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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 작성자 탈퇴 회원
  • 작성일 2015-07-17
  • 조회수 283

군데군데 들러붙은 살점

좀비도 뜯어먹다 버릴 뼈쟁이

언젠가 제 부모가 틔우고 돋운

오래 전의 고사리

같은 열 손가락과

투, 두둑, 툭 삶이 떨어져나가는 소리로

남자는 자음을 줍고 모음을 쓸며

텅 빈 백지 위 자신이 디딜 땅 한 뙈기를

짓는다

 

그 열 손가락은 곡괭이도 됐다가

호미도 됐다가 싸리개도 됐다가

소가 되기도 하며

언젠가는 열리겠지, 하는 남자의

막연한 외침을 삼키고

텅 빈 백지 위 자신이 디딜 땅 한 뙈기를

짓는다

 

가끔씩 냉소 가득 품은 바람이

그 열 손가락에 생채기를 낸다

주방에서 트고 튼, 고왔던 손과

침에 퉁퉁 분 작달막한 주먹 두 개가

자주, 그 열 손가락에 매달리기도 했다

매일 1분 1초 끼니 걱정에 세금 걱정에

월세 걱정에 아내도 딸도 지쳐버린

가슴 속 남자가

고개를 쳐들어

그 열 손가락에 얼마 안 남은

살점을 뜯어 먹는다

그래도

남자의 자음과 모음은 여전히 소설을

자신이 디딜 땅 한 뙈기를

짓는다

 

손가락이 무뎌지면 안 돼

손가락이 무뎌지면 안 돼

끝을 날카롭게 갈고 갈아서

갈아서.......

텅 빈 백지 위 내가 디딜 땅 한 뙈기를

짓는다

 

눈물콧물오줌똥 다 먹은 그 땅에는

20년 이상 지어온 그 땅에는

머리로 묻고 가슴으로 묻고

마침내

그 열 손가락으로 묻은 아내와

딸이 있다

그 열 손가락으로 묻은 10대의

판타지 소설 쓰던 내가 있다

 

먹을 것도 돈도 집도

그 땅은 내게 주지 않았다

그 땅은

먹은 것 없어 내보낼 것도 없는

똥구멍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나아가지 못한 마우스 커서는

자기 앞에 남아있는

막막한 하얀 황무지를 바라본다

그 모양새가

껌벅이는 그 모양새가

곧 끊어질 것 같은 노인의

심장박동 그래프를 닮아있다

 

비오지 않는 논밭 위의 농부처럼

언제나 텅 빈 백지 위에 굽어있는

남자의 그 열 손가락은

짓는다

텅 빈 백지 위 자신이 디딜 땅

탈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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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래바람

    판타지 소설을 쓰고 있는 화자의 마음이 잘 담겨 있어서 좋았습니다. 글을 짓는 과정과 화자의 심경, 상상력 등을 공감할 수 있었어요. 글을 짓는 사람이라면 '텅 빈 백지 위 자신이 디딜 땅'을 생각해본 적이 있겠죠. 아그책 님은 소설을 쓰는 분 같은데 시에도 재능이 있답니다. 앞으로도 더 열심히 써보세요. 다만 상상력이 좋지만 과장된 이미지는 삼가해야 합니다. 또한 이미지의 확장을 고려해보세요. 연상작용을 할 수 있도록, 이미지가 이미지를 낳도록 시를 하나의 그림처럼 쫘악 펼쳐준다면 더 좋을 듯해요.

    • 2015-07-21 12:57:34
    고래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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