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흰둥이 생각」

흰둥이 생각   손 택 수(낭송: 손택수)   손을 내밀면 연하고 보드라운 혀로 손등이며 볼을 쓰윽, 쓱 핥아주며 간지럼을 태우던 흰둥이. 보신탕감으로 내다 팔아야겠다고, 어머니가 앓아누우신 아버지의 약봉지를 세던 밤. 나는 아무도 몰래 대문을 열고 나가 흰둥이 목에 걸린 쇠줄을 풀어주고 말았다. 어서 도망가라, 멀리멀리, 자꾸 뒤돌아보는 녀석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며 아버지의 약값 때문에 밤새 가슴이 무거웠다. 다음날 아침 멀리 달아났으리라 믿었던 흰둥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와서 그날따라 푸짐하게 나온 밥그릇을 바닥까지 달디달게 핥고 있는 걸 보았을 때, 어린 나는 그예 꾹 참고 있던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흰둥이는 그런[…]

손택수,「흰둥이 생각」
/ 2006-07-17
양애경,「가로등이 있는 숲길」

가로등이 있는 숲길   양 애 경(낭송: 윤미애)     초여름 저녁 어스름산책로로 접어드는데파득, 하고가로등이 날개 펴는 소리가 들렸어요올려다보니빛의 씨앗이 점점 더 붉게더 환하게 켜지더니밤의 우주를 향해 열린 커다란 등대가 되더군요 내 마음도 가로등처럼 켜져서우주를 향해그대, 나 외로워!라고 나와 밤하늘만 들을 수 있는큰 소리로 외쳤어요       빛의 빠르기로 대답이 와도몇천 년 후에야 이 자리에 도착할지 몰라요 산새가 가쁜 내 숨소리를 따라와서자기도 답.답.해. 답.답.하다고나무 위에서 큰 소리로 울어줬어요 하늘엔 초승달과 별이 마주보며저렇게 수줍게 열려 있는데 밤이 다가온 숲과사람이 사는 마을 사이저렇게 아름다운 불빛들이 걸렸는데…   – 양애경 시집『내가 암늑대라면』(고요아침) 저녁 어스름 혼자[…]

양애경,「가로등이 있는 숲길」
/ 2006-07-10
정일근,「흑백사진-7월」

흑백사진-7월   정일근(낭송: 백익남)   내 유년의 7월에는 냇가 잘 자란 미루나무 한 그루 솟아오르고 또 그 위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 내려와 어린 눈동자 속 터져나갈 듯 가득 차고 찬물들은 반짝이는 햇살 수면에 담아 쉼 없이 흘러갔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착한 노래들도 물고기들과 함께 큰 강으로 헤엄쳐 가버리면 과수원을 지나온 달콤한 바람은 미루나무 손들을 흔들어 차르르차르르 내 겨드랑에도 간지러운 새 잎이 돋고 물 아래까지 헤엄쳐가 누워 바라보는 하늘 위로 삐뚤삐뚤 헤엄쳐 달아나던 미루나무 한 그루. 달아나지 마 달아나지 마 미루나무야, 귀에 들어간 물을 뽑으려 햇살에 데워진 둥근 돌을 골라[…]

정일근,「흑백사진-7월」
/ 2006-07-03
김용락,「단촌국민학교」

단촌국민학교                                           김 용 락(낭송: 도종환)   뿔새가 서편 하늘에 수를 놓으면은버드나무 그늘이 교정을 안개처럼 하얗게 덮고계단 밑의 살구나무가 신열을 앓듯이살구꽃 향기를 보리밭으로 흘려 보내던단촌국민학교콧수건을 접어 훈장처럼 가슴에 달고땡땡땡사변 때 포탄껍질로 만든 쇠종소리에 발도 맞추면서검정고무신에 새끼줄을 동여매고 공차기도 하고달빛과 어우러져측백나무 울타리 밑을 기어다니며 술래잡기도 하던내 유년의 성터에서모두들 어디 갔을까이젠 모두들 어디 갔을까장다리꽃처럼 키가 껑충하던 첫사랑 내 여선생님도샘이 유난히 많던 짝꿍 순이도손풍금소리에 맞추어 울면서 어머님 은혜를 따라 부르시던백발의 울보 교장선생님도 이젠 없는흰구름만 둥실 떠가는단촌국민학교모두들 어디로 숨어버렸을까20년 만에 서본 운동장은 텅 비어 쓸쓸하고호루라기 소리에 맞추어 물개구리처럼 뛰고 배우던 우리들의 학습그 싱싱하고[…]

김용락,「단촌국민학교」
/ 2006-06-26
이상국,「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이 상 국(낭송:백익남)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나는 벌 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오늘은 일찍 돌아가서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   – 이상국 시집『어느 농사꾼의 별에서』(창비, 2005)   여러분도 그러셨는지요?[…]

이상국,「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 2006-06-19
천양희,「물가에서의 하루」

물가에서의 하루     천 양 희(낭송: 김미애)     하늘 한쪽이 수면에 비친다 물총새가 물 속을 들여다보고 소금쟁이 몇개 여울을 만든다 내가 세상에 와 첫 눈을 뜰 때 나는 무엇을 보았을까 하늘보다는나는 새를 물보다는 물 건너가는 바람을 보았기를 바란다나는 또 논둑길 너머 잡목숲을 숲 아래 너른 들판을 보았기를바란다 부산한 삶이 거기서 시작되면 삶에 대해 많은 것을바라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산그늘이 물 속까지 따라온다 일렁이는물결 속 청둥오리들 나보다도 더 오래 물 위를 헤맨다 너는아는구나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물이라는 걸 아는구나 오늘따라새들의 날갯짓이 훤히 보인다 작은 잡새라도 하늘에다 커다란원을 그리고[…]

천양희,「물가에서의 하루」
/ 2006-06-12
배한봉,「자연 도서관」

자연 도서관                                                      배 한 봉(낭송:고은주)     부들과 창포가 뙤약볕 아래서목하 독서중이다, 바람 불 때마다책장 넘기는 소리 들리고더러는 시집을 읽는지 목소리가 창랑滄浪 같다물방개나 소금쟁이가 철없이 장난 걸어올 때에도어깨 몇 번 출렁거려 다 받아주는싱싱한 오후, 멀리 갯버들도 목하 독서중이다바람이 풀어놓은 수만 권 책으로설렁설렁 더위 식히는 도서관, 그 한켠에선백로나 물닭 가족이 춤과 노래 마당 펼치기도 한다그렇게 하루가 깊어가고나는 수시로 그 초록 이야기 듣는다그러다가 스스로 창랑滄浪의 책이 되는 늪에는수만 갈래 길이 태어나고아득한 옛날의 공룡들이 살아 나오고무수한 언어들이 적막 속에서 첨벙거린다이때부터는 신의 독서 시간이다내일 새벽에는 매우 신선한 바람이 불 것이다자연 도서관에 들기[…]

배한봉,「자연 도서관」
/ 2006-06-05
곽재구,「단오」

단 오        곽재구(낭송: 김근)     사랑하는 이여강가로 나와요 작은 나룻배가 사공도 없이저 혼자 아침 햇살을 맞는 곳 지난밤가장 아름다운 별들이눈동자를 빛내던 신비한 여울목을찾아 헤매었답니다 사랑하는 이여그곳으로 와요그곳에서 당신의 머리를 감겨드리겠어요햇창포 꽃잎을 풀고매화향 깊게 스민 촘촘한 참빗으로당신의 머리칼을 소복소복 빗겨드리겠어요 그런 다음노란 원추리꽃 한 송이를 당신의 검은 머리칼 사이에꽂아드리지요 사랑하는 이여강가로 나와요작은 나룻배가 은빛 물살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곳그곳에서 당신의 머리를 감겨드리겠어요그곳에서 당신의 머리칼을 빗겨드리겠어요   -『참 맑은 물살』, 창비   모레가 단오입니다. 고요하고 밝은 강가, 아름답고 신비한 여울목에서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싶은 단오입니다.“햇창포 꽃잎을 풀고/매화향 깊게 스민 촘촘한 참빗으로/머리칼을[…]

곽재구,「단오」
/ 2006-05-29
나희덕,「오분간」

오분간                                 나 희 덕(낭송: 나희덕)     이 꽃그늘 아래서내 일생이 다 지나갈 것 같다.기다리면서 서성거리면서아니, 이미 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아이를 기다리는 오분간아카시아꽃 하얗게 흩날리는이 그늘 아래서어느새 나는 머리 희끗한 노파가 되고,버스가 저 모퉁이를 돌아서내 앞에 멈추면여섯살배기가 뛰어내려 안기는 게 아니라훤칠한 청년 하나 내게로 걸어올 것만 같다.내가 늙은 만큼 그는 자라서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보겠지.기다림 하나로도 깜박 지나가 버릴 生,내가 늘 기다렸던 이 자리에그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쯤너무 멀리 나가버린 그의 썰물을 향해떨어지는 꽃잎,또는 지나치는 버스를 향해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내 기다림을 완성하겠지.중얼거리는 동안 꽃잎은 한 무더기 또 진다.아, 저기 버스가[…]

나희덕,「오분간」
/ 2006-05-22
김시천,「아이들을 위한 기도」

아이들을 위한 기도                                        김시천(낭송: 김근)   당신이 이 세상을 있게 한 것처럼아이들이 나를 그처럼 있게 해주소서불러 있게 하지 마시고내가 먼저 찾아가 아이들 앞에겸허히 서게 해주소서열을 가르치려는 욕심보다하나를 바르게 가르치는 소박함을알게 하소서위선으로 아름답기보다는진실로써 추하기를 차라리 바라오며아이들의 앞에 서는 자 되기보다아이들의 뒤에 서는 자 되기를바라나이다당신에게 바치는 기도보다도아이들에게 바치는 사랑이 더 크게 해주시고소리로 요란하지 않고마음으로 말하는 법을 깨우쳐주소서당신이 비를 내리는 일처럼꽃밭에 물을 주는 마음을 일러주시고아이들의 이름을 꽃처럼 가꾸는 기쁨을남 몰래 키워가는 비밀 하나를끝내 지키도록 해주소서흙먼지로 돌아가는 날까지그들을 결코 배반하지 않게 해주시고그리고 마침내 다시 돌아와그들 곁에 순한 바람으로머물게 하소서저 들판에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우리[…]

김시천,「아이들을 위한 기도」
/ 2006-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