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중에서

      김미월 │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배달하며       그러네요. 지구 멸망 열네 시간 전이네요. 사랑하는 사람과 지구 최후의 날을 맞겠다던 대학 교양수업 작문 과제 때의 소망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네요. 그때 맘에 두었던 사람이 공이었으니까요.     열네 시간 후면 지구가 멸하는데 이 두 사람은 공원벤치에서 황도 원터치 캔 하나로 웃고 있습니다. 지구가 곧 멸망해도 웃을 일은 있다는 거겠지요. 스피노자의 경구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인데 이걸 김미월의 문장으로 다시 읽으면 새롭게 따뜻해집니다. 제목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네요. 설령 그것이 열네 시간 후에 온다 하더라도 아직은.   소설가 구효서  […]

김미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중에서
/ 2020-02-27
이주란,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 중에서

      이주란 │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를 배달하며       일기식으로 된 소설을 읽으며 이렇게 수제비 반죽 떼어 넣듯 뚜걱뚜걱 던지는 문장이 참 좋구나 좋아, 하고 중얼거립니다. 길면서 길지 않은, 무심한 듯 무심하지 않은, 내용도 연결된 끈 없이, 그러면서도 보이지 않게 어딘가 연결되는.     세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랄까 태도 같은 것도 이제는 썩 부러워집니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하다가, 생각만이라도 이렇게 해보고 싶다 하다가, 에이 뭐 그냥 이런 소설 읽게 된 걸로 고마워하자 하고 말았네요. 개화역 공중화장실에서 똥 싸는 장면이 곧장 이어지는데 지면이 적어 소개하지 못해 정말 안타깝네요.[…]

이주란,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 중에서
/ 2020-02-13
김선재, 「누가 뭐래도 하마」 중에서

      김선재 │ 「누가 뭐래도 하마」를 배달하며       살 찐 주제에 허구한 날 먹을 것만 밝힌다고 유조 씨는 냉장고를 자물쇠로 잠그고 양을 관리하네요. 그러면서 유조 씨는 입만 열면 '그건 개돼지도 안 하는 짓이다.' '사람도 아니다.'라는 말을 반복해요. 그러니까 냉장고를 걸어 잠그고 못 먹게 하는 까닭이 뭐라는 거죠? 사람 만들려고 그런다는 거 아닌가요. 사람 만든다면서 사람 취급 안 해도 된다는 건지 뭔지. 사람이라 멋대로 명명하고 호명하는 특권을 차지한 자들에게는 애초부터 사람 따위는 없는 건지도 몰라요. 휴머니즘 또한 언제나 폭력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고도 할 수 없고요.*   소설가 구효서[…]

김선재, 「누가 뭐래도 하마」 중에서
/ 2020-01-23
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 중에서

      파트리크 쥐스킨트 │ 「깊이에의 강요」를 배달하며…       '어느 평론가'의 말을 듣고 이 사달이 난 거에요. 평론가는 그녀에게 말했죠.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하다고. 여인은 순진하게도 그 말을 곧이듣습니다. 139미터나 되는 방송탑에 올라 떨어지다니.     그녀를 죽인 게 깊이인 셈이죠. 그런데 그럴까 싶어요. 평론가가 깊이라는 말을 무책임하게 썼고 그녀가 깊이라는 말을 무책임하게 받아들였잖아요. 깊이라는 게 무엇이관데 두 사람에게 그 뜻이 완벽하게 공유되었을까요. 두 사람 다 무책임하다고 하는 건 이 때문일 거예요. 진짜 무섭지 않나요. 하나의 단어가 일말의 여지도 없이 두 사람에게 그 뜻이 철저하게 공유되는 거. 그러니까 그녀를[…]

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 중에서
/ 2020-01-09
한유주, 「그해 여름 우리는」 중에서

      한유주 │ 「그해 여름 우리는」을 배달하며…       하도 자살 자살 그러니까 자살이 자살 같지 않네요. 자살이 우리가 아는 그 자살인지 아니면 여행이나 기록이라는 말의 단순 오기인지도 알 수 없네요. 자살이라고 자꾸 말할수록 그 말의 의미랄까 그런 게 증발해서 자살이라는 말은 과수원 사과나무의 사과를 쌌던 사과봉지처럼 하얗게 바래서 파삭파삭하네요. 그러니 도무지 소설의 세계로는 미처 들어가지조차 못 해요. 한유주의 문장들은 독자를 소설의 세계(흥, 그런 게 어디 있냐는 듯)로 끌어들이지 않으며 들어와 봤자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들어올 생각 따위 말고 시간 있거들랑 문 앞에 서서 문에 새겨진 문양이나 슬슬[…]

한유주, 「그해 여름 우리는」 중에서
/ 2019-12-26
정소현, 「어제의 일들」 중에서

      정소현 │ 「어제의 일들」을 배달하며…       대략 저간의 사정이 짐작됩니다. 이보다 앞선 페이지에 등장하는 '유부남 미술 교사'라는 말을 더한다면 전체의 줄거리마저 잡힙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투신을 했고 지금은 장애를 안은 채 주차장 관리인으로 일하며 뒤늦게 찾아오는 옛 동창 친구들을 하나하나 만납니다. 친구의 숫자가 늘수록 '사건'에 대한 그들의 진술이 많아질 수밖에 없지만, 워낙 소문이 소문을 낳았던 일이고, 주인공의 기억도 이제는 노트에 꼼꼼히 메모를 하지 않으면 어제의 일을 잊을 만큼 심각한 훼손을 입어 '사실'의 전말을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사실이란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한 소녀가 아파트에서[…]

정소현, 「어제의 일들」 중에서
/ 2019-12-12
마루야마 겐지, 『여름의 흐름』 중에서

      마루야마 겐지 │ 『여름의 흐름』을 배달하며…       어딘가 끝장면 같지 않나요. 영화든 소설이든 이렇듯 고즈넉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맞습니다. 소설의 끝장면이고요, 여름 바닷가로 휴가 온 가족의 단란한 한때입니다. 그런데 '나'의 직업은……교도관입니다. 휴가 전날, 저항하는 사형수의 목에 밧줄을 걸어 처형한 사람입니다. 위에 인용된 첫 문장도 사실은 '처형 다음날 받은 특별휴가 덕분에……'입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동료인 호리배와 낚시를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조용한 곳'을 아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요. 물고기를 잡아 '큰 놈은 배를 찢어, 손가락을 집어넣어 내장을 꺼내고, 물로 씻어서 아가미에 갈대를 뀁(p.69)'니다. 낚시도 교수형 집행도 그는 베테랑답게,[…]

마루야마 겐지, 『여름의 흐름』 중에서
/ 2019-11-28
윤성희, 『상냥한 사람』 중에서

      윤성희 │ 『상냥한 사람』을 배달하며…       누군가의 아버지며 남편인 사람이 동네 목욕탕에서 배를 갈아 만든 음료를 마시다가 배숙과 닭발을 떠올리는 장면이네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딸과 아내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데 그들이 등장하려니 생강을 넣어 달인 배숙과 네발가락집의 최강닭발은 물론이요 감기와 시험, 마을버스 정류장과 뚜껑이 하얀 장수막걸리, 그리고 계란탕까지 덩달아 따라 나옵니다. 이것. 덩달아 따라 나오기. 이게 도무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윤성희만의 매력적인 문장인데요, 하이고 참 시시콜콜도 해라 싶을 만큼 책 한 권이 이런 꼬순 얘기들로 아주 가득합니다. 그렇죠. 시시콜콜한 얘기를 빼면 인생에 남는 게 별로 없다는 게[…]

윤성희, 『상냥한 사람』 중에서
/ 2019-11-14
장은진, 「외진 곳」 중에서

      장은진 │ 「외진 곳」을 배달하며…       네모집.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이 집을 네모집이라고 부릅니다. 한가운데에 작은 마당이 있는, 미음(ㅁ)자 모양의 집이니까요. 아홉 개의 월세방이 나란합니다. 이보다 더 싼 곳이 있을까 싶은, 그런 곳. 이 집의 주인과 이곳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의 면면은 소설작품 속에서 자세합니다만, 자세하지 않아도 그들 삶의 신산과 외로움이 선하게 느껴질 판입니다. 그리고 한밤중에 9번 방 여자와 5번 방 남자가 나와 눈사람을 만드는군요. 말없이. 더는 토를 달 필요가 없는 풍경이겠습니다.   소설가 구효서   작가 : 장은진 출전 :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장은진[…]

장은진, 「외진 곳」 중에서
/ 2019-10-31
기 헬밍거, 「겨울」 중에서

      기 헬밍거 │ 「겨울」을 배달하며…       겨우, 그녀의 이름이 발 부인일 뿐입니다. 남자가 누구인지, 그는 어째서 혼자인 그녀를 집에서 끌어내어 눈 덮인 호숫가 한가운데 얼음 구멍에다 처넣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발 부인을 발 부인이라고 말할 뿐 룩셈부르크의 이 작가는 그녀에 관해서도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남자가 그녀를 집에서 끌어내고, 때리고, 호수 한가운데의 얼음 구멍 속에다 밟아 욱여넣는 내용이 전부입니다. 생명, 인권, 약자 등의 말이 생겨나기 이전, 순수 악과 절대 폭력의 시간으로 장면을 되돌려 보는 작가의 의도는 뭘까요. 모르겠네요. 다만, 매우 낯설고 거부감이 들면서도[…]

기 헬밍거, 「겨울」 중에서
/ 2019-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