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용,「숯불의 詩」

숯불의 詩     김 신 용(낭송: 김신용)     군불을 지피고 남은 숯불에 감자를 묻는다 숯불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는 것 같다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온기로 몇 알의 감자라도 익힌다면 사그라져 남는 재도 따뜻하리라,고 생각하는 눈빛 같다. 수확이 끝난 빈 밭에 몇 줌의 감자를 남겨두는 경자(耕者)의 마음도 저와 같을까? 묻힌 것에게 체온 다 주고 사그라지고 있는 모습이 삶이 경전(耕田)이며 곧 경전(經典)이라고 말하는 눈빛 같기도 하다 추수가 끝난 빈 밭에서 주워온 몇 알의 감자, 숯불 속에서 익고 있는 그 뜨거운 속살이 심서(心書) 같아 마음의 빈 밭에라도 씨앗 하나 묻어둔 적 없는[…]

김신용,「숯불의 詩」
/ 2006-11-27
정진규,「연필로 쓰기」

연필로 쓰기 정 진 규(낭송: 도종환)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 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반편도 거두어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정진규,「연필로 쓰기」
/ 2006-11-20
신달자,「여보! 비가 와요」

여보! 비가 와요     신 달 자(낭송: 신달자)     아침에 창을 열었다여보! 비가 와요무심히 빗줄기를 보며 던지던가벼운 말들이 그립다오늘은 하늘이 너무 고와요혼잣말 같은 혼잣말이 아닌그저 그렇고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사소한 일상용어들을 안아 볼을 대고 싶다 너무 거칠었던 격분너무 뜨거웠던 적의우리들 가슴을 누르던 바위 같은무겁고 치열한 싸움은녹아 사라지고 가슴을 울렁거리며입이 근질근질 하고 싶은 말은작고 하찮은날씨 이야기 식탁 위의 이야기국이 싱거워요?밥 더 줘요?뭐 그런 이야기발끝에서 타고 올라와가슴 안에서 쾅 하고 울려오는삶 속의 돌다리 같은 소중한 말안고 비비고 입술 대고 싶은시시하고 말도 아닌 그 말들에게나보다 먼저 아침밥 한 숟가락 떠먹이고 싶다[…]

신달자,「여보! 비가 와요」
/ 2006-11-13
고정희,「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 정 희(낭송: 김혜옥)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뿌리 깊으면야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이 세상 어디에서나 개울은 흐르고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고정희 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 푸른숲  […]

고정희,「상한 영혼을 위하여」
/ 2006-11-06
민영,「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 아들에게」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아들에게   민  영(낭송: 최경원)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늘 약골이라 놀림받았다.큰 아이한테는 떼밀려 쓰러지고힘센 아이한테는 얻어맞았다. 어떤 아이는 나에게아버지 담배 가져오라 시키고,어떤 아이는 나에게엄마 돈을 훔쳐오라고 시켰다. 그럴 때마다 약골인 나는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갖다 주었다.떼밀리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얻어맞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생각했다.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떼밀리고 얻어맞으며 지내야 하나?그래서 나는 약골들을 모았다. 모두 가랑잎 같은 친구들이었다.우리는 더 이상 비굴할 수 없다.얻어맞고 떼밀리며 살 수는 없다.어깨를 겨누고 힘을 모으자. 처음에 친구들은 주춤거렸다.비실대며 꽁무니빼는 아이도 있었다.일곱이 가고 셋이 남았다.모두 가랑잎 같은 친구들이었다.[…]

민영,「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 아들에게」
/ 2006-10-30
김종해,「가을 문안」

가을 문안   김 종 해(낭송: 이숙영)     나는 당신이 어디가 아픈지 알고 있어요.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오오,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슬픔이어둠 속에서 굳어져 별이 됩니다.한밤에 떠 있는 우리의 별빛을 거두어당신의 등잔으로 쓰셔요.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만 가혹하게 빛나는 우리의 별빛당신은 그 별빛을 거느리는 목자가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요.종루에 내린 별빛은 종을 이루고종을 스친 별빛은 푸른 종소리가 됩니다.풀숲에 가만히 내린 별빛은 풀잎이 되고풀잎의 비애를 다 깨친 별빛은 풀꽃이 됩니다.핍박받은 사람들의 이글거리는 불꽃이하늘에 맺힌 별빛이 될 때까지종소리여 풀꽃이여……나는 당신이 어디가 아픈지 알고 있어요.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김종해,「가을 문안」
/ 2006-10-23
고영민,「볍씨 말리는 길」

볍씨 말리는 길   고 영 민(낭송: 고영민)     집 밖을 나섰습니다. 검은 아스팔트 위에 노랗게 펴 말린 볍씨들이 가지런합니다. 햇살에선 오래된 볏짚 냄새가 풍기고 마을은 이제 편하게 쉬고 있습니다. 참 오랜만의 휴식입니다. 이런 날은 길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발소리를 죽이며 걷는 이 길,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선 볍씨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누런 볍씨 속에 들어 있는 흰쌀, 영혼들, 나는 문득 저 길의 끝, 일년 내내 못물에 발목을 적시며 준비한 정갈한 저녁 밥상을 떠올립니다. 텅 빈 무논 한가운데 흰 백로가 허리를 구부려 마음 자락에 떨어진 이삭 하나를 줍습니다. 이[…]

고영민,「볍씨 말리는 길」
/ 2006-10-16
정안면,「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정 안 면(낭송: 도종환)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항상 마음이 푸른 사람을 만나고 싶다.항상 푸른 잎새로 살아가는 사람을오늘 만나고 싶다.언제 보아도 언제 바람으로 스쳐 만나도마음이 따뜻한 사람밤하늘의 별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세상의 모든 유혹과 폭력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언제나 제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의연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언제나 마음을 하늘로 열고 사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오늘 거친 삶의 벌판에서언제나 청순한 마음으로 사는 사슴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모든 삶의 굴레 속에서도 비굴하지 않고언제나 화해와 평화스런 얼굴로 살아가는그런 세상의 사람을 만나고 싶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오늘[…]

정안면,「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 2006-10-09
김용택,「섬진강 17 – 동구」

섬진강 17– 동구   김 용 택(낭송: 김상현)       추석에 내려왔다추수 끝내고 서울 가는 아우야동구 단풍 물든 정자나무 아래―차비나 혀라―있어요 어머니철 지난 옷 속에서꼬깃꼬깃 몇 푼 쥐여주는소나무 껍질 같은 어머니 손길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고개 숙여 텅 빈 들길터벅터벅 걸어가는 아우야서울길 삼등열차동구 정자나무잎 바람에 날리는쓸쓸한 고향 마을어머니 모습 스치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어머니 어머니 부를 아우야찬 서리 내린 겨울 아침손에 쩍쩍 달라붙는 철근을 일으키며공사판 모닥불 가에 몸 돌리며 앉아 불을 쬐니팔리지 않고 서 있던 앞산 붉은 감들이눈에 선하다고불길 속에 선하다고고향 마을 떠나올 때어여 가 어여 가 어머니 손길이랑눈에 선하다고강 건너 콩동이랑들판[…]

김용택,「섬진강 17 - 동구」
/ 2006-10-02
조병화,「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조 병 화(낭송: 도종환)   낙엽에 누워 산다.낙엽끼리 모여 산다.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낙엽이 지는 하늘가에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낙엽끼리 모여 산다.낙엽에 누워 산다.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 시집 『하루만의[…]

조병화,「낙엽끼리 모여 산다」
/ 2006-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