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 「백색 공간」

      안희연 ┃「백색 공간」을 배달하며       흰 종이에 글을 쓴다. 이를테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쓴다. 그렇게 쓰면, “눈앞에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글쓰기의 백색공간에서는 내게 말을 걸고, 항의를 하고, 가시권 밖으로, 이 세계의 극지로 떠나는 사람이 태어난다. 그 사람은 유리창 안쪽에 물러나 있는 나를 깨뜨려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 내가 그를 썼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나를 쓴다. 나는 그를 더 많이 더 깊이 읽어야 하는데, 자칫 그를 잃어버릴 것만 같다.     시는 백색공간을 자기 말로 점령하지 않는다. 시의 언어는 백색공간에 내려앉으면서 또[…]

안희연, 「백색 공간」
/ 2020-06-25
김봉곤, 「시절과 기분」 중에서

      김봉곤의 「시절과 기분」을 배달하며       작가 김봉곤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이토록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어떻게 일부분만 배달할 수 있나? 그냥 가구 배달원처럼 통째로 배달하면 안 되나? 이게 무슨 수능 모의고사 지문도 아니고, 이 소설을 어떻게 한 장면만 들려주나? 난감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제 말이 뻥이 아닌 게 위 지문의 대사를 한번 보세요. 듣기평가 시험 준비하듯 한 번 소리 내서 따라해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위 대사 다음에 올 혜인의 말 중 가장 적절한 것은? 1번 “말 다 했나?” 2번 “니 꼬치다 개자슥아”…… 작가 김봉곤은 누구보다 유머를 잘 아는[…]

김봉곤, 「시절과 기분」 중에서
/ 2020-06-18
심보선, 「‘나’라는 말」

      심보선 ┃「‘나’라는 말」을 배달하며       나르키소스가 사로잡힌 사랑은 저주받은 것이었습니다. ‘나’라는 말이 “당신의 귀를 통과”해서 “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돌아올 수 없는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운 소년은 끝내 사랑이 아니라 거울에 빠져 죽고 맙니다. ‘나’라는 말은 당신이라는 타자에게 가기 위한 말입니다. ‘나’라는 말은 나의 지평선을 찢고 당신이라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꺼내놓는 말입니다. ‘나’라는 말이 어떻게 당신에게 가닿았을까요? 당신의 이야기를 통해 ‘너’로 돌아오는 ‘나’는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나’입니다. 그것은 거울에 비친 내가 아니라 당신이 보내는 선물처럼 배달된 ‘나’입니다. 이 세계에 당신이 있어서, 나는 ‘나’라는[…]

심보선, 「‘나’라는 말」
/ 2020-06-11
루시아 벌린, 「안녕」 중에서

      루시아 벌린의 「안녕」을 배달하며       여기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동생을 간호하고 있는 한 언니가 있습니다. 침대 옆에서 언니는 대화를 계속 시도하려고 하지만 여동생은 허파의 통증 때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죠. 그 침묵의 시간 속에서 언니는 자신의 삶을 바라봅니다. 언니가 동생의 현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죠. 그래서 그런지 문장과 문장 사이 침묵과 여백이 꽤 크고 깊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많은 것을 생각할 것 같지만, 루시아 벌린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작은 것들, 무심히 스쳐 지나간 것들, 용서보다는 원망을, 후회보다는 인정을, 그리고 소소한 일화들. 어쩌면[…]

루시아 벌린, 「안녕」 중에서
/ 2020-06-04
이원, 「서울의 밤 그리고 주유소」

      이원 ┃「서울의 밤 그리고 주유소」를 배달하며       그래, 이 시였다. 그로테스크하고 황량한 사막 같은 세계를 가로질러 "우리는 언제나 조금 더 길을 가야 한다"라는 문장이 내게 도착했다. 내가 절망과 무기력에 빠져있을 때, 이 문장이 몇 번이나 나를 찾아와 일으켜주었다. 이 시가 발음하는 "우리"라는 말, "언제나"라는 말, "조금 더"라는 말은 어둠 바깥에서 내미는 부드러운 손 같은 환영이 아니었다. 세계의 악몽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어떤 전망도 내비치지 않았다. 희망 없이 가자고 했다. 다만 걸을 힘이 남아 있으니 순수하게 근육을 써서 조금 더 걸어가자는 것이었다. 이 문장을 중얼거리면 뭔가가[…]

이원, 「서울의 밤 그리고 주유소」
/ 2020-05-28
장류진, 「탐페레 공항」 중에서

      장류진의 「탐페레 공항」을 배달하며       여행을 자주 가는 편은 아니지만, 공항은 종종 찾아가곤 합니다.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무안국제공항이 있는데, 거기 일층 국제선 입국장 출구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전광판에 뜨는 항공 스케줄을 멀거니 바라보는 것, 그게 제 작은 즐거움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 무안국제공항은 아무런 비행기도 뜨지 않고, 그 누구도 도착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엊그제도 그쪽으로 가보았는데, 6월까지는 아무런 운행 스케줄도 잡혀 있지 않다고 하더군요. 사람이 없는 공항은 마치 물길이 끊긴 항구 같습니다. 사람이 없으면 드라마도 없는 법. 공항이라는 장소는 정말이지 평생 만날 수 없을 것[…]

장류진, 「탐페레 공항」 중에서
/ 2020-05-21
주민현, 「스노볼」

      주민현 ┃「스노볼」을 배달하며       우리는 "겨울이 지나갈 때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겨울, 을 하나씩 갖게 되고", 봄이 지나갈 때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봄을, 여름이 지나갈 때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여름을 하나씩 갖게 되지. 사람의 마음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고이는 곳이야. 시간의 깊이가 그 사람이야. 그래서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과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을 떠올리게 되지. 스노볼을 흔들면 그 겨울의 눈송이들처럼 "한낱 조각난 종이"들이 떠올라 반짝이고, 우리는 그걸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지"(「블루스의 리듬」). 그러면 마음 어딘가가 환해지기도 하고 부서지기도 해.[…]

주민현, 「스노볼」
/ 2020-05-14
오은, 「다독이는 안녕」 중에서

      오은의 「다독이는 안녕」을 배달하며       모두 힘든 시기이지만 작은 카페나 동네서점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이 더 크게 눈에 들어오는 시절입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자가 격리'를 이유로 책을 읽거나 그동안 미처 살피지 못한 자아의 어떤 지점을 돌아보는 것 역시 사치일지도 모릅니다. 자아니 마음이니 하는 것들도 다 '밥' 다음에 오는 것이니까요. 이런 때일수록 서로의 말에 대해 더 고민하고 엄격해져야 하겠지요. 그 말을 살피는 것이 시인이고, 그 말을 상황에 적용하는 게 소설가의 일인데, 이런 문장을 쓰는 시인 앞에선 그냥 질투가 나기도 합니다. 모두가 '안녕'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띄워봅니다. 천천히 천천히 올라오는 게[…]

오은, 「다독이는 안녕」 중에서
/ 2020-05-07
진은영, 「신발장수의 노래」

      진은영 ┃「신발장수의 노래」를 배달하며       "네가 황급히 떨어뜨린 슬리퍼 한 짝"을 주웠네. 네가 흘린 신발을 가슴에 껴안고, 나는 네가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그리 급히 달려가는지 떠올려본다네. 너의 낡은 신발 한 짝에는 고된 노동의 시간이 붉은 흙덩이처럼 달라붙어 있어. 그래도 신발은 늘 말없이 신비롭고 낯선 지도를 품고 있었다네. 나는 무한히 신발을 주우러 다니는 신발장수, "원인을 찾으러 오지 않고 원인을 만들러 온 자". 내가 모으는 것은 신발만이 아니야. 나는 재미난 샛길들과 새로운 시간들을 모으고 있지. 나는 매일 똑같은 노래만 들려주는 시계탑에 폭탄을 던지고 새로운 시간의 리듬을 발명할[…]

진은영, 「신발장수의 노래」
/ 2020-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