다. 그러다 딱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애는 눈웃음을 지으며, 선생님이 첨삭해 놓으신 내 글을 내 손에서 낚아채 갔다. 그는 빙글거리며 읽어 내려가다, 어느 순간부터 무표정으로 읽어가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기대감과 심장 박동이 목구멍으로 통통 튀어 올라 다시 뺏어올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별 생각을 다 했다. 혹시 내 글이 생각보다 괜찮은가? 너무 별로라서 저런가? 왜 표정이 저러지?

 

손을 안절부절 못 하고 언제쯤 다 읽고 말을 해줄까 하는 생각에 그의 눈길만 쳐다보던 중, 마침내 그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는 입을 비죽 내밀고 깨물다, 갑자기 내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쪼개면서 말했다.

 

“야, 묘사는 괜찮은데, 너무 형식적이다. 아니, 무슨 수학 문제 풀어? 너무 기승전결이 교과서적이지 않냐? 닌 교과서 지문만 읽냐?”

 

턱에 누가 추라도 달아놓은 듯 입이 닫히지 않았다. 방문이 열리고 과외 선생님이 풀썩 앉으시고 다시 수업을 시작하셨다. 그러나 처음 들어본 직설적인 비난에 머리는 방향제를 코에 갔다 댔을 때처럼 어지러웠다.

 

늦은 시각, 과외가 끝나고 윤중빈의 집에서 나와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까지도 나는 윤중빈의 말을 소처럼 반추하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항상 학교나 학원에서 늦게 돌아오는 길에는 걱정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해 집에 간다는 전화를 하고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서둘러 뛰어 갔던 나는 그 날 괴성을 지르며 텅 빈 길거리를 발이 닫는 대로 질주했다. 묘사는 좋은데, 묘사는 좋은데, 그 말을 곱씹으며 그가 한 나머지 말들을 가리려 애썼다. 그러지 않고서야 윤중빈에 대한 생각을 마주할 자신조차 없었다. 아마……, 내 자신에 내재되있던

 

그 날 이후 나는 과외 수업에서 한 마디도 떼지 못했다. 그의 얼굴을 눈흘김으로도 쳐다볼 수 없었으니까.

 

“어이구, 이 자식아! 너 모의고사 어떻게 봤어? 정환이는 전체에서 3개 틀렸다는데!”

 

“그래도 지난번보단 잘 봤잖아요!”

 

“24334”으로 무슨 대학을 가려고!“

 

선생님은 곧잘 나와 윤중빈을 성적으로 비교하시곤 했다. 그럴수록 더더욱 나는 그의 말이 생각나, 고개를 푹 숙여야 했다.

 

윤중빈과 나의 미묘한 신경전을 눈치 채신 선생님은 어느 날 슬쩍 말을 띄었다.

 

“야, 윤중빈! 정환이랑 친하게 좀 지내라. 정환이도 원래 중빈이가 저런 애니까 이해해주고.”

 

나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고, 윤중빈은 투덜거렸다.

 

“저런 쪼다새끼랑 어울리는 건 저부터가 싫거든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척, 나는 얼굴을 아예 책상에 묻고 글에만 집중했다. 선생님의 당황한 시선이 느껴졌다.

 

수능이 두 달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윤중빈의 집에 도착하니, 선생님의 신발 자국도 없었다.

 

“야, 쌤이 오늘 일 있으셔서 한 시간 늦게 오신대.”

 

왠일로 그가 말을 걸었다.

 

“아, 그래.”

 

“야.”

 

그의 목과 눈을 맞추고 대답했다.

 

“왜.”

 

“지금 부모님도 없으신대, 같이 소주나 마실래? 니같은 놈은 소주잔에 입도 안 대봤을 것 같아서.”

 

평소 술 냄새도 싫어했지만, 도전적인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대답이 술술 나왔다.

 

“뭐, 좋지.”

 

유리잔을 쨍, 하고 부딪치고 그가 부어준 소주를 한 입에 털어마셨다. 술이 반 병 정도 들어가자 말문이 트였다.

 

“이정환, 넌 왜 그렇게 시험을 잘 봐서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냐? 응? 공부 잘해서 딴 사람한테 피해 주는 것도 민폐야, 민폐!”

 

“너는 글 좀 잘 쓴다고 나한테 그렇게 잘난 척 했어? 네 말 때문에 내가 얼마나 기분 더러웠는지 알아?”

 

유리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더 커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술잔을 입 안에 붓다시피 했다.

 

“그땐 미안. 나한테 과외가 니 얘기 하면서 공부 좀 하라고 얼마나 잔소리 했는지 알어? 아니, 난 공부는 싫단 말이다! 이 거지같은 대한민국!”

 

“뭔 거지같은 대한민국이야. 중2병이야?”

 

“그래, 니 같은 놈한텐 참 좋은 세상이다! 아! 공부가 전부냐, 이 세상은!”

 

그는 히죽거리며 쫑알거렸다. 마침, 마지막 잔을 쨍 하던 차에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과외 선생님은 비틀거리는 중빈의 자태를 보자마자 코를 막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윤중빈, 술 마셨어? 아니, 정환이도? 너네 대체 어디서 술을 마신거야. 잘한다, 잘해. 수능 두 달 남은 놈들이, 어휴.”

 

선생님은 우리를 한심하게 보시더니, 찬 물을 떠다 책상에 탁 놓고 수업을 시작했다. 알딸딸한 기분으로 하는 수업은 신선했다.

 

나와 윤중빈은 그때부터 친해졌다. 중빈은 나에게 독서실을 함께 다니자 했고, 우리는 편의점에서 저녁마다 뺀질나게 삼각김밥을 까먹곤 했다. 항상 흰색 옷을 입고 다니는 중빈이 보이지 않으면 괜히 신경이 쓰였다. 중빈은 장난기가 많고, 애 같아 보이면서도 의외로 속이 깊었다.

 

그러나 그는 남들과 다른 이상한 점이 있었다. 바디워시를 갖고 다니며 많은 공부량 때문에 더러워진 흰 소매를 맨날 독서실 화장실에서 벅벅 닦아대는 것이었다. 그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넌 왜 더러워질 걸 알면서 뻔히 흰 소매를 입고 다녀? 난 볼펜 자국 때문에 일부로 까만 옷 입고 다니는데……. 그리고 그걸 왜 독서실 화장실에서 빨고 다녀? 그러고 다니면 불편하고 축축하지 않아?”

 

그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난 흰 소매가 좋다. 흰 소매를 보면 내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

 

나는 속으로 은근히 그를 비웃었다. 수험생이 옷 같은 걸 신경 쓸 시간이 어딨어, 하면서.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원래 중빈은 또라이 중에서도 상또라이였으니까.

 

'아주 흰 옷 예찬가라도 울부짖고 다니지 그러냐?'

 

마지막 과외 수업이 끝나자, 우리의 관계는 점점 옅어졌다. 간간히 연락이 오곤 했지만, 잘 지내냐는 으레 형식적인 얘기뿐이었다. 연락을 하는 횟수는 점점 줄어갔다. 수능이 끝나고 몇 달 후, 과외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정환이 대학은 어떻게 됐어?”

 

“성적우수자로 A대학 국문학과 가요.”

 

“A대? 오오. 네가 가고 싶어 했던 대학이잖아. 문예 특기자로 넣었던 건……?”

 

“……떨어졌어요.”

 

“괜찮아, 괜찮아. 중빈이는 거기 서울에 있는 D 예술 대학 갔대.”

 

네.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받다 나가봐야 한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중빈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된 것은 몇 년 뒤 신문에서였다.

 

파격적인 소재와 친근하고 밝은 문체로 이야기를 힘 있고 능숙하게 이끌어 간다는 호평과 함께, 그의 신춘문예 당선 인터뷰가 신문 한 켠에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나에게 떠들었던 흰 옷에 대한 찬사도 함께였다. 흰 깨끗한 바탕의 옷을 입고 글을 쓰면,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듯 글이 깨끗하게 술술 써진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도 실려 있었다. 그다운 인터뷰에 신문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까만 소매를 내려다 보았다. 얼마 전 4학년인 그에게 담당 교수는 글에는 재능이 없는 것 같지만, 성실하고 머리가 좋으니 박사까지 공부를 해서 교수가 되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신문 밑에 깔린 『한국문학사 심화 Ⅰ』 라는 제목의 책의 모서리가 송곳처럼 폐부를 찔러왔다.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교직원실로 돌아와, 고전문학 교수의 핀잔을 먼저 들었다.

 

“담배라도 한 개비 피고 왔나? 왜 이리 늦게 왔나? 곧 강의 시간인데, 자네 강의 들어가야지 않는가?”

 

[한국문학사개론 -이정환 교수] 라고 큼지막히 쓰인 두꺼운 강의안 철을 들고 강의실로 향했다. 많은 꿈과 희망을 가지고, 웃으며 복도를 메우는 학생들의 흰 소매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완연히 깨달았다. 내가 그렇게 은근히 시기했던 그의 작품은 때 묻지 않은 흰 옷 소매에서 나왔다는 것을. 내가 그토록 추구했던 학문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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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시 45분 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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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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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29
꽃비

할머니는 소녀의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창문 너머로 쭉 이어진 벚나무의 행렬에 양 뺨을 살짝 붉혔다. 여든에 가까워 이제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이었지만 초봄의 내음 앞에서 그녀는 소녀가 되었다. 두 눈을 활짝 열고서 가만가만 떨어지는 꽃비를 응시했다. 노인답지 않은 풍부한 생기가 그 표정에 깃들어 있었다. 엄마는 종종 ‘어머니가 너무 늙으셔서 그래’하며 한숨을 내쉬곤 했으나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늙지 않았다. 다만 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지금껏 놓쳐온 과거를 향해서. “너희 아빠랑 요양원 좀 알아보고 올 테니까 오늘만 할머니랑 둘이 있어.” 그 말과 함께 부모님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고삼이 된 너를 배려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슬픔이나 연민 대신 피로가 묻어나오는 한숨이었다. 최근 들어 엄마와 아빠는 자주 그런 한숨을 토했다.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오늘도 평소처럼, 응, 그래, 괜찮아. 짧은 세 마디로 둘을 배웅했다. 부모님의 한숨을 닮아 무거운 미소를 지었다. 시선을 돌려, 거실 탁자에 주저앉은 할머니와 눈을 맞췄다. 머리도, 눈도, 뇌도, 새하얗게 질려버린 노인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어째서 우리의 몸은 이렇게 쪼그라들고 마는 걸까요. 그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나는 창문에 기댄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올렸다. 거슬거슬한 촉감이 검지 손가락을 타고 전신에 감겼다. 젊음이 빠져나간 노인의 육체였다. 내 검지 손가락의 촉감이, 세월을 뚫고 올라온 그녀의 주름이, 그 사실을 열성적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뇌는 그 사실이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며 몸을 웅크렸다. 시간이 흐른다는, 스스로가 늙어간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저는 솔직히 말해서 어른들을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시간이 흐른다는 것도 그 시간에 맞춰 자신이 점점 깎여나가는 것도 모두 당연한 거라고 다들 이야기했잖아요.” 그런 건 당연하다고 잘난 듯이 말하는 주제에, 어째서 기어코 어제를 돌아보는 걸까. 나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허공을 향해 말했다. 어제, 수업을 시작하기 직전 담임이 내뱉은 중얼거림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슬프다고 말했다. 우리 때가 참 좋을 때라고 말했다. 그 시간이 지나가 버린 지금은 그저 슬프다고 말했다. 우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그저 농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서 저녁 열 한시에 독서실을 빠져나오는 일상은 빈말로라도 그리워할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맨 앞자리에서 담임의 눈꺼풀이 미묘하게 떨리는 걸 보았다. 그는 그때 과연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알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할머니, 꽃이 그렇게 좋아요?” 나는 그리 묻고서, 잠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간고사가 마무리되면 벚꽃도 지겠지. 문득 그 사실을 실감했다. 평소라면 햇빛 아래서 벚꽃을 볼 일이 없는 탓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집을 나와 해가 떨어지고서 돌아오는 나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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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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