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좋아하던 내게 너는 그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문학에 소질이 있어보였다   그의 시에는 너의 애정이 묻어났고, 너의 마음에는 이전의 그사람이 묻어났다   사랑한번 해보지 못한 내가 이 모든걸 담담히 지켜봤다   사랑은 샘물같은거구나, 그를 만나면 밥 한끼나 사줄까  

/ 2016-03-18
플라스틱 에로스

와이파이의 붉은 궤적이 두 칸짜리 생각으로 떠오를 때면 나는 여우비에 조곤조곤 젖은 벤치서 액정 너머 스며든 지문들 사이로 무미건조한 기대를 집어넣곤 했다   밤하늘에 글썽이는 네온사인 와이셔츠를 적시는, 홍대 길거리의 하루짜리 사랑은 첫눈과 같은 입맞춤을 잊을 수 없었다 습한 화면과 맞닿은 눈망울이 이어폰에 맺힌 기계음과 닮은 까닭일까 순수한 한 뼘 짜리 플라스틱 사랑은 희미한 손길에도 사무쳐했다 나는 아스팔트에 사뿐히 무너졌다   아직도 휴대폰은 내 품에서 무엇 그리 서글픈지 몸서리치며 울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편평한 여체를 더듬다, 조용히 그녀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매연만 가득한 콘크리트 빌딩 속 파릇한 순수에 맺힌 사랑이[…]

플라스틱 에로스
/ 2016-03-14
절명

Allegro above all 그 무엇보다 빠르게 검은 악보를 연주하는 건 언제나 공백의 몫이네 음표가 이마에 맺히면서 만드는 불협화음이 살가죽을 벗긴다는 생각으로 묵직하게 반박의 무게를 실고 오선지를 향해 추락하지 검은 노래소리가 핏기없이 시작하면 탄주(彈奏)하던 指骨 마디로는 냉기가 서리는데, 그림자는 그저 한없이 한없이 비명을 깨뜨리고 마네 '음표부가비탄하게바뀌고예리하게박히는staccato! 해골이토해낸일식들은머릿맡에죽음을찍고,척추를오선지에 내놓으면' 그제야 경쾌하게, 경쾌하게, 잠을 청하지 혹취나는 침묵이 더러운 가사를 대신해주지 엄습은 고통보다 약간 느리게 Allegretto 선율이 목을 조르면 꺼져가는 숨소리 위에 심장 한 조각

절명
/ 2016-03-14
백괴사전

1. 맨티코어(Manticore)는 노인의 얼굴에 사자의 身을 가지고 있다 뒷덜미에는 시리아의 사막을 담고, 시리아 사막 서러운 꼬리 끝에는 독전갈만을 담는다 아가리에서 지구의 허파를 저미는 독이 품어져 나온다 독은 이성의 모래알이기 때문에 마침표라고도 불린다 인육을 좋아하는 이 포악하고 뜨거운 생명체의 울대에서는 공포라는 것이 흘러나온다 한다 2. 두꺼비의 몸에 메기의 수염을 달고, 손발의 물갈퀴와 꼬리 지느러미를 단 채로 심연을 직립보행하는 괴물의 이름은 탐(貪)이다 탐은 게걸이 탐욕으로 흘러갈 때 강가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악어가 먹이를 탐할 때 흘리는 눈물을 강이라고 한다 혀는 사람의 세 치와는 다르게 五 배 더 길다 축축하고 끈적거리는 혀로 보이는 모든[…]

백괴사전
/ 2016-03-14
샤워를 하면서 눈을 감으면

물내음 코 끝에 비릿하다 몸을 녹이기에 굴곡은 여간 부드럽지 않다 등 받혀주는 젖은 나른함을 뒤로하고 눈길은 타일 물바닥에서 미끄러진다 지나간대로 지나간 하루가 남은, 사춘기의 여린 수염이 잘려나는 욕실 나는 여전히 푸석하게 말라있다 샤워를 하면서 눈을 감아보면 여전히 젖어있는 나태가 있다 침수(沈水)된 생각이 축축한 것인지 내 낯빛이 마르지 않은 것인지 아직 나는 모른다 하루를 적시고 꺼지는 습기 나태의 알몸을 씻겨주고 싶어진다 후회는 아무리 빠르어도 늦어진다 물은 떠날 때 뿌옇게 아른거리는구나 후회도 욕실문 젖히자 아른하고 사라진다 생각을 녹이기에 비누는 차가울 것이고 나의 몸은 아직 젖어있을 것이다 오늘을 적시고 스쳐간 물은 더러워졌고 더욱[…]

샤워를 하면서 눈을 감으면
/ 2016-03-14
사랑의 시소

  사랑의 시소   포엠스타     말려도 말려지지 않는 감춰도 감춰지지 않는   마음이 하는 거라서 어쩔 수 없는 사랑 그러니까, 그러니까 우린 이렇게 시소를 탄다   이제 삶의 하나가 되어버린 너는 사랑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밤에도 대낮같이 밝은 사랑 통금* 시간이 있던 시절에는 결국 금지된 사랑이었는데     * 밤 시간에 일반인의 통행을 금지한 제도였던, 야간 통행금지. 내무부에서 1945년 9월 8일부터 1982년 1월 5일까지 시행했다.

사랑의 시소
/ 2016-03-13

  새   포엠스타     어리둥절한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나는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서 어리바리하게 그 새를 바라본다 뭔가 잃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날아가다가 반대 방향으로 난다 또다시 앞을 향해 날고 있다 여전히 어리바리하게 바라보는 나의 눈동자에 환한 하늘이 들어와 앉았다 알 수 없는 소통이라도 하려고 한 것인가 새와 나에게 또 하나의 메시지가 전해진다 하늘에 화살촉으로 박혀 누군가 보고 싶다, 아픈 가슴 혼자 아무도 모르게 억누르고 있겠지! 어리바리하게 나는 어리둥절한 새 한 마리를 보았다 내가 그 한 마리 새라도 되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 2016-03-09
몸젠과 기번의 틈새 로마사

(1) 조작된 간통사건  카이사르는 갈리아 북동부 지역을 점령하고(BC 58), 라인 강을 넘어 두 차례나 게르마니아와 바다 건너 브리타니아(영국)까지 원정했으면서도 속주로 삼지 않았다. 그 후에도 적의 침략이 계속되자, 라인 강 서쪽 방위사령관이었던 드루수스와 도나우 강 동쪽 방위사령관이었던 티베리우스는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엘베 강과 도나우 강을 잇는 새로운 방위선을 구축하기 위하여 군사작전을 펴고 있었다.  클라우디우스는 갈리아의 루그두눔(리용)에서 드루수스와 안토니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다음 해(BC 9) 1월 어느 날, 드루수스는 원로원으로부터 호민관 특권에 동의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그동안 미루어 오던 후계자를 확정지었다.  전선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드루수스는 형이 후계자가[…]

몸젠과 기번의 틈새 로마사
/ 2016-03-06
기차 여행

  기차 여행   포엠스타     섬진강 기차 여행을 하다가 저는 그대의 이마에 삶은 계란을 부딪쳐 깼습니다 그대는 따로 싸 가지고 온 날계란을 내 이마에 부딪혀 깼습니다 저의 이마에서 흰자와 노른자가 피처럼 흘러내렸습니다 저는 이것을 눈물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대가 건넨 사이다를 마셨습니다 창밖에서는 곡성의 섬진강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기차 여행
/ 2016-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