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입설단비(立雪斷臂)」

입설단비(立雪斷臂)   김 선 우(낭송: 본인)       2조(二祖) 혜가는 눈 속에서 자기 팔뚝을 잘라 바치며달마에게 도(道) 공부 하기를 청했다는데나는 무슨 그리 독한 비원도 이미 없고단지 조금 고적한 아침의 그림자를 원할 뿐아름다운 것의 슬픔을 아는 사람을 만나밤 깊도록 겨울 숲 작은 움막에서생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를 들으며그저 묵묵히 서로의 술잔을 채우거나 비우며 다음날 아침이면 자기 팔뚝을 잘라 들고 선정한 눈빛의 나무 하나 찾아서그가 흘린 피로 따듯하게 녹아 있는동그라한 아침의 그림자 속으로 지빠귀 한마리종종 걸어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싶을 뿐작은 새의 부리가 붉게 물들어아름다운 손가락 하나 물고 날아가는 것을 고적하게 바라보고 싶을 뿐[…]

김선우,「입설단비(立雪斷臂)」
/ 2007-01-29
허만하,「이별」

이별     허 만 하(낭송: 도종환)   자작나무 숲을 지나자 사람이 사라진 빈 마을이 나타났다. 강은 이 마을에서 잠시 방향을 잃는다. 강물에 비치는 길손의 물빛 향수. 행방을 잃은 여자의 음영만이 짙어가고 파스테르나크의 가죽 장화가 밟았던 눈길. 그는 언제나 뒷모습의 초상화다. 멀어져가는 그의 등에서 무너지는 눈사태의 눈부심. 눈보라가 그치고 모처럼 쏟아지는 햇살마저 하늘의 높이에서 폭포처럼 얼어 있다. 우랄의 산줄기를 바라보는 평원에서 물기에 젖은 관능도 마지막 포옹도 국경도 썰렁한 겨울 풍경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선지피를 흘리는 혁명도 평원을 건너는 늙은 바람도 끝없는 자작나무 숲에 지나지 않는다. 시베리아의 광야에서는 지도도 말을 잃어버린다.[…]

허만하,「이별」
/ 2007-01-22
문정희,「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 정 희(낭송: 김혜옥)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한계령쯤을 넘다가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문정희,「한계령을 위한 연가」
/ 2007-01-15
김용화,「첫눈 내리는 날에 쓰는 편지」

첫눈 내리는 날에 쓰는 편지   김 용 화       소한날 눈이 옵니다가난한 이 땅에 하늘에서 축복처럼눈이 옵니다집을 떠난 새들은 돌아오지 않고베드로학교 낮은 담장 너머로풍금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는 아침입니다창문 조금 열고가만가만 눈 내리는 하늘 쳐다보면사랑하는 당신 얼굴 보입니다멀리 갔다 돌아오는 메아리처럼겨울나무 가지 끝에순백의 꽃으로 피어나는 눈물 같은 당신,당신을 사랑한 까닭으로여기까지 왔습니다기다림의 세월은 추억만으로도아름답지만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당신을 만나서는 안 되는 까닭은당신을 만나는 일이내가 살아온 까닭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한 방울 피가 식어질 때까지나는 이 겨울을 껴안고눈 쌓인 거리를 바람처럼 서성댈 것입니다      -『첫눈 내리는 날에 쓰는 편지, 문학세계사, 2004(2005년[…]

김용화,「첫눈 내리는 날에 쓰는 편지」
/ 2007-01-08
도종환,「처음 가는 길」

처음 가는 길   도 종 환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두려워 마라 두려워하였지만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자기 전 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 도종환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 문학동네, 2006(2006년 3분기 우수문학도서)   * 베드로시안은 「그런 길은 없다」에서 “아무도 걸어가본 적이 없는 그런 길은 없다”고 한 바 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우리 앞에는 언제나 처음 가는 길이 놓여[…]

도종환,「처음 가는 길」
홍작가 / 2007-01-01
정세기,「성당 부근」

성당 부근                              정세기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계수나무 한 그루가 서 있던성당 가까이에 살던 그해 겨울지붕들이 낮게 엎드려소리 없이 젖어 잠들고그런 밤에 내려온 별들은읽다 만 성경 구절을성에 낀 창 틈으로 들여다보았다눈사람이 지키는 골목길을 질러상한 바람이 잉잉 울고 간 슬픔을연줄 걸린 전깃줄이 함께 울고측백나무 울타리 너머종소리가 은은한 향기로 울려퍼지면저녁 미사를 보러 가는 사람들그들의 긴 그림자도 젖어 있었다담벼락에 기댄 장작더미 위로쌓이던 달빛이 스러지고 사랑하라사랑하라며 창가에 흔들리던 촛불도 꺼진 밤그레고리안 성가의 낮은 음계를 밟고양떼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성당 뜨락엔 마리아상 홀로 남아 산수유 열매 같은 알전구 불빛을 따 담고 있었다  […]

정세기,「성당 부근」
/ 2006-12-25
문태준,「빈집의 약속」

빈집의 약속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볕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몽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문태준,「빈집의 약속」
Zoe Gilbert / 2006-12-18
고두현,「늦게 온 소포」

늦게 온 소포   고 두 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고두현,「늦게 온 소포」
/ 2006-12-11
장석주,「등(燈)에 부침」

등(燈)에 부침   장 석 주   1누이여, 오늘은 왼종일 바람이 불고사람이 그리운 나는 짐승처럼 사납게 울고 싶었다.벌써 빈 마당엔 낙엽이 쌓이고빗발들은 가랑잎 위를 건너 뛰어다니고나는 머리칼이 젖은 채밤 늦게까지 편지를 썼다.자정 지나 빗발은 흰 눈송이로 변하여나방이처럼 소리없는 아우성으로유리창에 와 흰 이마를 부딪치곤 했다.나는 편지를 마저 쓰지 못하고책상 위에 엎드려 혼자 울었다. 2눈물 글썽이는 누이여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저 고운 불의 모세관 일제히 터져차고 매끄러운 유리의 내벽에밝고 선명하게 번져나가는 선혈의 빛.바람 비껴불 때마다흔들리던 숲도 눈보라 속에 지워져 가고,조용히 등의 심지를 돋우면밤의 깊은 어둠 한 곳을 하얗게 밝히며홀로 근심없이 타오르는 신뢰의 하얀[…]

장석주,「등(燈)에 부침」
/ 2006-12-04
김신용,「숯불의 詩」

숯불의 詩     김 신 용(낭송: 김신용)     군불을 지피고 남은 숯불에 감자를 묻는다 숯불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는 것 같다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온기로 몇 알의 감자라도 익힌다면 사그라져 남는 재도 따뜻하리라,고 생각하는 눈빛 같다. 수확이 끝난 빈 밭에 몇 줌의 감자를 남겨두는 경자(耕者)의 마음도 저와 같을까? 묻힌 것에게 체온 다 주고 사그라지고 있는 모습이 삶이 경전(耕田)이며 곧 경전(經典)이라고 말하는 눈빛 같기도 하다 추수가 끝난 빈 밭에서 주워온 몇 알의 감자, 숯불 속에서 익고 있는 그 뜨거운 속살이 심서(心書) 같아 마음의 빈 밭에라도 씨앗 하나 묻어둔 적 없는[…]

김신용,「숯불의 詩」
/ 2006-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