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봄날」

      이문재 | 「봄날」을 배달하며…       "봄이 하느님의 눈에 띄고자 한다면 나무나 들판 같은 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봄의 기운은 인간의 내부로도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봄은, 말하자면 시간 속에서가 아니라 영원 속에서, 그리고 신의 임재 가운데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였던가. 오는 봄의 소리가 영원이 되도록 나도 온몸으로 벙그는 저 목련을 급브레이크로 삼아 보자. 봄이 빠져나가 버린 뒤에야 보이는 것이 봄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일이 슬프기도 하지만 괜찮다. '부아앙' 소리가 사나운 기계음이 아니라 봄나팔 소리가 되도록, 책가방 대신 철가방에 든 봄을 배달할 줄 아는 눈이 있으니까.[…]

이문재, 「봄날」
/ 2020-02-20
이주란,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 중에서

      이주란 │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를 배달하며       일기식으로 된 소설을 읽으며 이렇게 수제비 반죽 떼어 넣듯 뚜걱뚜걱 던지는 문장이 참 좋구나 좋아, 하고 중얼거립니다. 길면서 길지 않은, 무심한 듯 무심하지 않은, 내용도 연결된 끈 없이, 그러면서도 보이지 않게 어딘가 연결되는.     세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랄까 태도 같은 것도 이제는 썩 부러워집니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하다가, 생각만이라도 이렇게 해보고 싶다 하다가, 에이 뭐 그냥 이런 소설 읽게 된 걸로 고마워하자 하고 말았네요. 개화역 공중화장실에서 똥 싸는 장면이 곧장 이어지는데 지면이 적어 소개하지 못해 정말 안타깝네요.[…]

이주란,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 중에서
/ 2020-02-13
하상만, 「간장」

      하상만 | 「간장」을 배달하며…       "우리에게는 우리가 살았다고, 우리가 죽었다고, 우리로 인해 이런 것이 달라졌다고 말해 줄 증인과 기록 보관자가 필요하다. 죽음이 의미 없는 곳에서 삶은 의미가 없다." 시인이자 장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토마스 린치의 말이다. 시인은 죽은 자의 기억을 삶으로 복원시켜 주는 일을 한다. 이때 우리의 삶은 바뀐다. 빈 반찬통 속 설거지물에 씻겨 내려가야 할 간장이 문득 영혼의 음식으로 바뀌듯이. 지상에 머물렀던 자의 외로움과 나의 외로움이 겹쳐져 물에 푼 간장 방울처럼 서로에게 번져 가듯이. 우리는 기억되고 싶어서, 사라져도 잊히지 않고 싶어서 기억한다.   시인 손택수  […]

하상만, 「간장」
/ 2020-02-06
김선재, 「누가 뭐래도 하마」 중에서

      김선재 │ 「누가 뭐래도 하마」를 배달하며       살 찐 주제에 허구한 날 먹을 것만 밝힌다고 유조 씨는 냉장고를 자물쇠로 잠그고 양을 관리하네요. 그러면서 유조 씨는 입만 열면 '그건 개돼지도 안 하는 짓이다.' '사람도 아니다.'라는 말을 반복해요. 그러니까 냉장고를 걸어 잠그고 못 먹게 하는 까닭이 뭐라는 거죠? 사람 만들려고 그런다는 거 아닌가요. 사람 만든다면서 사람 취급 안 해도 된다는 건지 뭔지. 사람이라 멋대로 명명하고 호명하는 특권을 차지한 자들에게는 애초부터 사람 따위는 없는 건지도 몰라요. 휴머니즘 또한 언제나 폭력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고도 할 수 없고요.*   소설가 구효서[…]

김선재, 「누가 뭐래도 하마」 중에서
/ 2020-01-23
백무산, 「초심」

      백무산 | 「초심」을 배달하며…       눈이 오니 눈사람이 노동을 한다. 눈을 치우는 눈사람의 노동은 노동을 잊은 노동으로서 자기 자신 외엔 다른 목적이 없는 활동이다. 이 무구한 놀이가 종종거리는 구두와 택배 오토바이와 폐지를 모으는 손수레 바퀴가 미끄러지지 않는 선업을 달성한다. 아무려나 눈은 아버지의 흰두루막 자락을 놓치 않는 다섯살의 새벽길을 잊지 않게 하고, 삶에 지친 영혼을 당목처럼 쳐서 천둥소리를 내게 하는가 하면, 마음과 몸의 구분을 넘어 온 천지를 한번도 살아보지 못한 첫날의 경이로 다시 살고 싶게 한다.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과 규칙과 제도의 작동을 정지시키는 이 감각적 사건을 노동에게[…]

백무산, 「초심」
/ 2020-01-16
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 중에서

      파트리크 쥐스킨트 │ 「깊이에의 강요」를 배달하며…       '어느 평론가'의 말을 듣고 이 사달이 난 거에요. 평론가는 그녀에게 말했죠.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하다고. 여인은 순진하게도 그 말을 곧이듣습니다. 139미터나 되는 방송탑에 올라 떨어지다니.     그녀를 죽인 게 깊이인 셈이죠. 그런데 그럴까 싶어요. 평론가가 깊이라는 말을 무책임하게 썼고 그녀가 깊이라는 말을 무책임하게 받아들였잖아요. 깊이라는 게 무엇이관데 두 사람에게 그 뜻이 완벽하게 공유되었을까요. 두 사람 다 무책임하다고 하는 건 이 때문일 거예요. 진짜 무섭지 않나요. 하나의 단어가 일말의 여지도 없이 두 사람에게 그 뜻이 철저하게 공유되는 거. 그러니까 그녀를[…]

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 중에서
/ 2020-01-09
고두현, 「늦게 온 소포」

      고두현 | 「늦게 온 소포」를 배달하며…       손톱 끝에 유자향이 묻어나는 시다. 먼길을 오는 동안 향이 희미해지기라도 할까봐 겹겹으로 둘러 포장을 했다. 매듭을 묶을 때 바짝 불거지던 힘줄과 부르튼 손마디의 매듭도 따라 나와 소포의 끈이 되었을 것이다. 버리지 못한 장갑과 버선 한 짝과 해진 내의는 어머니의 주름진 피부라고 해야 하리라. 유자가 속알을 품듯 소포를 품고 온 육친의 체취가 울컥, 남쪽 바다를 서울 한복판으로 밀고 온다. 낮은 지붕 위에 바다를 인 어느 마을 오래된 돌담길처럼 정겹게 뻗어가는 남해산 방언은 맞춤법도 없이 맞춤하다.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고두현, 「늦게 온 소포」
/ 2020-01-02
한유주, 「그해 여름 우리는」 중에서

      한유주 │ 「그해 여름 우리는」을 배달하며…       하도 자살 자살 그러니까 자살이 자살 같지 않네요. 자살이 우리가 아는 그 자살인지 아니면 여행이나 기록이라는 말의 단순 오기인지도 알 수 없네요. 자살이라고 자꾸 말할수록 그 말의 의미랄까 그런 게 증발해서 자살이라는 말은 과수원 사과나무의 사과를 쌌던 사과봉지처럼 하얗게 바래서 파삭파삭하네요. 그러니 도무지 소설의 세계로는 미처 들어가지조차 못 해요. 한유주의 문장들은 독자를 소설의 세계(흥, 그런 게 어디 있냐는 듯)로 끌어들이지 않으며 들어와 봤자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들어올 생각 따위 말고 시간 있거들랑 문 앞에 서서 문에 새겨진 문양이나 슬슬[…]

한유주, 「그해 여름 우리는」 중에서
/ 2019-12-26
이성선, 「이탈」

      이성선 | 「이탈」을 배달하며…       연결되고 싶기도 하지만 단절되고 싶을 때도 있다. 어디 먼 산중에라도 들어가 겨울잠 같은 칩거의 시간 속에 내성의 풍경을 마주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러다가 아주 잊히면 어쩌나. 폭설에 길이 끊겨버리면 어쩌나. 귀로를 잃고 꼼짝없이 위리안치 되고 말면 어쩌나. 잠시도 내려놓을 수 없는 근심과 불안을 내려치듯 폭설로 길을 끊는 도저한 단절감 속에 '한기에 깡말라버린 고봉'의 정신이 찾아든다. 편안과 편리와 안정 속엔 모험이 없다. 차라리 위험 속에 몸을 던져 마지막까지 창조하는 자의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음으로 살아라. 내 삶을 위협하는 '괴물'이 '땅에 없는 길 하나'를 가리키는[…]

이성선, 「이탈」
/ 2019-12-19
정소현, 「어제의 일들」 중에서

      정소현 │ 「어제의 일들」을 배달하며…       대략 저간의 사정이 짐작됩니다. 이보다 앞선 페이지에 등장하는 '유부남 미술 교사'라는 말을 더한다면 전체의 줄거리마저 잡힙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투신을 했고 지금은 장애를 안은 채 주차장 관리인으로 일하며 뒤늦게 찾아오는 옛 동창 친구들을 하나하나 만납니다. 친구의 숫자가 늘수록 '사건'에 대한 그들의 진술이 많아질 수밖에 없지만, 워낙 소문이 소문을 낳았던 일이고, 주인공의 기억도 이제는 노트에 꼼꼼히 메모를 하지 않으면 어제의 일을 잊을 만큼 심각한 훼손을 입어 '사실'의 전말을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사실이란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한 소녀가 아파트에서[…]

정소현, 「어제의 일들」 중에서
/ 2019-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