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봉,「자연 도서관」

자연 도서관                                                      배 한 봉(낭송:고은주)     부들과 창포가 뙤약볕 아래서목하 독서중이다, 바람 불 때마다책장 넘기는 소리 들리고더러는 시집을 읽는지 목소리가 창랑滄浪 같다물방개나 소금쟁이가 철없이 장난 걸어올 때에도어깨 몇 번 출렁거려 다 받아주는싱싱한 오후, 멀리 갯버들도 목하 독서중이다바람이 풀어놓은 수만 권 책으로설렁설렁 더위 식히는 도서관, 그 한켠에선백로나 물닭 가족이 춤과 노래 마당 펼치기도 한다그렇게 하루가 깊어가고나는 수시로 그 초록 이야기 듣는다그러다가 스스로 창랑滄浪의 책이 되는 늪에는수만 갈래 길이 태어나고아득한 옛날의 공룡들이 살아 나오고무수한 언어들이 적막 속에서 첨벙거린다이때부터는 신의 독서 시간이다내일 새벽에는 매우 신선한 바람이 불 것이다자연 도서관에 들기[…]

배한봉,「자연 도서관」
/ 2006-06-05
곽재구,「단오」

단 오        곽재구(낭송: 김근)     사랑하는 이여강가로 나와요 작은 나룻배가 사공도 없이저 혼자 아침 햇살을 맞는 곳 지난밤가장 아름다운 별들이눈동자를 빛내던 신비한 여울목을찾아 헤매었답니다 사랑하는 이여그곳으로 와요그곳에서 당신의 머리를 감겨드리겠어요햇창포 꽃잎을 풀고매화향 깊게 스민 촘촘한 참빗으로당신의 머리칼을 소복소복 빗겨드리겠어요 그런 다음노란 원추리꽃 한 송이를 당신의 검은 머리칼 사이에꽂아드리지요 사랑하는 이여강가로 나와요작은 나룻배가 은빛 물살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곳그곳에서 당신의 머리를 감겨드리겠어요그곳에서 당신의 머리칼을 빗겨드리겠어요   -『참 맑은 물살』, 창비   모레가 단오입니다. 고요하고 밝은 강가, 아름답고 신비한 여울목에서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싶은 단오입니다.“햇창포 꽃잎을 풀고/매화향 깊게 스민 촘촘한 참빗으로/머리칼을[…]

곽재구,「단오」
/ 2006-05-29
나희덕,「오분간」

오분간                                 나 희 덕(낭송: 나희덕)     이 꽃그늘 아래서내 일생이 다 지나갈 것 같다.기다리면서 서성거리면서아니, 이미 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아이를 기다리는 오분간아카시아꽃 하얗게 흩날리는이 그늘 아래서어느새 나는 머리 희끗한 노파가 되고,버스가 저 모퉁이를 돌아서내 앞에 멈추면여섯살배기가 뛰어내려 안기는 게 아니라훤칠한 청년 하나 내게로 걸어올 것만 같다.내가 늙은 만큼 그는 자라서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보겠지.기다림 하나로도 깜박 지나가 버릴 生,내가 늘 기다렸던 이 자리에그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쯤너무 멀리 나가버린 그의 썰물을 향해떨어지는 꽃잎,또는 지나치는 버스를 향해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내 기다림을 완성하겠지.중얼거리는 동안 꽃잎은 한 무더기 또 진다.아, 저기 버스가[…]

나희덕,「오분간」
/ 2006-05-22
김시천,「아이들을 위한 기도」

아이들을 위한 기도                                        김시천(낭송: 김근)   당신이 이 세상을 있게 한 것처럼아이들이 나를 그처럼 있게 해주소서불러 있게 하지 마시고내가 먼저 찾아가 아이들 앞에겸허히 서게 해주소서열을 가르치려는 욕심보다하나를 바르게 가르치는 소박함을알게 하소서위선으로 아름답기보다는진실로써 추하기를 차라리 바라오며아이들의 앞에 서는 자 되기보다아이들의 뒤에 서는 자 되기를바라나이다당신에게 바치는 기도보다도아이들에게 바치는 사랑이 더 크게 해주시고소리로 요란하지 않고마음으로 말하는 법을 깨우쳐주소서당신이 비를 내리는 일처럼꽃밭에 물을 주는 마음을 일러주시고아이들의 이름을 꽃처럼 가꾸는 기쁨을남 몰래 키워가는 비밀 하나를끝내 지키도록 해주소서흙먼지로 돌아가는 날까지그들을 결코 배반하지 않게 해주시고그리고 마침내 다시 돌아와그들 곁에 순한 바람으로머물게 하소서저 들판에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우리[…]

김시천,「아이들을 위한 기도」
/ 2006-05-15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이승하(낭송: 도종환)   작은 발을 쥐고 발톱 깎아드린다일흔다섯 해 전에 불었던 된바람은내 어머니의 첫 울음소리 기억하리라이웃집에서도 들었다는 뜨거운 울음소리   이 발로 아장아장걸음마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이 발로 폴짝폴짝고무줄놀이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뼈마디를 덮은 살가죽쪼글쪼글하기가 가뭄못자리 같다굳은살이 덮인 발바닥딱딱하기가 거북이 등 같다   발톱 깎을 힘이 없는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린다가만히 계셔요 어머니잘못하면 다쳐요어느 날부터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고개를 끄덕이다 내 머리카락을 만진다나 역시 말을 잃고 가만히 있으니한쪽 팔로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   맞닿은 창문이온몸 흔들며 몸부림치는 날어머니에게 안기어일흔다섯 해 동안의 된바람 소리 듣는다.                                     […]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 2006-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