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희, 『첫 문장』 중에서

          윤성희│『첫 문장』을 배달하며…         오래 전 새의 시선으로 찍은 동영상을 본 적이 있어요. 한 남자가 행글라이더처럼 생긴 작은 기구에 카메라를 단 뒤 새의 비행 속도와 눈높이에 맞춰 세계 여러 장소를 다닌 영상물이었어요. 다만 고도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풍경 자체가 다르게 다가와 놀란 기억이 납니다. 하물며 우리와 다른 몸, 다른 영혼을 지닌 존재를 상상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그게 나와 가장 가까운 타인, 가족을 이해하는 일이라 하더라도요. 첫 문장을 적는 두려움을 생각합니다. 모든 작가가 겪는 어려움이지요. 그걸 고백한들 잘 해결되지도 해소되지도 않는 어려움, 이해를[…]

윤성희, 『첫 문장』 중에서
/ 2019-01-24
정여울, 「내 안에서 피어오르는 시간의 힘」 중에서

          정여울│『내 안에서 피어오르는 시간의 힘』을 배달하며…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가장 의식하는 접속사로 ‘그래서’와 ‘그런데’가 있어요. 개연성이라 하나요? 서사에 ‘그래서’가 있어야 말이 되고, ‘그런데’가 끼어야 흥미가 생기니까요. 창작자뿐 아니라 생활인으로 일상을 꾸려갈 때도 제게 저 두 가지는 소중한 접속사에요. ‘그래서’는 인과와 논리로 ‘그런데’는 의심과 회의로 저를 보호해주니까요. 그러다 최근 제가 그 무게를 실감하지 못한 접속사가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자주 안 쓰다 보니 흐릿해진 단어, ‘그렇다 하더라도’의 준말 ‘그래도’에요. 인과를 뛰어넘기 때문에 때론 숙연하게 다가오는 접속사고요. 자동차 운전에 빗대면 속도나 재미에 관여하는 부품이 아니라[…]

정여울, 「내 안에서 피어오르는 시간의 힘」 중에서
/ 2019-01-10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중에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을 배달하며…         최근, 신문을 읽다 ‘신라의 미소’라 불리는 경주얼굴무늬수막새를 보았습니다. 한 시대의 표정이랄까 정신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연히 ‘백제의 미소’나 ‘모나리자의 미소’ 같은 것들도 떠올랐고요. 만일 우리 후손들이 지금 이 세기의 대표적인 표정을 고른다면, 포 뜨고 석고 붓듯 한 곳에 고정시킨다면 그 안에는 어떤 미소가 담길까 상상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아마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가 말한 저 ‘프로페셔널 미소’가 새겨 있지 않을까요? 고생대 지층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 중 하나가 삼엽충[…]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중에서
/ 2018-12-27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중에서

          마거릿 애트우드│『시녀 이야기』를 배달하며…         이곳 ‘길리아드’라는 나라에는 모두를 기만하기 위해 고안된 성적 규칙과 관습이 있습니다. 극히 소수의 계층에게만 혜택을 몰아주는 규칙이지요. 대개 터무니없는데다 위반의 대가 또한 가혹한데 지금 막 그걸 깨려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기계적인 관계만 맺어오다 처음으로 사적 접촉을 시도하는 이들이지요. 유사 이래 ‘이야기’의 가장 강력한 엔진으로 기능한 ‘성’과 ‘권력’에 ‘미스터리’까지 더해 읽는 이의 목덜미를 확 잡아끄는 장면입니다. 물론 뒤에 일은 더 괴상해지지만 시녀는 지금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낍니다. 아주 오랫동안 감정과 감각, 일상과 사생활을 빼앗긴 사람의 분열이지요. 전에도 ‘통제’를[…]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중에서
/ 2018-12-13
최백순, 『조선 공산당 평전-프롤로그』 중에서

          최백순│『조선 공산당 평전-프롤로그』를 배달하며…         각기 다른 이유로 한국에서도 북한에서도 잘 조명되지 않은 인물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인지 몇 사람의 평전이라기보다 한 시대의 초상처럼 보이고요. 그 얼굴을 그리는 붓 선이 호쾌한 듯 복잡해, 당시 운동가들의 국제 감각이랄까 상상력의 스케일에 어안이 벙벙해지다가도, 종래에는 신념을 위해 무언가 지불한 사람들, 너무 일찍 죽은 청년들의 눈동자를 오래 들여다보게 됩니다. 제겐 ‘이념’이라기보다 ‘이상’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로도 읽히고요. 어느 시대나 그런 걸 품은 사람들이 있지요. 그들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경이와 연민 그리고 보다 너른 감정이 있고요. 그래서인지 이 책에 나오는 한 사람[…]

최백순, 『조선 공산당 평전-프롤로그』 중에서
/ 2018-11-29
주제 사라마구, 『눈 먼 자들의 도시』 중에서

          주제 사라마구│『눈 먼 자들의 도시』를 배달하며…         영화나 소설, 만화 속 식사 장면 좋아하시나요? 저는 좋아합니다. 특히 주요 인물들이 오랜 결핍 끝에 무언가 먹는 순간을요. 소설 의 복숭아통조림이라든가 영화 에 나오는 돼지바비큐 장면 등이 그렇지요. 한 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곤궁과 허기를 그린 소설을 읽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새벽에 식빵을 구워먹은 적도 있네요. 그런데 만일 누군가 ‘당신이 읽은 소설 중 무언가 먹는 장면을 가장 인상적으로 그린 작품이 뭐냐?’ 묻는다면 저는 이 부분을 꼽을 것 같습니다. 진수성찬도 산해진미도 아닌 아주 깨끗한 물 한 잔.[…]

주제 사라마구, 『눈 먼 자들의 도시』 중에서
/ 2018-11-15
나카지마 교코, 『시간을 달리는 노파』 중에서

          나카지마 교코│『시간을 달리는 노파』를 배달하며…         다케 씨는 알츠하이머를 앓는 아흔 넘은 노인이에요. 어쩌다 4대가 모여 살게 된 집에서 친딸 하루카의 돌봄을 받으며 살고 있는 할머니지요. 다케 씨는 이따금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 그때마다 무한 반복하는 얘기가 있나 봅니다. 바로 평생 함께 한 자신의 딸이 친딸이 아니라는 거지요. 정말이냐고요? 아니요. 다케 씨의 착각입니다. 그런데 그 혼동의 이유가 조금 아름답습니다. 그 혼란은 언젠가 ‘딸 손인 줄 알고 잡았다 놓친 다른 아이의 손’을 오래 복기하다 생긴 혼란이니까요. 연인이든 가족이든 전쟁 중 나와 가까운 이의 손을 놓친 서사는[…]

나카지마 교코, 『시간을 달리는 노파』 중에서
/ 2018-11-01
정지돈,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중에서

          정지돈│『빛은 어디에서나 온다』를 배달하며…         ‘어디서 본 장면인데’라고 생각했는데 본 게 아니라 겪은 거였습니다. 오래 전 지하철 3호선 안에서 누군가 저렇게 제 이름을 부른 적이 있으니까요. 그 사람은 하강중인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이제 막 출발하려는 열차 안으로 뛰어든 저희 어머니였습니다. 급한 성격 탓에 자식이 뒤에 오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몸을 날렸다, 뒤늦게 무언가를 깨닫고 비명을 지른 장본인이었지요. 어머니는 서울 시민들로 가득 찬 열차 안에서 큰 소리로 제 이름을 연거푸 불렀습니다. 촌부의 후회와 절박 당혹이 뒤섞인 외침이었지요. 내가 내 이름으로 불린 것뿐인데 저는 왜 얼굴이 확[…]

정지돈,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중에서
/ 2018-10-18
최은미, 『아홉번째 파도』 중에서

          최은미│『아홉번째 파도』를 배달하며…         ‘알아내다’와 ‘앓아내다’ 제게 두 말은 때로 같은 뜻으로 다가옵니다. 두 말 모두 어느 정도 장편의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일까요? 여기 그 장편의 세계로 우리를 ‘앓음 알음’ 안내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무슨 일이든 벌어질 것 같은 도입부지요. 눈앞에 한 세계가 천천히 입 벌리며 다가올 때 위화감. 작가는 그 어둠과 비밀을 현대의 행정 언어로, 어른의 문장으로 풀어냅니다. 삶을 가리키는 화살표와 죽음을 지시하는 방향이 같은 동네, 척주에서요. 그리고 이곳엔 진실을 향해 다가가는 보건소 직원 송인화가 있습니다. 오해와 고립,[…]

최은미, 『아홉번째 파도』 중에서
/ 2018-10-04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카뮈』 중에서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카뮈』를 배달하며…         문학 이야기 같지만 축구 이야기입니다. 축구 이야기 같지만 인생 이야기고요. 이 책은 모두 152개의 작은 조각들로 이뤄졌는데, 각 장마다 ‘선수’, ‘주심’, ‘축구공’ 등의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이 장의 이름은 당연 ‘카뮈’이고요. 작가 얘기가 나오는 거의 유일한 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어떤 말들은 한참 나이가 든 뒤에야 이해할 수 있는데 제겐 저 카뮈의 말이 그랬습니다. ‘신을 느끼지 않고서도 이길 수 있는 법을 배웠고, 쓰레기라 느끼지 않고서도 질 수 있다’는 첨언 또한요. 우리는 살면서 선수와 관중, 심판과 감독 등 경기장 내 모든[…]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카뮈』 중에서
/ 2018-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