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대,「그대의 발명」

그대의 발명     박정대(낭송: 윤미애)     느티나무 잎사귀 속으로 노오랗게 가을이 밀려와 우리 집 마당은 옆구리가 화안합니다그 환함 속으로 밀려왔다 또 밀려나가는 이 가을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한 장의 음악입니다 누가 고독을 발명했습니까 지금 보이는 것들이 다 음악입니다나는 지금 느티나무 잎사귀가 되어 고독처럼 알뜰한 음악을 연주합니다 누가 저녁을 발명했습니까 누가 귀뚜라미 울음소리를사다리 삼아서 저 밤하늘에 있는 초저녁 별들을 발명했습니까 그대를 꿈꾸어도 그대에게 가 닿을 수 없는 마음이 여러 곡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저녁입니다음악이 있어 그대는 행복합니까 세상의 아주 사소한 움직임도 음악이 되는 저녁, 나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박정대,「그대의 발명」
/ 2006-09-18
이기철,「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이기철(낭송: 김용신)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도 한다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하루는 또 한번의 작별이 된다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그런 이별은 숭고하다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내가 만난 사람도 모두 아름다웠다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하루를 건너가고 싶다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내 아는 사람에게상추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

이기철,「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 2006-09-11
강연호,「9월도 저녁이면」

9월도 저녁이면     강연호(낭송: 김상현)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치던 아이들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빈집의 돌담은 제풀에 귀가 빠지고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애매한 그리움이란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지난 여름은 어떠했나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문학동네) 어느새 9월입니다. 9월의 저녁엔 바람도 천천히 이분쉼표로 불어오는 게 느껴지시는지요? 노을도 생각이 많아져 오래 머물고[…]

강연호,「9월도 저녁이면」
/ 2006-09-04
이성선,「사랑하는 별 하나」

사랑하는 별 하나   이성선(낭송 : 윤미애)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될 수 있을까.외로워 쳐다보면눈 마주쳐 마음 비쳐주는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 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가슴에 화안히 안기어눈물짓듯 웃어주는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둔 밤 깊을수록우러러 쳐다보면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길을 비추어주는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물방울 우주』(황금북) 누구나 되고 싶은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그 많은 것 중에 별과[…]

이성선,「사랑하는 별 하나」
/ 2006-08-28
오규원,「비가 와도 젖은 자는 – 순례1」

비가 와도 젖은 자는– 순례1   오규원(낭송: 김용신)     강가에서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그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다시 한 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여름의 옷 한 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 올라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얼마 쉰 뒤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

오규원,「비가 와도 젖은 자는 - 순례1」
/ 2006-08-21
이준관,「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   이준관(낭송: 김상현)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구부러진 길을 가면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드는 구부러진 길.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구불구불 간다.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부엌의 불빛』시학 (예술위원회 선정 2006년[…]

이준관,「구부러진 길」
강혜빈 / 2006-08-14
정호승,「바닷가에 대하여」

바닷가에 대하여   정호승(낭송: 도종환)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때지구 위를 걸어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새들과 함께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지 못했을 때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었을 때모내기가 끝난 무논의 저수지 둑 위에서자살한 어머니의 고무신 한 짝을 발견했을 때바다에 뜬 보름달을 향해 촛불을 켜놓고 하염없이두 손 모아 절을 하고 싶을 때바닷가 기슭으로만 기슭으로만 끝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하나씩 있으면[…]

정호승,「바닷가에 대하여」
/ 2006-08-07
안도현,「저물 무렵」

저물 무렵                                               안 도 현(낭송: 김용신)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그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의 한쪽을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싶었습니다얼마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요오래오래 그렇게 앉아 있다가 보면양쪽 볼이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었는데그것이 처음에는 붉은 노을 때문인 줄로 알았습니다흘러가서는 되돌아오지 않는 물소리가그애와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그애는 날이 갈수록 부쩍 말수가 줄어드는 것이었고나는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다만 손가락으로 먼 산의 어깨를 짚어가며강물이 적시고 갈 그 고장의 이름을 알려주는[…]

안도현,「저물 무렵」
/ 2006-07-31
마종기,「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   마 종 기(낭송: 도종환)     오랫동안 별을 싫어했다. 내가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 때문인지 너무나 멀리 있는 현실의 바깥에서,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안쓰러움이 싫었다. 외로워 보이는 게 싫었다. 그러나 지난 여름 북부 산맥의 높은 한밤에 만난 별들은 밝고 크고 수려했다. 손이 담길 것같이 가까운 은하수 속에서 편안히 누워 잠자고 있는 맑은 별들의 숨소리도 정다웠다.       사람만이 얼굴을 들어 하늘의 별을 볼 수 있었던 옛날에는 아무데서나 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요즈음, 사람들은 더 이상 별을 믿지 않고 희망에서도 등을[…]

마종기,「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
/ 2006-07-24
손택수,「흰둥이 생각」

흰둥이 생각   손 택 수(낭송: 손택수)   손을 내밀면 연하고 보드라운 혀로 손등이며 볼을 쓰윽, 쓱 핥아주며 간지럼을 태우던 흰둥이. 보신탕감으로 내다 팔아야겠다고, 어머니가 앓아누우신 아버지의 약봉지를 세던 밤. 나는 아무도 몰래 대문을 열고 나가 흰둥이 목에 걸린 쇠줄을 풀어주고 말았다. 어서 도망가라, 멀리멀리, 자꾸 뒤돌아보는 녀석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며 아버지의 약값 때문에 밤새 가슴이 무거웠다. 다음날 아침 멀리 달아났으리라 믿었던 흰둥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와서 그날따라 푸짐하게 나온 밥그릇을 바닥까지 달디달게 핥고 있는 걸 보았을 때, 어린 나는 그예 꾹 참고 있던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흰둥이는 그런[…]

손택수,「흰둥이 생각」
/ 2006-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