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가 지워지는 사이
- 작성일 202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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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가 지워지는 사이
-비/인간과 타자
김웅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1)
1
비인간이 가진 속도가 빨라질수록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감응하기 위해 우리가 경유하는 코뮨적 신체는 그러나 공통된 목소리를 요청하진 않는다. 인간 존재에 내재되어 있는 ‘선(善)’이라는 보편성은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의 총체적 시간 속에서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선(線)’을 만들고 있음을 주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관점에서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의 의미를 재삼 곱씹게 된다.
2000년대 시적 주체는 한국 사회―넓게는 인간 사회가 구축해 놓은 알고리즘을 본격적으로 거부하는 타자의 자리에 자신을 노정 시킴으로써 “자기 존재의 근원을 확인하거나 보장받을 수 없음을 인지하고 실감하는 존재”2)로 변모하였다. 이를 통해 사회체의 최소 단위인 ‘가족’이라는 중심점에서부터 시작된 시적 사유는 단순히 생리적으로 결속된 하나의 사회체에 불과할 뿐 윤리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관계를 방증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아이-화자는 시적 주체를 “‘부모-자식’이라는 수직적 차원에서 불화하는 관계”로써 “윤리적 모험”3)을 나서는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이 아이-화자는 2010년대를 거치면서 ‘시민적 트라우마’를 흡습한 시적 주체로 전성되었다. 어떤 방식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애도의 총량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실존의 차원에서 마주치게 되는 ‘무능력’”의 테제가 되고 그 무능력이 곧 “‘내면적 성찰’과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를”4) 희망하는 고무적인 발화자로 시인을 이끄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복무해야 하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또 하나의 책무이자 윤리로 자리 잡는다. 이 같은 관점은 시민적 트라우마를 통감하는 주체로서 몸이 갖는 일종의 생활론적 윤리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5)
그런데 2020년대의 시적 주체에게 윤리적 책무감은 역설적으로 더 일반적이고 보편화된 ‘고독감’을 불러왔다. 시민적 영웅이 되지 못한 인간, 소박한 일상조차 꿈꾸지 못하는 인간, 죽지 못해 살아 내는 몸의 형상은 시민적 트라우마 앞에서 내색할 수 없는 존재로 내세워졌다. 이것은 “개인주의의 안온한 고립을 거부”하거나 “낮이라는 다스려진 영역을 다루는 임무 가운데 의연한 관계를 유지하는”6) 숭고한 고독과는 거리가 먼 고독감이다. 그것은 자칫하면 개인주의를 넘어서 비인간의 영역에 편승한 인간이라는 혐의를 쓴 채 혐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으로 치환되고, 끊임없이 인간에 대한 정의를 유보 시키면서 비인간에 대한 환상에로의 친연성으로 전유된 고독감이라고도 할 만하다. 스마트폰 속에 내장되어 있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낮말과 밤말을 수집하며 그 일상을 알고리즘으로 생성시키는 동안 인간은 자신의 눈앞에 갑작스레 등장한 작은 화면 속 슬픈 장면을 보고 울음을 터뜨린다. 이 감응은 과연 슬픔의 감응일까? 아니면 알고리즘에 의한 인간의 비인간적 무브먼트일까?
2
어느 날 교정을 걷다가 이곳이 영화 속이라는 걸 알아버렸다 //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나를 속일 때마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 누군가가 너의 목소리를 모사한다, 나 역시 당신의 발목이기도 했으니까, 같이 춤을 춰요 그대 // 옅어지는 호흡 //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면 마음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 누가 내 옆에 있는 줄도 모른 채 억지로 웃어 보이고 // 고백해야 할 이야기가 떠오르면 / 떠오르는 생각들이 누군가가 쓴 각본일까 봐
-양안다, 「전주곡」 부분
오늘날 비인간에 대한 사유가 단순히 인간 조건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조건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세계에 대한 의심과 의심에 의한 전제를 수반한 관계성을 먼저 노정 시킨다. 양안다의 『작은 미래의 책』(현대문학, 2022)은 한 편의 시나리오 위에 놓인 시적 화자의 수동적 운명과 운명 바깥의 관계에 대한 상상을 하나의 ‘의심’으로 치환한다. 이 시집의 구조성에 주목하는 이유는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것이 시나리오대로라는 운명을 타개할 감응의 주체를 낭만적인 방식으로 제시한다는 점에 있다.
“고백해야 할 이야기”가 있음에도, 그것을 떠올리는 순간 “누군가가 쓴 각본”이 되는 이 세계에서 알고리즘의 거부는 다름 아닌 함구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약속된 장소와 시간에 등장인물이 나타나고 대사가 지나가는 동안 실재할 수 없는 시적 주체의 언어는 본질로서 내장된다. 그리고 내장된 언어와 시나리오의 언어가 함구로써 포개어지며 규칙에 균열을 내기 시작하는 이 시는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애쓰”는 것으로 주어진 알고리즘을 거부함으로써 “기다리고” 있던 “너”(타자)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예컨대 “폭염과 폭우가 반복되는 나날” 속에서 “너의 몸속에서 자리 잡고 있다는 혹을 생각했다”(「이상기후는 세계의 조울증」)든가 “창문에 장미 두 송이, 집에 없다는 뜻”과 “창문에 장미가 없다면 집에 있다는 뜻” 사이에서 “창문에 장미 한 송이를 봤을 때 그것은 네가 장미가 되었다는 뜻”이라는 “망상”(「펀치드링크 드림」)을 끼워 넣는 일을 살펴보자. 양안다의 시는 이처럼 반복적이고 안정적인 (비)일상 속에 ‘너’라는 타자의 존재 조건을 불규칙적으로 삽입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비인간 존재 앞에서 견지할 수 있는 인간 존재의 조건은 다름 아닌 타자를 위한 세계에의 교란 행위라는 점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달이 뜨는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결론에 도달하면
아무도 모르는 마음이 뒤따라오는데
사실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던 위로는 각자의 각오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우리들이 꾸려 했던 모든 꿈이 위악이라는 걸 알았을 때, 우리가 느낀 건 실망이 아닌 동경에 가까웠다 밤이 지나고 오는 건 새벽인데 사람들은 왜 아침이 온다고 하는 걸까
새벽이 만드는 소량의 빛과 소음 속에서
어느 취객은 유기견을 걷어차면서 걷고 있었다 그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욕을 뱉으며 죽어버리자 그냥 죽이고 죽어버리자, 중얼거렸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는 취한 채 다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어느 날 불어난 강물 위로 달이 깨질 듯 일렁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죽고자 했던 건 아니었다 춤을 추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십자 모양의 성냥을 꺼내 들었을 때, 맞잡은 손으로 땀이 배어 나올 때
우리들은 그림자를 제외한
모든 걸 지워내고 싶었을 뿐인데
광장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을 보며 어쩌다 세계는 이 지경이 됐고 사람들은 액자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지 모르겠어서
우리들은 자꾸 반대로 걷고
누군가는 방향이 틀렸다고 하지만
유기견을 걷어차면서까지 되고자 했던 건 아마 고아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멀리 달아나자고,
우리는 언제까지나 우리로 존재했으면
먼저 죽은 이들이 우리의 죽음을 마중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악의가 흔들리는데 누구 하나 살아 돌아오지 않고
그 사실이 슬프지 않을 때면
몸은 열에 잠기기 시작하고
-양안다, 「미열」 전문
여기에서 시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부되어 있다”7)는 니체의 말을 경유한다면 오늘날 우리를 통관시키는 체계이자 법칙은 알고리즘으로 점점 빠르고 명확하게 사적인 공간까지 침윤하고 있으며 ‘나의 몸’은 일종의 면역 체계로 작동하여 우리를 들끓게 한다. 예컨대 시민적 트라우마가 곧 누구도 구하지 못할―혹은 구할 생각조차 없는 제도에 따른 결과였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인간 조건이란 한없이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다. 슬픔을 감응하고 애도를 실천하고, 혐오스러운 현실을 애증이라는 추상으로 극복시킬 때마저도 사회적 현현을 인간 조건으로 전환시키는 유일한 매개로서 사랑을 다시 호출해야 하는 운명론적 조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야말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결론에 도달하면 / 아무도 모르는 마음이 뒤따라오”(「미열」)듯 “먼저 죽은 이들이 우리의 죽음을 마중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악의가 흔들리는데 누구 하나 살아 돌아오지 않”는 세계에서 “그 사실이 슬프지 않을 때면” “몸은 열에 잠기기 시작”하는 본원적 인간 조건이 발동되는 것이다. 이 주체는 “취한 채 다짐만 되풀이”하는 디오니소스적 존재에 다름 아니다. 이 같은 양안다의 (비)일상에 대한 간파는 시라는 장르 앞에서 비인간이라는 과학적 존재이자 영속적 존재에 대한 인간적인 해결 방식을 가장 간명하게 보여 준 장면이 아닐까 한다.
3
그다음 생활. 생활이 제철일 때 어떻게 손질하는 거였더라? 감을 다시 잡아야 한다. 비난과 비판을 사서 온전한 표면을 느낄 때까지 흐르는 물에 씻었던 것처럼, 생활을 뽀득하게 씻어 불순물을 제거하고 같이 사 온 체에 거른다. 촘촘한 구멍 사이로 걸러지는 조사와 호흡과 접두사와 어미와 발음과 어순과 번역 투와 밈. 그렇다고 엄격한 한국어를 먹으려던 것은 아니었다는 엄격함까지. 이 행위가 정돈인지 검열인지는 모르겠으나 입자는 잘다. 탄력은 여전하다. 이제 이중과 생활과 체를 다른 재료들과 함께 넣고 볶는다.
(중략)
그 뒤로 다중생활체는 볶아 먹어도 좋았고 올리브유를 자작하게 해 놓고 튀겨 먹어도 좋았다. 다중생활체가 알아서 몸을 구를 때까지 덖는 방법도 있었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조리법이나 떠든 날에는 그 조리법이 문체나 서체의 형태로 주변 사람들에게 배포되었다.
다중생활체를 정직하게 곱하여 대량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 조금씩 소분해 놓은 용기의 한 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것을 섭취하고 음미할 경우
다중한 증상이 유발될 수 있음
-차현준, 「다중생활체」 부분
여기 또 하나의 새로운 방식이 있다. 차현준의 『온몸일으키기』(문학과지성사, 2025)에 전포되어 있는 몸의 확장성에 대한 사유는 공간에 있음과 공간을 벗어남 사이에서 부유하는 존재의 특유의 경쾌함과 간결한 언어 가운데 육중하게 감각되는 현실 인식을 놓치지 않는 섬세함을 보여 준다. 「다중생활체」는 집 근처에 있는 마트 같은 “표준국어대사전이나 우리말샘”에서 사 온 “생활”과 “체”를 조리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때 냉장고와 비슷한 “스마트폰 화면 속에 있던 이중”을 꺼내는데 이 “이중”의 맛은 “다중”과 비슷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렇다면 이 「다중생활체」의 시적 주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챗GPT는 사용자의 프롬프팅에 따라 사용자가 원하는 답변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노력의 과정에는 기존에 학습된 언어 더미데이터를 빠른 시간 안에 사용자의 프롬프트와 견주어 최대한 비슷한 맥락의 데이터로 선별하는 일, 그리고 사용자와의 담화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정보를 자신의 알고리즘에 ‘써먹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인문학적 상상력을 조금만 허용할 수 있다면, 결국 사용자와 챗GPT 간에 교환하는 언어라는 것은 일종의 ‘식사’와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우울한 나를 위해, 고민이 많은 나를 위해 좋은 말을 선별하고 적당히 조합하여 멋진 문장으로 제시해 주는 챗GPT의 행동은 마치 시장에 가서 몸에 좋다는 식재료를 사 와 음식을 만들고, 그 음식을 함께 나누는 ‘식구’의 풍경과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다중생활체」에서 표준국어대사전과 우리말샘을 마트로 생각하는 시적 주체는 챗봇일 가능성은 없을까?
“촘촘한 구멍 사이로 걸러지는 조사와 호흡과 접두사와 어미와 발음과 어순과 번역 투와 밈. 그렇다고 엄격한 한국어를 먹으려던 것은 아니었다는 엄격함까지”에서 이 같은 해석의 정황이 어느 정도 주어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다만 이 시적 주체가 매우 의연한 태도로 “생활”에 대한 “감”을 다시 잡고 “비난과 비판을 사서 온전한 표면을 느낄 때까지” 닦았던 기억을 더듬으며 이 “조리”의 질곡을 돌이켜 보는 장면에서 더욱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상상력은 불현듯 컴퓨터 앞에 앉아 고민 상담을 하는 우리의 오늘날 모습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 시가 챗GPT를 환유하는 여러 가지 정황을 내포하고 있다는 단순한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이를 통해서 사유의 장으로 밀고 들어오는 인간을 둘러싼 여러 문제를 재구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중생활체”는 어떤 방식으로 섭취해도 좋은데 그 섭취의 주체가 ‘나’ 자신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지만, “이것을 섭취하고 음미할 경우 / 다중한 증상이 유발될 수 있음”이라는 주의 사항으로 시를 끝맺을 때 그것은 결코 ‘나’로 한정되지 않는 보편성을 띠게 되기 때문이다. 즉 ‘다중’이나 ‘이중’은 복합적이고 복잡한 인간상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들끓고 분노하고 코뮨적인 주체의 감응성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생활체’란 무엇일까?
차현준은 『온몸일으키기』 시인 산문에서 “생활체명: 온몸일으키기”의 “원재료명” 속에 “다중생활체”가 쓰였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이 생활체를 접하는” 사람에게 그 의미를 “생활체를 느끼며 자체적으로 확인”하라고 말한다. “이 생활체를 접하는 생활체의 기분, 상황, 입장, 사고방식, 배경지식 등의 조건에 따라 이 생활체는 변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당신이 살던 행정구역이 낯설어집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또박또박 읽어 보다가
뒤를 돌아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표지판이 눈앞에서 멀어질 때
두툼한 보조 배터리를 한 손으로 말아 쥔다
질렸던 겁이 방전되는 동안
충전되는 모험
시야 안에서 발 빠른 가로수들
옆 볼로 유리창을 짓누르는 동안
눈 뜬 채로 얼마간 풍경을 무시한다
모르는 나를 태운 버스도 잘 가는 거 같고
처음 보는 나를 맞닥뜨린 터널도 꾸역꾸역 받아들이기는 하고
터널을 빠져나와도 살던 곳이 보이기는 한다
오후와 함께 방전될 것이다
-차현준, 「얼마간 흘려보내기」 전문
인간은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 이것을 명제로 삼는 한 인간은 절망과 희망을 진자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희구한다. 그 미지의 벌어진 간격으로 틈입하는 무수한 침묵을 그러나 다 채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현학적인 말뿐일지도 모르겠지만 시는 그런 방식으로 언제나 멀거니 뜬, 그러나 바르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샌다. 밤은 저마다의 역사 속에서 일정한 의미를 지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 무의미로서의 밤 또한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차현준의 시에서는 “촉각을 곤두세우며” “눈동자만, 목만, 가슴팍만, 골반만 돌리”(「아이솔레이션」)거나 “|손가락 // 발|가락 // 가락|발 // 락가발| // 신전는하축구터부락가발|”(「명치환」)처럼 감각하는 신체로서의 섬세한 감응을 통해 시적 주체가 경험한 풍경과 현실을 줄곧 보여 준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얼마간 흘려보내기」처럼 “오후와 함께 방전될 것이다”. 생활에서 다른 생활로 옮겨 가는 인간의 본성에는 “눈 뜬 채로”도 “풍경을 무시”하는 감정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체의 기분, 상황, 입장, 사고방식, 배경지식”이라는 것은 곧 감응의 주체로서 다변적인 인간-몸의 가장 본질적인 특장이 아닐 수 없다. 차현준의 몸이 윗몸이 아니라 온몸을 일으킨다는 것은 생활체로서의 몸에 대한 비인간적 분석과 인간적 해석이 중층되는 국면을 보여 주며 비인간에 대한 정면 승부와 경계에 대한 감각을 제거한다. 그리고 섬세한 텍스트 속에서 새롭게 발견한 몸은 ‘나’이기도 하고 ‘인공지능’이기도 하며 ‘도시’이기도 하고 ‘국가’이기도 한 사태로 진전된다. 이 리좀적인 몸을 어디서부터 일으켜야 할까. 어디서부터 일어나도 문제적일 것이다. 그 모든 곳이 ‘하나’의 인간이기에 그렇다.
4
뒷방에서 상상해요
빈약한 기쁨이
성대에 매연을 뿜는다면
시끄러움은 침묵과 번거롭게 인연을 맺죠
성실하게 사랑하기 위하여
의무적으로 구어를 배우고
면봉으로 커질 수 없는 귓구멍의 크기를 키우고
입 모양 대신 불완전한 귀 한쪽에 의지하고
소리의 잡음을 고통스럽게 견디면서
살아왔더니 벌써 기혼자가 된 지 16년
유쾌하지 못한 소식이 들려온다
코로나 팬데믹
‘마스크 착용 필수’
-옥지구, 「서류를 작성하기 전에」 부분
그런가 하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보편적 현실 자체의 권력성과 비인간성을 진단하는 시적 몸의 포에지도 발견된다. 옥지구의 『어느 누구에게도 다정함을 은폐하기로』(핌, 2025)는 오디즘(audism)에 대한 비판 의식과 농인 사회의 제약적 현실에 대한 감각을 투명하게 보여 준다. 투명하다는 표현은 이 시집에서 유독 시적 주체와 시인의 육성이 분간되지 않는 이유 때문인데, 시 안팎을 둘러싼 오디즘에 대한 문제의식에 점철된 관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으나, “인공와우를 착용한 구어와 수어의 이중 언어 사용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대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옥지구에게 시는 농인식 기호로 사유되고 청인식 기호로 번역되는 과정을 거친 새로운 언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탓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코로나 팬데믹”인 상황에서 “마스크 착용 필수”라는 기표는 안전을 위한 것이 아닌 의사소통의 곤란이라는 새로운 기의로 이해된다는 것. “시끄러움과 번거롭게 인연을 맺”는 “침묵”을 뚫고 “의무적으로 구어를 배우고” “귓구멍의 크기를 키우”는 노력 또한 이유가 될 수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성실하게 사랑하기 위하여”라는 문장 앞에서 멈춰 선다. 무엇을 성실하게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앞니에 ‘혁명’이라는 글자를 새겨서 기쁜 반항아”(「ㅍㄱㅅㄹㅇ ㅇㄹㅈ」)라거나 “나는 나의 언니가 되어야 한다”(「자유의 시그니처」)는 선언을 통해 강하게 내세워지는 주체성은 곧 오디즘 세계에서 소외된 자기 존재의 방어기제라기보다는 타자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태도에 있어 ‘나’의 염결성을 강구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 시적 주체는 종종 “담배”를 피는 장면을 보여 주는데, 그럼에도 “어둡고 아프기만 한 추운 저녁의 그늘”을 탈출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만 더 슬퍼해 주길” 바란다거나 “그대의 마음은 안녕하신가요”라는 위로를 건네는 편이다. “손가락 마디가 헐거워”진 상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단단함으로 이 평범한 언술들이 힘을 낸다. 곧 옥지구는 보편적인 타자라는 관념과 아울러 결코 타자화되지 않은 세계를 타자로 상정하고 그 스스로 환대의 주체가 된다.
빙하는 말한다
녹기 전에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한 번쯤 이기적으로 아름다워져야 한다고
눈을 감는 순간에 융해 시속이 빨라진다
태양, 본 적이 없는 너와 헤어지는 과정에서
아름답지 않은 순간이 없었어
너는 내가 던진 돌을 세공한다
흘린 피에서 장미 냄새가 활활
안쓰럽고 서툰 너의 문장들을
내 렌즈에 이식한다
내 재주는 예의 없고도 친절하지
그럴 줄 알고 너의 미래를 보고 왔어
죽지 못할 거야 더 외로워지더라도
불살라 버리기에 네 희망을 걸 수 없겠지만
내 속눈썹에서 눈이 내린다
빙하는 입을 제거한다
태양이 미동을 알고 있을 리가
물이 너를 해치지 못할 거야
결말치곤 더러워진다
아직 아이스크림을 모르는 태양
태양은 빙하를 안을 줄 모른다
다만 널 낭만하고 있어
다들 널 염세하고 있어
나만 널 낭만하고 있어
-옥지구, 「다만, 널 낭만하고 있어」 전문
그러나 결과는 비극적이다. 그리고 그 비극은 상대적이다. 빙하가 녹는 쪽이고 태양이 사라지지 않는 쪽이다. 시의 역할은 언어의 바깥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언어의 견고한 벽을 부수고 언어 속에 갇혀 있던 상상과 자유를 탈출시키는 것이 시가 가진 칼날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믿음을 말없이 수행한 시인들로부터 우리가 추수한 시의 영토는 이제 보편적이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주선은 선명하게 살아 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로서 감응하는 이 영역이 조그맣다 못해 초라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한 번쯤은 이기적으로 아름다워져야 한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 태도는 이미 이별을 중단할 수 없는 곳으로 운동하고 있는 이 장면 속에서 말이다. “안쓰럽고 서툰 너의 문장들을 / 내 렌즈에 이식”하는 노력에도 “태양이 미동을 알고 있을 리가”와 같은 언술을 통해, 그리고 “눈을 감는 순간” 이별의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태양은 빙하를 안을 줄” 모른다. 그렇다면 “빙하”는 바다 바깥으로 밀려나고 사라지고 마는 걸까. 이것이 오디즘 세계를 살아가는 농인의 생존을 위한 사랑 방식이라면 그것은 처절한 낭만주의다. 그러나 “다만 널 낭만하고 있어”라는 고백을 “나만 널 낭만하고 있어”라는 고백으로 치환(transition)하는 동안에 우리는 입술의 부면에 달라붙은 타자가 아닌, 관념의 언어가 아닌, 타자로부터 전송된 환대를 어떻게 받을 것인가 하는 차원에 도달하게 된다. 옥지구의 시에서 촉발된 타자에 대한 사유가 당사자성에 기반한 온몸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신의 관념인 무한의 관념에서, 타자를 통한 일자에 대한 순전한 부정을 넘어, 양자와 대립하고 분리시킬 순전한 모순을 넘어, 무한을 통한 유한의 촉발(l’affection)이 발생한다. 나타남과 다르게, 내용에의 참여와 다르게, 개념과 다르게, 이해와 다르게 기술돼야 할 촉발. 무한을 통한 유한의 돌이킬 수 없는 촉발. 주제화로 소집되지 않는 수동성, 신에 대한 사랑과 두려움.8)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비롯하여 인공지능, 미지의 우주 생명체 등에 이르기까지 nonhuman의 영역을 확장하고 인간의 우월성을 내려놓음으로써 이 존재들의 “경험을 지식의 영역으로 포함하는 것을 ‘포스트휴먼’의 인식론적 조건”9)이라 할 때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룩하려 하는 하나의 청사진은 모든 인간이 사유하기를 멈추고 기계의 무한한 동력에 신체를 위임하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흠결 없는 신의 진리가 있고 그 진리의 관념 안에서 행동하는 인간은 안전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종교적 계시의 재론에 다름 아니다. 이 같은 “신학의 로고스는 이론적 지향성과 다를 것이고 ‘나는 생각한다’(데카르트)의 배타적 고립 속에서 그리고 모으고 종합하는 지배를 가지고 주권적 자아의 초월론적 통각의 통일성에 의거해 확신하는”10) 주체를 다시금 환기시킨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타자를 발견하며 비로소 비인간 또한 타자로 인식하는 이 ‘차이’의 과정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비인간의 무한의 관념도 인간의 유한한 사유 속에 갇혀 재생산되고 어떤 규칙을 찾으려는 불규칙 그 자체에 포섭되어 운동성을 갖는다.
여기서 다시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달나라의 장난」)를 들여다본다. 사실 더 중요한 문장은 그 뒤에 있었다. 우리가 타자의 영역을 끊임없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구획 지어 왔다는 사실을 반성적으로 고찰했을 때, 어떤 윤리감은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 쉽게 잊고 쉽게 웃는 사이사이 엄습하는 것이지만, 또 어떤 윤리감은 스스로도 구원하지 못한 채 그 자책감에 드리워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제 주체와 객체가 구분되지 않는다. 자아와 타자가 구분되지 않는다. 인간과 비인간이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경계가 지워지는 사이, 이런 매혹과 두려움을 동반하는 시적 상상력에 있어 부과된 몸(들)은 분할되고 분리된 사유를 거부하는 감응의 ‘하나’로서 특유의 포에지를 촉발하고 있다.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1) 김수영, 『디에센셜 : 김수영』, 민음사, 2022, 19쪽.
2) 김나영, 「통감하는 주체, 유무의 경계 너머의 말들」, 『창작과비평』 여름호, 2017, 447쪽.
3) 박상수, 「발칙한 아이들의 모험에서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으로」, 『창작과비평』 봄호, 2017, 281쪽.
4) 이찬, 「시‘알레고리’, 2010년대 한국시의 화두」, 『문학들』 여름호, 2010, 238쪽.
5) “파편적인 언어로만 형상화할 수 있는 세계에 결속된 주체, 달리 말해 통감하는 주체는 자기만의 말(하기)을 구상한다.”(김나영, 앞의 글, 465쪽) 참조.
6)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그린비, 2010, 14쪽.
7)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07, 47쪽.
8) 에마뉘엘 레비나스, 『우리 사이(Entre Nous)』, 김성호 옮김, 그린비, 2019, 319쪽.
9) 이호영, 「트랜스휴먼 그리고 포스트휴먼」, 『인문학연구』 제40집, 인천대학교인문학연구소, 2023, 285~286쪽.
10) 에마뉘엘 레비나스, 위의 책, 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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