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출 혹은 작곡
- 작성일 2023-06-01
- 댓글수 0
추출 혹은 작곡
최제훈
“그래도 예전엔 말이야, 취조실의 낭만이라는 게 있었는데.”
허 반장은 의자 팔걸이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채 회색 방음벽을 휘둘러보았다.
“형사와 용의자가 이렇게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한판 승부를 겨루는 거지. 네가 했지, 불어라, 생사람 잡지 마쇼, 하면서.”
허 반장의 맞은편에 어깨를 웅크리고 앉은 건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흑백이 고루 섞인 수염 자국이 입 주변으로 점점이 퍼져 있었다.
“여기 딱 앉혀 놓으면 아주 가지각색이거든. 물증을 들이미는데도 막무가내로 뻗대는 놈, 인생 역정을 구구절절 늘어놓으며 하소연하는 놈, 되지도 않는 개똥철학을 싸제끼는 놈, 사실과 구라를 교묘하게 섞어 가며 판소리 한 마당을 뽑는 놈, 너처럼 입 꾹 다물고 묵비권을 행사하는 놈.”
허 반장은 눈동자를 굴려 건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숨만 색색거리는 모습이 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듣다 보면 캐릭터가 딱 나와. 이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왔구나, 왜 이런 짓을 저질렀구나. 물론 가끔은 당최 속을 알기 힘든 강적도 있지. 그런 놈일수록 낚는 맛이 있다니까. 뜨끈한 설렁탕 한 그릇 먹이고 같은 질문을 포장만 바꿔 가며 계속 던지는 거야. 너덧 시간 동안. 그러다 보면 집중력이 흐트러지면서 덥석 미끼를 무는 순간이 있거든.”
허 반장은 손목을 퉁 튕기며 가상의 낚싯대를 잡아채는 시늉을 했다.
“취조라는 게 재미가 있었어. 악착같이 감추려는 자와 어떻게든 밝혀내려는 자. 심약해 보인다 싶으면 좋은 경찰, 나쁜 경찰 놀이도 하고, 공범이 있으면 옆방에 나란히 처넣고 죄수의 딜레마 게임도 하고. 뭐 이런······.”
허 반장은 깍짓손으로 뒤통수를 받치고 허공을 쏘아보았다.
“스토리, 그렇지. 잘근잘근 씹을 만한 스토리란 게 피어났다고. 창문도 없는 이 작은 방에 말이야.”
건은 여전히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허 반장은 천연스럽게 혼잣말을 이어 갔다.
“철옹성 같은 용의자를 무너뜨리고 자백을 받아내는 클라이맥스를 지나, 고개 숙인 범인의 눅진한 침묵을 음미하며······ 엔딩, 크으. 그때의 쾌감이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지. 그 맛에 형사질 하는 거 아니겠어? 그런데 지금은······.”
문에서 울린 노크 소리가 허 반장의 말허리를 끊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빳빳한 정복 차림의 이 경장이 알루미늄 케이스를 들고 취조실로 들어왔다.
“반장님, TME 영장 나왔습니다.”
“뭐 이리 오래 걸려?”
“요즘 법원에서 까다롭게 보더라고요.”
“앉아서 사인만 하는 양반들이, 쯧.”
허 반장은 이 경장이 건넨 종이를 쓱 훑어보고 건을 향해 내밀었다.
“전과가 없으니 TME 영장은 처음 보지? 뉴스에서 들어는 봤을 거야. 토탈(Total), 몽땅, 메모리(Memory), 기억, 익스······ 익스, 뭐였지?”
허 반장이 이 경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 경장은 유창한 네이티브 발음으로 “익스트랙션(Extraction), 추출”이라고 대답했다.
“유학파 엘리트라 발음이 달라. 이젠 형사도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니까.”
허 반장은 건을 향해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추출. 이건 범행에 대한 네 기억을 몽땅 추출할 수 있다는 영장이야. 뇌 곳곳에 흩어져 저장된 감각과 잔상, 범행 당시 근육들의 움직임, 뇌파의 변동, 호르몬 분출, 이런 기억의 파편들을 싹싹 긁어모아 재조립하면 범행 당시가 리플레이된다는 거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일 죄가 없다면 아무것도 안 나올 테고. 그럼 나한테 눈 한 번 흘기고 바로 귀가하면 돼. 영장 내용 이해했어?”
허 반장이 영장을 들이민 채 기다렸지만 건은 묵묵부답이었다.
“깔끔하지. 이게 도입되면서 취조실의 스토리란 게 싹 다 사라졌잖아. 설렁탕은커녕 조서 쓰고 지장 찍는 절차마저 필요 없다니까. 추출한 기억을 저장하면 그게 바로 법정에 제출되는 자백서거든.”
허 반장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쯧, 낭만이 없어, 낭만이.”
그사이 이 경장은 알루미늄 케이스를 열고 장비를 세팅했다. 노트북처럼 생긴 단말기를 부팅하고 헤드네트를 테스트하고 활력 징후 모니터를 설치하는 분주한 손놀림을, 건은 눈만 치떠 훔쳐보았다.
“준비됐습니다.”
“시작하지, 그럼.”
이 경장은 건에게 다가가 머리에 헤드네트를 씌우고 손목에 바이털 밴드를 채웠다. 건은 잠깐 움찔했지만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협조했다.
“입을 벌리고 혀를 위로 붙이세요.”
이 경장이 조그만 스프레이를 흔들며 말했다. 미간을 찌푸리는 건에게 허 반장이 대신 설명했다.
“그냥 진정제 뿌리는 거야. 기억이 잘 나도록 뇌를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주려고. 아, 크게······ 그렇지. 혓바닥 올리고.”
이 경장은 건의 혀 밑에 스프레이를 분사한 후 허 반장의 옆자리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멀뚱히 건을 건너다보며 기다렸다.
“소개팅은 어떻게 됐어?”
“아······ 반장님한테까지 들어갔어요?”
“수사과 짬이 있지. 이번엔 제대로 수갑 차는 거야?”
“밥만 먹고 헤어졌어요.”
“마음에 안 들었어?”
“저는 더 만나 보고 싶었는데, 결혼 상대로 경찰은 부담스러운 모양이더라고요.”
“근데 왜 나왔대?”
“재미 삼아 나온 것 같아요. 범죄 수사물을 좋아한대요.”
“그렇지만 경찰과 결혼할 마음은 전혀 없다.”
“그럴 수 있죠. 저도 좀비물 마니아지만 좀비와 결혼할 마음은 전혀 없거든요.”
“지랄.”
블라인드를 내리듯 건의 눈꺼풀이 스르륵 내려앉았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건이 어눌한 음성으로 웅얼거렸다. 허 반장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응? 뭐가?”
“기억이, 흩어지는 데는······.”
그 말만 흘리고 건은 의식을 잃었다. 거, 영 찜찜한 놈이네. 허 반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입속말로 꿍얼거렸다.
“사건 번호 MSP-6047, 용의자 김건, 기억 추출 시행합니다. 담당 경관은 수사1팀 경위 허태식, 기술지원팀 경장 이시형. 용의자 맥박, 호흡, 체온, 모두 정상입니다.”
이 경장이 마이크에 대고 녹음한 후 단말기 키보드를 두드렸다. 허 반장은 몸을 기울여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자, 무대부터 세팅하고.”
“현장 업로드합니다.”
이 경장이 엔터키를 눌렀다. 모니터 하단 진행 표시바의 붉은 막대가 성큼성큼 달려 나갔다.
“쭉쭉 빨아들이네.”
“아직은 방어기제가 작동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붉은 막대가 우측 결승점에 도착하자 모니터에 하얀 타일로 둘러싸인 공중화장실 영상이 떴다. 천장 구석에 설치된 CCTV로 내려다보는 듯한 각도였다. 실제 영상은 아니고,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사건 현장 사진을 3D 이미지로 구현한 것이었다. 타일에 흩뿌려진 붉은 피며 깨진 거울은 원상 복구한 상태로.
“내 머릿속도 이렇게 프로그램 돌려서 깨끗이 청소되면 좋겠다. 기억이라고 떠오르는 게 죄다 피 칠갑 영상뿐이니.”
허 반장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영상을 점검하던 이 경장이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그게 다 반장님 훈장이잖습니까.”
“됐다 그래. 나이 먹으니까 점점 숭악한 것들이 싫어. 영화도 이젠 스릴러는 안 본다니까.”
“경찰청에서 하는 명상센터에 나가 보시죠. 저도 틈틈이 다니는데, 일하면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런 덴 좀 민망해서. 아직은 애들 앞에서 가오도 살려야 되고. 그나저나 쟤도 명상센터에 다니나, 뭐 저렇게 평온해.”
허 반장은 활력 징후 모니터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건의 맥박과 혈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고른 숨소리가 탁자 너머에서 무심하게 건너왔다.
“그러게요. 강심장인지 무딘 건지, 아니면······.”
“저 새끼 맞다니까. 이상 없으면 특수 효과 들어가자.”
“감각 자극 추가합니다.”
해당 공중화장실에서 채취한 냄새, 범행 추정 시간인 오후 11시경의 주변 소음이 무대에 덧입혀졌다. 아울러 위드마크 측정기로 역산한 당시 김건의 혈중 알코올 농도 0.05퍼센트 수준의 자극이 가미되었다. 시각, 후각, 청각에 취기까지 총동원되어 용의자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배우도 바로 투입해.”
“피살자 오정환 이미지 업로드합니다.”
이 경장이 다시 단말기 키보드를 두드렸다. 여러 각도에서 캡처한 더벅머리 노숙자의 이미지 파일이 한 장씩 업로드되었다. 67퍼센트까지 죽죽 치고 나가던 붉은 막대가 버퍼링이 걸리며 멈칫거리기 시작했다.
“슬슬 투정을 부리는데요.”
“상처 부위 꼼꼼하게 지웠지?”
“예. 그것 때문에 일이 많았어요. 노숙자라 SNS 사진을 구할 수 없으니.”
허 반장은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숙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투성이 시체 사진을 매만져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야 했으니 일이 많았을 것이다. 용의자의 머릿속에서 피해자를 얼마나 입체감 있게 부활시키는가는 TME 성공 확률과 직결된 문제였다.
모든 업로드가 완료되었지만 건의 활력 징후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허 반장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는 기다려야 했다. 뇌리에 강제로 주입한 무대와 특수효과와 배우로 용의자가 공연의 막을 올리기를.
“범행 도구를 보여주는 게 효과가 좋은데.”
이 경장도 모니터의 그래프를 확인하며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어쩔 수 없지. 부검의도 흉기 정체를 모르겠다는데.”
“일자 드라이버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야. 갈비뼈를 긁은 흔적이 다르대.”
모니터에 뜬 공중화장실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무조건 발뺌하고 보는 용의자들처럼, 뇌 역시 온갖 방어기제를 작동시켜 취조실이라는 공간에 저항하기 마련이었다. 그래 봤자 시간문제일 뿐이지만.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무엇이겠나.
“어······ 으······.”
건의 입술이 벌어지며 메마른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한순간 오른 팔뚝이 움찔하고 뒤틀렸다. 허 반장의 한쪽 입술이 히죽이 올라갔다.
“이제야 입질이 오네.”
“심박수 올라가고 뇌파가 엉기기 시작했어요.”
허 반장은 모니터와 맞은편의 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건의 입이 낚싯줄에 걸려 올라온 물고기처럼 뻐끔거렸다. 그와 동시에 모니터 속에서 화장실 문을 밀고 노숙자 오정환이 들어왔다.
“흠, 조연이 먼저 등장하나?”
곧장 세면대로 간 노숙자는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허리를 숙여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물비누를 듬뿍 받아 떡 진 머리를 힘차게 문질렀다. 하얀 세면대에 땟국물이 흐르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이 경장의 손가락이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이 장면이 재생된다는 건 화장실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는 건데······.”
“한밤중에 일부러 따라온 건가?”
“저기 주인공도 등장하네요.”
건이 화장실 문을 밀고 들어왔다. 허 반장과 이 경장의 상체가 모니터를 향해 숙여졌다. 샴푸를 끝낸 노숙자는 종이 타월을 한 움큼 뽑아 머리칼을 훔치고 안주머니에서 칫솔을 꺼냈다.
“깔끔쟁이 노숙자네.”
“그러게요.”
건은 양치 중인 노숙자를 힐끔 쳐다보고는 벽에 붙은 소변기로 가서 바지 지퍼를 내렸다.
“소리나?”
“예. 쪼르르륵. 진짜 소변을 보고 있어요.”
“밖에서 시비가 붙었던 분위기는 아니지?”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요.”
건이 바지 지퍼를 올리고 세면대 앞으로 가더니 노숙자의 왼편에서 태연하게 손을 씻었다. 양치질을 마친 노숙자는 이를 한껏 드러낸 채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건의 오른손이 노숙자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갔다. 친구끼리 어깨동무를 하려는 듯이 자연스럽게. 뒤통수까지 올라간 손이 뒤에서 노숙자의 머리통을 강하게 떠밀었다. 챙, 소리와 함께 거울에 거미줄 모양의 금이 갔다.
“느닷없이 선빵을 날리네.”
허 반장이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노숙자는 코피를 쏟으며 휘청휘청 뒷걸음질 쳤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사이 건이 바닥에 떨어진 파란색 플라스틱 칫솔을 집어 들더니 양손으로 힘을 주어 부러뜨렸다.
“저거였군요.”
이 경장이 마우스를 잡고 재빨리 건의 손 부분을 확대해 화면 옆쪽에 띄웠다. 해상도는 낮아졌지만 송곳처럼 날카롭게 부러진 칫솔 자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잘도 쪼갰네. 교도소에서나 하는 짓인데.”
“현장에서 부러진 칫솔은 안 나왔죠?”
“자택에도 없었어. 중간에 버린 거면 찾기 힘들겠는데.”
허 반장과 이 경장은 눈을 부릅뜨고 모니터를 주시했다. 맞은편에 앉은 건의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며 의자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목. 왼쪽 목으로 먼저 가야지.”
허 반장이 격투기 중계를 보듯 화면 밖에서 코칭을 했다. 모니터 속의 건이 그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부러진 칫솔을 노숙자의 왼쪽 목 부근에 찔러 넣었다. 목과 어깨가 만나는 지점에서 핏줄기가 치솟았다. 노숙자는 손으로 상처를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힘없이 비틀거렸다. 사방의 하얀 타일에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칫솔을 움켜쥐고 다가가는 건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다음은 보디 샷. 복부에 어퍼컷 두 방 먹이고.”
건은 노숙자의 복부에 연속으로 두 차례 타격을 가했다.
“마지막으로 심장을 노렸다가 4번 갈비뼈에 걸려서 삑사리.”
건이 칫솔을 움켜쥔 주먹을 치켜들고 노숙자의 왼쪽 가슴을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칫솔은 가슴에 박히지 않았고 노숙자는 뒤로 떠밀리며 자빠졌다. 건은 다시 달려드는 동작을 취하다가 발을 멈추고 화장실 바닥에 쓰러진 노숙자를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노숙자의 다리가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켰다.
모니터 우측의 인체도에 타격 부위가 빨간 점으로 표시되었다. 이 경장이 전신 부검 사진을 불러와 인체도와 겹쳐 놓았다.
“네 군데 자상. 부검 보고서의 위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커트, 오케이! 자식, 얌전빼더니 멍석 깔아 주니까 아주 화끈하게 재연하네. 영상 저장하고 마무리하자.”
허 반장은 이 경장의 어깨를 두드리고 몸을 뒤로 기댔다.
“전과도 없는 자가 왜 갑자기 저런 짓을 저질렀을까요? 눈이 완전히 돌아갔던데.”
“또라이들의 깊은 속을 어찌 알겠어. 종신형 면하려면 뭐라도 털어놓겠지. 담배 한 대 피우고 올 테니까, 정리하고 쟤 깨워 놔.”
허 반장은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어, 잠깐만요.”
영상을 최종 검토하던 이 경장이 모니터에 얼굴을 붙이며 쇳소리를 냈다.
“왜 그래?”
“이것 좀 보세요.”
허 반장은 엉거주춤 선 채로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저기 좌변기 두 번째 칸, 문틈에 조그맣게 튀어나온 거요.”
좌변기 칸의 문틈에 하얀 사각형 모서리가 비쭉 튀어나와 있었다. 이 경장이 마우스를 드래그해 그 부분을 확대했다. 희미하게 보이는 접힌 자국이 눈에 익은 모양이었다.
“저거, 봉투 아닌가요?”
“맞네. 편지봉투. 화장실 문틈에 왜 편지봉투가 끼어 있는 거야?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처음엔 없었던 것 같은데······.”
“현장 사진 띄워 봐.”
실제 사건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들이 모니터에 차례로 지나갔다. 좌변기 칸의 문틈 어디에도 봉투 같은 건 끼어 있지 않았다. 굳이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제일 먼저 출동한 허 반장도 현장을 샅샅이 뒤진 과학수사대 요원들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으니.
“아!”
이 경장이 탄식을 뱉으며 의자 등받이에 털썩 기댔다.
“기억이 오염됐어요.”
“무슨 소리야? 그럼 이거······.”
“못 써요. 현장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으면 증거 채택이 안 돼요.”
“뭐?”
허 반장은 애먼 이 경장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말이 돼? 방금 봤잖아, 외부에 공개도 안 된 자상 부위 네 군데를 정확히 가격하는 거. ‘나 살인범이요’ 하고 자백을 했는데, 저 종이 쪼가리 하나 때문에 나가리라고?”
이 경장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안 그래도 TME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많아요. 기억과 무의식적 공상이 혼합될 여지가 있다는 거죠. 법원뿐 아니라 검찰에서도 증거 채택 가이드라인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추세예요.”
허 반장은 탁자를 내리치려던 주먹을 끄응, 하며 천천히 내려놓았다.
“지금 정황 증거 몇 개로 잡아들인 거지 물증은 하나도 없어. 이거 채택 안 되면 저 사이코 새끼 바로 풀려나는 거야. 방법이 없어?”
“용의자 내면에서 강력한 침투가 발생한 거라 기술적으로는 손쓸 수 있는 게 없어요.”
“다시 해봐도 똑같나?”
“현장 불일치 사유로 재시도는 불가합니다. 한번 오염된 기억은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슬쩍 지우면 안 돼?”
“반장님, 그건 증거 조작······.”
“알아, 알아! 답답해서 해본 말이야.”
허 반장은 벽 앞으로 가더니 팔짱을 낀 채 이마를 방음벽에 퉁퉁 찧기 시작했다. 메트로놈처럼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소리가 건의 숨소리와 겹쳐졌다. 이 경장은 손목시계를 확인한 후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얼른 깨워서 다시 취조하는 수밖에 없어요. 옛날식으로.”
“기억 추출 실패했다는 거 뻔히 아는데, 너 같으면 불겠냐. 체포 시한 얼마나 남았어?”
“두 시간도 채 안 남았어요.”
허 반장은 몸을 돌려 곤히 잠들어 있는 건을 노려보았다. 실룩이는 입술이 승리의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큼직한 콧구멍으로 콧김을 내뿜던 허 반장이 “그래!” 하고 소리쳤다.
“모니터 안의 저 자식은 기억 오염이고 뭐고 모르잖아.”
“그렇죠. 저 공간 자체가 기억이니까.”
“취조라면 어디서 해도 상관없지.”
“예?”
“공범들 진술 어긋날 때 한꺼번에 연결해서 기억 추출하는 방법도 있다고 했지?”
“다중 접속도 가능하죠. 안정성이 떨어져서 권장하지는 않지만.”
“내가 들어간다.”
“예? 그건······.”
“돼, 안 돼?”
“연결이야 가능하지만, 그랬다가는 반장님 기억까지 합쳐져서 더욱 심하게 오염될 수 있어요. 감정 과잉 상태에서 이질적인 기억이 섞이면 예상치 못한 거부 반응이 일어날 위험도 있고.”
“어차피 저거 못 쓴다며. 배경만 재활용하자고. 살인의 기억이 시퍼렇게 재생된 현장이니, 살살 구슬리다 보면 뭐라도 흘리지 않겠어?”
“저기는 온갖 의식이 흘러 다니는 내면 공간이라 논리적인 대화가 어려울 텐데······.”
“그만큼 허점이 더 많다는 거 아냐. 빨리 업로드나 해.”
허 반장은 자리에 앉아 예비 헤드네트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진정제 스프레이를 흔들었다. 이 경장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이어폰 하나를 건넸다.
“이거 먼저 귀에 꽂으세요.”
“뭐야, 이건?”
“베타테스트 때 쓰던 장비예요. 이걸로 저 안에서도 외부와 통신할 수 있어요.”
“이런 게 있으면 저 자식도 하나 채워 놓지 그랬어. 현장 인터뷰가 가능했겠네.”
“안 되죠, 그건. 용의자 기억 추출 시에는 사소한 암시라도 작용하면 또 나가린데.”
“젠장, 까다롭네.”
허 반장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진정제 스프레이를 혀 밑에 뿌렸다. 엉덩이를 움찍거려 수면 자세를 잡는 사이 눈꺼풀이 스르르 아래로 처졌다. 기다려라. 내가 가서 탈탈 털어 주마. 레트로 감성으로.
§ § §
몸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블랙홀을 통과하는 기분······ 저 멀리 소실점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 점점 커지는 밝은 빛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눈을 뜨는 순간 허 반장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벽을 짚은 손바닥에 차갑고 매끈한 타일의 감촉이 느껴졌다.
“야, 이거 진짜 같다.”
허 반장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현실과 차이가 없을 겁니다. 아무리 디테일한 감각이라도 결국 뇌가 인지하는 신경 신호일 뿐이니까요.”
귓속의 이어폰에서 이 경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정말 용의자의 내면에서 재조립된 가상 공간이란 말인가. 타일의 감촉뿐 아니라 먼지 낀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 표백제와 방향제가 배설물 악취를 감싼 공중화장실 특유의 냄새, 피부에 닿는 눅눅하고 사늘한 공기까지 현장에 출동했을 때 끼쳐 오던 그대로였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바닥에 피를 쏟은 채 널브러진 피살자 옆에 범인이 떡하니 서 있다는 점이었다.
“김건이, 한칼 제대로 먹였네.”
건이 어깨 너머로 허 반장을 돌아보았다. 생기라곤 없는 공허한 눈빛. 당황스러울 법한 상황이건만 건은 차분한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신경 신호 자극으로 외부 감각은 현실과 똑같이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내면의 감각은 확실히 위화감이 느껴졌다.
“굿! 연기 좋았어. 박진감 넘치던데.”
허 반장은 너스레를 떨며 건 옆으로 다가가 함께 피살자를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게슴츠레하게 떠진 눈과 헤벌어진 입, 누렇게 변색된 삐뚤빼뚤한 치아가 현장에서 보았던 몰골 그대로였다.
이 중년 노숙자에게도 빛나는 청춘과 가슴 떨리는 첫사랑이 있었을 텐데, 어떤 갈림길과 악천후가 이런 시궁창으로 그를 인도했을까······ 현장에서 변사체를 확인하며 스쳐갔던 상념까지 허 반장의 뇌리에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벌써 갱년기인가, 쓸데없이 감상적이 되네. 범인이나 잡으면 그만이지.
“왜 이런 짓을 했어? 불쌍한 노숙자한테.”
허 반장은 과장되게 혀를 차며 건을 곁눈질했다.
“한잔 걸치고 지나가는데 널 째려보기라도 했어?”
취조실에서와 마찬가지로 건은 대꾸가 없었다. 물증이 없는 경우, 용의자라는 둑을 무너뜨리는 작은 구멍은 대개 범행 동기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을 이해받고 싶어 한다. 아무리 미친 짓을 했을지라도.
“재취업은 안 되고 모아 놓은 푼돈은 주식으로 날리고, 마흔이 훌쩍 넘었는데 결혼도 못 해, 짜증나고 세상이 원망스럽고 그랬어? 부모 잘 만나 탱자탱자 놀고먹는 놈도 많은데, 내 인생은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저 버러지 같은 노숙자 새끼까지 나를 무시하네. 에이 씨!”
허 반장은 상대의 반발심을 자극하려 너절한 처지를 조롱하듯 주워섬겼지만 건은 말려들지 않았다.
“칫솔은 상상도 못했는데, 그건 어디다 버렸어?”
“······.”
“네가 죽였다는 건 이미 똑똑히 확인했고, 속 시원히 말이나 해봐. 왜 그랬어? 늘그막에라도 세상 구경 다시 하려면 정상 참작할 건덕지가 있어야지.”
“······.”
허 반장은 목 운동을 하듯 고개를 크게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낫지 않겠어? 밖에 나가면 또 이것저것 심란할 텐데, 네 자신한테 고해성사 한다 생각하고······.”
“일식.”
멍하니 노숙자를 내려다보던 건이 불쑥 중얼거렸다.
“응?”
“일식 때문이에요. 개기일식.”
허 반장은 눈을 끔뻑이며 건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드디어 입을 열기는 했는데, 이건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태양이 달에 가려져서 사람을 죽였다는 거야? 무슨 부조리 문학, 그런 건가?”
“달이 제 지름의 400배가 넘는 태양을 완전히 가려 지구에 까만 점을 하나 찍어요. 그 점 속에서 의식과 무의식이, 이성과 광기가 몸을 섞는 소리를 들어요.”
“야, 김건이 유식하네. 그런데 사건 날 일식이 있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허 반장의 대꾸를 무시한 채 건은 자신의 독백만 이어 갔다.
“태양은 밝고 뜨겁고 거대한 가스 덩어리. 가까이 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태양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을 거예요. 세팍타크로 공처럼.”
“세팍타크로라면, 족구 비슷한 그거 말이지?”
“유일하게 속이 들여다보이는 공. 유일하게 밖이 내다보이는 공. 원래는 등나무 줄기로 만들지만 지금은 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요. 세상을 한 바퀴 빙글 돌아 롤링 스파이크를 때릴 때면, 하, 기분이 끝내줘요. 태양을 차는 것처럼.”
어디까지 진지하게 대꾸하는 게 좋은지 허 반장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들 고모할머니를 싫어했지만 나는 좋아했죠. 탑처럼 쌓인 음식상 앞에서 칼과 부채를 들고 춤을 추거든요. 빙글빙글, 나비처럼.”
“굿 말인가? 고모할머니가 무당이었구나.”
“어느 날 고모할머니가 엄마 몰래 내 귀에 대고 속삭였어요. 넌 성직자가 되거나 살인자가 될 팔자라고.”
“용하신 분이었네. 어떻게든 성직자가 됐어야지.”
“내가 되고 싶었던 건 성직자도 살인자도 아니라······.”
“아니라?”
“세계적인 세팍타크로 선수였어요.”
“그럼 열심히 하지 그랬어. 국가대표가 돼서 가슴에 태극 마크 달면 얼마나 좋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따면 병역 면제도 받고.”
“무릎과 무릎이 떨어지면 십자가가 부러져요.”
“하아, 어렵다.”
잠시 침묵에 잠겨 있던 건이 덤덤히 입을 열었다.
“일식 때문이에요. 개기일식. 대낮에 튀어나온 달이 태양을 가리면 짐승들은 겁에 질려 울부짖어요.”
허 반장은 손끝으로 턱에 돋은 까칠한 수염을 어루만졌다. 과거 취조실에서도 이렇게 횡설수설하는 용의자들이 있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놈, 온전치 않게 보이려는 놈,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놈, 자포자기해 아무 말이나 뇌까리는 놈. 그런 횡설수설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한 번씩 회귀하는 포인트가 있었다. 삶에 지칠 때면 떠오르는 고향 집처럼.
허 반장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조용히 이 경장을 불렀다.
“예.”
“우리나라에서 가장 최근의 개기일식이 언제였는지 찾아봐.”
“마지막 개기일식은······ 2007년 11월, 25년 전입니다.”
“그때 김건이 어디서 뭐 하고 있었지?”
“2007년 11월이면······ 군 복무 중이었네요. 강원도 철원에서. 하, 입대 전에 세팍타크로 선수였어요.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뽑힌 경력이 있는데요.”
“혹시 군대에서 무슨 일 없었어?”
“어, 아······.”
“왜, 뭔데?”
“이등병 때 사고가 있었어요. 차렷 자세에서 무릎이 안 붙는다고 고참한테 야삽으로 맞아 전방 십자인대가 파열됐어요. 개기일식이 있던 날에. 그 고참병이······.”
“오정환이었군.”
“예. 오정환은 영창에 갔고, 김건은 수술을 받은 후 의가사 제대를 했습니다.”
“세팍타크로 선수 생활도 끝났을 테고.”
“제대 이후로는 선수 경력이 없어요.”
“‘묻지 마 살인’이 아니라 복수극이었군. 노숙자 꼴로 사는 거 보고 위안이나 삼지, 쯧. 그런 놈 때문에 인생을 두 번 망치나.”
“살해 동기를 알아냈으니까, 이걸로 몰아붙이면 자백을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일단 구속영장 청구하고 장기전으로 가야지. 저 흉기만 찾으면 가장 확실한데······.”
허 반장은 건의 손에 들린 부러진 칫솔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디에 버렸는지 여기서 나가는 기억을 계속 따라가 볼 수는 없나?”
“범행 현장을 이탈한 기억 추출은 금지돼 있어요. 오염 때문에 제대로 추출하기도 힘들고. 동선을 파악해 모든 배경을 정확히 세팅하지 않는 이상 빈틈으로 금세 다른 기억이 침투하거든요.”
“아직까지 형사는 발로 뛰어야 하는 직업이군.”
“손도 움직여야죠. 들어가신 김에 저 봉투 확인하고 나오세요. 랜덤 박스에서 결정적 아이템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네, 네, 그렇게 합지요.”
허 반장은 좌변기 칸 문틈에 튀어나와 있는 편지봉투를 잡아 뽑았다. 요즘은 찾아보기도 힘든 밋밋한 규격 봉투였다. 이것만 아니었으면 간단히 끝났을 사건인데. 도대체 뭐야? 허 반장은 투덜거리며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편지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역시 까만 줄이 죽죽 그어진 밋밋한 편지지였다.
희정아.
겨울이 가니 어김없이 봄이 오는구나. 따뜻한 봄바람이 철조망을 뚫고 들어와 삭막한 부대에 봄소식을 전해 준다. 연병장에 핀 노오란 개나리가 어찌나 탐스럽던지. 하지만 아직도 꽁꽁 얼어붙어 있는 내 마음까지 녹여 주지는 못하는 것 같아······
종일 진지 공사를 하며 네 생각을 했어. 네가 보낸 편지를 화장실에서 읽고 또 읽으면서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만 오빠 동생으로 남고 싶다는 너의 비수 같은 한마디가 읽을 때마다 내 가슴을 후벼파는구나.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 도대체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잠시 떨어져 지내는 시간조차 견디지 못할 만큼 우리의 관계가 가벼운 것이었나? 너와 갔던 데이트 장소, 함께 먹었던 음식,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 내 마음속 호수에 맷돌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데.
희정아. 이 거지 같은 군 생활을 버틸 수 있는 건 오로지 네가 있기 때문이야. 하루하루 너만을 생각하는 내 뜨거운 진심을 부디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곧 첫 휴가를 나가니까, 우리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차분히······
허 반장은 눈알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온몸의 열기가 얼굴로 쏠려 금방이라도 머리통이 폭발할 것 같았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손 글씨는 눈에 익은 필체였다. 스물한 살의 이등병 허태식이 고무신 거꾸로 신은 연인에게 보내는 절절하고도 찌질한 연서. 내용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복원된 것 같았다. 반듯함 속에 어지러운 심경이 배어나도록 볼펜을 움켜쥐고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써내려가던,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또렷이 떠올랐다.
말도 안 돼. 피로 얼룩진 노숙자 살인 사건 현장에 뜬금없이 이 편지가 왜······ 이 경장의 경고가 이런 거였구나. 김건의 군대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 자신의 군 시절 기억이 스며들어 봉투의 내용을 ‘덮어쓰기’ 한 게 틀림없었다. 맙소사, 이 편지가 꼭꼭 접힌 채 기억의 캐비닛 어딘가에 여태 보관돼 있었다니.
“반장님, 뭡니까, 그 랜덤 박스는?”
이 경장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확성기를 댄 것처럼 요란하게 울렸다. 허 반장은 화들짝 놀라 편지를 박박 찢었다.
“어, 그거 왜 찢으십니까?”
“아냐, 아무것도. 내 옛날 기억이 오염돼 들어갔어.”
“그래요? 뭔데 저러실까.”
이 경장이 짓궂게 코웃음을 흘렸다. 다행히 자신이 읽은 내용이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편지가 새어 나갔다가는 정년퇴직할 때까지 위아래로 놀림을 받을 터였다. 오, 희정 씨∼ 오, 맷돌∼
“시스템을 뚫고 뭐가 침투했는지 궁금했는데, 희귀템 하나가 날아갔네요.”
“희귀템은 무슨, 보나마나 허접한 추억 나부랭이였을 거야.”
허 반장은 갈가리 찢은 편지를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팔랑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종이쪽 하나까지 주워 서둘러 변기의 물살에 밀어 넣었다. 민망함은 둘째치고, 풋풋하고 순수했던 시절의 추억을 살인자의 기억 속에 단 한 글자도 남겨 놓고 싶지 않았다.
소용돌이에 휩쓸려 변기 구멍 속으로 사라지는 손 편지를 보며 허 반장은 아련한 감상에 잠겨들었다. 손······ 그래, 손희정이었지. 첫사랑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내셔널 지오그래픽 전속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었을까? 아직도 웃을 때면 콧잔등에 토끼 주름이 잡히려나? 나를 걷어찬 건 현명한 선택이었네. 형사 마누라는 뭐, 고생이지. 허 반장은 고개를 흔들며 피식 웃었다.
“이 경장, 나 이제 밖으로······.”
몸을 돌리던 허 반장이 숨을 헉 들이켰다. 검은 그림자가 열린 문틈을 막고 서 있었다. 당연히 김건이라고 생각했는데, 문을 벌컥 열어젖힌 건 피 칠갑을 한 노숙자였다.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시체가 되살아난 것이다. 뿌연 눈깔에 검푸른 혈관이 얼굴에 나무뿌리처럼 퍼졌고, 입가로 피와 침을 질질 흘리면서.
“이 경장, 이거 뭐야? 왜 오정환이가 좀비가 돼서······.”
말을 마치기도 전에 노숙자 좀비가 괴성을 지르며 덤벼들었다. 허 반장은 오른손을 뻗어 혈관이 도드라진 목을 막고 버텼다. 손아귀에 닿는 차갑고 물컹한 살덩이가 어찌나 리얼한지 전에도 좀비와 살을 맞대 본 느낌이었다. 옆으로 뿌리치기에는 공간이 너무 좁았다. 왼손으로 안면을 몇 차례 가격했으나 좀비는 꿈쩍도 않고 발악했다. 침과 핏방울이 허 반장의 얼굴에 튀었다.
“야, 이것 좀 어떻게 해봐!”
버둥거리던 시커먼 손톱이 허 반장의 눈을 스쳤다. 팔을 움츠리는 순간 손아귀에서 차가운 살덩이가 빠져나갔다. 빨간 핏물 사이로 뾰족뾰족 튀어나온 누런 이빨이 눈앞으로 달려들었다.
“악!”
목과 어깨가 만나는 지점에 유리 파편이 박히는 통증. 피가 빠져나가며 드라이아이스를 갖다 댄 것처럼 상처가 서늘해졌다. 뿌연 눈깔이 턱밑에서 킬킬거렸다.
침착하자. 이 경장 경고대로 이질적인 기억이 섞이며 거부 반응이 일어난 거야. 여긴 가상 공간일 뿐이라고. 근데 씨, 더럽게 아프네. 좀비물 마니아란 말은 왜 꺼내 가지고······ 허 반장은 정신이 가물가물 흐려졌다. 상관없어. 여기서 나가면······ 그만이니까.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 § §
몸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터널을 통과하는 기분······ 저 멀리 소실점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 점점 커지는 밝은 빛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태식은 눈을 떴다. 탁자 맞은편에 주먹으로 턱을 괴고 앉은 남자가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흑백이 고루 섞인 수염 자국이 입 주변으로 점점이 퍼져 있는,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건? 김건 반장이라고 소개했던 것 같은데. 남자가 씨익 미소를 머금었다.
“허태식이, 경찰 놀이 재미있었어?”
태식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옆쪽 벽에 붙은 반사거울에 헤드네트를 뒤집어쓴 어리벙벙한 얼굴이 비쳐 보였다. 빳빳한 정복 차림의 경장이 자신의 머리에 이걸 씌우고 혀 밑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도 일말의 죄의식은 있었나 보네. 마지막에 속죄의 좀비 쇼도 벌이고. 박진감 넘치던데.”
태식은 빙글거리는 김 반장을 멍하니 건너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 조금 전까지 내가 형사가 되어 당신을 취조하는 꿈을 꾸었는데······.”
“꿈은 아니고, 뭐랄까, 기억과 무의식적 공상이 뒤섞인 사이코드라마 같은 거지. 그게 결국 꿈인가?”
“비슷하죠.”
옆에 앉은 이 경장이 단말기 키보드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나한테 무슨 장난을 친 거냐니까?”
태식이 헤드네트를 벗어던지며 볼멘 음성으로 물었다.
“자신을 형사라고 착각한 범인이 제 머릿속에 있는 범죄의 진상을 낱낱이 파헤친다. 방어기제를 우회해 사건을 해결하는 완벽한 스토리잖아.”
“선량한 시민한테 강제로 약을 먹여 환각에 빠지게 하다니, 경찰이 이래도 되는 거야?”
“뭐 그런 우악스러운 용어를 쓰고 그래. 최첨단 VR 롤플레잉 심문 시스템을 두고. 아까 TMC 영장이라고 보여줬지? 토탈(Total), 몽땅, 메모리(Memory), 기억, 컴포지션(Composition), 작곡, 작문, 구성, 배합 기타 등등.”
김 반장은 한껏 혀를 굴린 후 이 경장을 바라보았다.
“발음 괜찮아?”
“퍼펙트합니다.”
“이젠 형사도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니까.”
김 반장은 손끝으로 턱에 돋은 까칠한 수염을 어루만졌다.
“아무튼 네 기억을 몽땅 긁어모아서 마음대로 배합하고 작품을 하나 만들어도 좋다는 그런 영장이지. 어때, 결과물이 마음에 들어?”
태식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콧방귀를 끼었다.
“흥, 웃기는 소리. 이따위 VR 게임으로 내 진술이 달라지진 않아.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꿋꿋하다 허태식. 그래, 용의자라면 이렇게 뻗대는 기개가 있어야 취조할 맛이 나지. 요즘 양아치들은 헤드네트 씌울 새도 없이 다 불어버린다니까. 잘근잘근 씹는 재미가 없어.”
김 반장은 깍짓손을 탁자에 턱 올리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런데 어쩌나. 이미 네 입으로 범행 동기와 수법을 싹 자백하고 현장검증까지 마쳤는데.”
“난 그런 적 없는데.”
“너 자는 동안 조사 다 끝났어. 피살자 오정환과 너는 같은 부대에서 복무했잖아.”
태식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 와중에 이미지 세탁까지 했네. 실제로는 네가 고참이었더라고. 야삽으로 이등병의 십자인대를 아작내 버린.”
“그건······ 실수였어.”
“알지. 같이 짬밥 먹는 처지에 설마 고의로 그랬겠어? 하지만 애당초 사람한테 야삽을 휘두르면 되나. 무릎 안 붙는 거야 신체 구조상 어쩔 수 없는 건데. 그 실수 하나로 세계적인 세팍타크로 선수가 되겠다는 스무 살 청년의 꿈이 박살나 버렸잖아. 개기일식이 있던 날에.”
자분자분한 말투와 달리 김 반장의 눈은 날카롭게 태식을 스캔했다.
“미친개한테 물린 셈치고 새 출발 했으면 좋았으련만, 쯧. 이리 꼬이고 저리 치이다가 중년 노숙자로 전락한 오정환은, 어느 날 공원 화장실에서 25년 전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군대 고참을 알아보았지.”
태식은 표 나지 않게 마른침을 삼켰다.
“어떻게 된 거야? 오정환이가 대뜸 따지고 들었나? 당신 때문에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됐다고. 먼저 칫솔 부러뜨려서 위협하는 바람에 정당방위로 그렇게 된 거야? 참, 상처를 보면 정당방위 받기는 어려워. 외부에 공개도 안 된 부검 보고서대로 정확히 네 방을 먹이던데.”
태식은 고개를 쳐들고 뭐라 항변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급할 것 없다는 듯 김 반장도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이 경장이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만 유난히 도드라졌다. 한참 눈알을 되룩거리던 태식이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오정환과 내가 함께 복무했고 구타 사고가 있었던 건 사실이야. 엊그제 한잔 걸치고 그 공원 화장실에 들렀던 것도 사실이고. 기억은 안 나지만, 웬 노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무심코 오정환을 떠올렸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게 뭐? 난 곧장 집에 가서 잤어. 꿈인지 사이코드라마인지, 그 우연한 장면 하나에 온갖 상상을 끼얹은 거잖아. 우연히 상처가 일치하건 말건, 이건 함정수사야. 난 당신들이 짜놓은 시나리오에 놀아난 것뿐이라고. 함정수사에 의해 수집된 증거는 효력이 없다는 거 몰라?”
“와, 별을 세 개나 달더니 얘 아주 변호사 다 됐네.”
김 반장은 감탄하는 표정으로 이 경장을 돌아보았다. 이 경장은 장비를 정리하며 고개만 까딱했다.
“상상만 끼얹었겠어? 이건 대놓고 연출과 각색이 들어간 픽션이라 법정에서 전혀 증거 가치가 없어. 하지만······.”
“하지만, 뭐?”
태식이 불안한 표정으로 김 반장의 입을 주시했다. 낚싯대의 손맛을 즐기듯 김 반장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결정적인 증거를 찾을 수 있는 힌트를 주거든. 예를 들면,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이등병의 연애편지 같은 거.”
“그, 그 편지가 뭐······.”
“말까지 더듬는 걸 보니, 고무신 거꾸로 신은 첫사랑한테 보냈던 편지가 맞나 보네. 아련하다. 누구한테나 그런 시절이 있다니까.”
“젠장, 그게 사건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
태식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지만 김 반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숨겨진 진실의 사원으로 안내하는 메타포라고 할까. 그만 오빠 동생으로 남고 싶다는 너의 비, 수, 같은 한마디가 읽을 때마다 내 가슴을 후벼파는구나.”
김 반장은 편지 내용을 인용하며 ‘비수’를 힘주어 한 음절씩 발음했다.
“남에게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흑역사이자 풋풋하고 순수했던 시절의 추억. 너는 그걸 화장실 두 번째 칸에 처박았지.”
태식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과학수사대가 벌써 출동했어. 두 번째 칸의 변기를 뜯으면 S자 트랩에 부러진 칫솔이 걸려 있지 않을까? 요즘은 기술이 좋아서 물속에 잠겨 있던 잠재 지문도 나노입자 시약으로 얼마든지 채취할 수 있거든.”
태식은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구었다. 철컥. 이 경장이 알루미늄 케이스를 닫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응, 수고.”
취조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사이 후터분한 공기가 앞다투어 빠져나갔다. 김 반장은 의자 팔걸이에 비스듬히 기대며 회색 방음벽을 휘둘러보았다. 고개 숙인 범인의 눅진한 침묵을 음미하면서.
“예전 같진 않지만, 그래도 아직은 낭만이 남아 있잖아. 창문도 없는 이 작은 방에 말이야. 안 그래?”
추천 콘텐츠
그해 겨울은 내게 백가흠 방안에 어둠이 번지며 축축한 기운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찬 공기가 몸 안에 가득 차며 퍼진다. 가스가 끊긴 지 두 달 전이다. 조금만 견디면 겨울은 가고 봄이 올 것이다. 나는 차가운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는 중이다. 내게는 겨울이 ‘가혹하다’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다음 겨울을 내 생에서 다시 맞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나는 혹독한 시절을 지나고 있다. 매일 나는 마음의 절벽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마흔다섯 번째 겨울을 나는 강원도의 한 작은 도시에서 버티고 있다. 하루하루가 힘겹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원룸 안에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생활한다. 웬만한 추위를 견디는 데 불편이 없었지만, 며칠 전부터 엄청난 한파가 시작된 뒤로는 소름 끼치는 한기가 등에 붙어 나를 괴롭힌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갖은 애를 써도 별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동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도서관은 따뜻하고 읽는다는 일거리가 있어서 좋다. 나는 휴대용 버너에 물을 올린다. 텐트 안에 습기가 차며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텐트 안에 누워 밤이 시작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본다. 지루한 삶의 권태와 살이 갈라지는 듯한 추위와 배고픔의 고통 사이 내 밤이 놓여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권태와 생의 존속을 위한 고통 사이 내 하루가 있다.1) 핸드폰은 정지된 지 몇 주가 지났다. 내게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점점 사라지는 중이다. 나를 걱정하는 어머니, 친구에게 안부를 전해야 하는 일 빼면 전화기는 내게 불필요한 물건이었다. 평생 내가 맺은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은 딱 그 정도였다. 나만 외롭고 쓸쓸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한동안은 그간 살아온 내 삶의 방향에 대해 곰곰 해질 수밖에 없었다. 금세 주전자가 울기 시작한다. 고요함이 물러간다. 가끔 이는 소란스러움이 내게는 퍽 소중하다. 나는 따뜻한 물을 한 잔 천천히 마신다. 추위가 잠시 녹는다. 뜨거운 물을 물통에 담아 꼭 껴안는다. 다른 하나는 침낭 안에 넣어 둔다. 얼어붙었던 하루의 고뇌가 녹는 것 같다. 온종일 먹은 것이 없으니 배고픈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이런 허기짐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처한 어려움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줄 알게 되었다. 그제는 한 끼라도 먹었으니, 어제, 오늘은 굶을 수도 있는 게 우리의 인생이라고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배고픔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은 되지 못했다. 오늘도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책을 읽으며 굶었다. 끼니를 때우는 대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지막 남은 돈으로 소주 두 병과 담배를 샀다. 마지막까지 나는 무얼 먹을까 고민했다. 그러나 배고픔을 견디기로 했다. 소주와 담배만큼은 쉬이 참을 수 없었다. 술이 없으면 한잠도 잘 수가 없고 담배가 없으면 숨을 쉴 수가 없다. 담배는 허기를 채워 주는 묘약이다. 소주는 내 안에서 끓고 있는
- 관리자
- 2026-03-01
서브리미널 안종성 여러 대의 카트가 교차 레일 지점을 충돌 없이 지나갔다. 높은 위치를 누비면서도 질서 정연히 움직일 줄 알았다. 출로에 다다를 때쯤 천천히 감속하더니 허공에 뚫린 검은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윤무의 눈동자는 천장 주행 장치의 행렬을 따라가는 중이었다. 그 장면으로부터 슬픈 기분을 느끼고는 습관처럼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떠오르는 생각을 어떻게 붙잡아 두는가? 그러나 기록할 도구를 찾지 못한 윤무는 걷기로 했다. 산책하며 생각을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벽과 바닥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흰 공간이 광활하게 펼쳐졌다. 소리와 냄새, 온도, 어떤 예감마저 느낄 수 없었다. 윤무는 이곳을 알 것만 같았다. 얼마 전 필경사와 무한한 흰 공간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필경사는 권면에 들기 전 미리 가서 둘러볼 것을 권했다. 깨어날 때 부분적인 기억상실이 있을 테지만 영원히 망각한 게 아니라서 살다 보면 어느 순간 권면 전의 삶이 되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필경사는 뇌의 저장 용량을 컴퓨터 저장 단위로 환산하면 2.5페타바이트에 달함에도 인간의 상상력이 쉼 없이 활동하므로 정보를 선택적으로 보관한다고 말했다. 필경사는 인간의 신체가 권면과 죽음을 구분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필경사는 기억 편람의 업로드가 끝나면 직계 가족이라 할지라도 오십 년 뒤에나 조회할 수 있다고 했다. 필경사는···. 구축 아파트에서 볼 법한 편복도를 지날 때 윤무는 재건축 직전의 폐허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호수마다 잡동사니가 나뒹굴거나 무가지가 쑤셔 박혀 있었다. 앞바퀴 없는 자전거도 복도를 비좁게 만들었다. 윤무는 그중 현관문이 열린 곳에 서 있다가 인기척을 듣고는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곳에는 회색 정장 차림의 남성이 있었다. 그 역시 깨어난 게 얼마 되지 않았는지 윤무에게 여러 번이나 같은 내용을 물었고─여기 당신의 집인가요? 다른 누가 또 살고 있습니까? 식사했습니까?─결국 이들은 임장하러 온 일행처럼 나란히 집 안을 둘러보게 되었다. 내부는 따로 특별한 게 없는 가정집이었다. 통유리에 붙은 주먹만 한 크기의 스테인리스 휠을 돌려 보거나 싱크대 위에 널브러진 여러 가재도구를 들춰 보던 윤무는 커피믹스를 발견하고 남성을 향해 들어 보였다. 포장 비닐이 아침의 배경 앞에서 가볍게 바스락거렸다. 두 사람은 함께 커피를 마셨다. 스스로 마토메라 밝힌 남성은 일본 전자상거래 업체를 다니고 있지만, 서울 출장 경험이 잦아서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안다고 말했다. 윤무는 소파에 앉은 마토메의 다부진 체격,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이국적인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 외형만큼이나 독특한 건 마토메의 상태였다. 한눈에 보더라도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내려다보는데 호흡이 불규칙했으며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윤무와 얼굴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업무차 여기에 온 건가요? 윤무는 낯에 익은 그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무대를 오며 가며 보았을 조
- 관리자
- 2026-03-01
우주의 영향 아래 임수지 언젠가 우주에게 내가 어릴 적 살았던 마을에 함께 가 보자고 말한 적 있다. 거기에 가면 세상에서 가장 큰 나방을 보게 될 거야. 팅커벨은 환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화장실에 다녀오면 문 앞에서 두꺼비가 널 지키고 있을 거야. 두꺼비들은 착하다. 두꺼비들은 두껍두껍 울지 않아. 걔들이 울면 동그란 구슬이 와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정말이야. 내가 그렇게 말하면 우주는 그곳은 꿈과 환상의 나라네, 하며 웃기도 했었는데. * 기사는 나를 미림슈퍼 앞에 내려 주었다. 멀어지는 택시의 후미등을 잠시 바라보다 미림슈퍼 옆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목을 두 번 꺾어 집 앞에 서서는 주먹으로 대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바다 냄새가 몸속 깊이 들어왔다. 버스터미널에서는 맡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분명 전화를 했는데도 할머니는 정말 내가 곧장 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문을 열어 준 할머니의 짧은 파마머리가 멋대로 눌려 있었다. 할머니는 내게 짜증을 조금 부리다가 곧 이불을 내어주었다. 날 밝을 때 오지, 뭐 하러 이 늦은 시간에 와.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닌 것 같았다. 보일러를 안 틀었나? 얼굴과 손발을 대충 씻고 작은방에 깔아 둔 이불 속으로 들어갔는데 이불이 너무 차가워서 깜짝 놀랐다. 안방에서 자는 할머니를 깨워 물어볼까 고민하는 동안 내 체온에 맞춰 이불이 천천히 데워졌다. 이불을 코까지 덮은 채로 가만히 천장을 바라봤다. 내가 데운 이불이 다시 나를 데우며 조금씩 따뜻해졌다.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2시가 지나 있었다. 눈을 감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오늘은 우주의 기일. 오늘 나는 우주의 흔적이 없는 곳에서 잠들 것이다. * 우주가 내 방에 머물 때 입던 품이 큰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는 잘 개켜 종이 가방에 넣고 옷장의 가장 깊숙한 곳에 두었다. 나는 그걸 다시 꺼내 본 적 없다. 우주가 쓰던 면도기나 낡은 양말 같은 것들도 진작 정리했다. 이제 내 방에 우주의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사용 기한이 지난 음식점 할인 쿠폰 같은, 우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들이 쓸고 닦아도 계속 생겨나는 먼지처럼 어딘가에서 자꾸만 하나씩 발견되었다. 청소를 하다 그런 것들을 찾아낸 날이면 나는 자꾸만 골똘해졌다. 2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있다니. 그런데 2년이 그렇게 긴 시간인가? 2년이라는 시간은 하루이틀 사이에 지나가 버린 것 같기도, 사실은 하루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2년이 흘렀다고 누군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며칠 전에는 매트리스와 벽 사이에서 영화 티켓을 발견했다. 어쩌다 여기에 티켓이. 영화 제목을 보니 그때가 떠올랐다. 그날 관객은 다섯 명뿐이었다. 재미가 없는 영화인가. 영화 선택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으므로 나는 조금 민망해져서 옆에 앉은 우주에게 작게 말했다. 전세 낸 것 같고 좋은데
- 관리자
- 2026-03-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