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미래와 동맹의 정치
- 작성일 2022-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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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비평]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
2022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12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가족의 미래와 동맹의 정치
- 최은영의 『밝은 밤』과 황정은의 『연년세세(年年歲歲)』 읽기
김주원
1.
최은영의 『밝은 밤』(문학동네, 2021)과 황정은의 『연년세세(年年歲歲)』(창비, 2020)는 여성을 중심으로 한 가족 이야기이다. 이들의 소설은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살았던 여성들을 비추며 그들이 감내한 혹독한 시련을 보여주고 있다. 이전에도 여성의 역사적, 사회적 경험들을 다룬 여성 작가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소설은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한 가족 관념의 변화와 그 경험과 관련하여 진전된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최은영과 황정은의 소설에서 여성 인물들은 그 세대와 경험이 다름에도 여성화된다는 것의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 여성화된다는 것이 극단적으로 취약해진다는 것을 뜻한다는 전언에 따르면, 그것은 해체되고 재조립되며 예비 노동력으로 착취될 수 있다는 것, 노동자보다는 서비스 제공자로 여겨진다는 것, 노동일 제한을 비웃기라도 하듯 급여가 지급되다 말았다 하는 노동 시간 배치에 종속된다는 것, 언제나 외설적이고 부적절한 성으로 환원되는 실존의 경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1) 이 소설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크든 작든 여성화의 비극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갖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소설들은 여성에게 드리워진 불길하고 심란한 진단을 넘어 여성의 삶을 역사적,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밝은 밤』과 『연년세세(年年歲歲)』는 한국 사회의 격변기 속에서 여성이 감당해 온 자리를 응시하고, 침묵하고 숨겨져 온 여성의 경험을 말한다는 점에서 얼마간 익숙한 것이지만 그 이야기는 모성과 가족이라는 통념을 벗어나 있거나 적어도 그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서사로 구성된다. 특히 여성들 간의 유대는 여성 자신들에게 삶의 버팀목이 될 뿐 아니라 가부장적 가족 관념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것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미투(Me too) 운동 이후 불거져 나온 한국 사회의 견고한 남성 중심성에 대한 비판과 성찰과 무관하지 않다.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인물이 지금 한국 사회의 청년 세대에 속하는 여성들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이들의 가족 이야기를 ‘정상 가족’의 대안이나 그 비판쯤으로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들은 전통적인 혈연 가족과 거리를 두며 자신에게 필요한 친족을 스스로 만들면서 다른 개념의 우정 관계를 형성하는 데까지 나아가기 때문이다. 친밀성의 구조 변동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변화는 최은영과 황정은의 소설에서 여성들의 우정과 연대에 관한 각별한 고려 속에서 이루어지며 그것은 여성들의 문화가 일구어낸 성취로 이해할 만한 것이다. 이 소설들은 가족을 구성하는 여러 차원이 과거에도 존재했고 현재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최은영과 황정은의 소설은 혈연 가족의 바깥, 다시 말해 혈연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동맹(alliance)과 그 다양성을 탐사한다.
1) 도나 해러웨이 저,『해러웨이 선언문』, 황희선 옮김, 책세상, 2019, 54.
2.
『밝은 밤』은 ‘희령’이라는 소도시에 도착한 지연이 어린 시절 이후 교류가 없었던 할머니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그곳에 있는 천문학 연구소 연구원으로 오게 된 지연은 이혼의 충격과 상처를 안고 있지만 할머니 영옥과 만나면서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된다. 그것은 ‘삼천이’로 불린 증조모 이영선의 이야기부터 영옥과 엄마 미선으로 이어지는 지연의 모계(母系)에 관한 이야기이다. 식민지 시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성 4대가 겪는 한국 사회의 격변기는 할머니 영옥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증조모 삼천이와 그녀의 친구 새비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통해 가시화된다. 지연의 물음에 할머니가 들려주고 또 지연이 낭독하는 그 시절의 편지는 그 자체로 방대한 여성 생애 구술사이다.
영옥은 혼자가 된 지연에게 정성스럽게 밥을 차려 주곤 하지만 독립적인 여성 노인으로 그려져 있다. 그녀는 진분홍빛 립스틱을 바르고 짧은 머리를 단장하며 일과 교유 관계에 열심이다. 캔디크러쉬 게임이 취미인 영옥은 지연의 이혼 소식을 알면서도 지연에게 어떤 것도 묻지 않는다. 다시 남자를 만나 보호받을 울타리를 얻어야 한다는 엄마와 달리 영옥은 이혼한 지연에게 잘했다는 한마디를 무심히 던질 뿐이다.
삼천 출신이라 삼천이라 불린 증조모는 천대받는 백정의 딸이었지만 당차고 호기심 많은 소녀였다. “백정의 표식 따위는 집어던져 버리고 세상을 보고 싶었”던 그녀는 일본 사람들이 혼인하지 않은 여자들을 차출해 가는 것에서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감을 받는다. 삼천이를 마음에 두고 있던 양민 계급의 증조부는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개성행을 제안하고 그곳에서 둘은 부부가 된다. 양민 출신 남자의 아내가 된 후에도 삼천이는 백정의 딸이라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외롭고 고통스런 일은 삶의 구원자로 믿었던 남편의 무관심과 권위 의식이었다. 삼천이는 포기하고 체념하는 법을 터득하고 삶에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사치이기 전에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삼천이의 유일한 친구는 새비였다. 새비에서 왔다 해서 새비라고 불린 그녀는 삼천이를 편견 없이 받아들였고 삼천이가 난산으로 사경을 해맬 때 돌보았으며 삼천이 역시 새비가 출산 후 극심한 심리적 동요를 겪을 때 그녀를 지켜주었다.
사람들은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아이를 첫눈에 사랑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가 백일을 넘길 동안에도 아이에게 별다른 애정을 느끼지 못했고, 그 마음이 부끄러워서 누구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아이를 예뻐하는 척하는 자기 모습이 무서웠다. (중략) 그녀는 아이가 작은 몸과 마음으로 눈치를 살피느라 마음껏 울어 보지도 못하는 게 아닐지 근심했다. 그녀의 사랑은 그 근심에서 자랐다.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웃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이 아이를 마음으로 귀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어미의 본능적 사랑 같은 것은 아닐지 몰라도.(74)
삼천이와 새비는 모두 출산 후 아기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 출산의 후유증은 여성의 모성이 자연적인 것이 아님을, 오히려 여성이 모성과 갈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은 자연화된 모성 이데올로기를 수정하면서 출산과 육아를 온전히 담당했던 여성들이 남자들의 무관심 속에서 서로 고통을 나누고 그들 사이의 협력과 우정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음을 서술한다. 삼천이와 새비는 어려운 처지에 서로를 적극적으로 돌보고 지지함으로써 서로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그 마음이 간절한 것인지를 이해했던 것이다. 한국 전쟁의 난리 속에서 그들이 겪는 피난은 삼천이와 새비가 서로를 보살피는 관계라는 것을, 그것이 가족보다 더한 우애라는 것을 극화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평화로운 장면은 대구 피난 시절, 삼천이 가족이 새비네가 사는 명숙 할머니집에 기거하던 시간일 것이다. 새비의 고모 명숙 할머니 덕분에 그들은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을 했다. 명숙 할머니는 오랜 수녀 생활을 마치고 수선 일을 하며 경제적 여유를 누리고 있지만 퉁명스럽고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런 명숙 할머니에게 영옥이 『로빈슨 크루소』를 낭독해 준 일로 영옥은 재봉 일을 배우고 명숙 할머니는 어린 시절 즐겼던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밝은 방』은 역사 속에서 억척스런 모성으로 재현되기 쉬운 여성의 이미지를 다양하게 표현한다. 증조모와 할머니는 그들의 세대에서 보기 드물게 독립적이고 활달하며, 명숙 할머니는 감정 표현에 서툴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한 독신 여성으로 등장한다. 새비의 딸 희자는 약혼자와 혼사를 깨고 독일로 유학을 감행한다. 이 소설에서 삼천이와 새비가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들은 여성들의 유대를 증거할 뿐 아니라 여성들이 향유한 문화 속에 삶과 감정을 공유하는 친밀한 공동체가 존재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대구 피난 시절, 삼천이와 영옥, 새비와 새비의 딸 희자, 명숙 할머니는 혈연 가족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결속된 돌봄의 공동체였으며 전쟁의 위협 속에서도 일과 여가를 공유하고 부족하나마 ‘함께 웃고 즐거워하고 따뜻함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밝은 밤』에서 편지와 편지 낭독은 여성들의 내밀한 자기 고백의 형식이자 타인의 삶을 깊게 이해하고 공유하는 과정이다. 지연이 “편지에서 새비 아주머니의 목소리와 손길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에 놀라워하며 “마치 새비 아주머니가 내 속에 들어와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같”고 “그 편지를 받아 읽었을 증조할머니의 마음도 내 안에서 살아났다”(121)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모계(母系)에 틈입한 다른 여성들의 삶을 깊이 읽어내는 것으로, ‘이름 없는 구체적인 형상도 없는’ 여성들의 유대는 혈연과 지역, 계급을 넘어 있으며 현재적으로도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너 없었으면 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기야. 진짜야. 너가 날 살렸다. (중략) 삼천아, 새비에는 지금 진달래가 한창이야. 개성도 그렇니. 너랑 같이 꽃을 뽑아다가 꿀을 먹던 게 생각나. 그걸 따다가 전을 부쳐 먹던 것두, 같이 쑥을 캐다가 떡을 만들어 먹던 것도. 인제 나는 꽃을 봐도 풀을 봐도 네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됐어. 별을 봐도 달을 봐도 그걸 올려다보던 삼천이 네 얼굴만 떠올라. 새비야, 참 희한하지 않아? 밤하늘을 보면서 그리 말하던 네가 떠올라. 이것도 희한하구 저것도 희한한 우리 삼천이가 생각나누나.(119~121)
『밝은 밤』에서 편지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다. 증조부의 일방적인 결심으로 가족이 모두 희령으로 가게 되자 할머니는 거의 매일 편지를 썼고 증조모도 매주 새비 아주머니에게 편지를 쓴다.(213) 편지에 대한 탐닉은 서로 안부를 확인하는 것을 넘어 깊은 그리움과 사랑의 표현이다. 나중에 “편지가 점점 뜸해지면서 할머니는 희자를 조금씩 잃어버리는 기분”(213)을 느끼고 자신의 존재가 그녀에게서 지워질 것을 걱정하는 것은 이들 사이에 오가는 감정이 훨씬 강렬한 것임을 짐작케 한다. 『밝은 밤』에 나타난 여성의 유대는 여성 정체성의 경험의 특징으로서 ‘레즈비언 연속체’라 부를 만한 것이다. 레즈비언 연속체는 성적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내적 삶을 공유하거나, 남성 독재에 대항하는 유대나 실천적이고 정치적인 지지를 주고받는 등 여성들 사이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일차적이고 강렬한 관계까지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것이다.2) 에이드리언 리치가 말하는 레즈비언 연속체의 예시는 어머니와 딸, 공간을 같이 쓰는 두 여성, 다른 여성을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보살피는 여성들까지 해당되며 여성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레즈비언 연속체 안팎을 오간다. 그런 의미에서 편지는 외부로 발설되지 않는 여성들 간의 애착과 성애적 표현의 매개물이다. 동시에 그녀들의 감정은 레즈비언 존재가 그러하듯 여성의 경험 가운데 가장 폭력적으로 삭제당한 성애의 한 형태이다. “내 삶은 개성에도, 대구에도 있지 않아. 내 삶은 희령에 있어”라고 생각한 할머니가 “희자와 새비 아주머니, 명숙 할머니에게서 자신을 분리하기 위해 노력”(214)할 때 그 노력은 결혼으로 이어진다. 레즈비언 존재가 강제된 이성애에 의해 좌절되는 것처럼 그녀의 갑작스런 결혼은 여성의 우정과 특별한 동지애가 출구를 찾지 못해 좌절한 결과이다. 할머니의 결혼은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라 그들의 관계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체념에서 비롯한다. 소설에 따르면 그녀의 결혼은 증조부에게 인정받기 위한 방편이자 남들 보기에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서 자신을 속인 결과였다. 할머니의 남편 남선은 ‘여러모로 증조부를 닮은 사람’이었고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선은 유부남이었음에도 자신을 속였고 엄마 미선이 태어나자 할머니는 자신의 권리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지연을 비롯하여 이 소설에서 결혼은 여성들의 삶에서 포기와 체념을 선택하게 만든다. 이후 할머니가 엄마를 임신했을 때, 새비 아주머니와 명숙 할머니, 희자에게 편지를 주고받는 장면은 그들 사이에 사랑을 확인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그들의 관계가 생명과 기쁨의 공동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밝은 밤』에서 여성들의 유대는 결혼으로 충족되지 않는 정서적 유대와 보살핌이며 이성애적 관계 바깥에 잠재되어 있는 여성들의 욕망과 열정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 인물들은 새비 아저씨를 제외하면 여성들처럼 풍부하게 그려지지 않으며 지나치게 가부장제의 화신처럼 보인다. 『82년생 김지영』에 등장하는 남성 인물들처럼 그러한 남성의 이미지는 여성들의 경험에서는 실감을 얻을 만한 것이라도 남성과 여성의 정형화된 심리적 자질에 의존한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소설의 차원에서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협소하게 만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연 스스로 남편에 대한 원망과 고통을 쉽게 해소하지 못한다는 면도 있지만 『밝은 밤』은 가부장제 문화가 여성에게 가하는 보이지 않는 억압과 그로 인한 여성의 불안정한 자기애의 문제를 반복해서 다룬다. 계몽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와 남편에 익숙한 지연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존중받지 못했고 그것은 지연의 성장과 결혼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이 소설의 여성 인물들은 가족과 결혼에서 무언의 억압을 느끼며 존재를 부정당하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사랑에 무관심하고 돌봄에 무지한 남성들과 달리 그리고 결혼이 부과하는 남성과 여성의 위계적 관계와 달리 여성들은 나이와 출신, 지역을 넘나들며 서로 평등하게 교류한다. 지하철에서 졸던 이십대 초반의 지연에게 기대라며 어깨를 내어주던 여자들은 그 유대의 일상적 예시일 것이다. 삼천이에게 새비가, 영옥에게 희자가 있었던 것처럼 지연에게는 자신을 대신해서 울어 주고 걱정해 주는 지우라는 비혼의 동성 친구가 있다. 구조한 강아지 ‘귀리’를 돌보는 그녀의 모습에서 가족의 변화를 읽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밝은 밤』은 ‘감정의 전문가’로 여겨진 여성들의 삶 속에서 실재했던 친밀한 동맹 관계들과 유대를 복원하는 데 공을 들인다. 성별 갈등이 극심한 이 소설에서 여성들의 관계가 수용적이고 매끄러운 유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여성들이 서로 베푸는 사랑과 환대는 그것이 남성 중심적 사회가 여성에게 강제하는 자질이라는 것과 별개로 여성들에게는 가족 질서에서 벗어나는 해방적 기능을 의미한다. 『밝은 밤』은 그것을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성에 위협을 가할 만한 것으로 그리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여성들의 유대는 여성의 역사와 문화의 중요한 기억이자 여전히 유효한 자원인 것이다.
2) 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이주혜 옮김, 바다출판사, 2020, 262.
3.
황정은의 『연년세세』는 네 편으로 구성된 연작 소설로 1946년생 이순일의 이야기와 그의 자식들에 초점이 맞춰 있다. 이 소설에서 그녀의 삶은 온전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파묘(破墓)’에서 그녀는 한국 전쟁의 여파로 직계가족을 잃고 할아버지의 묘가 친정이나 다름없는 노인이다. 이순일은 쇠약해진 무릎 때문에 그녀의 뜻과 무관하게 파묘를 결정하고 그나마 있던 가족의 흔적마저 지우게 된다. 그녀의 파묘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가족들은 무관심하다. 처가 쪽 산소엔 벌초도 하지 않는다는 남편 한중언은 이순일이 물려받은 산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궁금해 하면서 아들에게 줄 궁리를 할 뿐이다. 이 소설에서 이순일은 자식 셋을 다 키웠지만 자식의 가족까지 건사하느라 여전히 가사 노동에 시달리는 주부이다.
이순일의 부엌, 거기엔 항상 일이 넘쳐 편수 냄비며 스테인리스 함지 따위가 양념이 묻은 채 쌓여 있었다. 이순일은 거기서 그 집 4층과 5층, 두 가정에서 먹을 음식을 만들었다. (중략) 이순일은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는 한중언의 아침 식사를 차리려고 새벽에 일어났다가 그 상을 치우기도 전에 5층으로 올라가 두 번째 아침상을 차리고, 다섯 살, 세 살인 손주들의 어린이집 등원을 도운 뒤엔 구정물과 기름얼룩으로 더러워진 앞치마를 벗을 틈도 없이 아래위층을 오가며 두 집 가사를 돌보았다. 이순일은 낮에 한세진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움직임이 예전만 못해 식사를 준비하고 상을 치우고 빨래를 너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다 간다고 말하곤 했다. 네 형부가 뭘 맛있게 먹질 않는다, 입이 짧아 병아리 눈물만큼 먹고, 기껏 아침을 차리고 쓱 보고 지 입에 다디단 것만 몇 점 먹고, 아니면 컵라면이나 뜯어 먹고 쌩하니 나간다, 이 나이에 사위집에서 이렇게 눈치를 보며 살 줄은 몰랐다고 이순일은 한탄했다. 그런 얘기를 이순일은 한세진에게만 했다. 한영진에게는 할 수 없는 이야기였고 한만수는 너무 멀리 있었다. 한세진은 가끔 이순일의 피로에 책임을 느꼈지만, 그 집 구석구석에 쌓이고 있는 엄마의 피로와 엄마의 후줄근한 크록스 샌들 같은 것이 자기의 무능 탓인 것 같은 순간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 이야기들을 그냥 들었다. 그래 엄마, 그래요, 하면서.(21~22)
이순일의 부엌은 노년이 되어서도 자식의 살림까지 도맡아야 하는 노인 여성들의 현실이다. 그녀의 정리되지 않은 부엌처럼 어머니의 노동은 표시가 나거나 누가 알아주는 일이 아니다. 그녀는 일을 가장 많이 하면서도 생활 방식이 다른 사위의 눈치를 본다. 그녀는 온가족을 보살피지만 그녀가 느끼는 문제는 딸에게만 얘기할 수 있을 뿐 개입을 하거나 바꿀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두 아이를 키우는 40대 여성 워킹맘 한영진의 생활도 고단하기는 마찬가지다. 한영진 부부는 이순일 부부에게 아래층을 내주고 생활비를 댔으며 그 대신 “엄마의 사물들과 엄마의 짜증을 감당”(50)하기로 한다. 이 소설에서 이순일은 평생 부엌을 떠나 본 적 없고 “결혼도 안 하고 사는 게 그게 무슨 살림이냐”(20)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자식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한영진은 유능한 판매원이고 가족을 생각하는 주부 고객의 심리를 간파하여 판매 수익을 올리는 일을 한다. 아버지가 사기를 당한 후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던 한영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유통업체에 취직해 한중언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게 된다. 한영진은 집안의 여러 생활비와 동생들의 학비를 도맡는다. 엄마는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는 자신을 챙겨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한영진의 수고와 희생은 엄마의 가사 노동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한영진에게는 막내 한만수가 뉴질랜드에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딸인 자신에게는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81)라는 말을 해온 엄마에 대한 애증이 있다. 그것은 “현명하고 덜 서글픈 쪽을 향한 진리”(82)였지만 한영진은 “왜 나를 당신의 밥상 앞에 붙들어 두었는가”를 따져 묻고 싶다. 한영진은 이순일과 가장 가까운 관계이지만 이순일과 같은 어머니는 아니다.
한영진은 그 아이들을 낳고서야 세간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모성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첫아이 임신 때 한영진의 시모는 노산, 노산을 입버릇처럼 말하며 한영진의 몸 상태를 아쉬워하고 아이의 상태를 염려하더니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병원으로 찾아와 울었다. (중략) 왜 울어? 저 아이를 언제 봤다고 저렇게 반겨? 그 시기 한영진은 매 순간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중략) 한영진의 모성은, 그걸 부르는 더 적절한 이름이 필요하다고 언젠가 한영진은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타고난 것이 아니고 그 간격과 관계에서 학습되고 형성되었다. 그건 만들어졌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한영진은 둘째를 낳을 수 있었고 첫 번째보다는 여유 있게 아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이들을 지금은 좋아했다. 이순일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한영진은 알고 있었다. 이순일의 노동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75)
한영진은 모성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체험한 여성이다. 모성이라는 말이 당연해지지 않기 위해서도 그녀는 그걸 부르는 더 적절한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밝은 밤』의 여성 인물들처럼 한영진은 모성의 신화를 거부하며 그것이 만들어지는 것임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동시에 한영진은 이순일의 노동 덕분에 자신이 어머니 되기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모성에 관한 한영진의 인식은 이순일 세대에서는 가능하지 않았을 생각이다. 이 소설은 모성의 신화를 폭로하면서도 그 모성을 가능하게 한 이순일과 같은 보이지 않는 여성들의 노동을 함께 언급하고 있다. 한영진이 엄마에 대한 연민과 갈등을 보여준다면, 둘째 딸 한세진의 삶은 한영진과도 다르며, 셋째 한만수는 아예 한국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뉴질랜드에서 취직을 준비하고 있다. 한만수의 타국 생활은 그가 인터뷰에서 반복한 ‘파써빌러티. 오퍼튜너티’라는 말과 한참 멀리 있지만 그는 그곳에서 백인 할아버지와 친구가 되어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이순일의 자식들이 서비스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은 이들의 삶을 전통적 가족의 구심점에서 멀어지게 한다. 가령, 한만수가 이순일이 파묘하는 일에 동행한 한세진에게 너무 효도하지 말라고 하는 장면이나, 이순일을 위해 뉴질랜드에서 가져온 선물을 주며 그가 건넨 “어머니는 위대하다, 당신은 위대하다”(34)는 말은 그에게 ‘효’나 ‘어머니’가 상투적인 표현일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영진과 한세진도 이순일의 삶에 연민을 느끼지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한세진은 새로운 유형의 삶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소설에서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세진은 대학생이 되자 집을 나가 살았고 같은 처지의 친구들과 ‘작업실’을 얻었으며 대학 졸업 후에도 희곡과 시나리오를 썼다. 한세진이 올린 연극의 제목이 ‘가정 실습’인 것으로 보아 그녀는 가족 관계의 이면과 갈등에 주목하거나 가족을 실험의 한 대상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다.
『연년세세』는 지금 한국 사회의 가족 관념의 변화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한세진을 통해 구현하고 있는 듯하다. “내년 여름엔 빙하와 펭귄을 보러 뉴질랜드에 갈 생각”(61)을 하는 한세진은 한영진과도 매우 다른 인물로 자기 밑에서 들어와 일을 배우라는 한영진의 압력에 아랑곳하지 않는 인물로 나온다. 이순일은 그녀들 사이에 있는 “훨씬 신랄하고 내밀한 것”을 중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의 가책을 느낀다. 여성들 사이에 세대적 격차만큼이나 동시대의 삶의 방식에도 큰 차이가 생긴 것이다.
한세진의 이야기에서는 세진과 같이 사는 하미영이 등장한다. 나중에 세진이 하미영을 여자친구로 소개하는 것을 보면 하미영은 세진의 동성 파트너라 할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에 나오는 “더러운 도랑물을 마시고 그리고 거기서 죽을 것이다”를 말하는 미영은 레베카 솔닛의 『걷기의 역사』와 미아 한센뢰베의 영화 〈다가오는 것들〉에도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문화 텍스트들은 그들이 페미니즘의 문화에 익숙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특히 영화 〈다가오는 것들〉은 새로운 유형의 가족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서브 텍스트이다. 〈다가오는 것들〉에 등장하는 파비앵과 나탈리는 지적 동료로서 우정을 이어 가는 사이이다. 하미영은 본래 포스터에는 이들이 나란히 걸으면서 각자 생각에 잠겨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데 한국의 포스터에서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것이 실제 줄거리와 달리 영화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해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하미영은 이 영화가 두 사람 사이의 로맨스가 아니라 둘이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점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로맨스를 경험하는 사람은 나탈리의 남편이었던 하인츠이지만 나탈리는 너무 바쁜 나머지 용서를 구하는 하인츠를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주인공 나탈리는 아마도 미영이 생각하는 독립적인 여성의 이미지에 가까울 것이다. 영화뿐 아니라 미영과 세진의 관계도 “로맨스와 화해에 대한 기대”를 실망시킨다. 영화 포스터의 예에서 알 수 있듯 그것은 이성애 중심주의의 폭력이다. 이성애 관점으로 보면 남녀 사이의 우정이나 여성들 사이의 우정, 사랑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이성애적 관점은 영화에 대한 오독일 뿐 아니라 새로운 관계에 대한 오독일 확률이 크다. 세진은 일정한 직장은 없지만 한국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일을 하고, 그녀에게는 일과 생활을 같이할 수 있는 동료들과 동성 파트너가 있다. 유동하는 그녀의 삶과 어울리게 그녀는 가족에 귀속되지 않는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년세세』는 아기를 집어던진 미영의 어머니 이야기를 통해 모성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어머니’의 한쪽 면은 이순일처럼 헌신적이고 자애롭지만, 다른 면은 미영의 어머니처럼 난폭하고 잔인할 수 있다. 한영진이 경험한 모성의 양가성 만큼 어머니는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존재이다. 소설에서 하미영은 액션 영화의 잔인한 장면을 보지 못할 정도로 폭력에 민감한데 그녀가 반려 고양이를 밟지 않으려다가 바닥에 넘어져 크게 다친 일은 중요한 일화이다. 미영의 어머니가 아기를 학대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모성이 반드시 어머니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떄문이다. 그녀에게 동물은 인간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동등한 생명이다. 생물학적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동물을 돌보는 그녀의 정체성은 모성에 견줄 수 있는 것이다. 각자 자유롭게 삶을 영위하는 이들의 동맹에서 반려 동물은 그들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는 동맹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연년세세』는 여성들의 유대를 새롭게 재편된 가족 관계로 볼 수 있게 만든다. 여성이 누구와 살 것인가의 문제는 최근 한국 사회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변화에 속한다.3) 그들은 이미 가족의 한 형태를 이루고 공존하고 있다. 이성애 중심주의가 다른 관계를 보지 못하게 한 것처럼 기존의 가족 관념으로 보면 혈연 이외의 관계들은 결핍과 일탈의 이미지에 싸여 보이지 않게 된다. 미영과 세진은 대안 가족이 아니라 실재하는 가족이며 이성애적 혈연 가족에서 탈영토화한 동맹적 관계이다. 로맨스가 빠져 있는 영화 속 나탈리의 모습처럼 이들의 동맹은 익숙한 혈연이나 로맨스가 아니라 반려 동물이나 이민자들처럼 외부의 다른 동맹자들과 접속한다. 세진이 북페스티벌 참가로 뉴욕에 가서 낯선 이민자들을 만나고, 이순일의 이모할머니와 그 자손들을 만나는 것은 그녀의 삶이 만나고 접속할 수 있는 외부가 그만큼 크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연년세세』에 이르러 우리는 혈연 중심적 가족 관념을 벗어난 여성들의 유대가 지닌 정치성을 상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3) 김하나·황선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위즈덤하우스, 2019 ; 권민주, 『비혼 여성, 아무튼 잘 살고 있습니다』, 이담북스, 2020 ; 우에노 치즈코·미나시타 기류,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동녘, 2017.
4.
최은영의 『밝은 밤』과 황정은의 『연년세세(年年歲歲)』는 한국 사회의 지난 역사 속에서 지워진 여성의 삶을 조명하는 동시에 현재의 맥락에서 돌봄 공동체라는 여성 문화의 유산들을 재기입하는 이야기이다. 이들 소설은 여성 소설이 여성의 역사와 경험을 다룰 때 종종 보여주었던 수난사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여성들의 우정과 연대를 부각시킨다. 모성 신화 비판과 레즈비언 연속체에 대한 소설적 재현은 이들의 문제 의식이 미투 운동 이후 일고 있는 페미니즘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소설들의 주요 인물이 여성들이라고 해서 이 소설들을 여성 중심적이라고 평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최은영과 황정은의 소설들은 여성의 감정과 경험에 기초하여 여성들의 유대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며 그 가능성을 탐색한다는 점에서 여성 중심적이다. 이들의 가족 이야기에서 이성애와 결혼이라는 주제는 반려 동물과 여성들의 유대 관계로 옮겨지고 있다. 반려 동물과 연대할 수 있는 여성들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친족이다. 이 소설들에서 구현하고 있는 여성들의 유대는 혈연을 넘어선 수평적 동맹의 방식이며, 그 개인들에게는 친밀한 돌봄의 공동체였고 남성 문화에 대해서는 저항의 방식으로 존재해 왔다. 여성들의 유대는 혈연적 가족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이상으로 기존 가족 관념을 해체하고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으로 제시된다. 여성화의 비극을 넘어, 지금 여성 작가들의 가족 이야기는 동맹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삶의 실험장으로 변모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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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22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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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양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3월부터 2026년 5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ㅡ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1) 박서양 0. 연재에 앞서 본고는 김인숙의 장편소설 『자작나무 숲』을 중심으로 쓰레기라는 물질이 공적인 처리 제도와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 그리고 기억과 서사의 경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단계적으로 고찰하는 3부작 비평이 될 예정이다. 1부에서는 단편소설 「빈집」을 살피며 쓰레기가 공적 처리 시스템에 편입되기 이전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수행되는 분류 노동과 그 젠더화된 정동을 분석할 것이다. 2부에서는 쓰레기를 배제함으로써 질서를 회복하려는 배제의 원리가, 서사에서 개연성을 통해 사건을 정합적으로 배열하려는 충동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살핀다. 3부에서는 지워진 여성들의 언어와 역사, 그리고 쓰레기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며, 재개발과 쓰레기집이라는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여성 고딕적 상상력이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논할 예정이다.1) 1. 쓰레기집의 사회적 상상력 곡교동 산1번지의 쓰레기집은 소설 『자작나무 숲』의 공간적 배경이자 독자를 압도하는 오브제다. 개발과 투기의 욕망으로 들끓는 재개발 예정 구역 한복판에 우뚝 선 이곳은 그 강렬한 존재감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우리는 흔히 ‘집’이라는 단어에서 안식과 보호, 정돈과 재생산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쓰레기와 오물로 뒤덮인 이 공간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 쓰레기와 쓰레기 아닌 것, 집과 집 아닌 것의 구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이 이질적인 장소에서, 자본의 생리에 따라 버려져야 할 물건들은 한데 뒤엉켜 완강한 물질적 현존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물질의 축적은 단순한 불결함이나 미관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일상적 분류와 질서의 법칙이 멈춘 어느 공간에서 소설은 사물의 퇴적과 부패를 집요하게 드러내며, 집의 장소성을 ‘언캐니(uncanny)’하고 낯선 심연으로 변주시킨다. 집은 물리적으로 내부를 보호하고 외부를 차단하는 경계로 구성되며, 무엇을 수용하고 배출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분류 체계 위에 성립한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끊임없이 순환되어야 하므로 ‘쓸모’를 다한 물질은 즉각 폐기되어 사라져야 한다. 이러한 논리는 집이 수행하는 선별의 원리와 닮아 있다. 이때 집은 어떤 사물이 여전히 인간의 일상에 머물 자격이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선택과 배제의 논리가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장소로 존재한다. 산1번지에 위치한 그곳이 문제적인 이유는 이러한 소비주의 시스템과 분류 기제가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무력화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사물의 분류 체계도, 공간의 경계 논리도 더 이상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 오랜 시간 퇴적되고 방치된 사물들만이 거대한 물질 덩어리로 합쳐져 뒤엉킨 채 굳어간다. 이처럼 쓰레기 더미가 인간의 거주 공간을 잠식하는 장면 속에서 독자는 익숙한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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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의 병리학 ㅡ 유선혜와 차현준의 시를 중심으로 송현지 1.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몸 1929년,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을 내세운다. 이 요구는 여성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았던 사회적 조건을 폭로함으로써 당시에도 강한 호소력을 가졌지만, 그 구체성과 상징성으로 인해 약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자주 인용되곤 한다. 특히 ‘자기만의 방’이라는 표현은 독립을 위한 물질적 요건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며 여성 창작자만이 아닌, 청년 등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이들의 문제를 다루는 데까지 확장되어 활용되어 왔다. 청년 세대를 대상으로 한 금융 자기 계발서의 제목이나 그들의 주거 형태를 분석하는 사회학적 키워드로 변주되는 것이 그 예다. 그러나 울프가 제시한 이 조건은 단순히 경제적 여유를 갖추거나 물리적 공간을 확보하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은 짚어 둘 필요가 있다. 당시 여성의 몸이 가사 노동과 돌봄을 위해 수시로 침범되며 공동의 재화처럼 사용되었음을 떠올려 본다면, 정기적 수입의 필요성은 생존을 이유로 타인에게 자신의 몸을 양도하지 않을 권리를 의미하며, 독립된 방에 대한 요청은 몸이 침범당하지 않을 최소한의 물리적 공간을 요구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울프가 요구했던 저 경제적·물리적 조건이란 타인에게 뺏긴 자신의 몸을 되찾아야 한다는 선언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러한 점에 기대어 오늘날 청년 세대의 거주 불안 문제를 경제적 관점에서만이 아닌, 신체의 주권 문제와 함께 살펴보면 어떨까. 고시원에 거주하는 청년들을 인터뷰하며 정민우가 그들의 불안정한 거주 자체가 아닌, 잦은 이동으로 인해 소유물을 버리는 일에 익숙해진 그들이 삶을 ‘요약’한 채 살게 되었음을 포착한 것처럼 말이다.1) 이처럼 방의 문제가 주체가 삶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어떤 방식으로 운용하게 되는지를 규정하는 조건으로 작용하며 현재는 물론 미래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방을 살펴보는 작업은 소재주의적인 탐색만은 아닐 것이다. 이 글은 임대된 방에 머무르는 유선혜 시의 화자와 내면의 방을 관리하는 차현준 시의 화자를 중심으로 청년 세대가 처한 사회적 조건을 살펴보고,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 그들이 어떻게 ‘자기만의 방’을 상상하고 변형하며 자신의 미래를 모색하고 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동시대 청년들의 인식 구조를 가늠해 보려 한다.2) 2. 임대된 몸과 구멍의 존재론: 유선혜의 경우 유선혜의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에서 청년 인물들은 주로 좁고(「흑백 방의 메리」), 어두운(「Nirvana」) 방에 머문다. “조립형 서랍장이 쓰러져가”는 방에서 “싸구려 보드카와 오렌지주스를 종이컵에 섞”(「잡종의 별자리」)어 마시고, 여러 개의 방이 있는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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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ㅡ 김엄지론1) 안세진 1. 색소폰 연주와 살아남은 소설들 내가 살고 있는 집 앞 하천 굴다리에는 매일 저녁 색소폰을 부는 할아버지가 있다. 처음에는 아저씨였는데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항상 있었다. 어제도 있었다. 당신은 테이프 반주에 맞추어 끈적한 유행가를 연주하는 중절모 쓴 노신사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겠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풍경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벽을 보고 색소폰을 분다. 반주도 없고 관객도 없다. 중절모는 쓰고 있다. 한 이십 년쯤 들었으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나는 아직도 그가 대체 매일 무엇을 연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불협화음 같은 프레이즈가 툭툭 던져지고 호흡을 고르는 듯 어색한 침묵이 길게 흐른다. 몇 개의 음으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멜로디가 수십 번 반복되기도 한다. 아무리 들어 보아도 그것은 노래 같은 것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오래 연주하지도 않는다. 한 시간쯤 지나면 색소폰을 케이스에 넣고 어딘가로 털레털레 사라진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정한 규칙에 따라 매일 무엇인가를 연주하고 있다. 어떤 수련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유 모를 형벌을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무엇인가 반복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는 장인(匠人)일까, 아니면 광인(狂人)일까. 언제부터인가 김엄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색소폰 소리를 듣는다. 무엇인가가 소설 속에서 그저 미친 듯이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엄지의 연주가 시작된 순간은 언제였을까? 정확히 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겠다. 그때 데뷔 육 년 차의 소설가 김엄지는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문학과지성사, 2015)와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민음사, 2015)라는 두 편의 책을 거의 동시에 문단에 상재했다. 전자는 그의 등단작 「돼지우리」부터 시작해 비교적 ‘단편소설’의 통상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는 초기 작품들이 모여 있는 소설집이었고, 후자는 그가 최근 발표했던 각종 소설의 파편들이 이리저리 조합되어 만들어진 그야말로 괴이쩍은 장편소설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었지만 김엄지의 소설은 명백히 전자에서 후자의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무개념 상태로 널브러져 있”2)는 오피스 맨들의 기이한 무기력은 이미 그의 초기 소설이 잠시 펼쳐 보였던 ‘씹’, ‘뻑’, ‘좆’의 치기 어린 발랄함을 모조리 잠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야흐로 - 이후 김엄지의 소설을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규정하게 될 - “삶의 무게, 아니 ‘무게 없음’을 형상화한 듯한 하나의 형식”3)이 발명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김엄지의 문체(style)는 사실상 그때 이후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 성의 없이 툭툭 끊어지는 문장, 몇 페이지를 채 이어 가지 못하고
- 관리자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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