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그날 나는―K에게

  • 작성일 2025-02-01

   그날 나는

   ―K에게


최지인


   동산에는 어린 내가 있고 바람 불고

   바람 불고


   맨발로 잔디밭을 뛰어다니다

   벌에 쏘였다

   발이 팅팅 부었다


   아버지가 암실에서 빛을 건졌다 나는 자라 오래된 빛에 색을 입혔다

   

   오빠는 나를 많이 때렸다 수돗가에서 어머니가 생선 대가리를 자르고 내장을 꺼냈다

   우리 가족은 고개에서 고개로 이사 다녔다

   밤이 되면 박쥐들이 날아다녔다


   영국 친구들은 나를 키라고 불렀다

   하루는 일회용 라이터로 친구들의 맥주병을 따 주었다 캐시가 내 입에 알약을 넣어 주었다

   그때 그 섬에 남았더라면

   하지만 사랑이 전부인 줄 알았지

   우주가 잠들고 아이가 태어났다


   왼쪽 가슴에 알사탕처럼 만져지는 게 있다


   재수 학원에 다녔을 때였다

   껄렁껄렁한 남자애 중 하나가 창문을 올려다보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 알고 있다


   동산에는 어린 내가 있고 바람 불고

   바람 불고


   일단 살고 봅시다

   한쪽 가슴을 전부 잘라 냈다


   너희 어머니는 네 머리카락이 다 세었다고 걱정하더라

   나는 머리카락이 몽땅 빠졌는데


   거울 앞에 서서 내 눈을 오래 지켜보았다

   너와 많은 것을 약속한 그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제 너는 없다

   집이 다 허물어지기 전에 다시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재개발구역에 펜스가 쳐져 있다 가난한 아이들이 교문 앞에서 가방을 등에 메고 부모를 기다린다


   너는 묻는다

   애들은 어쩌고 요양 병원에 가는 거야


   살려고 가는 거야

   솜털 하나하나 이유가 없는 게 없어


   둘째를 낳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다짐했지만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이마가 꺼진 일이 떠올랐다


   이 골목 저 골목 내가 놀던 골목 초인종 누르고 도망갔던 골목 돗자리 깔고 수박 까먹던 골목

   인부들이 세탁소 간판을 떼어 낸다


   이 년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넓적하고 반드러운 돌을 주워 거기에 자화상을 그렸다

   죽는 사람을 많이 봤다


   손톱 발톱 다 빠져도 먹어야지

   부질없어도 먹어야지


   발가벗은 내 모습

   나를 잘 모르겠어 나를 제일 모르겠어


   유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한쪽 가슴


   나는 옥수수 밭길을 걸어 학교에 갈 수 있다


   동산에는 어린 내가 있고 바람 불고

   바람 불고


   느티나무 아래서 낯선 사람이 손짓한다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회복

회복 최지인 너는 슬프지 않다고 하는데 몇 주 전 암 진단을 받았다 암세포가 림프샘에 전이된 상태다 네 아버지는 이름난 연주자였다 술에 취하면 너를 기절할 때까지 때렸다 너는 가까스로 화장실에 들어가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나중에 엄마가 그러더라 지나간 일이니 용서하라고 또 그러더라 사촌에게 연락해 진단비가 얼마나 나오는지 알아보라고 오른쪽 눈에 대하여: 너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피를 모조리 다른 사람의 것으로 수혈해야 했다 네 몸에는 모르는 사람들의 피가 흘렀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네가 돌봤던 아이들 한국어가 서툴렀던 이민자 2세들 한 번도 너희를 잊지 않았어 너희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네 오래된 악기는 집시의 것처럼 보통보다 조금 작고 까맣다 너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네 삶을 망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첼로를 시작한 뒤로 나는 나를 인정할 수가 없었어 졸업 연주회 마지막 여덟 마디를 남겨 두고 손이 아파지더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무대가 마지막인 줄 알았어 너는 천 년 된 은행나무 밑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큰 가지들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고 멍울이 자라는 게 느껴져 사람들이 자꾸 내 꿈을 꾼대 네가 왼쪽 눈을 꺼내 찬물에 씻는다 잠깐 깜깜해질 테지만 네가 웃는다 그래, 너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지

  • 최지인
  • 2025-02-01

문장웹진

죄책감

죄책감 최지인 너와 손잡고 누워 있을 때 나는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 세계의 끝은 어디일까 수면 위로 물고기가 뛰어올랐다 빛바랜 벽지를 뜯어내면 더 빛바랜 벽지가 있었다 선미(船尾)에 선 네가 사라질까 봐 두 손을 크게 흔들었다 컹컹 짖는 개를 잠들 때까지 쓰다듬고 종이 상자에서 곰팡이 핀 귤을 골라내며 나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기도했었다 고요했다 태풍이 온다던데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 최지인
  • 2019-01-01

문장웹진

섬 최지인 바위 위 사마귀 바위색 사마귀 그것들 뒤로 그림자 나는 벌써 백발이 되었다 그날 운세는 이러했다 쪽배가 큰 파도를 만나 예상치 못한 일로 변고를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 불의를 행하지 마라 트럭을 피하려다 벽에 차를 박았다 보조석 범퍼가 깊게 파였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어제는 저녁에 한강 공원을 걸었다 죽은 지렁이들을 보았다 실패한 사랑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괜찮은 변명거리다 누구나 실패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순 없다 형광봉을 흔드는 한 사람과 참 캄캄한 하늘 네가 가리킨 것은 맑고 향기로운 잘못들이었다 너는 슬퍼지지 않는 것 따위는 삶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었고 나무들 사이를 지나는데 손끝이 닿았다 다음 생은 엉망으로 살고 싶어, 마음껏 엉엉 울고 그 누구도 되지 않는, 그럼 아쉬워도 태어나지 않겠지, 나뭇가지에 옷을 걸어두고 이제 여름으로, 여름으로 사랑한다 말하면 무섭다 그것이 나를 파괴할 걸 안다 초파리가 과일 껍질 위를 맴돌고 있다 옆으로 돌아누운 너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네가 거기 있다는 걸 알 수 없듯이 서성이는 슬픔 저 멀리 섬들 보인다 이제 바다를 건널 것이다

  • 최지인
  • 2019-01-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