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영원히 빌리의 것」 중에서

      강태식 「영원히 빌리의 것」을 배달하며       어렸을 때 이런 상상을 해보신 적 있을 겁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먼 친척이 세상을 떠나면서 막대한 유산을 남기는 상상이요. 만화나 동화에서 익숙하게 봐온 설정이지요.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망상에 가깝지만, 인생이 따분하게 여겨지거나 지금의 삶 너머를 꿈꿀 때면 흔히 빠져드는 몽상이기도 합니다.     만약 유산으로 물려받는 게 행성이라면 어떨까요. 어두컴컴한 밤하늘 사진을 한참 들여다봐야만 겨우 존재를 드러내는 행성이 바로 내 것이라면요. 사실 그건 유산이 전혀 없다는 말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리로 갈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고 현금으로 바꿔 빵을[…]

강태식, 「영원히 빌리의 것」 중에서
/ 2021-09-02
신대철, 「반딧불 하나 내려보낼까요?」

      신대철 ┃「반딧불 하나 내려보낼까요?」를 배달하며       저는 무서운 이야기를 싫어합니다. 싫어한다고 표현했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는 무서운 이야기들을 무서워합니다. 납량(納涼)이라는 말도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후터분한 여름날에도 이런 서늘함과 떨림은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덥고 늘어지는 게 낫습니다.     생각해보면 무서운 것들은 하나같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신(神)이나 영혼(靈魂)라는 것이 그렇고 믿음(信)이나 영원(永遠)도 그렇지요. 존재하는데 내가 못 보는 것인지 존재하지 않아서 보이지 않는 것인지 혹은 너무 멀리 있어서 안 보이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만을 신뢰하는 인간의 습성도 당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두운 바다가 보이지 않으니까[…]

신대철, 「반딧불 하나 내려보낼까요?」
/ 2021-08-26
송주홍, 「노가다 칸타빌레」 중에서

      송주홍 「노가다 칸타빌레」를 배달하며       다른 사람의 직업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종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얘기를 듣는 재미가 쏠쏠하지요. 직업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운 건 그것이 ‘먹고 사는’ 일과 관련된 분투이기 때문이겠지요.     이 책은 우리가 흔히 ‘노가다’라고 부르는 건설업 종사자가 쓴 건설 현장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하루 일당이 얼마인지 하는 것부터 인력 사무소 소장에게 떼어주는 수수료, 건설 현장의 각종 직무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까지, 실제로 해당 직업을 가진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들 기술을 배우라고 하는 건설 현장에서, 그 중에서도 돈[…]

송주홍, 「노가다 칸타빌레」 중에서
/ 2021-08-19
김소월, 「왕십리」

      김소월 ┃「왕십리」를 배달하며       소월 이전의 현대시인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의 시집 『진달래꽃』이 세상에 나온 것이 1925년이니 사실상 현대시의 처음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소월은 제가 개인적으로 처음 접한 시인이기도 합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이렇게 시작되는 소월의 시는 오래 전 저를 재우던 자장가였다고 합니다.     소월은 1902년에 태어난 사람이고 김정식이라는 본명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1934년 스스로 삶을 내려둡니다. 그가 시를 통해 내보이는 정서를 우리 민족 특유의 한(恨)이라 배웠지만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소월은 스스로 가질 수 있을 만큼의 한으로[…]

김소월, 「왕십리」
/ 2021-08-12
정한아, 「잉글리시 하운드 독」 중에서

      정한아 「잉글리시 하운드 독」을 배달하며       다정하고 따뜻했던 마음은 언제 흐트러질까요. 어떤 관계든 몹시 허기지고 추운 날을 맞게 되기 마련입니다. 사이가 괜찮았을 때는 눈썰매를 타는 것처럼 붕 떠올랐던 마음이 어느 순간 아득하게 아래로 꺼져 버리죠. 그럴 때면 상대가 미워진 나머지 모든 걸 상대 탓으로 돌리고 싶어집니다.     마음이 식고 나서야,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관계가 나빠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다른 줄 아느냐고 질문합니다. 마치 다른 사람인 줄 몰랐던 것처럼요. 마음이 두터울 때는 서로 다른 게 미덕이 되지만 마음이 희박해지면 어느 것도 참을 수 없어집니다.     “우린[…]

정한아, 「잉글리시 하운드 독」 중에서
/ 2021-08-05
김영승, 「반성 673」

      김영승 ┃「반성 673」을 배달하며       식구를 밖에서 만나는 것은 우연에 가까운 일이지만 만났을 때 공연히 서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이 서럽다는 말에는 애틋하다 애처롭다 가엽다 미안하다라는 마음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아울러 반가우면서도 난처하며 동시에 근원을 알 수 없는 화도 조금은 섞여드는 것일 테고요. 그렇게나 무거운 짐을 양손에 들었는데 왜 택시는 안 타고 버스를 타고 온 것인지, 번번이 밥때를 놓치고 다니는 것인지, 이제 그 옷은 그만 입었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아직도 그 외투를 입는 것인지. 이런 물음들도 치밀어오릅니다. 하지만 점점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그냥 웃고[…]

김영승, 「반성 673」
/ 2021-07-29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햇빛」 중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햇빛」을 배달하며       그럴 때 있지 않나요. 마음이 언짢고 잔뜩 꼬여서 세상이 볼품 없어 보일 때요. 신디는 병을 앓으면서 부쩍 그렇게 됐습니다. 이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러자니 외롭고, 남편이 구두쇠여서 자주 짜증이 나고, 친구들이 자신을 보러 오지 않아서 서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올리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은 그저 경황이 없을 뿐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간 자신의 고통과 외로움에 취해 다른 사람의 사정을 미처 헤아리지 않았던 거죠.     무엇보다 올리브와 신디가 함께 바라본 2월의 햇빛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2월이 어중간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햇빛」 중에서
/ 2021-07-22
김행숙, 「입맞춤-사춘기2」

      김행숙, 「입맞춤-사춘기2」를 배달하며       작품에 등장하는 선일여자고등학교 2층 복도. 저는 이 복도를 걸어본 적도 또한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선일여자고등학교 2층 복도 같은 복도가 어떤 복도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별 생각 없이 달려갔다 다시 달려올 수 있는 곳이라면, 이쪽을 저쪽이라 부르고 저쪽을 또 이쪽이라 부를 수 있다면, 웃음과 욕과 맹목이 한데 뒤섞이는 시간이라면, 이 시간이 깃드는 장소라면. 이들은 모두 선일여자고등학교 2층 복도를 닮았을 것입니다.     이 작품이 수록된 김행숙 시인의 시집 『사춘기』의 뒷표지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합니다. “무조건 달리고 또 달릴 거야. 다만 멀어지기 위해.[…]

김행숙, 「입맞춤-사춘기2」
/ 2021-07-15
이원석, 「까마귀 클럽」 중에서

      이원석 「까마귀 클럽」 중에서       지금 이 사람들은 뭘 하는 걸까요. 느닷없이 파이팅을 외치더니 ‘프로틴’이라는 사람이 다짜고짜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프로틴은 민이 어머니나 춘희 아버지, 원장님 같이 이 자리에는 있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한바탕 분노를 퍼붓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잠자코 듣고 나더니 프로틴이 화를 낸 방식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합평을 해줍니다.     ‘까마귀 클럽’은 ‘화를 못 내는 사람, 억울하면 눈물부터 나오는 사람’들을 ‘노력형 분노자’로 만들어주는 모임입니다. 말하자면 화내는 연습을 하러 모인 사람들이에요. 굳이 연습해서 화를 내야 할 만큼 평소에는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못하는 순하디 순한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이원석, 「까마귀 클럽」 중에서
/ 2021-07-08
박용래, 「상치꽃 아욱꽃」

      박용래, 「상치꽃 아욱꽃」을 배달하며       얼마 전 처음으로 오이꽃을 보았습니다. 아, 오이도 꽃이 피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가 스스로의 무지와 무심에 웃음이 났습니다. 오이꽃은 늘 오이꽃처럼 피어왔던 것이니까요. 상치꽃이 ‘상치 대궁만큼’ 웃고 아욱꽃이 ‘아욱 대궁만큼’ 웃듯이 우리도 우리가 웃을 수 있을 만큼 웃고 사는 듯합니다.       다만 이 시를 쓴 박용래 시인은 사람으로 태어나 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울었던 이였습니다. 생전 시인과 가까웠던 소설가 이문구 선생이 울지 않던 그를 본 것이 두 번밖에 되지 않았다고 회고할 만큼. 그는 갸륵한 것과 소박한 것과 조촐한 것과[…]

박용래, 「상치꽃 아욱꽃」
/ 2021-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