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거룩한 밤
- 작성일 2009-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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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선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젯밤에 무명실로 칭칭 감아 놓은 손끝이 여태 욱신거린다. 봉숭아 꽃잎에 백반가루를 너무 많이 넣어 찧었나. 작년보다 진하게 꽃물을 들이려고 조금 욕심을 부렸다. 다섯 손가락 끝마디가 검붉게 물들어서 찬바람이 불 때까지는 아버지 눈을 조심해야겠지만 오래오래 봉숭아 꽃물을 보고 싶었다. 손톱이 더디 자라면 좋겠는데, 애가 탈수록 더 잘 자란다. 그렇듯 간절히 바라는 일은 등을 보이기 일쑤이다.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을 예감하기 때문에 간절해지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내 경우는 그랬다. 무엇을 바라게 되면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반드시 되어야 한다고 마음을 졸이고 애를 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욕심이 질기다며 내게 눈살을 찌푸리신다. 계집아이가……. 아버지가 나를 곱게 보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게 너무 억울하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삼신할머니가 원망스럽다. 아홉 살 어린 남동생이 나보다 그만큼 먼저 태어났으면 아버지에게 미움을 덜 샀을까. 그런데 이름이 뭐더라. 이런 낭패한 일이 있나. 남동생 이름을 잊어버리다니. 아, 영기였지. 백반가루가 지나쳐서 봉숭아 꽃물이 손가락을 타고 팔을 따라 어깨로 올라가 머릿속까지 벌겋게 물들여 버렸나. 내 영민함은 아버지도 인정하시는데 하필 동생 이름을 까먹다니. 그러고 보니 영기 손가락을 봐야겠다. 영기가 하도 보채서 어머니가 왼쪽 새끼손가락만 허락하셨다. 봉숭아 꽃잎을 쌀알만큼만 올리라고 당부하셨는데, 콩알만큼 올렸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오래 영기 핑계를 대며 아버지의 타박을 면할 수 있겠지 싶었다. 영기야, 일어나 봐. 어서 일어나. 손톱 좀 보여 다오. 영기야, 영기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영기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깨실까 봐 조심스럽다. 몸을 흔들어 보지만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사내아이라서 그런지 영기는 종일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그러다가 지치면 아무 데나 머리를 대고 잠이 든다. 달빛만 조금 밝아도, 빗소리가 조금 청승맞아도, 바람이 조금 스산하게 불어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는 그런 영기가 부럽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시지만 아버지는 외아들이 행여 우둔하지 않은가 걱정하시는 게 분명하다. 그래서 내 영민함이 더 못마땅하신 것이다. 여자가 글을 배우면 도리어 배우지 않은 것만도 못할 수 있다고 하시지만 글방에 나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는 따로 있다. 사내아이들을, 그중에서도 특히 영기를, 기죽게 만들 것을 걱정하시는 것이다. 그래도 기어코 방문 밖에서 엿들어 방 안의 사내아이들보다 먼저 천자문을 떼고 논어를 읽었지만 칭찬은커녕 눈물이 쏟아지도록 꾸중을 들었다. 그럴수록 더 오기를 품었다. 붓 대신 나뭇가지를 들고 종이 대신 마당에 글씨를 썼다. 어느 날엔 마당에 빈 곳이 없었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방 안으로 끌어들여 수틀을 잡게 하려고 했지만 오래 붙들지 못했다. 수틀만 잡으면 머리가 어지럽고 맥이 풀렸다. 그래서 누우면 어느 땐 사나흘을 일어나지 못했다. 처음엔 방문을 열어젖히며 혀를 끌끌 차던 아버지도 이제는 손수 약을 달여 주시기도 한다. 과년해지는데 큰일이라며 어른들의 걱정은 깊어 가지만 나는 낫고 싶지가 않다. 온몸의 맥을 놓고 누워 있을 때가 나는 가장 흡족하다.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안타까운 눈길도, 아버지가 감추고 돌아서다가 흘리는 혀 차는 소리도, 나를 처량하게 만들지 않는다. 도리어 나는 그렇게 온전히 나를 느끼며 평생을 살고 싶다. 그런데 영기는 왜 이렇게 못 일어날까. 영기야, 영기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휴, 왜 또 부르신대.
이제야 알아들었나 보다. 얼른 영기의 왼쪽 손을 잡아당긴다. 단번에는 어림도 없다. 나이는 한참 어려도 힘은 나보다 훨씬 세다. 백일이 지난 영기의 등에 찹쌀 반말 자루를 올려놓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한번 무엇을 손에 쥐면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었다. 모두 나중에 영기는 천석꾼 만석꾼이 될 거라고 말했다. 외아들이 학자가 되기를 원하셨던 아버지는 그 말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잡아당긴다. 이번에는 아주 힘껏 당겨 본다.
아야, 아파라. 이 손 좀 놓으셔요. 아야, 아야. 하지 말라시면 더 하신다니까. 웬 힘이 이렇게 센지 몰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또 시작이셔? 눈 좀 붙일 만하면 깨우시네. 도대체 몇 시야? 이제 겨우 한 시인데 어쩌면 좋아.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기저귀 봐 드릴 테니 이 손 좀 놓으셔 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내가 못살아, 또 큰 것 싸셨네. 못살아, 못살아.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제 하루 종일 갈았는데 또 시작이시네. 아이고, 이 냄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쩌자고 이러신대? 돌아가시려고 작정하신 거야? 관 무거워서 산에 못 올라갈까 봐 다 비우고 가시려고?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이고, 어머니, 제발 정신 줄 놓지 말고 생각 좀 하셔 봐. 내가 왜 어머니야? 그 양반이 몇 살이실 텐데, 백 살도 훨씬 넘을 텐데, 그런 양반이 어떻게 따님 아랫도리 수발을 하셔?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에그, 며느리를 어머니라고 하시는 양반이 뭘 알아듣는다고, 물어보는 나도 정신 나간 거지.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이고 지겨워라, 그 소리.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는 나중에 저승 가서 찾으시고, 지금은 다시 주무시기나 하셔.
차라리 못 알아들으면 좋겠다. 아예 못 들으면 더 좋겠는데 귀가 너무 밝다. 또 망측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영영 정신 줄 놓아 버리고 단숨에 저승길로 달려가고 싶다. 누가 내 아랫도리를 더듬을 때마다 나는 죽고만 싶어진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작은 것 봤다는 말을 들으면 덜 미안해진다. 큰 용무이든지 작은 용무이든지 아랫도리를 보이는 낭패함은 마찬가지인데 저승길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이승을 기웃거리며 핑계를 댄다. 하루 만이라도 좋으니 기저귀 신세를 벗어나 살아 봤으면……. 언젠가 입이 매운 둘째 딸애가 그 말을 듣더니 침을 튀기며 따졌다. 어머니, 그냥 안 돌아가시고 싶다고 하셔. 그런 궁색한 핑계를 대지 말고 솔직히 말씀하셔. 아들 며느리 진을 다 빼놓아도 좋으니 오래 살고 싶다고 하셔. 돌아가시면 이도저도 다 벗어날 수 있는데 그런 걱정을 왜 하셔? 밖에서 올케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냐며 동생의 옆구리를 쑤셔대는 큰딸애가 픽픽 웃지만 않았어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한 기운이 없기도 했지만 정나미가 떨어져서 말 한마디도 더 섞고 싶지 않았다. 하기는 열 달 동안 내 뱃속에 품었다가 죽을 만큼 고생을 하며 낳아 뼛골 빠지게 키운 자식의 소견머리가 그렇게밖에 안 되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한마디만은 꼭 해주고 싶었다. 너희도 당해 봐라, 똑같이…….
그 말을 하지 않았던 게 옳았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행여 내 자식들이 이런 참담한 지경을 당하면 어쩌란 말이냐. 내 몸뚱이를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구차한 지경을 어찌 내 자식들에게 겪어 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데 도대체 누가 이리 민망한 일을 맡아 해주는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서 딸자식들도 마다하는 일을 맡아 하고 있는가. 하기는 딸자식들 탓할 수도 없다. 나도 우리 어머니 대소변 못 가리시고 누워 계실 때 한 번도 거들지 않았다. 서글퍼서 그랬다고 올케에게 둘러댔지만 사실은 징그러워서 못했다. 추접스럽게 늙은 어머니가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혼자 남으신 아버지는 더 고약했다. 다행히 장조카가 효손이어서 찾아뵐 때마다 코를 쥔 채 잠깐 눈만 맞추고 못 이기는 척 등 떠밀려 아버지 방을 나왔다. 인과응보라고, 이제 그 죄를 고스란히 받는 것이다. 불효한 죄, 불경한 죄, 무렴한 죄…… 그 많은 죄명을 일일이 다 외울 수도 없다. 나는 절대로 아버지 어머니처럼 되지 않을 줄 알았으니 오만방자한 죄도 집어넣어야겠다.
그런데 어두워서 그런가, 백내장 수술했던 게 잘못되어서 그런가, 얼굴이라도 익혀 놓아야 신세를 갚을 텐데 잘 보이지 않는다. 누군지 몰라도 어지간히 고달픈지 손길이 거칠다. 원앙금침 안의 서방님이 아니라 저승 냄새 풍기는 노인네 아랫도리를 만지는데 다정할 수가 있겠는가. 서운하지만 당연한 노릇이다. 아니, 이보다 더 거칠게 굴어도 그 은혜가 백골난망이다. 죽어서도 이 은혜를 잊지 못할 것이다. 대체 뉘시오? 뉘시란 말이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이고, 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내 손을 잡으면 어떡해요? 손 좀 놔요, 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새삼스럽게 왜 이러신대? 여태 안 그러다가 이제 창피하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발 좀 가만히 계셔. 차가워도 할 수 없어. 지긋지긋하시겠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잠들만 하면 일어나서 찍찍 물 뿌리고 닦아 내고, 꽃나무에 그렇게 했어 봐, 가지가 휘어지도록 대접만 한 꽃들이 방긋방긋 피었을 거야. 난 이제 분무기만 봐도 비위가 상하고 구역질이 나. 그렇게 공을 들여도 짓물러서 고생하신 게 벌써 몇 차례야? 어머니만 고생하시는 게 아니라 나도 죽겠어. 오죽하면 부채질을 했을까. 창피하고 염치없어서 그러셨겠지만, 눈 질끈 감고 주무시는 척하는 어머니가 얼마나 미웠는지 아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그때는 정신이 좀 있으셨잖아. 차마 며느리한테 미안하다고는 못하셔도 그만두라는 말은 한번쯤 하실 줄 알았지. 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내가 알게 뭐야 하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계시니까 밉지 않겠어? 아무튼 어머니 자존심은 알아줘야 해. 며느리 생면하는 자리에서 부족하고 아쉬울 것 없을 텐데 다시 잘 생각해 보라고 하실 때 알겠더라고. 없는 집에 와서 고생하겠다고 하셔도 되잖아? 아니, 절대 못하시지. 안하시지. 그 말도 얼마나 거만하고 당당하게 하셨는데. 그런 양반이니 오죽해서 그러실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너무나 미운 거야. 불쌍해 죽겠다가 미워 죽겠다가, 왜 그렇게 내가 변덕이 죽 끓듯이 하나 몰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솔직히 좋아서 하겠다고 처음부터 나선 것은 아니지. 우리보다 형편 좋고 넓은 집한테 미루고 싶었지. 그런데 결국 제일 마음 약한 사람이 하게 되어 있더라고. 지금이니까 하는 말인데, 애당초 결국 내 차지가 될 것 같았어.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다른 집들 돌아서 이리로 오셨을 때 차라리 마음이 편하더라고.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기저귀를 처음 갈아 드렸을 때 얼마나 허망해졌는지 몰라. 사람 사는 게 별것 아니라는 말을 실감하겠더라고. 어머니는 또 얼마나 불쌍하던지. 며느리한테 그러고 싶은 시어머니가 어디 있겠어? 그래서 나는 아무 원망도 없이 해낼 줄 알았지. 왜 못한다고 두 손 들고 나자빠지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찼지. 정말 내가 이럴 줄 몰랐어. 에그, 누가 보면 내가 망령 들었다고 하겠네. 주절주절, 횡성수설, 혼자서 잘도 지껄인다니까.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느 땐 내가 생각해 봐도 미친년 같아. 그래도 할 수 없어. 그렇게라도 안하면 정말 돌아 버리고 말 거야. 여기 이 명치 밑이 뭉근하게 아픈 게, 바윗덩어리가 짓누르는 것 같아서 숨을 쉴 수가 없어. 이것 봐, 또 그러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잠자코 계셔 봐, 나 숨 좀 쉬게…….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발 그만 부르셔. 귀가 따가워 죽겠어.
어머니, 어머니.
다시 주무셔 봐. 눈 감고, 얼른 감고, 옳지, 이제 잡시다, 자요.
어머니.
그만, 그만. 그만하시라니까.
할 수 없이 눈을 감는 척한다. 그러나 절대로 자지 않을 것이다. 잘 수가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밤을 평생 붙들고 있고 싶다. 영영 날이 밝지 않으면 좋겠다. 왜 나는 여자로 태어났을까. 전생에 무슨 죄를 그리도 많이 지어서 남자로 태어나지 못했을까. 겨우 열여섯 해를 데리고 살려고 어머니는 나를 낳으셨단 말인가. 아버지가 내게 박정하신 것은 지각이 들 때부터 깨달은 사실이지만 어머니가 이리도 매정하실 줄은 몰랐다. 시집을 가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고 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죽어도 처녀 귀신을 면해야 하니 시집을 가고 나서 죽으라고 하셨다. 그 말이 너무나 서러워서 이틀을 꼬박 울었다. 병약한 딸을 걱정하신 나머지 죽어도 원이나 없게 시집을 보내시려는 뜻을 나중에 외할머니에게서 들었어도 좀처럼 마음이 풀어지지 않았다. 백리나 떨어진 낯선 동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만 우글거리는 집에서 나는 단 하루도 편히 숨을 쉬지 못할 거라고 울먹거렸다. 나도, 네 어미도 너처럼 그랬지만 이렇게 숨 잘 쉬고 살고 있지 않느냐. 외할머니의 말씀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머니며 외할머니뿐 아니라 외할머니의 어머니도, 그 어머니의 어머니도, 그 어머니의 어머니도, 까마득한 옛날의 어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나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순식간에 눈물이 마르고 서러움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불끈 쥐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내가 언제 무엇을 천지신명께 원했다고 여자로 태어나게 했는가. 그랬으면 봄날 뒷산에 만발한 진달래꽃이며, 안골 참외밭의 달큼한 여름 냄새며, 어둑새벽 군불 때는 아버지의 마른기침 소리며,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못하게 해야 했다. 기어코 글을 읽고 쓰고 싶은 욕심도 생기지 못하게 해야 했다. 차라리 장님이나 귀머거리를 만들던지. 아니면 수족 못 쓰는 병신이나 아무 지각도 없는 바보가 되게 했던지…… 어차피 나는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이제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그런 기막힌 날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만 같다. 내가 온전하게 살 수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 동구 밖을 나가 어디로 가야지 그런 곳을 찾을 수 있을까.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진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옷을 주워 입고 보따리를 꾸렸다. 그리고 엉금엉금 방문 쪽으로 기어갔다. 살그머니 문고리를 잡고 힘을 주어 밀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조급증 때문에 문고리를 쥔 손에서 진땀이 난다. 누가 들을까 봐 귀를 바짝 세워 본다. 아무도 나의 반란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나는 기를 쓰고 다시 문을 밀어 본다.
아니 자다 말고 왜 방문은 두드리신대? 내가 꼭 끌어안고 잤는데 언제 빠져나가신 거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앉은뱅이가 되신 양반이 어떻게 나를 타 넘고 거기까지 가셨대? 아무튼 기운도 좋으셔. 그렇게 싸시면서, 그렇게 안 주무시면서 어떻게 그런 기운이 생기나 몰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암만 애를 써도 소용없어. 고리를 따로 높이 달아 놓았으니까 어머니가 일어나시기 전에는 문 못 열어. 안 그러면 식구들이 잠을 못 자는데 어떡해. 제대로 잠을 자야지 돈 벌러 나가고 공부하러 나가지. 정 나가고 싶으면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서 열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맘대로 해보시라니까.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소용없으니까 그만 두드리셔. 식구들 다 깨겠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오기도 대단하셔. 그런다고 더 세게 두드리는 것 좀 봐. 아휴, 그만 좀 하셔. 온 아파트 사람들 다 깨우겠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그래, 기왕이면 더 세게 하셔. 그래서 다리 뻗고 속 편히 잘 자고 있는 자식들 집까지 다 들리게 더 세게 하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이고, 내가 못살아, 못살아.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발 좀 그만하셔. 방문 부수겠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자, 자, 그만하셔. 도대체 밤마다 왜 이러셔? 이렇게 진땀이 나도록 방문을 왜 두드리시냐고. 가슴이 벌렁벌렁 뛰도록 왜 그렇게 흥분을 하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자, 자, 고집 그만 부리고 저리로 가시자고. 기저귀도 좀 보고 잠 오는 약도 한 번 더 잡숩시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이고, 징그러, 그 소리…….
약을 먹어도 쉽사리 잠이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먹고, 또 먹어야지. 마음대로 손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쥘 수 있을 만큼 다 목구멍 안으로 넣고 싶다. 그까짓 쌀알만 한 걸 먹어서 까마득하게 달아나 버린 잠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는가. 그 알량한 것을 심지어 네 토막으로 잘라 주면서도 그 양반은 마음을 놓지 못했다. 내가 몰래 온전한 것으로 다시 한 개를 삼킨 줄 알았다면 당장에 뱉어 내라고 온갖 소란을 피웠을지도 모른다. 겁이 많고 뒤가 무르기로는 누구한테도 일등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걸 감추느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걸 모르고 모두 무섭고 어려워서 쩔쩔맨다. 언젠가 팔 남매가 한자리에 모여서 입을 모아 아버지 정을 모르고 자랐다고 서운해 하기에 듣다못해 털어놓았다. 간난 자식도 만지면 탈이 날까 무서워 매정하게 외면했다는 말을 아들도 딸도 믿지 않았다. 아버지를 감싸 주려고 어머니가 평생 소설을 쓰시느라 애쓴다는 고약한 말도 들었다. 너희들이 내 뱃속에서 열 달이나 있다가 나온 것들이냐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나도 내 부모한테 그랬지만, 그래서 자식보다 징글징글한 게 없다고 하는 모양이다. 세월 잘 타고난 자식들 앞에서 나는 구차한 소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놈들이 이 나라를 빼앗지 않았더라면 할아버지가 서러운 땅을 구석구석 다 밟아 보시겠다며 복중의 아들과 생이별을 하셨을 것이냐. 층층시하 고단한 시집살이가 아니었다면 생사를 모르게 된 할아버지 때문에 애간장이 녹는 아픔을 한 번도 소리 내어 토해 보지 못하고 명치끝에 혹을 매달고 할머니가 스물도 못 채운 아들 며느리를 놓아두고 저승길로 가셨겠느냐. 같은 동족끼리 총을 들이대고 싸우는 참담한 난리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가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 들어가 피를 말리며 숨어 있었겠느냐. 그 양반의 반평생도 못 미치는 그만큼 만으로도 거북이 등처럼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던 겉 성질 속에 손끝만 스쳐도 겁에 질려 오그라드는 함수초 잎 같은 여린 속 성질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만한데, 마음으로 듣지 못하고 건성으로 귀만 열고 있는 자식들의 얼굴에는 지루한 표정만 가득했다. 그런다고 자식들만 나무랄 수도 없다. 살을 섞고 살았던 나 또한 그 양반의 곁에서 지겨워서 죽을 지경이라고 아우성을 치고 싶은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누구나 다 그렇게 제 눈으로만 보고 제 귀로만 듣는다. 그래서 곡절 많은 인생은 외로움의 골이 깊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기다려도 잠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기는 무슨 염치로 편히 눈을 감는단 말인가. 자식 앞세운 죄를 받자면 평생 불면의 고통을 받아도 싸다. 그런데 저리 코를 골며 잘 수 있다니, 지독한 양반…….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듣고 저 양반은 사랑방으로 들어가 연거푸 큰아들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충격으로 쓰러져 혼미한 정신으로 들었지만 천 리 밖에서 들어도 애간장이 녹을 만큼 애절한 통곡 소리였다. 저승길로 떠나는 아들도 그 소리를 들으면 차마 발을 떼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놓고 내가 우는 소리는 막았다. 천하에 불효자식이야. 그런 지지리도 못난 놈 때문에 애통해 할 것 없어. 그리고는 남의 상가 일을 하듯이 장례 절차를 따지고 지시했다. 죽은 자식보다 그런 아비 때문에 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심지어 나는 저렇게 독하니 자식을 앞세웠다며 이를 갈았다. 그런 아비 만나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객지에 나가 마음고생 몸 고생하다가 그래도 천운으로 타고난 복이 있어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형편을 누리는가 싶더니 저렇게 모질고 각박한 아비 때문에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마흔둘에 가게 했다고 혼자 악을 쓰며 원통해 하기도 했다. 아비 복 없는 큰아들을 고향으로 데리고 가면서 이내 나도 뒤따라가리라 마음먹었다.
장지 일 때문에 먼저 내려가 있던 저 양반이 고향집 앞에 서서 장의차를 맞았다. 나는 저 양반이 지긋지긋해서 고개를 돌렸다. 금의환향할 고향땅을 이제 제 발로 밟아 보지도 못하게 된 아들 생각에 버스에서 내려 감히 땅에 발을 디딜 수가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리기를 간절히 바라며 버스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귀에 귀청이 터질 것처럼 우렁우렁한 곡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소리가 컸던지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허둥지둥 그 소리를 찾아갔다, 그러자 채 버스에서 내리지 못한 관을 하염없이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저 양반이 보였다. 이상한 것은 저 양반의 목소리가 실제로는 들릴 듯 말 듯했다는 것이다. 장례의 다음 순서를 준비하려고 어수선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듣지도 못할 만큼 작은 소리였다. 그런데 어떻게 버스 안에서 정신이 혼미한 내 귀에 그렇게 우렁차게 들렸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제야 나는 저 양반의 진심을 깨달았다.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하고 고향집에 기진맥진 누워 버린 나보다 천하에 불효자식의 누울 자리를 간섭하려고 상여 뒤를 따라가는 독한 저 양반의 속이 더 험하게 문드러진다는 것을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맥을 놓고 누워서 나는 아비의 그 애통한 소리를 듣고도 끝내 상여를 타고 저승길을 가는 아들이 어쩌면 더 모질고 야박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저 양반은 매일 밤 큰아들을 만나러 저승을 기웃거리는지도 모른다. 그러느라 고달프고 지쳐서 저승 문턱에 머리를 대고 정신없이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렴, 그러고도 남을 양반이지. 아무래도 약을 더 먹어야겠다. 아니지, 내가 잠을 자면 안 되지. 오늘 밤에는 저 양반 대신 내가 저승을 기웃거려야지 왜 기를 쓰고 잠을 자려고 하는가. 가자, 어서 가 보자. 얘, 큰애야, 오늘 밤엔 어미가 너를 찾으러 간다. 애야, 큰애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이고, 또 문 두드리시네. 미쳐, 내가 미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약도 소용없으니 어쩌면 좋아. 젊은 사람도 그만큼 먹으면 맥을 못 추고 까라질 텐데 구십 노인이 어찌 저러신데.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휴, 귀 따가워. 제발 그만 좀 하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도대체 문 열고 나가서 뭐하시려고?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그래, 맘대로 해보셔. 자, 문 열어 드렸으니 어머니 혼자 저 껌껌한 데 나가서 거실이며 부엌이며 원 없이 돌아다니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왜 또 그러셔? 문 열어 줘서 고맙다고? 아이고, 무슨 그런 황송한 말씀을……. 이 밤중에 시어머님한테 그런 황송한 말씀을 들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없는 정신에 인사치레까지 챙기셨으니 이제 그만 볼일 보러 나가 보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얼씨구, 엉덩이 밀면서 잘도 가신다. 어디를 가시는데 저렇게 기운이 펄펄 나실까. 저렇게 다니시니 팔에 알통이 생기지. 어두운데 어디까지 가신대? 하기는 하도 돌아다녀서 눈 감고도 다니실 거야. 그나마 앉은뱅이가 되셨기 망정이지 멀쩡하게 걸어 다니면 어쩔 뻔했어. 방문이 아니라 현관문 열고 나가서 사방천지 온 데를 다 돌아다녔을 텐데, 아이고, 그런 양반을 쫓아다니자면 내가 먼저 쓰러지고 말지, 몸뚱이뿐이야? 내 정신도 온전하지 못하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쩌다가 영특하신 양반이 저 지경이 됐나 몰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청산유수로 지껄이시던 말들을 어떻게 다 잊어버리고 어머니만 남았는지 몰라. 아버지, 동생, 삼촌, 언니도 아니고 왜 하필 어머니야? 어머니는 죽어서도 맘 편히 못 누워 있으라고? 그 어머니는 지금 얼마나 지겨우실까. 나 같으면 절대로 들은 척, 아는 척 안 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이고, 거기서 그렇게 시끄럽게 하면 어쩐대? 내일 출근할 사람 다 깨워 놓겠네. 이리 오셔, 얼른. 이쪽으로 오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못살아, 내가. 기어코 깨우셨네. 주희야, 별일 아니니까 들어가. 어머니, 이리 오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도 없는데 기어코 나를 부리시려고 하네. 그냥 오셔, 나 부르지 말고. 가던 대로 밀고 오시면 되잖아. 갈 때는 혼자 잘 가셔 놓고 왜 못 오셔. 십 리 길이야, 백리 길이야? 주희야, 할머니 놔두고 어서 들어가서 눈 붙여.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발 정신 좀 차리셔. 손녀딸을 붙들고 어머니라고 하면 어떡해? 자, 이 손 놓고 우리 방으로 갑시다. 저기 우리 방, 어머니랑 나랑 자는 방말이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우리 방, 아니 어머니 방, 어머니 방으로 가시자고. 자, 자, 어서, 저기 어머니 방, 어머니 빨리 오시라고 문도 열려 있고, 불도 환하게 켜져 있네. 어서어서 가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자, 다 오셨네. 어서 들어가셔. 왜 또 고집을 피우신대? 어머니 방이라니까. 봐, 어머니 이불도 있잖아. 이 방에서 사신 지가 언젠데 새삼스럽게 왜 그러신대? 일 년 반도 넘게 이 방에서 어머니가 똥 싸고 오줌 싸고 온갖 속을 다 썩여 놓고 왜 몰라? 어머니 방이라니까. 그러고 날 새려고? 나 좀 자게 해줘. 나를 자게 해줘야지 어머니하고 또 싸우지. 자, 내가 밀 테니 들어갑시다. 자, 자, 옳지, 옳지. 이제 옆으로 한 바퀴 굴려서 누웁시다. 됐다, 됐어. 자, 이제부터 꼼짝 말고 주무셔. 아무리 시끄럽게 해도 나는 안 들을 테니까 잠이 안 와도 어머니 부르지 말고 아침까지 가만히 눈 감고 계셔. 아셨어? 여기가 어머니 방이니까 어디 갈 생각하지 말고 그대로 계셔, 응?
어머니 방이라니. 내 방이라니. 여기가 어쩌자고 내 방인가? 아무리 봐도 낯설기 짝이 없는 그 방을 어머니 방이라고 떠밀어 넣는데, 그렇듯 황당하고 참담한 지경은 내 평생 처음이었다. 경로당에 나가 있으면 할 수 없이 자식들 집에 들어간 노인들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었다. 자의건 타의건 그렇게 된 노인들의 뒷이야기는 처량했다. 사 남매가 매일 번갈아 가면서 찾아와 같이 살자고 졸랐다던 과수원집 할머니에게서는 흐뭇한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전화를 걸어 보았다. 쉬는 날마다 사 남매가 모여 심심치 않게 해준다고 자랑을 하는데도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호강에 겨운가 보다고 얄미운 생각이 들어 그만 통화를 끝내려는데 나를 붙들고 간곡하게 말했다. 아무리 호강을 해도 마음이 편치가 않아. 몸 건사 잘해서 죽을 때까지 내 방구석을 지키고 있어. 나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온몸 구석구석이 다 무너지고 망가져서 더 이상 자식들에게 오기를 부릴 수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정신이 말짱한 이상 자식들 눈치 보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자식들 집에 가 있으면 그 양반도 나도 심심해서 주리를 틀 만큼 할 일이 없지만 마음은 좀처럼 쉴 틈이 없었다. 현관문이 조금만 세게 닫혀도, 며느리 목소리가 조금만 높아져도, 아들 입꼬리가 조금만 처져도, 손자가 조금만 야단을 맞아도, 밥이 조금만 꼬들꼬들해도 두 늙은이 때문인가 싶어서 저절로 신경이 곤두섰다. 생전 남의 눈치를 모르고 사신 그 양반 때문에 더 신경을 써야만 했다. 시골집에 계실 때처럼 어둑새벽에 일어나셔야 하고, 식전에 반주 한 잔을 꼭 드셔야 하고, 똑같은 시간에 세끼 식사를 하셔야 하고, 식사 후에는 커피 한 잔씩 마셔야 하고, 식구들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꼬박꼬박 인사를 다 받으셔야 했다. 아침에 거실로 나가시면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방에 들어가시지 않았다.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소용이 없었다. 왜 자꾸 잘못한 사람 취급을 하느냐고 역정을 내셨다. 그러면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자식들 집에서는 잘못한 게 없어도 잘못한 사람처럼 지내야 한다는 말을 해드릴 수도 없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앞에서 고물거리며 기어 다니던 자식들이 머리가 허옇게 반백이 되어 가는 동안 세상이 수없이 뒤집어져서 인륜이며 도리를 감히 따질 수도 없게 되어 버린 것도 모르고 여전히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 있는 답답한 그 양반 때문에 속을 끓이고 애를 태우지만 기를 쓰고 끝내 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자식한테 부모 대접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는 양반이 잘못인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없게 뒤집어진 세상이 잘못이지. 그래서 나는 이승의 마지막 날까지 그렇듯 난공불락의 성으로 버티어 주시기를 자식들 몰래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다시 시골집으로 돌아와 내 방에 누우면 더 간절하게 빌었다. 이보다 더 편안하고 한가한 곳이 세상천지 어느 곳에 있단 말인가. 부디 당신 덕분에 오래오래 이 방을 누리게 해주소서…….
정말 나는 그 양반이 그렇게 해주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삭신이 쑤시고 결려서 돌아눕지도 못하겠으면, 밥상 차리기 귀찮으면, 자식들 전화가 뜸해져서 서러워지면, 귀가 안 들리신다는 핑계로 당신이 어서 죽어야 내가 자식들 집에 가서 편하게 산다는 악담을 목청껏 퍼부어댔다. 하루에 딱 세 번 드시던 커피며 반주를 돌아서면 잊어버리기를 수없이 반복하시는데도 고래고래 소리만 질러댔다. 이발하러 나가셔서 하루 종일 돌아오지 않으셔도, 삼복에 겨울 잠바를 찾아 입어도, 노망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마당에 비질을 하러 나가셨다가 바지가 녹아서 구멍이 날 만큼 불에 덴 줄도 모르고 들어오실 때서야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약을 들고 달려온 셋째가 허벅지에 손바닥만 하게 난 상처를 치료해 줘서 마음을 놓았는데, 사나흘 뒤 잠결에 듣는 그 양반 신음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제멋대로 상처를 만지고 빨지 않은 방 걸레로 꼭꼭 싸매어 놓아서 곪아터지다 못해 살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그 양반 자신도 몰랐던 것이다. 급히 서울로 모시고 갔지만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셨다. 그 한 달여 동안 어지간히 자식들이며 내 속을 썩이셨다. 하도 속이 상해서 병원으로 가신 뒤에는 좀처럼 보러 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나보다 두 살이 아래시니 적어도 그만큼은 앞서 가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무 귀띔도 없이 칠십 년 넘게 같이 살아 준 사람을 배신하셨다는 생각에 돌아가신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작정을 했다. 속 모른 자식들은 그런 나를 두고 제멋대로 입방아를 찧어댔다. 결국 딸자식들이 나서서 윽박질렀다. 어머니 때문에 올케들 보기 민망해 죽겠어. 마나님도 마다하시는 양반을 어느 며느리가 돌보려고 하겠어? 같은 병실에 있는 사람들이 할머니는 먼저 돌아가셨냐고 물어보는데 창피해 죽을 뻔했어. 간병인한테도 얼마나 눈치가 보이는지 알아요? 아무리 힘드셔도, 함께 누워 계시게 되더라도 한 번 가 보셔야지. 할 수 없이 두 팔을 딸들에게 맡기고 질질 끌리다시피 병원으로 가 보았다. 내심 그렇게 큰소리칠 만큼 그 양반을 잘 대접해 드리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병실로 들어선 순간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주렁주렁 주사약을 매달고 두 손을 묶인 채 코 줄을 꿰이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그 양반은 사람의 꼴이 아니었다. 항우장사 같은 기운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주사바늘이며 소변 줄까지 뽑아버려서 어쩔 수가 없다고 자식들이며 간병인이 돌아가며 변명을 했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살이 썩어 문드러지다 못해 뼈까지 썩어도 모른 척 그대로 시골집에 계시게 할 것을……. 어차피 노망 덕분에 아픈 것도 모르고 괴로운 것도 모르셨을 테니 그러는 편이 훨씬 나았다. 훨씬 더 사람다웠다. 후회막급이지만 돌이킬 수 없으니 더 기가 막혔다. 그 양반 앞에 넋을 잃고 앉아 그만 가시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했을 뿐, 아무것도 도와드릴 일이 없었다. 여봐요, 아직 정신 남아 있거든 내 말 좀 들으셔요. 남은 명줄 얼른 놓아 버리고 어서 가셔요, 제발 가셔요. 여봐요, 여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머리맡을 더듬어 보니 내 방이 아닌 것이 분명해진다. 물 대접, 약병, 효자손, 숟가락, 수건, 방 걸레, 파리채, 휴지, 요강…… 심지어 껄끄러운 먼지도 손에 잡히지 않는 걸 보면 내 방이 아니다. 여기가 어디인가. 막내네 집인가. 셋째네 집인가. 아니면 둘째네 집인가. 그 양반을 떠나보내며 다짐했다. 나는 어떻게든지 정신 붙들어서 사람답게 살다 가겠다고. 여자로 태어난 것도, 그래서 부모 형제를 떠난 것도, 낯선 남자와 살을 섞고 아이를 낳아 어미가 된 것도, 세월 따라 늙어 저승 문 앞에 서게 된 것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천명이지만 그것만은 내 의지대로 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어서 기운을 차려 시골집, 내 방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부지런히 밥을 챙겨 먹고, 좋은 약이며 좋은 주사도 챙겨 자꾸만 구부러지는 무릎이며 허리를 반듯하게 세워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내려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급해져 아들을 조르고 며느리를 독촉하고 딸들을 불러들였다. 안 돌아가시려고 기를 쓴다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서 기운 차려 내려가 보란 듯이 살아 주면 어떤 누명도 다 벗게 될 테니 귀 막고 입 막고 있자고 나를 다독거렸다. 어느 날엔 뽀얀 사골국물을, 어느 아침에는 근근한 찰밥을, 어느 저녁에는 매운 겉절이를 먹으면 벌떡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 몸뚱이는 이미 내 편이 아니었다. 먹는 대로 탈이 났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잠자코 열심히 비위를 맞추던 딸들도 어미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아버지 병간호 때부터 고달팠던 막내며느리가 기어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더 마음이 조급해져서 시골집과 가까운 셋째네로 가겠다는 말을 흘려 보았다. 그러나 막상 막내로부터 정 그러시면 잠시만 다녀오시라는 말을 듣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만있자, 그런 게 아니었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나를 내쫓았던가. 막내 집에서 살고 싶다고 했는데 아무도 듣지 않았던가. 아니다. 내 집, 내 방에서 기어코 나를 끌어내더니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아니, 내 자식들이 그럴 리가 없다. 없는 부모 때문에 그리 고생을 하고도 원망 한번 해본 적 없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아버지 보내느라 고생하고 한숨 돌릴 사이도 없이 또 어미가 속을 썩이니 지칠 수밖에 없다. 자식이 하나면 모를까, 죽어라고 하나만 고생시키는 것은 경우가 아니니 어찌 되었든 셋째네로 가겠다고 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런데 도대체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갔는가. 나를 느닷없이 어느 방문 앞에 세우더니 어머니 방이라고, 내 방이라고 모두 등을 떠밀었다. 먼지도 없고, 외풍도 없고, 구질구질하게 늘어놓은 것도 없는 깔끔하고 단정한 방이었지만 나는 불안하고 무서웠다. 어떻게 알았는지 셋째 내외가 내 방을 찾아왔기에 무섭다고 했더니 매일 아침저녁으로 들러 위로를 해주었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였던지 내 옆에 사람을 붙여 놓았다. 음식 솜씨도 좋고, 목소리도 좋고, 마음씨도 좋은 여자였다. 그 여자 덕분에 덜 무서워졌지만 저녁밥을 주고 셋째네가 오면 돌아갔기 때문에 밤에는 여전히 무서웠다. 셋째가 나를 안심시키려고 저희 집이라고 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얼른 시골집, 내 방에 가 있고 싶다고 말했더니 이 집이 저희 집이니 어머니 집이고 그래서 이 방이 어머니 방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래도 내 방을 고집했더니 그 집이, 그 방이 뭐가 좋다고 가지 못해 애를 태우느냐고 서운해 했다. 셋째는 전화기를 내 귀에 대고 다른 자식들 목소리를 들려주며 나를 달래려고 했다. 그러면 모두 내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야단을 치기만 했다. 심지어 오도 가도 못하게 된 형편인 줄도 모르고 배부른 소리한다는 말도 들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식들을 두었는데도 그런 억울한 소리를 들으니 세상 꼴이 얼마나 험한지 알 만했다. 나는 그럴수록 하루빨리 내 방으로 돌아갈 궁리만 했다. 살다 보면 자식들이 철이 들어 내 속을 알아줄 날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구십을 살았는데도 자식들은 여전히 내 속을 모른다. 내 뱃속에서 나와 내 젖을 먹고 내가 해주는 밥을 먹었으면서도 어미가 어떤 사람인지를 모른다. 어미라는 인종이 따로 있는 줄 안다. 저희들도 아비 어미가 되었으면서도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저희들과 같이 있을 때야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제각각 나가서 일가를 이루어 살고 있고, 그 양반도 가시고 나 혼자 있게 되었는데 왜 나를 한 사람으로 생각해 주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걷지 못하면 기어서라도, 기지 못하면 등으로 밀고 다니면서라도 남은 생을 나, 김성순이라는 사람으로 살아 볼 것이다. 단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그렇게 살아 볼 것이다. 어서 가야지, 내 집으로, 내 방으로…….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무리 어두워도 갈 수 있다. 눈으로 보지 못하면 손으로 더듬어서라도 갈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이 이리도 내 걸음을 더디게 만드는가.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나, 어머나, 이게 무슨 냄새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이고 맙소사! 똥 기저귀를 왜 들고 계신대? 이리 내놓으셔, 얼른 이리 줘.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이 이불을 어떻게 해? 이 옷은 어쩐대? 난 몰라, 난 몰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발 정신 좀 차리셔, 어머니! 어쩌자고 이러셔? 나 말려 죽이려고 작정하셨어? 우선 손 닦고 옷부터 벗자고. 어머니, 말 좀 들으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이불 좀 뜯게 꼼짝 말고 거기 가만히 계셔. 추워도 어쩔 수 없어. 누가 겨울인지 몰라서 이 새벽에 창문을 활짝 열어 놓는대? 아이고, 이 냄새를 어떻게 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발 그 소리 좀 하지 마셔. 내가 미쳐 죽겠단 말이야. 벽에다 똥칠한다는 말을 들었어도 설마 했는데 이제 어쩌면 좋아. 어머니, 도대체 어쩌려고 그래? 이렇게 망령을 부리면 나도 못해. 그러면 이제 어디로 가실 거야? 요양원으로 가실 수밖에 없어. 할 수 없다니까. 그런 불효자식이 안 되려고 애를 써도 어머니가 기어코 불효자식을 만드는데 어떻게 해? 그런다고 자식들 원망할 수도 없어. 누가 견뎌? 이건 사는 게 아냐. 매일 밤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어. 간병인이 벌써 몇이나 달아났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물 떠 올 테니 거기 그대로 가만히 계셔. 지금 목욕 못 시켜. 아침에 애비가 안고 가던지 해야 씻기지 도저히 못해. 아이고, 락스도 가져와야겠다. 이 방바닥을 어쩌면 좋아.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왜 저 애가 눈을 부라리며 화를 내는가. 왜 이리도 몸서리치게 추운가. 이 고약한 냄새는 어디에서 나는가. 이런 데 나를 놓아두고 저 애가 어디로 가는가. 날더러 이제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죽는 날까지 저하고 있자고 했던 애가 왜 저러는가. 내가 어떻게 했기에 저 애도 나를 버리려고 하는가.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가만히 좀 계셔. 비누칠을 해야 될 것 아냐. 누구는 보고 싶어서 보고 만지고 싶어서 만지나. 어머니, 정말 너무하셔. 다른 사람들 다 그래도 어머니는 끝까지 정신 말짱하실 줄 알았는데. 그래서 며느리 고생 안 시키고 점잖게 가실 줄 알았는데. 당신 입으로도 그러느니 혀 깨물고 죽을 거라고 수없이 장담하셔서 철석같이 믿었는데 이게 뭐야. 어머니 꼴이 이게 뭐냐고.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발 정신 좀 차리셔, 제발.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창피하지도 않아? 이런 꼴을 자식들한테 보이고 싶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발 어머니 정신 좀 차려. 이러지 마. 날더러 어떡하라고 이러셔? 어머니가 미워 죽겠어. 얼마나 미운지 그만 돌아가시면 좋겠어. 하루에도 몇 번씩 그래. 어머니 때문에 나는 천당도 못 가고 극락도 못 가. 차라리 내가 아주 악질이면 좋겠어. 그래서 어머니가 조금도 불쌍하지 않고 죽어라고 미워하면 좋겠어. 얼마든지 욕을 하고 지랄을 하면 좋겠어. 모두 용하다고, 착하다고 하지만 나를 모르고 하는 말이야. 지금도 나는 어머니가 죽어라고 미워. 지겹고 끔찍해. 그런데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쌍해 죽겠어. 어머니, 정말 나도 내가 지겨워. 어머니는 더 그러겠지만 나도 내가 지겨워 죽겠어. 어머니, 날더러 어떻게 하라고 이러셔? 나한테 왜 이러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발 그러지 마. 그렇게 빌지 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내가 빌게. 정말 간절하게 빌어. 어머니, 제발 우리한테 이러지 마셔. 나한테 이러지 마.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게 해줘. 어머니, 우리한테, 나한테 더 이상 기대하지 마셔. 언젠가 그래도 어머니가 정신이 좀 있을 때 나랑 텔레비전 보면서 뭐라고 하셨지? 치매 걸려서 똥오줌 못 가리고 속 썩이는 노인네한테 예쁘다고 입을 쪽쪽 맞추는 환갑 넘은 아들 보면서 얼마나 욕을 하셨어. 저게 무슨 자식이냐고. 저걸 잘하는 짓이라고 방송에 내고 자랑하냐고. 천하에 나쁜 놈이라고……. 그런데 어머니, 속으로는 부러웠던 거야? 그래서 어머니도 우리가 그렇게 하는가 보려고 이러시는 거야? 아냐, 어머니. 기대하지 마셔. 나도 내가 얼마나 더 무서운 생각을 할지 모르겠어. 그러니 제발 나 안 그러게 해줘. 나 좀 살려 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발 그러지 마. 제발…….
이제 알겠다. 내가 왜 이 방에 있는지를……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생각이 난다. 어쩌다가 내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창피하고 속상하고 염치가 없어서 혀를 깨물고 죽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몸뚱이를 잘라 내 버리고 싶다. 사람의 얼굴을 하고 어떻게 이런 몸뚱이를 가질 수 있는가. 미안하다, 애야, 나는 정말 징글징글한 이 몸뚱이를 너한테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네가 깨기 전에, 네가 보기 전에 나 혼자 감쪽같이 치우려고 했는데, 더 이상 너를 괴롭히지 않고 내 방을 찾아가려고 했는데, 정말 그런 것인데, 미안하다, 애야. 내가 너를, 내 자식들을 도대체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 것이냐. 용서해라, 제발 나를 용서해라. 아니, 용서하지 마라. 절대로 용서하지 마라. 그리고 내가 정신 줄을 다 놓아 버려 이보다 더 참담한 꼴이 되어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거라. 그러면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죽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정말 미안하다, 애야, 내 자식들아, 이 사람들아…….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문장웹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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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자의 기록공유자의 기록 이서수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가 나를 데려간 곳은 엉뚱하게도 낡은 정자 앞이었다. 아버지는 육모정이 있는 그 땅을 세 조각으로 잘라 친구들과 나누어 가졌던 사실을 내게 처음 알려주었다. 사다리꼴 모양의 땅 둘레에 소나무와 중국 단풍나무, 벚나무가 띄엄띄엄 심겨 있었다. 파란 셔츠를 입은 아이가 정자 마루 끄트머리에 앉아 휴대폰 게임을 하며 발끝으로 축구공을 굴렸다. 그 모습이 무척 편안해 보여 부근에 사는 아이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 사람이 삼분의 일씩 갖고 있어. 그러니까 이 땅의 삼분의 일이 네 몫이라고. 아버지에게 땅이 있었는지도 몰랐기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게다가 내게 증여할 생각이라는 말이 더욱 놀라웠다. 아버지가 다른 가정을 만들면서 우리의 관계는 소원해진 지 오래였다. 한편으론 번듯한 건물이 아니라 낡은 정자가 지어진 땅을 물려받게 된 사실이 약간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정자 앞은 너른 공터였고 지도 앱을 통해 확인한 주변엔 초등학교와 파출소, 보습학원과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정자를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지으면 가치가 얼마나 오를지 궁금했다. 정자는 저대로 내버려 둬. 그건 지켜. 아버지가 내 속내를 읽은 듯이 말했다. 나는 미약하게 항의했다. 땅을 이렇게 놀리는 사람이 어딨어? 놀리는 게 아니지.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잠시 말이 없던 아버지가 입을 뗐다. 올해 우리가 자식들에게 땅을 증여하기로 다 같이 합의를 봤어. 왜 그런 결심들을 하셨는데? 그냥 때가 된 거지. 상념에 잠긴 표정을 짓던 아버지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하더니 갑자기 일이 생겨 빨리 돌아가 봐야 한다고 말했다. 땅에 대한 설명이나 해명이 더는 없었다. 나는 의구심을 삼키고 정자와 나무를 한 프레임 안에 담아 사진을 찍었다. 그러곤 어색함을 적당히 감추며 아버지와 정자 앞에서 헤어졌다. 해마다 한두 번씩 오가던 안부 연락마저 뜸해지던 때였기에 서울로 함께 돌아갈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생전에 재산을 미리 처분하려는 아버지의 태도가 못내 마음에 걸렸던 나는 결국 한 통의 문자를 보냈다. ―아버지, 혹시 어디 아파? ―건강해.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분명 건강했던 것 같고, 나는 언젠가 그 땅에 대해 아버지와 길게 얘기할 기회가 다시 있을 줄 알았다. 3년이 훌쩍 흐르고 겨울 산행을 나선 아버지가 실족사로 세상을 뜰 줄은 까맣게 모르고서. * 부고장엔 그들이 아버지의 자식으로 되어 있었다. 내 이름이 없는 온라인 부고장을 들여다보다 장례식에 가지 않을 결심을 세웠다. 그러곤 동네 성당으로 가 나름의 작별 인사를 했다. 자식에게 지은 죄가 있긴 하지만 좋은 곳으로 가시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빌었다. 세상을 먼저 떠난 이들의 안식을 위해 켜둔 초를 바라보다 아버지의 봉헌초도 마련해 불을 밝혀 두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친족의 도리로 그 정도는 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새 초가 보이지 않아 나는 스스로 초가 되어 아버지 생의 일면을 조용히 밝혔다
- 이서수
- 2026-10-01
문장웹진 소설
베일베일 윤해서 ∴ 배달을 끊을 수 없다. 이번 달에만 12번째 같은 메뉴를 시켰다. 분리수거 배출일은 월요일이다. 월요일 18시부터 23시까지만 재활용 쓰레기를 배출할 수 있다. 일주일치 쓰레기를 모아 월요일 밤에 내다 버린다. 조명을 환하게 밝힌 주차장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커다란 이케아 봉투 가득 플라스틱 용기를 들고 온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그 사람과 말없이 번갈아 비닐, 플라스틱, 종이, 캔을 분리 배출한다. 내가 이번 달에만 열두 개째 버리고 있는 똑같은 플라스틱 뚜껑 아래 색색의 플라스틱이 가득하다. ∴ 두 개의 점이 있다. 점을 번갈아 본다. 어떤 움직임이 점을 만들 때 점에 내려앉는 건 뭘까. 같은 크기의 점을 찍을 뿐인데. 무엇이 점과 점 사이에 차이를 만드나. ∴ 면허 갱신 안내 문자를 받았다. 최근 6개월 내 찍은 사진이 있어야 하고,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 증명사진을 찍는 일은 언제나 불편하고 어색하다. 어딘가 제출했을 최초의 증명사진을 앨범에서 발견했는데, 5살의 나는 입을 꼭 다물고 뭔가를 참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증명사진을 찍을 때마다 흑백사진 옆에 모아두었는데 조금씩 다른 사진 속 얼굴이 모두 흑백사진 속 얼굴과는 기묘하게 닮아 있다. 내가 사진관을 선택할 수 있게 된 후로는 계속 같은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몇 년 만인지 그 사이 사진관은 이사를 했다. 큰길가에서 골목 안쪽으로 이동한 것을 확인하고 찾아갔는데 이전 사진관 크기의 절반도 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 의자와 카메라가 놓여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왼쪽으로 조금 갸우뚱. 이런 지시를 하던 사장님이 답답했는지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이리저리 조금씩 움직였다. 보정을 거친 사진 속 나는 거울로 매일 보던 나와 달랐다. ∴ 금을 넘는 데 몰입하던 때도 있었다. 충동이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면서.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거나 휴대전화를 없애고 오래 걷거나 새벽까지 놀이터에 앉아 있거나. 보고 싶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 토끼 머리 위에 쌓인 먼지를 털고, 알람이 울리는 것을 듣고만 있었다. 토끼는 세 마리. 접시 하나를 들자고 매끈한 토끼 셋이 두 손 모으고 있다. 예외는 있을 수 없어 사이좋게 나란히. 어떤 날 접시 위에 사과를 올리고 토끼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아래층 사람이 천장을 두드리기 시작해서 팔 아프겠다, 생각하다가. 아래층 천장 위에 웅크리고 깜빡 잠들었다. 해가 지려는지 집은 어둑하고 에어컨 바람이 서늘했다. 눈을 뜬 건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 ∴ 통 속에 손을 집어넣는 기분. 통의 깊이를 알 수 없다. ∴ 큰 화분 2개와 작은 화분 2개가 있다. 작은 화분 중 하나에서 꽃대가 올라왔다. 이렇게 더운데. 꽃이 피었다. 역대 최대. 역대 최고. 이런 표현이 매일 반복되고 있다. 에어컨을 틀어 갇힌 공기를 식힌다. 2주 전에는 짧았던 꽃대가 일주일 만에 길어지더니 다섯 송이의 꽃이 피
- 윤해서
- 2026-10-01
문장웹진 소설
보트 아래보트 아래 손호영 한때 나는 얀의 말대로 집 앞을 비추는 보안카메라를 설치했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해 보곤 했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햇빛, 무심히 우리 집을 침범하던 빛을 나도 결국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 도시에 뿌리내렸다면, 나의 세계는 바라던 만큼 넓어졌을까? 어쩌면 우리는 아기를 낳아 키웠거나, 혹은 결혼했을지도…… 이런 생각들은 물의 파동처럼 하나의 점으로부터 사방으로 원을 그리며 뻗어 나가곤 했다. 나는 그를 떠나며 가족 핑계를 댔다. 여기서는 영원히 가족을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는 짐짓 놀라며,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다고 말했다. 나에게 너는 오래전부터 가족이었다고. 글쎄. 정말? 찰나였지만, 얀은 정말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고, 나는 승리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지난 일들을 여러 번 되감아 보면서 나는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이었는지 원점에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정말 그의 견고한 세계에 작은 생채기라도 낼 수 있는 존재였는지를. * 암스테르담 출장에 김수오를 데려간 건 박 대표 부탁 때문이었다. 그곳에 살 때부터 눈여겨보았던 로컬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와 국내 독점 유통 계약을 맺으려던 참이었다. 수 개월간 메일과 화상 회의로 대략의 조건 조율이 끝난 단계여서 큰 부담은 없었다. 현지 스튜디오와 쇼룸을 돌아보는 일정까지 포함해 4박 6일 출장 계획을 보고했는데, 박 대표가 그제야 김수오에게 시킬 만한 일을 고민해 보라고 말했다.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오 년을 살다 이 년 전쯤 귀국했다. 반년 넘게 하릴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던 내게 해외 바잉과 상품 기획을 총괄하는 차장 자리를 제안하며 손을 내밀어준 게 대학 선배인 박 대표여서, 나는 그의 지시라면 가급적 따르는 편이었다. 김수오는 박 대표 친구의 아들로 올해 스물일곱 살이었고 몇 달 전 정직원으로 채용됐다. 그의 아버지는 치아 교정 전문의로 전국에 네트워크 병원이 30곳쯤 있는 치과 체인의 대표라고 했다. 잘은 몰라도 박 대표는 김수오의 아버지에게 얼마간 빚을 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불쑥 남의 사무실을 찾아와 맡겨둔 듯 자기 아들 일자리를 요구할 수 있겠느냐고, 그것도 정규직을, 의사라면 상식이 있는 사람일 텐데, 하고 직원들끼리 수군댔다. ─우리 아들이 올해 졸업하는데 패션을 하고 싶다네. 그러면서도 아주 당당하거나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박 대표에게 전해 들으니 그 집안은 대대로 의사였는데, 김수오가 삼수를 하고서도 의대 입시에 실패했다고 했다. 메디컬 편입을 하라고 생명공학부에 보내놨더니, 학점 관리는 뒷전에 갑자기 패션MD를 하겠다고 선언해 집안이 뒤집어졌다는 것이다. 경력직 뽑아달랬더니 낙하산 신입이 웬말이냐고 투덜대는 직원들에게 박 대표는 김수오가 비싸고 좋은 것들 많이 보고 자랐으니 감각은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미감이니, 취향이니, 요즘 그런 거 없는 애들도 있어요? 내가 말했다. ─말하자면 그렇단 얘기지.
- 손호영
- 2026-10-01
문장웹진 소설
암순응암순응 박선우 스트레칭의 마지막 단계는 아기 자세다. 우선 바닥 매트에 두 무릎을 꿇고 발뒤꿈치에 엉덩이를 내려놓으며 앉는다. 상체를 숙이면서 두 손을 머리 위로 곧게 뻗는다. 그러면 어깨의 삼각근과 등허리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얕은 신음이 절로 나온다. 그대로 이마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것. 그리하여 더는 내려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 자세를 갖춘 뒤에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속으로 하나, 둘…… 서른까지 세다 보면 몸의 뒤틀린 부위들이 바로잡히는 게 느껴진다.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제자리에 끼워 맞춰지는 기분. 신체가 교정되는 감각은 정신 상태로도 이어진다. 머릿속이 한결 맑아지는 듯하다. 힘이 다하면 매트 위에 드러눕는다. 두 눈을 감은 채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뱉어낸다. 몸이 이완되는 감각에 집중한다. 그러면 호흡이 잦아들면서 주변의 모든 것이 서서히 멀어져감을 느낄 수 있다. 아득해지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도. 어느 순간에는 나 역시도. 스트레칭을 마친 후에는 몸을 일으켜 방문 앞으로 간다. 나는 번번이 문손잡이를 쥔 채 망설이다가 문을 열어젖힌다. 거실로 나가면 가죽 소파에 길게 누운 아버지가 보인다. 올해 일흔넷의 아버지는 한 손을 이마에 올려둔 채 나지막이 코를 골고 있다. 더는 염색을 할 수 없어 백발이 성성해진 머리카락과 고목 껍질처럼 버석하고 거무스름해진 얼굴, 움푹 파인 볼, 살집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앙상해진 팔다리로 맥없이 축 늘어져 있다. 매일 아침 나는 그 모습을 본다. 하루가 다르게 기력을 잃으며 쇠약해지는, 무시로 잠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어 헤어나질 못하는 아버지를 마주한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더디게 흐르다 못해 한순간 뚝 멈춰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현실과 유리되면서 내가 아버지의 세계에, 그러니까 산 자들의 세계에서 죽어가는 자들의 세계에 휩쓸려 들어와버린 것만 같다. * “이대로면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사실 겁니다. 항암을 하시면 6개월에서 1년쯤이고요.” 혈액종양내과 허 교수는 아버지의 검사 결과를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말해주었다. 초진을 맡았던 소화기내과 전문의와 위암센터 외과의가 입에 지퍼라도 채운 양 말을 삼갔던 것에 비하면 훨씬 나았고, 어쩐지 속 시원한 감정마저 들었다. 처음으로 상급종합병원 의사에게 신뢰감을 느낀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허 교수의 소견에서 새로운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전이성 위암 말기 환자의 여명’ 같은 키워드로 검색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느낀 속 시원함은 아버지가 시한부 환자임을 누군가 육성으로 선언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동안 가족은 물론이고 지인들조차 쉬쉬해온,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그러니까 네 아버지는 얼마나 남은 거니?”―공식적으로 논할 수 있게 된 후련함 말이다. 그래, 내가 의사에게 원하던 게 바로 이런 거였어. 우리가 환자에게 도
- 박선우
- 2026-10-01
문장웹진 소설
사람 같은 이름을 지어 주면 오래 산다사람 같은 이름을 지어 주면 오래 산다 임아라 그가 돌을 키우자고 했을 때 나는 딸기를 먹고 있었다. 케이크에 얹은 것치고 과즙이 실해서 턱이 저릿했다. 나는 테이블 매트에 포크를 내려놓고 오른뺨을 어루만졌다. 입안에 머금은 걸 삼켰는데도 신맛이 가시질 않았다. 어금니에 들붙은 씨가 거슬려서 자꾸 혀끝으로 더듬댔다.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돌을 키우자는 거지. 문득 씨가 아니라는 게 떠올랐다. 딸기의 겉에 박힌 점들 말이다. 그게 열매고, 그 속에 더 작은 씨가 있다는데, 그렇다고 그걸 달리 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골라낸 씨를 검지에 뱉었다. 침과 뒤엉켜서인지 꽤 부푼 것 같았다. 자기한테 도움이 될지도 몰라. 나한테? 그래, 우리한테. 그의 윗입술에 묻은 생크림이 바르르했다. 나는 그것을 닦아 주려다가 관두고 나이프를 집었다.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사면 으레 주는 플라스틱이었다. 초는 몇 개 드릴까요, 직원이 물었을 텐데. 그가 뭐라고 답했을지 궁금했다. 어쨌든 초는 없고, 나이프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손잡이에 달린 마개를 열었더니 성냥 두 개비가 쏟아졌다. 돌을 키우기도 해? 응, 돌도 키울 수 있대. 그는 컵을 움켜쥐고 이리저리 살폈다. 또 커피를 흘린 모양이었다. 그 컵은 가장자리가 겉쪽으로 휘어져 있어서 물이 넘치기 일쑤였다. 게다가 서랍에 들어박힌 처지길래 버리려고 했는데, 그가 발끈하는 바람에 그러지를 못했다. 너무 말짱하다는 게 그의 항변이었다. 이후 그의 커피는 그 컵에만 내줬다. 똑같은 컵이 있었는데 이미 버렸다는 건 굳이 밝히지 않았다. 왜 돌이야? 손이 가는 건 싫다며. 그렇다면 돌 만한 게 없지. 그가 살며시 컵을 기울이며 커피를 홀짝였다. 나는 슬쩍슬쩍 드러나는 둥근 밑면을 바라보면서 유난히 까맣다고 생각했다. 테이블에 닿을 때마다 닳았을 테니까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하얀 컵과 대비되어서 생경하게 다가왔다. 그 너머에 있는 그의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흰자위를 바삐 오가는 걸 보아하니 뭔가 숨기고 있었다. 실은 주문했어. 나는 잼이 덕지덕지한 접시를 토닥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몫의 케이크는 모로 누운 채로 사이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겹겹인 시트에서 반쪽짜리 딸기들을 빼낸 흔적이었다. 언제부턴가 버터에서 여물의 향을 맡았다. 내가 투덜댔더니, 그는 여물의 근처라도 가본 적이 있느냐며 놀렸다. 그때도 나는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고개를 가로저어야 했는데, 어째서 끄덕였는지 의문이었다. 미리 이름을 지어 주자. 그가 반절 남은 케이크를 상자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그새 눅눅해진 받침대가 흔들려서 잠시 애를 먹었다. 나는 식탁에 흐트러진 빵 부스러기를 그러모으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검지에 뱉은 씨앗이 온데간데없었다. 어딘가로 옮았을 텐데, 전연 기억나지 않았다. * 김이 피어오를 정도로 따끈한 물줄기를 쏘였더니 순식간에 케이크가 일그러졌다. 폭우를 맞은 모래성처럼 쉬이 뭉그러졌다. 자잘한 건더기는 배수구를 향해 미끄러지고,
- 임아라
- 2026-09-01
문장웹진 소설
심심심심 임승훈 심심함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심심한 적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래서 누군가가 "심심해서 집안을 싹 바꿔봤어."라든지, "심심해서 머리핀을 또다시 찾아봤어."라고 하면, 나는 그들이 말하는 심심함이란 일종의 수사라고 생각했다. 진짜 이유는 있는데 말하기 귀찮거나, 말하지 못할 무언가가 있다고. 대체 그 심심함이라는 게 무엇이길래 그만한 에너지를 들여서 굳이 무언가를 저지르냔 말이다. 하지만 이 년 전 급작스럽게 아내인 진서가 세상을 떠난 후, 나는 심심함에 시달렸다. 사실 위의 말들은 주로 진서가 한 거였다. 그녀는 '심심해서 뭐뭐 했어'란 말을 습관적으로 했다. 나는 때로는 재치 있고 수사적인 그녀의 화법이 귀여웠고, 때로는 완곡적인 그녀의 태도가 우스웠고, 때로는 자기 마음에 시달리다 지쳐버린 그녀가 답답해 종종 짜증이 났었다. 왜 그녀는 본심을 밝히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심심. 진서는 왜 심심했던 걸까?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건 진서와 나의 기질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농담을 하는 사람이었다. 뭐 대단한 농담도 아니다. 대화하다가 내가 무심코 '지금'이라고 말하면, 그녀는 잽싸게 내 말을 자르고 '이 순간-'이라고 흥얼거리는 식이었다. 그러면 나는 재빠르게 눈치를 채고 '바로 오늘'이라고 대꾸해주곤 했다. 섹스할 때도 그 버릇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 위에 벌거벗은 채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비장한 표정으로, "어디, 오늘 자네 실력 좀 확인해 보겠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진서 언니, 그럼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곤 옷을 훌렁 벗었다. 그 무렵 우린 홍명희의 소설 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진서와 광명 본가에서 아버지가 내놓은 책 박스를 뒤적이게 되었다. 진서와 나는 그 속에서 을 꺼내 들고 "우리도 이거 보자, 보자."라며 집에 가져왔다. 그 소설에서 무시무시한 사내들이 임꺽정에게 이렇게 말했다. 꺽정이 언니, 이 우라질 놈의 목을 뎅강 자를깝쇼? 진서는 또한 예민하고 침울한 사람이기도 했다.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툭 내뱉고는(주로 꿈에서 내가 자기가 키우던 양을 잡아먹었느니, 섬세한 사람에겐 섬세한 날이 있다느니 했다), 긴 침묵에 빠지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모스 부호처럼 짤막하고 건조한 말을 하긴 했으니 완벽한 침묵은 아니고, 침묵의 근사치에 이르는 그런 상태가 되었다. 짧으면 반나절, 길면 이틀 정도. 그러다가 그 침묵(의 근사치)에서 벗어나서 문득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였다. "심심해서 LA갈비를 만들어봤어."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내 사랑은 진서의 사랑과 조금 달랐던 걸까? 확실히 나의 사랑엔 고통이 없었다. 친구의 후배였던 진서를 처음 보자마자 호감을 느꼈다. 까맣고 가느다랗고 풍성한 단발머리,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그녀는 왠지 어떤 정물 같았다. 그런 그녀를 나는 힐끔힐끔 쳐다봤는데, 그때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후, 한 달 뒤에 우린 연애를 시작했고,
- 임승훈
- 2026-09-01
문장웹진 소설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찾아 계속 헤맬 거예요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찾아 계속 헤맬 거예요 이승은 수연은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다른 공부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일이 직업이 되었다. 월급이 높은 편도 아니었고 학원강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었지만, 수연은 아이들과 지내면서 학원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한 손에 샤프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우개 똥을 굴리며 수학은 왜 배워야 하는 거예요? AI가 있잖아요. 이제 수학은 필요 없는 거 아니에요? 투덜거리다가도 방긋 웃으며 떡볶이를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이 귀여웠다. 작은 규모의 학원은 번화가에서 살짝 벗어나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요즘 아이들 같지 않고 순한 편이라고 다른 과목 선생님들도 입을 모아 말했다. 학원에서 일하는 삼 년 동안 수연은 무탈하게 지냈다. 월급이 밀리지도 않았고, 선생님들과 의견도 잘 맞았다. 크게 아프지도 않았고 사소한 말다툼을 빼고는 우재와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지냈다. 출근하면서 아이들에게 들려줄 재미난 퀴즈를 생각했고 퇴근하면서는 그날 볼 OTT를 고르고 냉장고에 남은 식재료와 장 볼 것들을 체크했다. 수연은 아이들이 수포자가 되지 않도록 일차함수와 연립방정식을 쉽게 이해할 방법을 고민했다. 주말에는 가성비 좋은 맛집을 찾아두었다. 우재와 외식을 하고 집에서 OTT를 보는 것 말고 다른 걸 해 보고 싶기는 한데 뭘 해야 할지, 우재와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고민이었다. 그해 여름 폭우가 쏟아지고 나서 이런 고민은 사라졌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내리고 며칠 후에 천장에서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집주인이 옥상에 방수포를 깔아주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정 불편하면 나가라고 한 이후로 수연은 하루 종일 집과 돈을 생각했다. 부동산 앱을 다섯 개 깔고 대출 조건을 알아보면서 진짜 고민이 시작되었다. 늘 아끼면서 지냈지만 모아 놓은 돈은 없었고 집값은 훌쩍 뛰어있었다. 대출 조건은 까다로웠고 대출을 받는다고 해도 매달 빠져나갈 이자를 생각하면 망설여졌다. 이사를 해야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사실은 막막한 게 아니라 뻔했다. 수연이 갈 수 있는 집은 반지하 아니면 또 다른 재개발 지역이었다. 수연은 자신의 상황을 차분히 받아들이고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파악하고 싶었다. 그래야 느닷없이 찾아온 이 난제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빗물에 얼룩진 천장과 벽지를 보며 누워있던 어느 날 수연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삶을 그려보았다. 이 동네에 지낼만한 집이 없다면 살던 동네를 떠날 수도 있었다. 이번 기회에 서울을 벗어나 지방에서 학원 일을 할 수도 있고 학원 일이 아닌 다른 일을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었다. 다양한 선택지가 펼쳐지자,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수연은 오랜만에 설레었다. 하지만 우재의 생각은 달랐다. 네가? 아무 연고도 없는데 혼자서? 지방에서 일자리 구하기 쉽지 않을 텐데. 우재의 말에 수연의 설레던 마음은 사라졌다. 우재야. 응? 그냥 잘될 거라고 말해주면 안 돼? 너 차도 없고 운전도 못
- 이승은
- 2026-09-01
문장웹진 소설
자꾸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자꾸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김효나 그는 얇은 회색 잠바를 입고 있었다. 아니다. 그의 시신은 얇은 회색 잠바를 걸치고 있었다. 아니다. 그의 얼어붙은 육체는 얇은 회색 잠바 속에 내동댕이쳐 있었다. 내가 모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잠바였다. 아니다. 내가 모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잠바였을 뿐 아니라 한 번도 본 적 없는 체크 남방, 한 번도 본 적 없는 추리닝이었다. 아니다. 내가 모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잠바, 남방, 추리닝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모르는, 가장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은 얇은 회색 잠바였다. 그의 얼어붙은 육체가 내동댕이쳐진 잠바, 남방, 추리닝 사이에서 내가 가장 모르는, 가장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은 얇은 회색 잠바라고 썼지만 실은 가장 모르는, 가장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은 그였다. 아니다. 실은 가장 아는, 가장 여러 번 본 적 있는 것은 그였다. 아니다. 실은 가장 아는, 가장 무수히 본 적 있는 그였지만 이런 모습의 그는 아니었으므로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없었다. 알아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볼 수 없었다. 아니다.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가갈 수 없었다. 아니다. 다가갈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차갑게 얼어붙은 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흰 가운을 입은 직원은 가까이 와서 보시라고 말했다. 아니다. 흰 가운을 입은 직원은 가까이 와서 보고 확인해 주셔야 한다고 말했다. 아니다. 흰 가운을 입은 직원은 가까이 와서 확인해 주지 않으면 무연고자 처리가 될 거라고, 시신이 안치된 지 닷새가 지났는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아니다. 나는 알았다는 식으로 입술을 웅얼거렸다. 아니다. 나는 다만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전히 그에게서 멀리, 가능한 한 멀리 뒷걸음질 치고 있었고 흰 가운을 입은 직원 역시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이런 일이 적지 않은 것 같았다. 즉, 이곳에서는 시신에게서 뒷걸음질 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다. 이곳에서는 시신에게서 옆걸음질 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다. 이곳에서는 시신에게서 뒷걸음질이나 옆걸음질 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그 사람들 모두 결국에는 시신 곁으로 바짝 다가가야 하는 것 같았다. 흰 가운을 입은 직원은 가까이 와서 보셔야 한다고 반복하여 말했고 나는 그렇게 했다. 아니다. 그렇게 하려고 했다. 아니다. 반만 그렇게 했다. 그러니까 반만 가까이 다가갔고, 반만 보았다. 아니다. 겨우 두 걸음 다가갔고, 눈의 초점을 흐리게 하여 그를 보았다. 아니다. 초점을 흐리게 하여 본 것은 그의 얼굴이었고,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만 분명히 보았다. 아니다. 의도적으로 초점을 흐리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 시선이 닿을 때마다 초점은 저절로 흐려졌다. 나는 내 눈이 자동 초점 기능을 가진 카메라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고장 난
- 김효나
- 2026-09-01
문장웹진 소설
늦은 새해늦은 새해 주나영 우기 막바지인 3월 아침, 조식당에 안까지 빗소리가 크게 들렸다. 직원은 사다리에 올라 창에 붙은 검은 시트지를 문질렀다. 들뜬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몇 번이고 눌렀지만 쉽게 붙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해서 창을 가려야 하나 싶었다. 어젯밤 체크인할 때 받은 안내문 상단에는 영어로 ‘침묵의 날(녜삐 데이)’이라는 낯선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루 동안 발리의 불빛과 소음을 줄이며, 투숙객의 호텔 외부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안내문을 건네던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새해 첫날을 아주 조용하게 보내는 풍습이 있거든요.” 나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호텔 직원들은 목소리를 낮췄고, 손님들도 주변을 살피며 말을 줄이는 듯했다. 사다리 위의 직원은 테이프를 한 조각 더 잘라 시트지 가장자리에 붙였다. 그래도 한쪽이 다시 들뜨자 시트지 한 장을 떼어 사다리 아래로 내려보냈다. 창의 절반쯤이 드러났고, 유리 바깥 면을 따라 빗물이 흘러내렸다. 남편은 케이지-프리 에그 화이트 오믈렛을 주문했다. 쉰을 넘긴 뒤부터 식단과 운동에 부쩍 엄격해졌다. 디종 머스터드 병을 열어 숟가락으로 접시 귀퉁이에 덜어 놓은 뒤, 오믈렛을 잘라 찍어 먹었다. 면도를 공들여 한 듯 턱끝이 말끔했다. 맞은편에 앉은 혜리는 빵 바구니에서 올리브 치아바타를 집어 들더니 박혀 있는 올리브만 손끝으로 빼 먹었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어깨에 들러붙어 있었다. 머리를 귀 뒤로 넘길 때마다 손가락에 물기가 묻었다. 나는 냅킨 상자를 혜리 쪽으로 밀었다가 멈추었다. 혜리는 이미 옆에 놓인 냅킨으로 손끝의 물기를 닦고 있었다. 커피는 식어 있었다. 혜리는 남편과 전처 사이의 딸이다. 남편은 나보다 열다섯 살 많고, 혜리는 나보다 열다섯 살 어리다. 혜리가 초등학생 때 엄마와 함께 호주로 건너간 뒤, 남편은 일 년에 한두 번 혜리를 만났다. 생일과 크리스마스에는 빠짐없이 선물을 보냈다. 남편이 서재에서 혜리와 영상 통화를 하는 날이면 나는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를 조금 줄였다. 주방에 갔다가 웃음소리가 들리면 물병만 꺼내 돌아왔다. 통화가 길어지는 날에는 먼저 씻고 침실로 들어갔다. 남편은 통화를 마친 뒤 혜리의 학교생활과 새로 키우기 시작한 동물에 대해 말해 주었다. 나는 그가 보여 준 사진을 몇 장 넘겨본 뒤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혜리는 빵에서 올리브를 하나 더 빼 입에 넣었다. 남편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혼인신고를 했지만 결혼식은 혜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미뤄 왔다. 결혼식은 석 달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사흘 정도 쉬고 오자고 한 것도, 한국과 호주의 중간쯤인 발리에서 혜리를 만나자고 한 것도 남편이었다. 출발 전날 밤, 남편은 서재에서 청첩장이 든 봉투를 가져왔다. 구겨지지 않도록 얇은 파일 사이에 끼워 여행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혜리는 아보카도 스프레드를 빵 위에 고르게 펴 발랐다. 한입 베어 물자 빵 껍질이 바스러져
- 주나영
- 2026-08-01
문장웹진 소설
장정호장정호 장희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공기가 차고 맑은 곳. 다른 곳보다 해가 빨리 뜨고 지는. 다른 누군가의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희재에게서 그가 지내고 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우듬지 너머로 뜨는 어슴푸레한 새벽 동이나 찹찹한 분위기,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 같은 임야를 떠올렸다. “죽어버렸으면.” 희재는 허공 속의 한 점을 보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그곳에서 죽어버렸으면. 희재는 어머니가 복수가 찬 채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도 같은 말을 했다. 분명히 그때와는 다른 뉘앙스가 있다고 느꼈는데,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이른 아침부터 희재와 나는 서둘렀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입을 헹구고, 어제 벗어두었던 청바지를 주섬주섬 입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희재는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양손으로 손잡이를 쥔 채 창문으로 머리를 기댔다. 저기 뭐가 죽은 것 같아. 아니다, 다시 보니까 없어. 진짜 아무것도 없어. 희재는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혼자 말하고 답했다. 한참 후 주위가 고요해진 것 같아 옆을 보니 희재가 입을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우리는 휴게소에서 백반과 우동을 나누어 먹었다. 밥을 다 먹고도 시간이 남아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통유리창 너머로 구름 한 점 없이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과 휴게소 뒤편으로 펼쳐진 강줄기를 바라보았다.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휴가철이 지나서인지 대체로 가는 곳마다 사람이 없었다. 그럴 필요까지 없었는데 왜 그렇게 서둘렀냐고 묻자 희재는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희재의 아버지 얼굴을 보고 안부를 확인한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그는 삼 년 전 아내가 간경화로 죽고 난 후 홀로 지내다 언제부턴가 야산에서 지내고 있었다. 양산에 있던 그가 어떻게 산천에 있는 그곳으로 들어가 살게 됐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는 미처 주변을 정리하지도 않았다. 아직도 그가 살던 집 냉장고에는 그가 먹다 남긴 반찬들이 썩어가고 있을 터였다. 희재의 어머니가 살아있을 적부터 기르던 식물들, 호야 나무, 산세비에리아, 스투키가 말라비틀어진 채 죽어 있을 것이다. 나는 먼지가 가득한 집을 떠올렸다. 어렸을 적부터 희재와 희재의 가족이 살았던 집. 희재와 나는 명절이면 그곳에 가서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 돌아오곤 했다. 간간이 희재와 희재의 어머니, 내가 웃을 때면 그는 크고 검은 눈으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사람이니까.” 그가 왜 그런 곳까지 가게 되었을까 하고 묻자 희재가 대답했다. 자신도 우연히 그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뿐 더는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뭐든 다 자기 멋대로인 사람.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에 다른 사람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그냥 그런 사람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죽어버렸으면. 나는 희재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본 그는 그저 평범한 남자였다. 말이 없고 등이 조금 굽은 왜소한 노인. 그는 묵묵히
- 장희원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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