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 「사랑이 없는 날」

      곽재구|「사랑이 없는 날」을 배달하며…         사랑이 없는 날은 불화하는 날, 반목하는 날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려면 열렬한 사랑이 필요하다고 소란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 없는 날의 고요는 웬일인가요? 들끓은 마음 없이도 홍매화와 목련은 어울리고 은서네 피아노학원과 종점 세탁소 사이 집으로 가는 길은 정답군요. 무슨 병은 없는지, 별고 없으신지 간간이 소식을 묻고 전하는 마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도 합니다. 시인은 그런 자유의 순간을 예감하는 것 같아요. 물론 ‘겨울을 이겨내는 봄’처럼 대립과 극복의 비유가 우리 삶에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부정이든 긍정이든 세상을 무엇과 무엇의 관계 속에[…]

곽재구, 「사랑이 없는 날」
/ 2018-09-13
정끝별, 「오리엔트 금장손목시계」

      정끝별|「오리엔트 금장손목시계」를 배달하며…         아버지는 막내딸 집에 11시 39분 28초에 멈춰선 손목시계를 두고 가셨군요. 손녀딸들과 찍은 사진 몇 장, 밤새도록 들리던 심한 기침소리와 함께요. 사랑하는 이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애통한 마음이 끝이 없습니다. 그들이 더 따듯한 추억을 담고 갈 수 있도록 왜 더 잘 하지 못했을까 후회가 큽니다.     그러나 떠난 이들이 원했던 건 다른 것일지도 모릅니다. 천국에 챙겨갈 좋은 추억이 아니라 이곳에 깜빡 두고 가 잃어버릴 물건들. 아버지는 정말 아끼던 오리엔탈 금장손목시계를 딸 곁에서 분실하려고 기별없이 들이닥치셨어요. 주인을 잃어버린 물건들이 우리 곁에 남아있습니다. 우리[…]

정끝별, 「오리엔트 금장손목시계」
/ 2018-08-30
김안, 「가정의 행복」

      김안|「가정의 행복」을 배달하며…         교과서에서 게젤샤프트(이익사회)와 게마인샤프트(공동사회)를 처음 배웠을 때는 헷갈리지 않았어요. 둘을 정확히 구분해서 시험문제에 정답을 쓸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모르나 봐요. 이 구분대로라면 당연한 일인데도 회사 동료들의 이해타산적인 모습과 나의 비굴함에 상처를 받습니다. 내가 그곳에서 다정한 마음의 연대를 꿈꾸기라도 했다는 듯 말입니다.     적지에서 철수하듯 집으로 달아나며 우리는 가정의 행복을 떠올려 봅니다. 그러나 돌아와도 무능하고 비겁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아요. 영혼이 전등처럼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아이의 뜨거운 이마에 손을 얹어보지만 이 손의 서늘함으로는 열을 식힐 수도 병을[…]

김안, 「가정의 행복」
/ 2018-08-16
김기택, 「슬픈 얼굴」

      작품 출처 : 김기택 시집, 『껌』, 창비. 2009.       김기택|「슬픈 얼굴」을 배달하며…         이 사람은 슬픔을 들킬까봐 초조한 것 같습니다. 먹고 마시고 떠드는 것으로는 숨길 수 없으니 인생은 원래 슬픈 거야, 이렇게 결론지으면 될 텐데요. 슬픔이 나쁜가요, 슬픔이 죄인가요? 슬픈 얼굴로 먹고 마시고 떠들며 살아도 돼요. 이렇게 말하려다 그만 둡니다. 인생이 그렇다는 건 그도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다만 그는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일 나가는 엄마가 걱정할까봐 동네 아이에게 맞은 걸 말하지 못했던 소심한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우는 얼굴로[…]

김기택, 「슬픈 얼굴」
/ 2018-08-02
강정, 「유리의 눈」

      작품 출처 : 강정 시집, 『귀신』, 문학동네, 2014.       강정 |「유리의 눈」을 배달하며…         우리는 태어날 때 예쁜 유리병 하나에 제 영혼을 담아서 세상에 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환하고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유리병 속에 우리는 작은 새싹처럼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조심해도 유리병은 깨지기 마련이죠. ‘오 하느님, 왜 저에게 이다지도 날카로운 운명을 선물하셨나요?’ 시인은 이렇게 묻지 않습니다. 따끔거린다는 건 제대로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 병이 깨진 것은 외부의 충격이 아니라 안에서 제 스스로 밀어내는 힘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팔차원의 흉기로 변한 세계[…]

강정, 「유리의 눈」
/ 2018-07-19
강성은 , 「외계로부터의 답신」

      작품 출처 : 강성은 시집, 『단지 조금 이상한』, 문학과지성사. 2013.       강성은 |「외계로부터의 답신」을 배달하며…         나의 말이나 마음이 누군가에게 닿기까지 50년쯤 걸린다면 얼마나 곤란한 일일까요? 26광년 떨어진 별에 사는 외계인에게 그쯤 걸린다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보다 가까이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멀어도 우리가 보낸 말들은 언젠가는 도착하긴 한답니다. 오늘밤 우리가 보는 안드로메다 은하의 별빛도 200만 광년 전에 우리를 향해 출발한 거래요. 아무리 오래 걸려도 결국 우리에게 도달한다니 희망적인 기분이 듭니다. 문제는 이 은하의 어떤 별들은 우리가 그 별빛을 볼 때쯤이면[…]

강성은 , 「외계로부터의 답신」
/ 2018-07-05
하재연, 「우리는 만난다」

      작품 출처 : 하재연 시집, 『라디오 데이즈』, 문학과 지성사, 2006.       하재연 |「우리는 만난다」를 배달하며…         시 속의 너와 내가 만나는 장소를 생각해봅니다. 야구장인가 봐요. 흰 공처럼 나는 당신의 팔을 부수고 라이트를 깨뜨리며 경기장 밖으로 날아갑니다. 나를 멀리 쳐내고 당신은 비 내리는 야구장을 힘껏 뛰어가고 있어요. 그렇게 우리는 슬픔의 홈런을 칩니다.     어린 시절에 ‘만남’이란 마냥 좋기만 한 단어였던 것 같아요. 앞마당에 내린 첫눈, 처음 뺨에 닿은 꽃잎, 처음 만난 바다, 처음 사귄 친구, 모두 놀랍고 아름다운 만남이었지요. 당신과의 만남도 시작은 분명 그랬을[…]

하재연, 「우리는 만난다」
/ 2018-06-21
문정희, 「늙은 코미디언」

      작품 출처 :문정희 시집, 『작가의 사랑』, 민음사. 2018.       문정희 |「늙은 코미디언」을 배달하며…         시인이 깨달은 세상의 큰 비밀은 뭘까요? 세상은 웃음과 눈물, 빛과 어둠처럼 이분법적인 정리가 불가능한 곳이라는 것. 어떤 순간은 쨍하게 환하고 어떤 순간은 가늠할 수 없이 깜깜하다면 의외로 사는 일은 간단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세상은 늘 모호한 순간들을 우리에게 선물합니다. 웃긴 일 같은데 슬프고 슬픈 것 같은데 웃겨요.     그래서 ‘나는 외로워’, ‘나는 슬퍼’와 같은 말들은 내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미흡합니다. 시를 쓰세요. 비유를 써서 말해보세요. 네루다처럼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고.* 내가[…]

문정희, 「늙은 코미디언」
/ 2018-06-07
김수영, 「꽃잎2」

      작품 출처 : 김수영, 『김수영 전집1』, 민음사, 2009.       김수영 |「꽃잎2」를 배달하며…         에세이스트 크리스티앙 보뱅은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무엇에 중독되었냐구요? 꽃이랍니다. 집안 곳곳에 꽃을 가득 두면 “단조로운 허무함에 맞서는 노랑, 하양, 빨강, 파랑, 분홍의 반박”이 느껴져 아내의 부재를 겨우 견딜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꽃이 필요하세요? 시인은 예전과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무엇보다 누군가와 주고받기 위해서 꽃을 원하네요. 그런데 간절히 원하던 꽃은 금세 보기 싫은 꽃이 됩니다. 꽃잎은 시들고 마르고 떨어지니까요. 그렇지만 시인은 노란 꽃이[…]

김수영, 「꽃잎2」
/ 2018-05-24
오은, 「나는 오늘」

      작품 출처 : 강성은 외, 『의자를 신고 달리는』, 창비교육, 2015.       오은 |「나는 오늘」을 배달하며…         정현종 시인은 ‘가슴 속의 진동’에 따라 사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진동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날마다 다릅니다. 오늘 하루는 나의 슬픔과 나의 변덕과 나의 잘못으로 내 가슴이 들썩입니다. 그렇지만 그다음 오늘은 햇빛이 쏟아져서, 쓰다듬어줄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네 곁을 종일 맴도느라 내 가슴이 흔들립니다. 그러니 사는 일이 진동 아니겠어요? 나에게서 나무에게로, 나에게서 당신에게로 계속 오고가면서, 나와 세계 사이에서 아름답게 진동하는 일.        시인 진은영[…]

오은, 「나는 오늘」
/ 2018-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