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우, 「가시」

      남진우 | 「가시」를 배달하며…       아침에 일어나 얼굴을 씻는다. 살 속에 묻힌 뼈가 섬뜩하게 손끝에 와 닿는다. 내 안의 폐허다. 도리질하듯 다시 물을 뿌린다.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폐허는 이내 잊힌다. '다소곳이', '우아하게' 단장을 하고 출근 준비를 한다. 망각은 오늘도 평안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 시는 그러나 '한시도 쉬지 않고 저를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를 직면하는 것이야말로 감추어진 존재의 비밀을 마주하는 일이라고 노래한다. 가시가 버려질 때 버려지는 것은 나의 삶이다. 가시는 만지면 아프지만 폐허를 밀어내고 무시하기에 바쁜 삶이 가식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각성하는 경험을 선물한다. 죽음을 은폐함으로써 소외된 삶을[…]

남진우, 「가시」
/ 2019-12-05
마루야마 겐지, 『여름의 흐름』 중에서

      마루야마 겐지 │ 『여름의 흐름』을 배달하며…       어딘가 끝장면 같지 않나요. 영화든 소설이든 이렇듯 고즈넉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맞습니다. 소설의 끝장면이고요, 여름 바닷가로 휴가 온 가족의 단란한 한때입니다. 그런데 '나'의 직업은……교도관입니다. 휴가 전날, 저항하는 사형수의 목에 밧줄을 걸어 처형한 사람입니다. 위에 인용된 첫 문장도 사실은 '처형 다음날 받은 특별휴가 덕분에……'입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동료인 호리배와 낚시를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조용한 곳'을 아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요. 물고기를 잡아 '큰 놈은 배를 찢어, 손가락을 집어넣어 내장을 꺼내고, 물로 씻어서 아가미에 갈대를 뀁(p.69)'니다. 낚시도 교수형 집행도 그는 베테랑답게,[…]

마루야마 겐지, 『여름의 흐름』 중에서
/ 2019-11-28
유병록, 「발」

      유병록 | 「발」을 배달하며…       구두 속에 갇혀 야성을 잃고 사는 발의 노역과 수모에 대한 연민이 있으나 너무 익숙해서 의식할 수 없는 게 신체기관이다. 발을 길들인 가축으로 관찰하는 낯선 시선 속에서 그간 잊고 살았던 나에 대한 고백과 성찰이 일어난다. 나를 과연 나라고 할 수 있는가? 나라고 할만한 것이 있기는 한가?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허락되는 위험한 질문'은 '길들여진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생을 함께하는 짐승을 어루만지고 '우멍한 눈동자'를 마주하는 시간이 자조를 넘어 따뜻한 비애의 정서를 낳는다. 내가 나를 포옹하는 순간이다. 자명한 질서를 재구성해서 명확히 재단되기 이전의 감각을[…]

유병록, 「발」
/ 2019-11-21
윤성희, 『상냥한 사람』 중에서

      윤성희 │ 『상냥한 사람』을 배달하며…       누군가의 아버지며 남편인 사람이 동네 목욕탕에서 배를 갈아 만든 음료를 마시다가 배숙과 닭발을 떠올리는 장면이네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딸과 아내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데 그들이 등장하려니 생강을 넣어 달인 배숙과 네발가락집의 최강닭발은 물론이요 감기와 시험, 마을버스 정류장과 뚜껑이 하얀 장수막걸리, 그리고 계란탕까지 덩달아 따라 나옵니다. 이것. 덩달아 따라 나오기. 이게 도무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윤성희만의 매력적인 문장인데요, 하이고 참 시시콜콜도 해라 싶을 만큼 책 한 권이 이런 꼬순 얘기들로 아주 가득합니다. 그렇죠. 시시콜콜한 얘기를 빼면 인생에 남는 게 별로 없다는 게[…]

윤성희, 『상냥한 사람』 중에서
/ 2019-11-14
서영효, 「소금에 관하여」

      서영효 | 「소금에 관하여」를 배달하며…       과학적으로는 이온 결합에 지나지 않지만 소금은 다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하는 순간 거기에 소금은 없고 염화나트륨의 분자식만 남게 된다. 우리가 소금 없이 살 수 없는 이유는 소금이 단순히 필수 영양소만이 아니라 바다의 '눈물자국'이며 잊었던 꿈들을 밝히는 '하얀 불'이며 무엇보다 '청청한 몸'이기 때문이다. 수평선을 한 점에 다 품고 있는 이 결정을 어떻게 요약하거나 분석하거나 나열하거나 추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응모했다가 낙선한 오래전의 신춘문예 당선작을 보니 상처로 불을 밝히던 문청 시절이 그립다. "시인의 감성을 가진 과학자"가 될 거라고 했던 그는 아직도 '피톨이[…]

서영효, 「소금에 관하여」
/ 2019-11-07
장은진, 「외진 곳」 중에서

      장은진 │ 「외진 곳」을 배달하며…       네모집.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이 집을 네모집이라고 부릅니다. 한가운데에 작은 마당이 있는, 미음(ㅁ)자 모양의 집이니까요. 아홉 개의 월세방이 나란합니다. 이보다 더 싼 곳이 있을까 싶은, 그런 곳. 이 집의 주인과 이곳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의 면면은 소설작품 속에서 자세합니다만, 자세하지 않아도 그들 삶의 신산과 외로움이 선하게 느껴질 판입니다. 그리고 한밤중에 9번 방 여자와 5번 방 남자가 나와 눈사람을 만드는군요. 말없이. 더는 토를 달 필요가 없는 풍경이겠습니다.   소설가 구효서   작가 : 장은진 출전 :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장은진[…]

장은진, 「외진 곳」 중에서
/ 2019-10-31
함민복, 「버스에서」

      함민복 | 「버스에서」를 배달하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가 세상에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하고 있구나. 중늙은이 사내를 어려지게 하고 창밖의 무정물들과도 희로애락의 인연을 나누게 하는구나. 왜 그렇지 않을까. 일찌감치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님 배 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성선설」 전문)라고 노래했던 시인이 아니던가. 함박꽃과 민들레와 복사꽃을 닮은 함민복 시인 덕분에 질주만 할 줄 알았던 버스가 포근한 요람으로 바뀌고 있다. 임산부와 태아와 시인과 창밖의 풍경들이 한 몸으로 이어지는 이 또 하나의 '성선설'을 나는 염치도 없이 읽는다. 이 시를 읽는 순간만이라도 '나보다[…]

함민복, 「버스에서」
/ 2019-10-24
기 헬밍거, 「겨울」 중에서

      기 헬밍거 │ 「겨울」을 배달하며…       겨우, 그녀의 이름이 발 부인일 뿐입니다. 남자가 누구인지, 그는 어째서 혼자인 그녀를 집에서 끌어내어 눈 덮인 호숫가 한가운데 얼음 구멍에다 처넣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발 부인을 발 부인이라고 말할 뿐 룩셈부르크의 이 작가는 그녀에 관해서도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남자가 그녀를 집에서 끌어내고, 때리고, 호수 한가운데의 얼음 구멍 속에다 밟아 욱여넣는 내용이 전부입니다. 생명, 인권, 약자 등의 말이 생겨나기 이전, 순수 악과 절대 폭력의 시간으로 장면을 되돌려 보는 작가의 의도는 뭘까요. 모르겠네요. 다만, 매우 낯설고 거부감이 들면서도[…]

기 헬밍거, 「겨울」 중에서
/ 2019-10-17
박준, 「환절기」

      박준 | 「환절기」를 배달하며…       바다의 기수역과도 같은 환절기를 통해 만남과 이별이 이루어진다. 얼마나 지독한 사랑이었으면 축농 같은 장면이라고 하였을까. 회유하는 은어들처럼 여행을 떠난 연인들의 사랑은 가난하다. 끝물 과일들이 가난을 위로하듯이 만남의 끝에서 지난 절기들을 외워 보는 건 망망대해에 어쩌면 홀로 떠나야 할 바닷길을 열어 주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물복숭아를 닮은 무릎의 차가움을 새로 알게 된 여행이 있어서 떠나가는 계절은 새로 맞은 계절 속에서도 쉬 잊히지 않으리라. 통영은 좋겠다.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백석, 「통영」 중)다고 노래한 백석의 후예들이[…]

박준, 「환절기」
/ 2019-10-10
박태일, 「그리움엔 길이 없어」

      박태일 | 「그리움엔 길이 없어」를 배달하며…       왜 '괭이갈매기'가 아니고 '재갈매기'인가. 왜 '출렁출렁'이 아니고 '자란자란'인가. '쓰러지다'나 '무너지다' 대신 '주저앉다'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재갈매기-재다-자란자란-주저앉다'로 연결되는 음의 연쇄는 재갈매기가 다른 말로 대체할 수 없는 필연의 결과물이라는 걸 알게 한다. 한발짝 더 나아가 자음 'ㅈ'이 뜻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뜻을 뿜어내는 장면을 보라. 하늘을 '재는' 상승과 '주저앉은' 하강을 동시에 품고 운동하는 '자란자란'에 이르면 넘칠 듯 말 듯한 그리움의 밀도까지 생겨난다. 소리내어 외워야 맛이 나는 시가 있다. 이런 시들은 시각보단 청각에 더 호소한다.   시인 손택수   작가 : 박태일[…]

박태일, 「그리움엔 길이 없어」
/ 2019-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