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모델수업

  • 작성일 2017-09-01

모델수업

강정


*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 속에서
지난 밤 꿈을 본다
돼지와 박쥐가 함께 서성대는 목조 건물은
짓다가 말았거나 무너지다 만 형국이었다
당신 눈 속에서 그 풍경은
에메랄드 빛 광선으로 절멸하고 있다


*


나를 그리고 있는 당신의 손끝엔
담비 털로 만든 붓이 떨고 있다
다른 손엔 여러 색채를 한데 짓눌러 시간의 살점으로 뭉개버린
팔레트가 들려있고
당신의 입은 혼잣말을 연신 중얼거린다
북향 창으로 스민 빛이 쪼개지는 소리 같다
내 입가의 잔주름들이 당신에겐 빛의 거품처럼 보이나보다


*


캔버스 건너 하얀 면에 누가 들어서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당신은 알고 있을까
당신은 내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며 춤추듯 움직일 뿐,
나는 좀체 숨쉬기가 힘들다
고사 상에 오를 돼지머리라도 되려고 간밤 꿈이 그리 질척거렸던 걸까
박쥐가 훑고 간 목덜미를 당신은 자꾸만 이리저리 훑어보며 킁킁거린다
신의 사냥개의 먹이라도 된 기분,
캔버스 너머 벽면이 목숨 걸고 올라야 할 암벽처럼 죄어온다


*


얼마나 오랫동안 앉아 있었을까
시간이 가없는 수평으로 늘어져 팔레트 위 물감들이 색색의 구름으로 부푼다
그 더께 진 살점들을 붓으로 떠내어 당신은 서쪽을 향한 나를
동향의 공백 위로 옮겨 놓는다
그림자를 떼어 창을 가린 듯 사위가 급격히 어두워진다
핀 조명 받은 광대처럼 당신은 온몸으로 팔레트가 되어
당신만의 빛기둥 안에서 너덜너덜 춤춘다


*


전 생애의 절반이 한나절 만에 떼어져나갔다
이제 움직일 수 있고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은 캔버스를 마주보며 벽면 쪽으로 물러서고
나는 당신 앞에서 당신이 덧칠해놓은 내 살점들의 파동을 본다
어디 먼데를 홀로 다녀왔다가 한참 만에 마주한 거울 속 같기도
죽기 전에야 시야에 떠오르는 전 생애의 일그러진 잔상 같기도 하다
쌍욕과 순정마저 한 몸으로 으깨져
처음 보는 색조를 낳았다
얼굴을 더 가까이 대어본다
돼지똥 냄새와 박쥐울음소리가 넓적한 평면에 깊디깊은 동굴의 공명으로 몸속을 파고든다


*


당신에게 말 걸려 고개를 돌린다
배후엔 누더기를 걸친 해골이 음화처럼 너울거릴 뿐,
당신은 없다
전 생애를 삼킨 벽면만 짓다가 말았거나 무너지다 만 형국이다
그림에 손을 대어 본다
오래 전 아팠던 상처가 물컹물컹 손끝에 묻어난다
나는 나를 죽인 자를 죽인 자가 되어 있었다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불을 껴안은 여인

불을 껴안은 여인 강정 하반신이 차가워지면 무서운 이야기들이 생겨납니다 악마도 천사도 제가 만들었지만 정작 저는 저 자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남자의 옷, 남자의 탈을 뒤집어썼으나 그 무엇을 사랑하려 할 때마다 상반신만 허공에 떠 보이지 않는 낮별을 찾아 떠돕디다 등이 뜨겁군요 머리에 들러붙은 불을 허리 아래로 내려 지상의 음험한 비밀들을 뿌리내리려 하고 들려줘선 안 될 이야기들을 꽃피우려하는 얼어붙은 하반신을 불태워주세요 썩은 잉걸처럼 흘러내린 머리털을 벗겨 빛나는 태양과 같은 비율의 원구를 되살려 주세요 오래 전 바다 속에서 활개 치던 유선형의 다리들이 불더미 속에서 다시 춤추게 하고 싶습니다 몸과 정신이 오로지 한덩이인 우주의 유충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습니다 화석이 되어서라도 명징한 과거의 징표로 오래도록 죽어 있고 싶습니다 하반신이 모두 타면 허리 위로는 저절로 불이 되어 태양의 흑점 속에 빨려 들어갈 겁니다 하나의 넋이 살다 갔다는 오래 전 소식은 이곳과는 전혀 다른 어느 태초의 밀림 속에 암갈색 양치식물로나 번성할 것인즉, 모두 불태워주세요 살아있었다는 흔적은 그저, 태양이 꺼질 때까지 불타고 있었다는 믿지 못할 소문으로나 떠돌게 놔두세요 하반신이 차가우면 무서운 이야기들이 다시 생겨납니다 몸의 빙하기를 적도의 끈으로 결박해 오래오래 불태워주세요

  • 강정
  • 2017-09-01

문장웹진

소리의 동굴

소리의 동굴 강정 우기의 밤, 기타 줄들이 눅눅하다 기대선 벽을 주먹으로 친다 분노나 억압 탓은 아닐 것이로다 제 마음에 뭐가 남아 있는지 의아해하는 백치 노파거나 오래 갇혀 있어 벽 너머가 외려 두려운 수인처럼 툭툭, 자신 손마디의 쓰임새나 확인하려 벽을 주먹으로 친다 마디가 둔탁한 공명이 누렇게 번진다 비에 젖은 벽은 의외로 말랑말랑하다 소리는 소리의 그림자보다 크지 않다 그림자 속으로 살을 여미며 사라지는 소리들 방이 크게 그늘진다 빗금으로 미끄러진 벽을 타고 허공에 고인 구름들이 활강한다 감금된 소리의 수형들이 손을 맞잡고 큰 원을 그린다 나는 드러누워 있는 참인데, 소리에 파묻힌 어떤 몸은 끝끝내 빗줄기를 거꾸로 부여잡고 느닷없는 우레로 쏟아진다 드러누운 내 몸을 관통해 오래도록 벽을 쿵쿵 친다 소리의 그림자는 소리보다 더 두껍고 맹렬하다 벽 안쪽으로 파행하는 소용돌이 구름의 미세 입자로 부풀어 오르는 시간 높이 뛰어올랐다가 하늘을 되튕겨 추락하는 기분이란 걸 시로 써보려 한다 그러려면 온몸이 소리가 되어 흔적 없이 바스라져야 한다 벽을 치던 손으로 기타를 쥐고 1번 줄과 6번 줄을 동시에 퉁긴다 높은 음이 낮은 음을 덮쳐 허공에 피가 고인다 벽 속에서 처음 보는 남자와 여자가 몸을 엉킨 채 나타난다 남자의 몸에 여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여자는 다시 벽 속으로 들어가며 더더욱 커지고 남자는 계속 작아져 성기만 남았다가 점이 되었다가 어두운 공명통 안에 잠긴 목청을 누인다 서로 닿지 않는 영역에서 전력을 다해 자신을 지우는 게 사랑이다, 라고 나는 쓴다 소리는 그러나 그 어떤 언어로도 쓰여지지 않고 소리의 그림자는 쓰여진 글자들을 지우며 넓어진다 저 홀로 그늘져 빗물을 피해 더 깊이 웅덩이가 되고 더 어두운 빛의 속살로 등등등등 제 갈비뼈를 우려 벽 속에 숨은 말들의 잔등을 두드린다 벽을 뚫고 나오려는 말 소리의 깊숙한 동굴에서 사람이 되어 무늬를 쥐어짜는 습기 다시 기타를 벽에 기대 세운다 기타 줄은 상한 낚시 줄처럼 꼿꼿하게 부식돼 있다 공명통 안에 숨죽인 남자의 울음이 줄들을 울린다 벽이 낮게 흐느낀다 벽 속의 여자가 몸 안의 사루를 흩뿌려 끄집어내는 종소리 방이 급격히 둥글어진다 벽 위에 느릿느릿 그어진 굵은 선을 따라 생시에 나를 삼켰던 거대한 물고기가 고대 암벽의 彫像처럼 끔뻑끔뻑 눈을 번득이며, 빗줄기 속에 큰 길을 낸다 소리를 망실한 어족들이 사람의 살로 회생하는 기나긴 우기의 밤이다

  • 강정
  • 2013-10-04

문장웹진

바다에서 나온 말

바다에서 나온 말 강정 달을 희롱하며 바다에서 나온 말[馬]은 창 앞에서 기다린다 - 김구용, 「유월」에서 누가 창가에 서 있다 여자라고도 남자라고도 말 못하겠다 남자의 성기 끝에 여자의 입을 달았다고나 말해야겠다 사람이라고도 사람 아니라고도 말 못하겠다 짐승의 몸으로 사람이 풀을 뜯는 것이라고나 말해야겠다 누가 창가에 서 있다 바람일까 낮에 본 나무의 그림자가 뿌리를 일으켰을까 이 집엔 없는 몸들을 일으켜 밤새 집 안을 서성이게 하는 것으론 바람이라고 믿는다 풀 하나 없는 방 안에 묵은 시간의 綠藻를 풍기면서 뚝뚝 천장의 누수를 도발하는 것으론 나무라 믿는다 그림자는 무슨 구덩이나 우물 같다 그 둘레로 풀들이 맵게 자란다 나는 잠들었는지 깨어 있는지 모르게 부들부들 움직인다 다리를 움직이는지 머리를 궁글리는지 분별할 만한 자는 이 세상에 없다 그렇게 나는 창 밖에 선 채로 방 안을 서성거린다 구덩이 근처로 큰 나무가 움직인다 집 전체가 구덩이 속으로 미끄러져 사라진다 알고 있던 모든 길들이 커다란 수풀로 변한다 허공에 뜬 들창에서 누군가 계속 이곳을 내려다본다 구덩이 위엔 먹다 버린 비스킷처럼 달이 떠 있다 수풀에서 나무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와 기다란 혀로 달을 건져 먹는다 바람이 몰아친다 부푸는 수풀이 광목천처럼 푸다닥 내달리며 바람 속에서 기다란 말 한 마리 오려낸다 나는 말의 목을 쳐 지나온 미래의 풍경들을 엿본다 잘려 나간 목덜미 안에 더 큰 말들이 바다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모든 밤을 달려온 바다가 첫 몽정의 당혹처럼 꼿꼿하게 일어선다

  • 강정
  • 2013-10-04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