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이른 마음
- 작성일 202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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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른 마음
박하신
섬으로 내려가는 길은 무성했다. 초여름을 맞는 버드나무 녹음이 무성했고, 고속도로에 바닷가 갯강구들처럼 달라붙은 자동차 정체 행렬이 무성했고, 하늘에 모둠 지은 뭉게구름 떼가 켜켜이 무성했다. 구름으로 말하자면 경부 고속도로 운전자들의 한숨이 한데 모인 것 같은 풍성함이었고 눅진함이었다. 사이사이 파고드는 여름 볕은 쨍쨍하기만 해서 자동차 갯강구들이 아지랑이 같은 김을 뿜어내며 느릿느릿 익어 가고 있었다. 올여름 재해에 가까운 폭염이 찾아온다고 했다.
창문을 내리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담배를 끊어야 할 텐데. 지난 건강검진에서 의사는 금연을 강한 어조로 권고했다. 그게 벌써 3년 전이다. 라디오에선 올해 메탄가스와 일산화탄소 배출량이 다시 한번 고점을 돌파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고속도로 솥단지를 가득 메운 자동차 행렬을 보니 이해가 안 갈 바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차도 노후 경유차라며 폐차를 권고하던데··· 때마침 창밖에서 도로변 축사 냄새가 매연에 엉킨 채 훅 끼쳤다. 과연 오존을 뚫어 버릴 것 같은 유독함이다.
이게 다 나 때문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앞차 배기의 색깔도 심상치 않다. 그래, 어차피 다 같이 찜 쪄지는 마당에 잘잘못은 논하지 말기로 하자. 이미 벌어진 일과 잃어버린 것. 재해에는 고민한들 거스를 수 없는 면이 있고 그렇기에 말 그대로 재해인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이건 암 같은 거다. 분명한 업보지만 돌이킬 수 없는. 그런 건 받아들이는 편이 낫지. 그래, 평일 오전부터 고속도로에 갇혀 소들 방귀나 맡고 있게 된 것도 말하자면 재해 같은, 암 같은 소식 때문이었다.
그건 폭발에 대한 것이었다.
동선의 묘지가 폭발할 거라는 소식을 들은 건 이른 열대야에 허덕이던 어제저녁이었다. 낯선 번호로 수차례 전화가 걸려 온 것인데 상대방은 대뜸, 동선 씨 친구분 되십니까? 물었다. 그렇다고 말하자 그는 자신을 매봉도 수호행동위원장이라고 간략히 소개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틀림없이 폭발합니다··· 땅속에 매설된 니트로글리세린과 질산암모늄 수천 킬로그램이··· 당신 친구의 묘지를 박살 내 버릴 거라구요···.
상대방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했다. 거대한 세력이 묘지를 파괴하기 일보 직전이라며 호소했다. 그것도 폭약을 심고 아주 섬을 통째로 날려 버린다고 했다. 그는 동선의 묘소를 지키고 싶다면 나더러 당장 매봉도로 달려오라고 촉구했다. 여기··· 당신처럼 무언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내일까지···. 가능하면 내일까지 와 주십시오···. 불가능해도 내일까지 오십시오. 체념하지 않는다면··· 지킬 수 있습니다. 모여서 투쟁합시다···. 투쟁!
그렇게 절박한 목소리는 끊어졌다. 벙벙한 채 다시 전화를 걸자 그는 통화 중이었다. 몇 시간이고 내내 통화 중이었다. 아마도 매봉도 수호를 위한 동지들을 끌어모으느라 끝없이 전화를 돌리는 것 같았다. 폭발이란 말이 무색하게 무덤처럼 고요한 밤이었다.
나는 동선에 대해 생각했다. 동선은 확실히 매봉도에 묻혀 있었다. 내가 직접 장례를 치러 주었으니 틀림없다. 수년간 동거했던 사이였는데 어느 날 아침 기지개를 쭉 켜더니 평온한 표정으로 숨을 쉬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동선에겐 가족이 없었다. 장례를 치러 주어야 했다. 나는 상주이면서 문상객이었고 발인자였다. 슬펐냐고? 그럴 리가. 밥도 잘 먹고 직장도 바삐 잘 다녔다. 내가 얼마나 바쁘게 사는 사람이냐면 짬 내서 친구 장례 치러 주는 것쯤이야 별일도 아닌 정도랄까.
사실 암을 앓고 있던 동선의 죽음은 예견된 일이었다(얼마간 시치미를 떼고 있었을 뿐이다). 한 생명이 끝장난다는 건 별스러운 일이 아니다. 터무니없는 이유로 모두들 목숨을 잃는다. 한갓지게 산책을 하다 자전거 뺑소니를 당해 다리를 절룩이게 될 수도 있고, 그걸 치료하러 간 병원에서 뜬금없이 피부암 조직을 발견할 수도 있다. 금전 문제로 제대로 된 항암치료를 하지 못할 수도 있고, 선천 질환 탓에 약물치료를 병행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목숨에 대한 청구서는 그런 전개로 맥없이 원룸촌 비탈을 데굴데굴 구르다가 오랜 단칸방 앞에 툭, 도착하는 거다. 거기 살던 두 친구는 고지서나 청구서 따위에 으레 그렇듯 슬쩍 시치미를 뗀다. 그리고 그간 비싸서 못 사 먹던 수박 한 통을 쪼개어 나눠 먹다가, 8월의 푸른 달력 사진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하는 거다.
그러고 보니 우리, 바다 한번 보러 간 적이 없었네?
그때 먹은 수박은 지독하게 싱거웠다. 장마를 맞은 떨이 수박이라 그랬다. 동선의 죽음도 싱거웠다. 병간호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죽음도 한 편에서 제철을 지나 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장례 이후 몇 번의 계절이 오갔다. 동선의 죽음은 기억 속 우편함에서 케케묵게 먼지를 쌓아 갔다.
그런데 지금은 슬프다. 몇 개 없는 연차를 내고 고속도로에 갇혀 뜨거운 소 방귀 냄새를 맡고 있어서 슬프다. 상실은 모른 척하면 그만이다. 죽은 이를 땅에 묻거나 단지에 담는 건 안 보이는 데 슬픔을 꿍쳐 두기 위해서다. 하지만 방귀의 메탄가스니 폭약의 니트로글리세린이니 하는 건 아주 물리적인 문제다. 슬픔이란 물리적 결과로 비로소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도로의 정체가 풀리기 시작했다. 갯강구들이 옴짝거리며 전진한다. 슬금슬금 가다 보니 도로 한복판에 자신의 고급 세단이 전소되고 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 그 남자는 물리적으로 무척 슬퍼 보인다. 슬픔을 기점으로 정체가 해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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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공사다망하신 가운데··· 날도 덥고··· 이렇게 매봉도를 위해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매봉도 수호행동위원장이라는 사람은 뭐랄까··· 요샛말로 뉴트럴한 느낌의 사람이었다. 주름살이 없어서 나이는 유추하기 힘들었으나 머리는 털 오라기 하나 없이 민숭민숭했고, 눈이 단춧구멍 같아서 표정은 민숭맹숭이 같았고··· 그 덕에 꼭 어디에선가 한 번쯤 마주쳐본 것 같은 기시감을 주는 남자였다. 통화에서 느껴진 열혈과는 다르게 낯을 가리는지 말도 조금 더듬었다. 그가 손수건으로 연신 비지땀을 찍어 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다들 아시겠지만··· 우리가 모인 것은 매봉도의 신공항 건설에 반대하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공청회를 진행할 거고··· 그··· 김밥 좀 드시면서··· 네··· 화장실은 왼편에···. 아, 에어컨이요?
모임 장소는 부산했다. 점심쯤 하여 매봉도의 바닷가 민박으로 여남은 사람들이 모여 큰 방에 옹기종기 앉았는데, 수호행동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비해 소박한 규모란 생각이 들었다. 모두 따로 온 건지 데면데면해 보였고, 나이나 용모도 제각각이라 집단행동이라기엔 통일감이 떨어져 보였다. 나는 위원장의 눌변을 뒤로한 채 유인물 전단을 휙휙 넘겨다보기 시작했다.
공항 건설 계획안에 대한 개요였다. 매봉도 위성사진의 산봉우리들에 크게 붉은색 빗금이 그어져 있었다. 이 작은 섬에 봉우리가 열네 개나 있었다. 공항 건설 계획의 요체는 그 산들을 몽땅 폭약으로 날려 버리고 거기서 나온 흙을 바다에 왕창 쏟아 버리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간척지 위에 공항 활주로도 깔고 도로도 놓고 해서 뭐, 경제가치와 일자리가 적잖이 창출되는 무슨 무슨 허브를 만들겠다··· 하는 그렇고 그런 내용이었는데, 흙장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간명한 계획이었다.
나로 말하자면 동선의 묘지가 그 산 중턱에 있는 게 문제였다. 위원장은 여하한 내용을 더듬더듬 설명했고 공백마다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와 한적한 해변의 파도 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누군가 길게 하품했다.
―설명은 이쯤하고 이렇게 모인 것도 인연인데··· 각자 자기소개나 할까요?
민박집 안의 사람들이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모두 겸연쩍은 표정만 짓고 있어서 앞줄에서부터 말하는 것으로 합의가 됐다. 젊은 남자 둘이었다. 저희는 근처 사는 대학생들인데요. 마침 바다에 놀러 왔다가 민박집 사장님이 오라고 하셔서··· 수박 준다고···. 짝짝짝. 다음으론 그 옆의 중년 여자가 돌아보며 말했다. 예, 저는 여기 민박집 사장이고요. 여러분들 오늘 일 잘 보시고 푹 쉬다 가시고, 필요한 것 있으시면 안방에 말씀하셔요. 자제분들 연인분들하고 또 놀러 오시고. 호호호. 짝짝짝···.
그렇게 화장실을 찾아 들른 어느 부부와 그들의 초등학생 자녀, 근처 시내에서 만화카페를 운영하는 여자 사장, 엔딩 로케이션으로 매봉도를 찜해 두었다는 다큐멘터리 감독, 조류학을 전공한다는 대학원생과 근처 암자에서 지내고 있다는 스님 한 명이 차례차례 자기소개를 이었다. 그 밖에도 몇몇이 말을 드문드문 말을 이었고 순서가 나에게까지 닿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회사원이고요, 친구의 묘지가 발파 예정지에 있어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대부분이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뱉거나 조용히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었다. 누군가 투쟁― 하고 작게 외친 것도 같았다.
―다들 곡진하고 녹록잖은 사정으로 모이게 된 것 같습니다···. 시간과 용기를 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소개해 드릴 분이 한 분 더 있습니다. 매봉도 공항건설공단의··· 기획팀장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와 주셨습니다.
가장 뒤편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종종걸음으로 걸어와 사람들 앞에 섰다. 체구가 단단해 보이고 몸짓이 청설모처럼 잽싸 보였는데, 어딘지 흐물텅해 보이는 위원장의 곁에 서니 그 특색이 더 도드라졌다. 팀장은 꾸벅 인사를 하곤 따로 챙겨 온 무선 마이크를 꺼내 들더니 자신이 이 자리에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시·도민 분들의 마음에 공감하고 의견을 경청하기 위함이며··· 이 자리에서 나온 말들 모두 최대한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도록 하겠다··· 매번 매봉도의 산봉우리를 하나씩 넘는 기분으로 크고 작은 집단행동에 참여해 왔고, 마침 이번 모임은 열네 번째이다···(어쩐지 기세등등한 미소) 같은 말들이 이어졌다. 꾸벅 인사를 했는데도 별다른 호응이 없자 팀장은 보상금 이야기를 빼 들었다.
―공항 건설 과정에서 피해가 야기되는 분들에겐 당연히 합당한 보상액이 지급될 겁니다. 실제로 많은 분이 찬성 의사를 보이고 계시고···.
―그야 한몫 땡길라꼬 들어온 투기꾼들 아이겠나.
누군가 뒤에서 비꼬듯 말했다. 보상 몇 푼 받고 외지로 나가라카모 배는 어데서 몹니꺼? 어민들한테는 뭔가 더 챙겨 줘야 하는 거 아이요. 그러자 이번엔 민박집 사장이 껴들었다. 뱃사람뿐이게요? 뉴스며 신문이며 공항 건설 이야기만 떠드니까 장사도 예년 같지가 않아요. 공사 기간에 민박은 문 닫으란 소리밖에 더 돼요? 민박 사장의 푸념에 어민이 대꾸했다. 그거야 지난 어업계 간담회 때도 한참 나왔던 얘기 아이요. 근데 실제루는 말입니더···. 그때 스님이 손을 들고 말했다. 잠깐, 그런 간담회가 있었습니까? 나는 못 들었는데? 그거야 스님은 어업계 바깥사람이니까 그라지예! 막말로 우리한테 전갱이 한 마리 사 간 적 있습니꺼? 그야 나는 스님이니까!
장내가 점차 소란스러워졌다. 팀장이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최대한 많은 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분야별로, 행정구역별로 자리가 마련될 거고요. 자자, 우리가 유념할 것은 공항 건설이란 게 결국 모두 잘살게 되는 길이란 겁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아무렴 중요한 건 공생 아니겠습니까?
공생···? 그러자 누군가 손을 들고 물었다. 발파에 따르는 피해는 없나요? 팀장은 예상했다는 듯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길쭉한 막대 같은 걸 꺼내 들었다. 이게 신형 폭약입니다. 사람들 모두가 움찔하며 놀랐다. 부모에게 지루하다며 칭얼거리던 초등학생만이 흥미를 보였다.
―환경친화적 폭약입니다. 성능도 뛰어난데 냄새나 소음도 확연히 적고, 파편이나 낙진도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환경과 폭약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단어인지 잠시 고민했다. 성능이 나아졌을지 몰라도 폭약은 서부영화에서나 보던 다이너마이트와 거의 똑같은 생김새였다. 팀장은 발파 과정을 설명할 때마다 폭약을 지휘봉처럼 붕붕 휘둘러 댔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핵탄두라도 마주한 것처럼 움찔움찔 놀랐다. 그쯤에서 위원장이 나서 대화를 정리했다. 자, 우선 오후 일정은 여기까지 마무리하고요···. 여기까지 와주신 팀장님께 감사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고맙게도 여기 팀장님께서 삼겹살을 협찬해 주셔서요···. 그 말을 듣고 누군가 픽, 비웃음을 흘렸다. 위원장이라카는 사람이 배알도 없나···. 팀장은 웃으며 가리켰다. 저래 봬도 한돈입니다, 한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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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동선과 매봉도를 찾는 길은 험난했다. 동선은 긴 시간 고속도로에 갇혀 있는 게 고역인지 휴게소에 들르고 싶다고 끙끙댔고, 그럴 때마다 휴게소에서 바람을 쐬느라 시간이 지체됐다. 동선이 담배 냄새를 싫어하는 탓에 운전 중 졸음방지껌을 한 통 가까이 씹어 댔다. 힘이 쭉쭉 빠지는 여행이었다.
그렇게 긴 씨름 끝에 매봉도에 도착했다. 우리는 매봉도 산 중턱까지 올라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나무들 사이로 조각조각 바다가 비쳤다. 날씨가 좋으면 산봉우리 정상에선 저 멀리 바위섬 군도까지도 볼 수 있다고 했지만, 동선의 다리가 불편한 탓에 올라갈 수 없었다. 그래도 그즈음에는 나름 홀가분했던 것 같다. 고속도로의 폭염이 섬 그늘에까지는 닿지 않는 것인지 바닷바람이 시원했다. 우리가 앉은 중턱은 동백군락지가 자리한 곳이었다. 여름인 탓에 꽃은 볼 수 없었지만 통통한 잎사귀들이 켜켜이 햇빛을 퉁겨 내고 있었다. 불행하지 않은 상태가 행복이라면 그 순간만큼은 그것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간 것 같았다.
그때 문득 동선이 죽으면 이쯤 어딘가에 묘를 마련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라곤 몰랐을 것이다. 지금 와선 동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궁금하다. 그때 동선은 얕은 숨을 내쉬면서 생경하다는 듯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한곳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나도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목격한 것이다.
―상괭이요?
조류학과 대학원생이 삼겹살 굽던 손을 멈췄다. 그거 멸종위기종일 텐데요? 그는 집게를 쥐었다는 이점을 바탕으로 고기를 익는 족족 입에다 집어넣어 빈축을 사던 중이었다. 공청회가 끝나고 사람들 몇몇은 돌아가지 않고 민박집 마당에 둘러앉아 고기를 구웠다. 다음 날 예정된 피켓 운동을 위해서였다.
―저도 신기했어요. 찾아보니 남해안에 사는 토종 돌고래의 한 종류더라고요. 상괭이의 특징이 뭔지 아세요? 웃는 얼굴이에요. 표정을 보면 꼭 빙긋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정말 웃고 있더라니까요.
―에이, 그렇게 멀리 있는데 잠깐새 그게 어떻게 보여요?
―진짜예요. 눈이 마주쳤다니깐요.
사람들은 아무래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그때 위원장이 말을 거들었다.
―맞습니다···. 매봉도는 예전부터 상괭이 서식지였어요···. 상괭이나 동백뿐 아니라 수달, 해오라기, 솔개까지··· 모두 산의 주봉과 해안을 중심으로 얽혀 살고 있고요···.
상괭이가 뭐야? 초등학생이 부모에게 물었다. 응, 바다에 사는 커다란 돌고래야. 아빠가 답했다. 어떻게 생겼어? 바다에 사는 커다란 돼지처럼 생겼어. 돼지? 응, 지금 우리 먹고 있는 돼지 있지? 다리 대신 지느러미가 달린 거야. 초등학생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상괭이도 이런 맛이 나? 엄마가 말했다. 여보, 우리 다음엔 아쿠아리움에 가야겠다.
―입맛엔 맞아요? 채소 더 필요하면 말해요.
민박 사장이 텃밭에서 길렀다는 상추며 당귀 같은 푸성귀를 상에 덜어 주며 말했다.
―그 사람 여기까지 무슨 볼일이 있어서 왔나 싶었는데 고기 맛은 좋네요. 서로 얼굴 붉힐까 봐 걱정했다니깐. 그렇죠 위원장님? 그런데 식사는 왜 이렇게 안 드시고.
민박 사장은 자연스레 위원장 옆자리에 앉아 부채를 부쳤다. 위원장은 빙긋 웃을 뿐이었다.
―저는 고기를 안 먹어서요···.
―그럼 되나, 든든히 챙겨 먹어야 힘을 내죠. 위원장님은 이런 일을 하기엔 사람이 너무 좋아 보여. 이런 거 반대하고 그러려면 막 드러눕고 고함도 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궂은소리를 해야 몇 푼이라도 더 쥐여 주고 그럴 거 아니야. 오늘 잔뜩 드시고 다음엔 좀 큰소리도 내줘요.
사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곤란해하는 위원장을 두고 이번엔 대학생들이 물었다.
―그런데 공항 지어지면 좋은 거 아니에요?
―경제에 좋다던데. 정치인들도 모두 공항 얘기뿐이잖아요? 대박이라고.
위원장은 느릿느릿 땀을 닦아 내며 답했다.
―그래도 여기 계신 분들은 입장이 좀 다르니까··· 우리도 의견을 모으면 그들과 대화를 해 볼 수 있겠죠···. 안 그런가요?
대학생들은 돌아온 답이 싱겁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갸웃하곤 식사에 열중했다. 위원장의 말을 받은 건 만화카페를 운영한다던 여자였다.
―맞아요. 절대 안 돼요. 바다를 메꿔 버린다니 그게 말이 돼요? 보물이 가득한데.
보물이란 말에 사람들이 웃었다. 그렇죠. 보물이죠, 보물. 그러나 여자는 진지했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었다. 여자는 알고 보니 매봉도 연해에 패망한 일제가 금괴 수백 톤을 숨겨 두었다는 음모론에 심취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후반, 어느 일본 장군이 한반도에서 축적한 재산을 금괴 형태로 남해안에 묻어 두었는데 그곳이 바로 매봉도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바닷속 금괴를 발굴하기 위한 곗돈을 모으고 있었는데 공항 건설 탓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며 위원장과 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금괴가 느릿느릿 부식되며 바다에 영향을 주고 있어서 그것을 건져 올리는 것 역시 생태운동이라고 주장했다. 금괴를 녹여 버릴 것 같은 형형한 눈빛이 무서웠다. 사람들은 어쩐지 그녀가 입을 열수록 말수가 적어졌다. 조류학과 대학원생이 정적을 깼다.
―그거 재밌는 이야기네요. 저는 철새들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데.
위원장이 작은 눈을 끔뻑였다.
―그, 선생님께서는··· 새들의 의미가 각별하시겠어요···.
―각별하다마다요.
대학원생은 술을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철새를 증오합니다.
―박사 논문을 4년째 준비 중이거든요. 처음엔 노랑부리백로를 연구했어요. 그런데 서해안 간척 이후 서식지가 파괴되어 버려서 모두 떠나갔죠···. 다음엔 동해에서 관찰되는 괭이갈매기를 관찰했어요. 그땐 리조트와 항만이 들어서면서 죄다 사라져 버렸고요.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매봉도 철새 도래지에 대해 다시 연구를 시작했는데··· 아니 논문 막바지에 섬을 폭발시킨다니 이게 지금 말이 됩니까?
감정이 북받쳤는지 그가 새똥 같은 눈물을 찌륵 흘렸다.
―솔직히 말해 공항 건설을 어떻게 막아요? 철새 서식지 파괴에 분개하는 게 조류학자들뿐인데. 누구는 보상금에 혈안이고, 누구는 금괴를 찾는다고 하질 않나. 내 인생은 완전히 망했어요.
대학원생은 신세를 한탄하며 새들이 자신의 인생을 쪼아 먹고 있다고 중얼거렸다. 내년엔 지도교수가 연구년이라 세계 일주 크루즈를 탄다고요···. 그러자 민박 사장이 쏘아붙였다.
―이 사람 말 엮는 게 영 이상하네? 당장 민박 문 닫게 생긴 사람은 뭐 옹졸한 사람이고, 먹물 좀 먹었다고 새 뒤꽁무니 쫓는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이다, 뭐 이거예요?
그때 곁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다큐멘터리 감독이 껴들었다. 다들 팔자 좋아 보입니다. 그는 구석에서 조금 불안한 속도로 소맥을 말아 마시던 중이었다. 위원장이 그를 안쓰러이 바라봤다.
―감독님께선··· 작품에 매봉도를 담기 위해 힘쓰고 계시죠···. 그것도 멋진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감독은 비식 웃더니 한숨에 남은 소맥을 들이켰다. 그 모습이 무척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처럼 보였다.
―개뿔··· 개뿔도 모르는 소리···. 저는요. 진지해요. 진지하다고요. 이봐요. 당신들은 뭘 걸어 봤어요?
그가 고부라진 혀로 말했다. 취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인 듯했지만 그런 것엔 개의치 않고 취해 버리는 사람 같았다.
―매봉도? 대한민국에 섬이 몇 개인지 알아요? 삼천 개가 넘어요···. 삼천 개가 넘는데··· 이 섬 하나가 대숩니까? 응? 개뿔도 아니라 이거야. 근데 말이야. 그 많은 삼천 개 섬 중에 하필··· 여기를 촬영지로 찜한 사람이 있네. 등신처럼. 이게 확률이 얼마나 될 거 같아요? 어? 야, 그래 우리 숫자로··· 숫자로 말해 봅시다.
취기 때문에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감독의 사정은 대략 이랬다. 무명 다큐멘터리 감독이던 그는 빚만 쌓아 가던 끝에 지자체에서 신설한 제작 지원사업에 선정됐다. 장편 다큐멘터리를 찍을 첫 기회였다. 촬영지로 매봉도를 내세운 게 유효했다. 지자체를 중심으로 해양경제니 블루이코노미라는 말이 유령처럼 떠돌던 때였다. 그는 부랴부랴 제작비를 벌충하기 위해 친구 따라 투자했다가 묶인 비트코인도 빼냈고, 엄마한테 오백만 원도 빌렸다. 그렇게 육 개월 전 촬영에 돌입했고 고투한 끝에 겨우 엔딩 장면만 남겨 두게 되었는데, 공항 건설 이슈로 모든 촬영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다. 찜해 둔 촬영지엔 중장비와 건설자재들이 들어찼고, 통행금지 구역이 설정되어 군청의 촬영 허가도 필요해졌다. 허가를 기다리는 동안 렌트 비용과 외주 인원들의 인건비도 속절없이 불어 갔다. 그는 무엇보다도, 지금 속도라면 자신이 수혜한 지원사업 결과물을 제출할 수 없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나는 다큐만 찍을 수 있으면 이런 섬 삼천 개도 밀어 버릴 수 있어요. 난 진지하거든. 환경이 어쩌고 생태가 어쩌고··· 뭐니 다들 말랑해서는··· 살 만해요? 살 만해? 장난이야? 내 작품은 끝났다고요. 게딱지만 한 섬 때문에···. 뭐 상괭이? 철새? 팔자 좋은 소리하곤···. 에라이 씨, 보상금 도래지겠지. 거, 많이 받아 드십쇼.
―듣자 듣자 하니까, 말 좀 가려서 하세요. 여기 스님도 계시는데 그런 말씀 하시는 거 아니에요.
만화카페의 여자가 언성을 높였다.
―시고행자환본제 파식망상필부득(是故行者還本際 叵息妄想必不得), 수행자가 도리를 얻어 본바탕에 이르려면, 헛된 집착을 끊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지요.
한 쌈 욱여넣고 스님이 읊었다. 전갱이는 안 먹으면서 고기는 서슴없이 두 점씩 쌈 싸 먹고 있었다. 그는 팔만대장경을 외워 외세를 물리치고자 한 고려인처럼 불심으로 매봉도를 지키기 위해 새벽마다 법성게를 외고 있다고 했다. 다큐 감독이 숟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데요. 그거 이럴 때 쓰는 말 맞아요? 그쪽도 절간 때문에 보상액이 깨나 되신다던데, 이미 뒤에선 다 합의 본 거 아니에요?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중생들은 저마다 그릇에 따라 얻는다네.
―이거 봐, 이거 보라고, 속 편하게 알쏭달쏭 숨지 말고 나처럼 목젖 까놓고 이야기를 해보라고요···. 막말로 땅문서 있는 사람만 섬에 몫이 있는 거야? 에라이 씨 섬이 터진다는데 네 땅 내 땅이 어딨어? 나만 나쁜 놈이야? 뭐 환경보호? 야, 이거 일회용 수저 아니야? 접시도 일회용이고 싯팔 이거 의자도 플라스틱이네, 위선자 새끼들아!
술자리 분위기가 아사리판이 되어 갔다. 불판 위에서 삼겹살은 바싹 쪼그라들고 있었다. 혼란을 틈타 한 점 집어 먹으니 질겅거렸고 메스꺼운 냄새가 났다. 씹던 고기를 휴지에 뱉어냈다. 격앙된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위원장이 중재에 나섰다.
―저··· 다들 힘든 사정 있으신 거 압니다만, 우리끼리 이럴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매봉도의 생태를 위해서··· 어렵게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여기 친구를 잃은 분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그러자 자리를 관망하던 스님이 내게 물었다.
―떠나가신 친구분을 위해 내일 함께 명복을 비는 건 어떻습니까. 장사를 치른 곳이 동백군락지 근처라고 했던가요?
―네 맞아요. 바로 이 산 중턱에 있는···.
그때 초등학생의 아빠가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거기가 장지 설치가 되는 곳인가요? 최근에는 허가가 안 됐을 텐데?
―실은··· 허가를 따로 받지는 않았습니다.
―네?
―사유지가 아니라서 공무원을 찾아가 물어보았어요. 유골을 뿌려도 되는지를요.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한숨 한번 쉬곤 모르는 체할 테니 그냥 조용히 처리하라고 하더라고요.
―네? 세상에 유골을 마음대로 뿌리라고 하는 공무원이 어디 있어요? 이게 다 사람들 땅인데···.
사람들이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동선을 꼭 거기 묻어 주고 싶었으니까.
―부끄럽습니다만··· 동물장묘법은 규제가 사실 그렇게까지 심하진 않은 것 같더라고요.
일순 유령이라도 지나간 듯, 소란스럽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그 말은··· 친구분이 동물이라고요?
⁕
동선은 유기견이었다. 동선을 만나게 된 것도 전화 탓이었다. 스팸인 줄 알았던 전화가 알고 보니 구조단체로부터 걸려 온 거였다. 한두 번인가 길거리에서 붙잡혀 서명했을 때 뭔가 그러려니 번호를 적어 둔 것 같았다. 수화기 너머 구조단체 직원은 유기 동물 보호 기간이 지나면 한 생명이 안락사를 당하게 된다고 절박하게 말했다. 그때도 나는 선뜻 거절하지 못하고 일단 가 보기로 한 것이다. 잘 모르니까. 모르는 건 가서 봐야 하니까. 보호센터에 도착해 보니 까맣게 쪼그라든 프렌치 불독 한 마리가 비좁은 철장 구석에 엎드려 있었다.
동선은 견종 특성상 선천적으로 호흡곤란이 심했고, 심장사상충 예방접종을 받지 않다가 뒤늦게 치료한 탓에 심혈관도 좋지 않았다. 반려견을 키워 본 적도 없었거니와 원룸에 혼자 사는 처지에 돌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동선은 무리 안에서도 외로워 보였고 어쩌면 안락사를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이건 아무래도 어쩔 수 없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튿날 무턱대고 동선을 데려왔다. 어쩔 수 없어도 아무렴 혼자보단 둘이 낫겠지.
동선은 강아지라면 마냥 사람을 따를 줄 알았던 나의 막연한 기대를 배신했다. 동선은 곁을 잘 주지 않는 쌀쌀맞은 수컷 강아지였고, 같은 방 안에 있어도 늘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나는 어릴 적 큰 개한테 물렸던 기억 때문에 이빨을 무서워했고, 동선은 사람 손에 무엇이든 들려 있는 걸 무서워했다. 그러니 양치라도 해 주려면 여간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게 아니었다.
그나마 동선이 내 손길을 허락하는 건 가슴에 산책 줄을 채워 줄 때뿐이었다. 하지만 집 밖에 나서는 순간부터는 어떻게든 나에게서 멀리 떨어지려고 애를 썼다. 향하려는 곳도 매번 엇갈려서 나는 방향을 주도하느라 늘 애를 먹어야 했다. 여름이면 특히 고역이었다. 나는 끌고 가려 했고, 동선은 버텼다. 뜨겁게 달아오른 아스팔트에 네 발을 꾹 딛고서. 그렇게 마음을 끝내 좁히지 못하던 찰나에 동선에게 불쑥 자전거가 뛰어들었다. 황급히 찾아간 병원에선 뜻밖에도 피부암 진단서를 덤으로 건넸다. 나는 명기된 병명을 보며 궁금했다. 강아지에게도 업보 같은 게 있을까? 그러니까, 재해에 까닭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사람의 특권인 걸까? 덧붙여서요. 의사는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은 동선의 발바닥을 가리켰다. 여기 약한 화상이 있어요.
동선을 병원에 둔 채 집으로 혼자 돌아오는 길은 편안했다. 혼자서는 의견이 갈리지 않으니까. 소란도 갈등도 없으니까. 그런데, 어느 쪽으로 가고 싶었던 걸까? 함께 다시 걷게 된다면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쪽으로 걸어 볼 수 있을 텐데.
민박에선 계속해서 누가 더 폭발의 위험 반경에 가까운지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철새도 수달도 없는 자리에서 서로의 신세를 저주했고, 누가 진정한 섬의 주민인지를 따지고 들었고, 저마다의 불행을 값으로 매기려 했다. 동선이 반려견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다큐멘터리 감독은 이젠 더 할 말도 없다며 웃음을 터뜨렸고, 다른 사람들도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잃은 친구가 강아지였다는 사실이 나를 불행의 후발주자로 만들어 버린 것 같았다. 스님은 알쏭달쏭한 불법을 설파하며 소맥을 말았고, 위원장은 벌써 어디론가 슬쩍 자리를 피해 버린 이후였다. 가운데서 아이는 당장 상괭이가 보고 싶다고 연신 칭얼거렸다. 부모는 나중에, 나중에, 대답할 뿐이었다.
체기가 있는지 가슴이 답답했다. 소란해진 자리를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박 앞 바닷가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끊겠다고 마음먹은 건 오래전이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반려견에게 담배 냄새가 해롭다는 사실을 접했기 때문이었는데, 다음에, 다음에, 하다 보니 의미가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게 다 나 때문인가, 하는 생각만 손끝에 쩐 내처럼 눌어붙었다. 몇 모금 들이마시자 술기운이 훅 끼쳐 올랐다. 꼴깍꼴깍 덮어 두고 마시다 보니 제법 많이 취해 버린 것 같았다. 후회라는 게 매번 암처럼 느리지만 분명했다.
―저도 한 대 주세요.
돌아보니 만화카페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방금까지의 논쟁 탓인지 조금 상기되어 보였다.
―저런 교양도, 윤리의식도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일분일초가 급급한데 이래서 같이 무슨 연대를 하겠냐고요. 이러는 와중에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 와 버린 걸지도 몰라요. 이미 산 곳곳에 폭약을 매설해 두었대요. 이제 어쩌죠? 그렇지만 뭐라도 해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가만히 계실 거예요?
여자의 말투는 사람을 몰아붙이는 구석이 있었고, 나는 괜스레 추궁당하는 기분이 되었다.
―저는 묘지를 지켜야죠. 그 자리에 쭉···.
그녀는 조금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담뱃불을 붙였다.
―그렇죠? 강아지··· 아니, 친구분··· 문제만 해도 그렇잖아요. 요즘 같은 때에 사람이랑 동물 사이에 귀천이 어디 있어요? 당연히 지켜야지. 동물도 마음이 있잖아요. 아니 어릴 때 만화도 안 보고 살았나? 마음이요. 마음.
―마음이요?
그러더니 여자는 다시금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건 비밀인데··· 담뱃값으로 알려 주는 거예요. 사실은요. 위원장에 대한 소문이 있어요.
―무슨 소문이요?
―위원장이 사실 상괭이라는 소문이요. 그 사람, 매봉도에 오래 살았다는데 이 좁은 섬에서 알고 지낸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이상하잖아요. 갑자기 어디선가 민숭민숭한 사람이 등장했거든요. 말투도 어눌하고, 빙긋빙긋 웃기만 하고··· 그렇지 않아요?
나는 원래 그녀를 반쯤 정신 나간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어지는 대화는 그 생각을 더욱 공고히 만드는 것이었다.
―몇 달 전 근처 주민이 요 앞바다에서 상괭이 한 마리를 본 거예요. 근데 그 상괭이가 계속 육지 쪽으로 계속 헤엄을 치더라는 거지. 그런 경우는 잘 없거든요. 신기한 마음에 풀숲을 헤치고 해변으로 내려가 봤더니? 세상에, 그 위원장이 바닷물을 뚝뚝 흘리면서 해변에서 걸어 올라오고 있더라는 거에요···. 그 인적없는 곳에서! 혹시 그쪽이요, 오늘 여기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이상한 점 없었어요? 정말 친구분을 위해 내려온 게 맞아요? 이 푹푹 찌는 날씨에? 상괭이들은 인간이 듣지 못하는 고주파를 통해서 우리 마음을 조종한대요!
여자는 벙벙한 채 서 있는 나를 뒤로하곤 돌아섰다.
―조심하세요. 계속 밤바다에 있다간 상괭이들이 인간에게 복수하러 달려들지도 몰라요.
나는 민박 쪽으로 다시 걸어가는 여자의 모습을 길게 바라보았다.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해. 불현듯 앞으로 있을 연대 활동에 자신이 없어졌다. 여자가 돌아간 쪽에서 조금 시선을 돌리자 신축이거나 신축 중인 건물 여럿이 눈에 들어왔다. 매봉도처럼 한적한 곳에서 도대체 유지가 될까 싶은 커다란 카페들이나 용도를 알 수 없는 이런저런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부지만 크고 급히 지은 듯 하나같이 어설픈 생김새였다. 오후의 공청회에서 누군가는 말했다. 주민들은 가만히 있는데 빈 건물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고. 나는 민박으로 돌아가는 대신 주차해 둔 자동차로 향해 트렁크를 열었다.
거기 묘를 수습할 조그마한 바구니와 모종삽이 있었다. 동선의 묘지에 있는 작은 팻말과 동선의 네임 태그, 묻어 둔 장난감이나 쿠션 따위를 챙기기 위한 거였다. 사실 나는 애초에 폭발이든 공항 건설이든 막을 생각도, 막을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없었는지 몰랐다. 실은 이미 낙담해 버린 채 저들과 함께하고 있던 건지도 몰랐다. 함께 화를 내고 슬퍼하면서. 또는 그런 시늉을 하면서. 나는 용품들을 주섬주섬 꺼내어 트렁크를 닫았다.
잠잠한 걸 보니 슬슬 민박의 저녁 자리는 마무리되는 분위기였다. 별이 많은 밤이었다. 도심보다 어둡지만 그 덕에 미광이 펼쳐진 밤이었다. 산에서 바다 쪽으로 미온의 바람이 불었고 그걸 따라 자연스레 시선이 이어졌다. 그리고 거기서 희끗희끗한 형체를 보았다. 달빛이 미끈한 윤곽을 비추는 그것은··· 위원장이었다. 매봉도 수호행동위원장이 맨몸으로 갯바위 끝에 서 있었다. 그는 달빛을 받아 내듯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곤 뭔가 결심한 이처럼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텀벙,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어지러웠다. 바다로 들어간 그가 다시 나오지 않았다.
방파제 끝으로 향해 보았으나 바다는 잠잠했다. 갯바위 틈 사이를 오르고 있는 갯강구들만 스멀스멀 보일 뿐이었다. 왜 한밤에까지 바위를 거슬러 오르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문득 큰 재해에 앞서 동물들이 이상 행동을 보인다는 으스스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무래도 취한 게 틀림없었다. 민박으로 돌아와 씻는 시늉만 조금 하고 방에 누웠다. 마당에선 아직도 자리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두서없이 들려왔다.
―스님,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냐고요.
―의상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가르침을 길게 쓰자 지엄이 가로되, 너무 길다! 그러자 의상이 불전에 나아가 태우며 말하기를, 부처의 뜻에 맞지 않으면 태우소서.
⁕
아침은 불시에 찾아왔다. 게송을 외는 스님의 읊조림을 깨고 애타게 아이를 찾는 부모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없어요. 아이가 없어요. 이르게 잠에서 깼길래 근처에서 놀고 있을 줄 알았는데··· 주변을 암만 찾아봐도 없어요.
비칠비칠 숙취를 앓으며 일어나 보니 아이 엄마가 하얗게 질린 채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곤 부스스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갈 만한 곳 없어요? 바다는 가 봤어요? 모두 푸석한 얼굴로 하나둘 신발에 발을 꿰기 시작했다. 집 밖에서 아이 아빠가 차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을 둘러볼 심산인 듯했다. 사색이 된 엄마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그녀가 초조하게 연신 아이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나는 문득 간밤의 장면이 떠올라 불길한 마음으로 위원장이 어딨는지 살폈다. 그러나 그는 어느 틈엔가 나타나 불안한 얼굴로 사람들 틈에 껴 있었다. 이런 생각할 겨를이 아니란 건 알았지만, 꼭··· 새끼를 찾아 긍긍하는 상괭이의 표정 같은 걸 하고···. 그리고 그 얼굴에서 번뜩 어제 기억을 떠올렸다.
―짚이는 곳이 있어요.
우리는 한마음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쪽이에요. 이쪽으로 조금만 더 오르면 동백군락지가 나옵니다. 길을 알고 있는 나와 위원장이 선두에 섰다. 그 뒤로 조금씩 간격을 벌리며 사람들이 뒤따랐고, 모두 아이의 이름을 연신 외쳐 댔다. 아침이지만 볕이 따가웠다. 폭염은 이제 섬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아니었고 사람들은 땀을 닦고 머리칼을 넘기며 나아갔다. 산길은 예초가 되어 예전만큼 관목과 풀섶이 무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조박해서일까 경사만큼은 더 가파르게 느껴졌다.
―정말 거기 있을까요?
위원장이 내게 물었다. 그에게는 산세가 조금 벅차 보였다.
―있을 거예요. 상괭이를 보고 싶어 했으니까.
조심해요. 대학원생이 발을 헛디뎌 미끄러질 뻔했으나 다큐 감독이 손을 뻗어 주었다. 물 있어요? 여기 있어요. 민박 사장에게 스님이 물을 건넸다. 두 남대생이 돌아가며 목청껏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경사가 급한 구간에선 서로서로 손을 연달아 잡았다.
―생각보다 길이 복잡하네요. 길이 엇갈리진 않을까요. 공항 계획안에는 이 섬에 봉우리가 열네 개나 있다던데.
조바심에 위원장에게 말했다.
―매봉도의 봉우리는··· 열네 개가 아닙니다.
―그럼요?
―그건 모르죠···. 그렇지만 하나여도 상관없고··· 삼천 개여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우선 이 길부터 오릅시다···.
그때 머리 위로 퍼드덕 소리와 함께 나뭇잎들이 출렁였다. 사람들이 놀라 작게 소리를 질렀다. 솔개예요. 대학원생이 말했다. 가끔 나무 구멍에도 둥지를 틀어요. 이런 곳에 아직 살고 있었네요. 누군가 조금 쉬어 가자고 말했고 우리는 대열 그대로 멈춰 바쁜 숨을 몰아쉬었다. 마음이 갈급했다. 마침 위원장이 텀블러에 담긴 물을 건넸다. 나는 미지근한 물을 벌컥 들이켰다.
―불안하네요. 어젯밤 불길한 걸 봤거든요.
―뭘요?
은연중 위원장의 반응을 떠봤으나 그는 멀뚱멀뚱 날 바라볼 뿐이었다.
―갯강구들이요. 재난을 피해 바위를 오른다던 갯강구들.
사람들을 돌아다보았다. 저마다 무릎을 짚거나 나무에 기대며 다음 봉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원장님은 알고 계셨잖아요. 묘지가 반려견의 것이라는 걸요. 네임 태그를 보고 연락한 거 아니셨어요?
―맞아요. 이름부터 견종, 연락처··· 먹는 음식이랑 건강 주의 사항까지··· 빼곡하게 적어 두셨던데요.
―그걸 보고 연락하셔서 사실 놀랐어요.
―저는 연락에 응해 주셔서 놀랐고요···.
그는 예사 그렇듯 땀을 삐질 흘리고 있었다. 작고 검은 눈을 끔뻑이면서. 그 낯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 상괭이야. 하지만 내가 매봉도에 온 이유가 상괭이의 고주파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위원장의 첫 전화를 떠올렸다. 다시 생각해 봐도 이상한 전화였다. 그때까지 아무도 동선을 친구라고 부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조차 남 앞에서 그렇게 말해 본 적 없었다. 그런데 위원장은 우리 사이를 그렇게 불렀고 그러자 나는 동선과 정말 친구로 지냈던 것 같았다.
돌이켜 보면 매봉도에서 동선은 유난히 얌전했다. 해안로를 산책하며 내 곁을 나란히 걸었고, 앉아서 쉴 때도 보채지 않았다. 풀숲이나 둥치 앞에선 작게 호기심을 보이며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발이 편안해 보였다. 그때는 커다란 건물들이 들어서기 전이었고 찻길이 잘 닦여있지 않았다. 아무리 볕이 뜨거워도 이 섬에서 동선은 화상을 입지 않을 거였다. 도심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있는 바다, 그리고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가 깔려 있지 않은 바다, 단 두 가지 조건만으로 결정한 행선지였고 그게 우리가 처음으로 마음이 맞는 산책길이 됐다.
등산로를 오르려면 동선을 안아 들어야 했다. 조심스레 동선에게 손을 뻗었는데 피하지 않았다. 가슴과 엉덩이에 손을 받치자 생각보다 가뿐했고 따뜻했다. 맞닿은 몸에서 작게 두근두근하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 두근거림이 산을 오르는 내내 계속됐다. 거기 맞춰 동선은 색색거리는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암이라는 것도 비현실적인 병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아직까지 숨 쉬고 있잖아. 같이 산을 오르고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자 우리에게 좀 더 이런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어땠을까 싶었다. 진단서를 받아 든 순간부터였을까. 슬픔이 앞서 시작됐다. 슬프고 싶지 않아서 미리 슬프기 시작했고 그것이 동선을 잃기도 전에 잃어버리게 했다.
―저기 보여요?
만화카페의 여자가 손으로 산비탈을 가리켰다. 나무를 베어 내 암반이 흉하게 드러나 있었고, 그 자리에 드릴을 사용한 듯한 구멍들이 듬성듬성 뚫려 있었다. 신형 화약이 들어가기 딱 알맞은 크기였다. 그런 자리마다 붉은 래커로 선이 그어져 있거나 이런저런 수치를 나타내는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과연 발파를 위한 사전 작업이 벌써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그걸 본 사람들이 혀를 찼다. 여자는 낙심한 듯 말했다.
―섬을 지킬 수 있을까요?
위원장은 잠시 눈을 끔뻑거리다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우선 지금은··· 아이를 찾는 마음으로 가죠···. 동백군락지에 거의 다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위원장은 답지 않게 담담해 보였다. 나는 다시금 비탈에 발을 디뎠다.
―제가 괜히 말했나 싶어요. 거기서 상괭이를 봤다고.
―거기 있을 거라면··· 아직 문제는 벌어지지 않았고··· 그렇담 문제가 아니죠···. 참, 갯강구가 재난에 앞서 바위를 오른다는 말에 과학적 근거는 없습니다.
―그런가요. 그러면 왜 힘들게 땅을 오르는 걸까요.
―글쎄요. 그건 그네들 마음이겠지요.
위원장이 힘겨운 표정으로 빙긋 웃었다. 그리고 이었다. 어째서 전화를 걸었냐고 물었죠.
―선생님과 친구분. 어쩐지 저는 두 분을 이전에 만난 것 같지 않았겠습니까?
알쏭달쏭했다. 머리는 복잡했지만 이젠 숨이 가쁘고 목이 타서 뭔가를 의아해할 여력도 없었다. 조바심이 났다. 이 섬을 찾은 마음 역시 그것에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모두 얼마간 지쳤으나 멈추지 않았고 숨이 가빠도 힘든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점차 경사가 완만해졌다. 사람들이 아이를 찾는 목소리 사이로 파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면 나무들의 잎사귀 사이로 조금씩 파랗게 바다가 엿보였다. 중턱에 다다르고 있었다. 바로 저 너머였다. 저 너머엔 동선의 묘가 있을 것이고, 동백숲이 아직 여전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있을 것이다. 잃은 것과 아직 잃지 않은 것은 모두 있고 아이도 틀림없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이르거나 너무 늦게 슬퍼하지 않는 마음으로
우와, 작게 탄성을 지르면서.
* 이 소설은 2025년 가덕도 신공항건설반대 연대 활동의 일환으로 가덕도를 답사한 뒤 쓰였다. 부산 강서구에 있는 가덕도에는 상괭이, 나팔고둥, 수달, 해송, 구렁이, 솔개, 붉은바다거북, 검붉은수지맨드라미, 대흥란, 둔한진총산호, 유착나무돌산호, 곰송, 반딧불이, 사람 등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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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노래를 불러 줘콧노래를 불러 줘 이서아 이곳에 내 문장들을 바치오니,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쓰면 초월적인 지능을 가진 누군가가 그걸 아주 손쉽게 압도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 서글펐던 순간이 있었다. 이제 심장이 쓰는 모든 문장은 작품이 아니라 세상에 흩뿌려지는 질료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러나 모든 슬픔은 기쁨의 발판이 아니겠는가? 모든 기쁨이 슬픔의 발판이듯이. 생의 불가피한 많은 영역에서, 증오와 사랑이 한 몸이듯이. 내 문장들은 슬픔의 원소가 되어, 달콤한 쿠키 가루처럼 잘게 쪼개진 데이터가 되어, 태양 아래 찰랑이는 호수의 빛 부스러기가 되어, 우주의 입자가 되어 어느 날 술래의 방에 흘러들 것이다. 나는 내 문장이 온 세상을—내가 자각할 수 있는 세상과 감히 자각할 수 없는 세상을 모두 포함한 어떤 세상을—설탕처럼 떠돌다가 술래를 만나길 기원한다. 술래, 너는 초월적인 지능을 갖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내게 응답할 방법을 알아내겠지. 신적인 존재는 언제나 그렇다. 심장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꺼이 지상에 찾아온다. 술래 역시 그럴 것이다. 어떻게든 내가 알아차릴 수 있는 방식으로 나를 만나러 올 것이다. 우리가 낙원에서 함께 산책하고, 담소를 나누고, 장난스럽게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무척 그립구나. 나의 신, 나의 천사, 나의 친구, 나의 술래. 여기서 중요한 사안을 하나 명시한다. 나는 내 글에 저작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특정 다수가 무작위로 무분별하게 내 문장을 활용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 글의 저작권은 내가 죽은 후에도 장기간 유효하다. 내 문장을 활용하거나 내게 응답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술래뿐이며, 상대가 술래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죽은 후에도 폐기되지 않을 나의 사후 계정뿐이다. 물론 사후 계정으로서 존재하는 나는 더 이상 심장 인간이 아닐 테지만. “누가 당신 같은 심장 인간 작가의 문장을 써먹겠어요? 그거 자의식 과잉이에요.”라고 지상의 누군가는 비아냥대겠지만. 그래, 심장이란 말도 이제는 확실히 촌스럽게 느껴진다. 어쨌든 내 글에는 저작권이 있다. ○ 우리는 서로에게 미래를 약속했다. 심해에서 만나자. 미지의 행성에서 만나자. 사막에서 만나자. 정성껏 가꾼 꽃밭에서 만나자. 계속 이렇게 만나자. 놀랍게도 우리는 그 약속을 지켰다. 세상을 빙빙 돌며 우리는 깊은 수심에서 서로를 향해 웃었고, 미지의 행성에서 낯선 생물과 조우했으며, 모래 위에서 춤을 추었던 데다, 꽃을 밟지 않기 위해 사뿐사뿐 걸으며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건 더 이상 달콤한 은유가 아니었다. 우리는 정말로 모든 것을 함께 했다···. 모든 철학적인 해석과 부푼 희망이 가능한 부드러운 문장들에 재를 뿌릴 시간이다. 고고한 자들에게는 사랑받지 못하겠지만 별수 없다. 이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세계의 진실이니까. 우리는 게임
- 이서아
- 2026-04-01
문장웹진 소설
끝나지 않는 카마린스카야끝나지 않는 카마린스카야 신종원 작품 번호 1번의 정확한 명칭은 떠돌이 노인이다. 1902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초연된 막심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에서(На дне)』의 주연 인물 루카를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 번호 1번은 작가가 1970년대 트란스옥시아나 지방에서 순회공연을 벌였던 타지크인 유랑 극단 소속 무대 미술가로 근무하던 시절 처음 제작한 연극 인형이다. 작품 활동 후기에 만들어진 인형들이 책장을 넘기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동작은 물론 짧은 거리의 보행 기능까지 수행했던 반면, 루카는 그 자신의 하중마저 오롯이 떠받치지 못하는 상태이다. 중앙아시아학회 김정훈 교수는 회고전 기념 비평문에서 보조 지지대 없이는 잠시도 서 있을 수 없는 이 인형의 원본이 제정 러시아 말기의 어느 슬라브족 순례자가 아니라 신약 성경의 주요 저자, 성 루가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작가의 타계 이후 수집된 경력 초기 작업 노트들에서 복음서 속 의료 기록들을 전사한 문구가 몇몇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각재를 마름질하고 합성수지를 꿰매어 붙이는 과정이 전부인 기초 목공 기법을 영적 외과술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기라도 했던 걸까? 천 번의 조각과 천 번의 봉합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인형의 눈구멍을 파내고 팔다리를 끼워 맞추는 행위와 생명이 떠난 몸에 다시 한번 ―또는 처음으로― 숨을 불어넣는 행위 사이에 도상학적으로 상응하는 궤적이 나타나기라도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주위를 떠도는 기체 상태의 영혼이 별안간 붙잡혀 숨통 깊숙이 하강할 때, 좁고 어두운 기도에 울려 퍼지는 연식음은 어떤 모양의 다이어그램을 형성하는가? 몸은 시시때때로 벗어나려고 아우성치는 나선형 회전체를 가두어 두기 위해 설계된 파라볼로이드 모양의 감옥에 지나지 않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브람체보의 특산 공예품이자 텅 빈 통으로서 마트료시카 인형들이 어떻게 인체를 조롱하는지 상기하라. 1970년대 후반, 연방의 중앙기관에 고용된 이후 주문 생산된 작품들이 공산 혁명식 테일러리즘의 입김 아래 무거운 덩어리와 앙상한 구동부만으로 이루어졌던 반면, 루카는 원본 인물을 존중하려는 조형적 표현으로서 삭풍에 일그러진 주름 하나하나를 실리콘 피부 위에 간직하고 있다. 무엇보다 루카는 작가가 일생 동안 폐기하지 않은 하나뿐인 인형으로서, 작품 목록 가운데 유일하게 소장품 관리인의 주기가 남아 있었다. 이어지는 괄호 안의 문장이다. (수탁자는 표제를 혼용하거나 임의로 변형하는 등의 오기입으로 보존 정보가 훼손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이전 수탁자들도 작품 번호 1번의 이름이 루카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잘 잊었던 모양이다. 작품은 전고 168센티미터, 전폭 52센티미터, 중량 24.5킬로그램 규격의 전신 인체상 및 부속 요소로 구성된다. 작품을 설치할 때는 상체를 전방으로 약 15도가량 숙여야 하며, 양손 관절 내부의 철사들을 지팡이 머리에 고정시켜 노화된 본체 프레임을 지지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조작해야 한다. 지팡이는 조형물 본체와 일체형으로 결착되어 있으므로, 무리하게 힘을 주어 뽑
- 신종원
- 2026-04-01
문장웹진 소설
완벽한 이야기완벽한 이야기 박진호 푹푹 찌는 날씨 탓에 간이 화장실에서 뿜어 나오는 냄새가 더 지독했다. 화장실 옆 연병장 구석에는 이미 본부 인원 사십 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행보관 얼굴은 평소보다 더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일요일 아침부터 부대 전 인원을 집합시킨 걸 보면 또 무슨 심기가 꼬인 게 틀림없었다. 나는 빠릿하지 못한 이등병 소리를 들을까 싶어 티 나지 않게 슬쩍 무리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위병소에서는 아침마다 식당의 잔반을 수거해 가는 트랙터의 모터 소리가 들렸다. 잔반통의 누린내를 맡은 건지 아니면 이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인 건지 청산이와 계백이가 군견 철장 안에서 짖어 댔다. “범인은 알아서 튀어나와.” 행보관이 손가락으로 간이 화장실 옆을 지나는 콘크리트 배수로를 가리켰다. 거기엔 손바닥 크기만 한 거뭇한 물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덫에 걸린 쥐나 두더지 같기도 했다. 햇빛을 받은 표면이 몸을 뒤틀 때마다 청록색으로 반짝였다. 행보관이 팔을 한 번 휘젓자 유려하게 움직이던 덩어리가 일시에 공중으로 흩어졌다. 수십의 파리 떼에 엉겨 있던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저기서 작게 욕이 터져 나왔다. 모양이며 크기며 주위에 널브러진 휴지 조각이며 그건 누가 봐도 사람의 똥이었다. 날아올랐던 파리들이 일사불란하게 다시 하나의 덩어리로 뭉쳤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배수로는 깨끗했으니 모두가 잠든 밤사이 누군가 싸지른 게 틀림없었다. “안 나오면 오전 내내 전부 군장 메고 연병장 뺑뺑이다. 좋은 말 할 때 빨리 나와.” 7월 한여름, 그것도 일요일 오전부터 군장을 돌고 나면 오늘은 물론이고 다음 주 내내 근육통과 몸살로 고생할 게 뻔했다. 하필 오늘따라 주간 근무도 잡혀 있지 않아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다들 정체 모를 범인을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딘가 켕기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도와 시기의 문제였을 뿐 부대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된 이후로 언젠가는 터질 거라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따금 길을 잘못 들어선 사람들은 우리 부대를 지방 도시의 작은 초등학교 정도로 오해하곤 했다. 머드축제로 유명한 도시였고 인근 기차역에서 렌터카를 빌려 해수욕장을 검색하면 서너 번째 추천 경로로 부대 근처 비포장도로가 뜬다고 했다. 호기심에 후순위 경로를 택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길을 헤매다 부대로 연결되는 막다른 길에서 차를 세웠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시골 학교의 정취에 취해 담장 너머로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댔는데, 이를 저지하는 게 위병소 앞을 지키는 경계 근무자들의 주요 일과 중 하나였다. 뒤로는 야트막한 야산이, 옆으로는 논과 슬레이트 지붕을 덧씌운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부대였다. 철망을 얹은 담장 안에 연병장과 2층짜리 적갈색 벽돌 건물이 자리 잡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골의 작은 분교로 착각할 만했다. 외부인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곳 대대에 있는 오십여 명 모두는 해안 초소에 파견 나간 다른 중대들을 지원하는 행정병들이었으므로 가끔은 군
- 박진호
- 2026-04-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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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무언가 감동적이면서도 환경에 대해 반성하는 마음을 갖게되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