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봄날」

      이문재 | 「봄날」을 배달하며…       "봄이 하느님의 눈에 띄고자 한다면 나무나 들판 같은 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봄의 기운은 인간의 내부로도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봄은, 말하자면 시간 속에서가 아니라 영원 속에서, 그리고 신의 임재 가운데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였던가. 오는 봄의 소리가 영원이 되도록 나도 온몸으로 벙그는 저 목련을 급브레이크로 삼아 보자. 봄이 빠져나가 버린 뒤에야 보이는 것이 봄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일이 슬프기도 하지만 괜찮다. '부아앙' 소리가 사나운 기계음이 아니라 봄나팔 소리가 되도록, 책가방 대신 철가방에 든 봄을 배달할 줄 아는 눈이 있으니까.[…]

이문재, 「봄날」
/ 2020-02-20
하상만, 「간장」

      하상만 | 「간장」을 배달하며…       "우리에게는 우리가 살았다고, 우리가 죽었다고, 우리로 인해 이런 것이 달라졌다고 말해 줄 증인과 기록 보관자가 필요하다. 죽음이 의미 없는 곳에서 삶은 의미가 없다." 시인이자 장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토마스 린치의 말이다. 시인은 죽은 자의 기억을 삶으로 복원시켜 주는 일을 한다. 이때 우리의 삶은 바뀐다. 빈 반찬통 속 설거지물에 씻겨 내려가야 할 간장이 문득 영혼의 음식으로 바뀌듯이. 지상에 머물렀던 자의 외로움과 나의 외로움이 겹쳐져 물에 푼 간장 방울처럼 서로에게 번져 가듯이. 우리는 기억되고 싶어서, 사라져도 잊히지 않고 싶어서 기억한다.   시인 손택수  […]

하상만, 「간장」
/ 2020-02-06
백무산, 「초심」

      백무산 | 「초심」을 배달하며…       눈이 오니 눈사람이 노동을 한다. 눈을 치우는 눈사람의 노동은 노동을 잊은 노동으로서 자기 자신 외엔 다른 목적이 없는 활동이다. 이 무구한 놀이가 종종거리는 구두와 택배 오토바이와 폐지를 모으는 손수레 바퀴가 미끄러지지 않는 선업을 달성한다. 아무려나 눈은 아버지의 흰두루막 자락을 놓치 않는 다섯살의 새벽길을 잊지 않게 하고, 삶에 지친 영혼을 당목처럼 쳐서 천둥소리를 내게 하는가 하면, 마음과 몸의 구분을 넘어 온 천지를 한번도 살아보지 못한 첫날의 경이로 다시 살고 싶게 한다.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과 규칙과 제도의 작동을 정지시키는 이 감각적 사건을 노동에게[…]

백무산, 「초심」
/ 2020-01-16
고두현, 「늦게 온 소포」

      고두현 | 「늦게 온 소포」를 배달하며…       손톱 끝에 유자향이 묻어나는 시다. 먼길을 오는 동안 향이 희미해지기라도 할까봐 겹겹으로 둘러 포장을 했다. 매듭을 묶을 때 바짝 불거지던 힘줄과 부르튼 손마디의 매듭도 따라 나와 소포의 끈이 되었을 것이다. 버리지 못한 장갑과 버선 한 짝과 해진 내의는 어머니의 주름진 피부라고 해야 하리라. 유자가 속알을 품듯 소포를 품고 온 육친의 체취가 울컥, 남쪽 바다를 서울 한복판으로 밀고 온다. 낮은 지붕 위에 바다를 인 어느 마을 오래된 돌담길처럼 정겹게 뻗어가는 남해산 방언은 맞춤법도 없이 맞춤하다.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고두현, 「늦게 온 소포」
/ 2020-01-02
이성선, 「이탈」

      이성선 | 「이탈」을 배달하며…       연결되고 싶기도 하지만 단절되고 싶을 때도 있다. 어디 먼 산중에라도 들어가 겨울잠 같은 칩거의 시간 속에 내성의 풍경을 마주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러다가 아주 잊히면 어쩌나. 폭설에 길이 끊겨버리면 어쩌나. 귀로를 잃고 꼼짝없이 위리안치 되고 말면 어쩌나. 잠시도 내려놓을 수 없는 근심과 불안을 내려치듯 폭설로 길을 끊는 도저한 단절감 속에 '한기에 깡말라버린 고봉'의 정신이 찾아든다. 편안과 편리와 안정 속엔 모험이 없다. 차라리 위험 속에 몸을 던져 마지막까지 창조하는 자의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음으로 살아라. 내 삶을 위협하는 '괴물'이 '땅에 없는 길 하나'를 가리키는[…]

이성선, 「이탈」
/ 2019-12-19
남진우, 「가시」

      남진우 | 「가시」를 배달하며…       아침에 일어나 얼굴을 씻는다. 살 속에 묻힌 뼈가 섬뜩하게 손끝에 와 닿는다. 내 안의 폐허다. 도리질하듯 다시 물을 뿌린다.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폐허는 이내 잊힌다. '다소곳이', '우아하게' 단장을 하고 출근 준비를 한다. 망각은 오늘도 평안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 시는 그러나 '한시도 쉬지 않고 저를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를 직면하는 것이야말로 감추어진 존재의 비밀을 마주하는 일이라고 노래한다. 가시가 버려질 때 버려지는 것은 나의 삶이다. 가시는 만지면 아프지만 폐허를 밀어내고 무시하기에 바쁜 삶이 가식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각성하는 경험을 선물한다. 죽음을 은폐함으로써 소외된 삶을[…]

남진우, 「가시」
/ 2019-12-05
유병록, 「발」

      유병록 | 「발」을 배달하며…       구두 속에 갇혀 야성을 잃고 사는 발의 노역과 수모에 대한 연민이 있으나 너무 익숙해서 의식할 수 없는 게 신체기관이다. 발을 길들인 가축으로 관찰하는 낯선 시선 속에서 그간 잊고 살았던 나에 대한 고백과 성찰이 일어난다. 나를 과연 나라고 할 수 있는가? 나라고 할만한 것이 있기는 한가?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허락되는 위험한 질문'은 '길들여진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생을 함께하는 짐승을 어루만지고 '우멍한 눈동자'를 마주하는 시간이 자조를 넘어 따뜻한 비애의 정서를 낳는다. 내가 나를 포옹하는 순간이다. 자명한 질서를 재구성해서 명확히 재단되기 이전의 감각을[…]

유병록, 「발」
/ 2019-11-21
서영효, 「소금에 관하여」

      서영효 | 「소금에 관하여」를 배달하며…       과학적으로는 이온 결합에 지나지 않지만 소금은 다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하는 순간 거기에 소금은 없고 염화나트륨의 분자식만 남게 된다. 우리가 소금 없이 살 수 없는 이유는 소금이 단순히 필수 영양소만이 아니라 바다의 '눈물자국'이며 잊었던 꿈들을 밝히는 '하얀 불'이며 무엇보다 '청청한 몸'이기 때문이다. 수평선을 한 점에 다 품고 있는 이 결정을 어떻게 요약하거나 분석하거나 나열하거나 추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응모했다가 낙선한 오래전의 신춘문예 당선작을 보니 상처로 불을 밝히던 문청 시절이 그립다. "시인의 감성을 가진 과학자"가 될 거라고 했던 그는 아직도 '피톨이[…]

서영효, 「소금에 관하여」
/ 2019-11-07
함민복, 「버스에서」

      함민복 | 「버스에서」를 배달하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가 세상에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하고 있구나. 중늙은이 사내를 어려지게 하고 창밖의 무정물들과도 희로애락의 인연을 나누게 하는구나. 왜 그렇지 않을까. 일찌감치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님 배 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성선설」 전문)라고 노래했던 시인이 아니던가. 함박꽃과 민들레와 복사꽃을 닮은 함민복 시인 덕분에 질주만 할 줄 알았던 버스가 포근한 요람으로 바뀌고 있다. 임산부와 태아와 시인과 창밖의 풍경들이 한 몸으로 이어지는 이 또 하나의 '성선설'을 나는 염치도 없이 읽는다. 이 시를 읽는 순간만이라도 '나보다[…]

함민복, 「버스에서」
/ 2019-10-24
박준, 「환절기」

      박준 | 「환절기」를 배달하며…       바다의 기수역과도 같은 환절기를 통해 만남과 이별이 이루어진다. 얼마나 지독한 사랑이었으면 축농 같은 장면이라고 하였을까. 회유하는 은어들처럼 여행을 떠난 연인들의 사랑은 가난하다. 끝물 과일들이 가난을 위로하듯이 만남의 끝에서 지난 절기들을 외워 보는 건 망망대해에 어쩌면 홀로 떠나야 할 바닷길을 열어 주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물복숭아를 닮은 무릎의 차가움을 새로 알게 된 여행이 있어서 떠나가는 계절은 새로 맞은 계절 속에서도 쉬 잊히지 않으리라. 통영은 좋겠다.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백석, 「통영」 중)다고 노래한 백석의 후예들이[…]

박준, 「환절기」
/ 2019-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