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캠 시뮬레이션; 존재하지 않는 그리움의 시작법
- 작성일 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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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캠 시뮬레이션; 존재하지 않는 그리움의 시작법1)
-황인찬과 배시은의 시를 중심으로
신은조
1. 왜 그리움은 이 세상에 없는가
이창동의 영화 <박하사탕>은 “나 돌아갈래!”라는 외침으로 포문을 연다. 기차가 달려오는 선로 위에서 절규하는 남자 “영호”는 어느 순간 자신의 인생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행복으로부터 멀어져 버렸으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부터 멀어지기를 선택한 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후 미쳐 버린다. 그래서 영호의 비명은 만약 시간을 멈추고 행복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이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이때 앞으로만 나아가는 기차의 이미지는 역행을 불허하는 시간의 특성과 매우 흡사하며, 선로에 서서 기차를 막아서는 영호의 행동 또한 시간의 흐름을 멈춰 세우려는 의지의 표명 그 자체라고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앞으로만 흘러가며, 이 장면과 함께 그의 삶은 막을 내릴 것이다.
과거는 그것이 이미 지나갔다는 사실만으로도 매혹적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고향 땅의 꿈을 꾸거나, 기행을 일삼는 사람들의 주변에 사진, 비디오, 일기와 같은 기록 매체가 놓여 있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지나간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고, 독자적인 물성을 부여하는 이미지들. <응답하라> 시리즈와 같이 과거의 사건들을 그대로 되살려 내는, 그 자체로 노스탤지어인 매체는 대중들이 시간을 넘나들 수 있도록 권능을 행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등장하는 미디어·매체·창작물에 드러나는 노스탤지어는 조금 다른 선로에 올라타 있는 듯하다. “베이퍼웨이브2) 음악 장르에 조악한 영상을 짜깁기해 놓은 에스테틱 영상”이 유행하는 현상과, 80년대 미국 올드스쿨 힙합 패션의 대표 격인 펑퍼짐한 바지와 브라탑을 입고 춤을 추는 톱 아이돌 가수들을 떠올려 보자. 그들의 뮤직 비디오에는 일본 도쿄 외곽의 풍경이 비추어지며, 등장하는 인물은 90년대의 전자 제품들을 사용한다. 이와 같은 이미지는 앞서 언급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동떨어져 있음은 물론, 실존하는 시대상을 재현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는 “복고”나 “레트로” 등의 키워드와도 거리가 있다. 이상한 일이라면 일련의 작품들을 감상한 대중들이 해당 영상에 공감하며 심지어는 그리워한다는 것이겠다.
이하림은 시대적, 정서적으로 동떨어진 이미지들을 매개 삼아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현대 매체들의 동향을 “액체 근대(지그문트 바우만)”로 통칭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의 파편화된 기억, 그리고 그로 인해 파열된 역사성의 형상이라고 정의한다.3) 세계화와 개인주의로 인해 “집단 기억”이랄 만한 상실의 경험을 갖추지 못한 현대인의 집단적 무의식이 정체성 혼란을 불러일으키므로, 경험한 적 없는 것을 기반으로 한 ‘보철 기억’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차이, 불일치, 충돌, 단절을 기반으로 한 현대의 이 ‘사변적 노스탤지어’는 개인적 내러티브와 역사를 중개하여 과거의 고통을 물신화하는 대신 현재의 체험으로 귀환하게끔 돕는 ‘성찰적 기능’을 갖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각을 오늘날의 문학에 그대로 적용하여 읽다 보면 미묘한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대중문화 속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내 손으로 촬영된 적 없는 시간대의 콜라주라면, 현대 문단의 노스탤지어가 향하고 있는 방향은 촬영할 수 없는 것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 속에서 인물들은 물리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궁핍한 세계에 머무르며 허구를 그리워한다. 그들이 머무르는 세계 자체가 허구인 경우도 적지 않다. 기술이 무한히 발전한 미래에 어떠한 결함도 갖지 않은 상태로 태어나는 “마을” 사람들이 “지구”로의 순례를 떠나 돌아오지 않는 상황(김초엽,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을 생각해 보자. 게임 속 세계(서호준, 『소규모 팬클럽』)와 웹소설 속의 웹소설(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은 또 어떤가. 이 시대의 시인들이 써 내려가는 그리움의 세계는 시집의 권수만큼 존재하겠지만 겪어 본 적 없는, 심지어는 실존하지도 않는 허구의 세계를 상정하고 그곳에서의 활동을 논하려는 이 정동을 단순한 ‘사변적 노스탤지어’라고 정의해도 되는 것일까?
물론 앞서 열거한 환상의 세계를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 읽지 않으려는 관점 또한 분명히 존재하리라. 위와 같은 세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기 때문에 과거가 아닌 현재이며, 자아가 고통스러운 실재의 세계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가공의 유토피아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하림이 짚었듯 노스탤지어가 개인적 경험의 바깥으로 향하게 된 이유는 액체 근대에 실재적인 ‘고향’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문학이 쓴 자와 읽는 자가 텍스트를 매개 삼아 서로의 심정적 간극을 좁혀 나가는 상상력의 교환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콜라주로 재탄생한 이미지와 문학이 구성하는 세계는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와 같은 주장은 오히려 겪은 적 없는 기억 전체를 공상으로 간주, 콜라주와 재전유를 통해 가능했던 노스탤지어의 성찰적 기능을 파편화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다시. 이토록 생경한 감정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민하는 시점에서 황인찬과 배시은의 두 시집을 펼쳐 보려는 것은 어떤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그렇지 않은 일인지 해명하려는 자아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무슨 일이 있었”고, 또 “일어난 것은 무엇”인지 되묻기를 멈추지 않는 자아(「통영」, 『사랑을 위한 되풀이』)와 “중요한 것은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일어난 일인가 아는 것”임을 잊지 않으려는 자아(「칫솔」, 『소공포』)라면 의식 속으로 침투하는 사실 아닌 경험을 상기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끝도 없이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에서 이 시대의 자아들을 유혹하는 미지의 그리움을 건져 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거꾸로 행하는 여정이다. 끝난 곳에서부터 출발하는 기행이다. 왜 그리움은 이 세상에 없는가. 생경한 기억을 투약하는 주사기는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는가. 어디에서도 촬영된 적 없고, 촬영될 수 없는 비디오 속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 환상발(發) 기차의 종착지가 여기에 있다.
2. 불가능한 경이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일상을 위해 무고한 한 명의 아이를 영원히 지하실에 가두는 어떤 도시에 대해서, 거대한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 소규모의 폭력을 준비하는 늙은 소설가와 건축가에 대해서, ‘외로운마음’이라는 이름을 걸고 신문 상담란을 운영하며 신앙을 잃지 말라는 답변을 해 주는 삶에 지친 어떤 남자에 대해서
가끔은 슬픈 목소리로, 또 가끔은 즐거운 목소리로,
중요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이건 정말 중요한 이야기야, 이건 정말 있었던 일이야
강조하고 또 강조하면서‧‧‧.
그러나 나는 네가 왜 소설 속의 일을 정말이라고 말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가에 발을 담갔는데 생각보다 차가웠다
그러나 아무것도 해명된 것은 없다」, 11p.
황인찬의 세 번째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는 “세상은 영화가 아니”라는 자각에서부터 출발한다. 세상이 영화가 아니라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일까. 미처 규명하기도 전에 이어지는 시 「물가에 발을 담갔는데 생각보다 차가웠다 / 그러나 아무것도 해명된 것은 없다」(이하 「물가」)는 소설 속의 이야기를 “정말 중요”하고 “있었던 이야기”라고 강조하기를 반복하는 “너”와, “소설 속의 일을 정말이라고 말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화자의 대립을 그려 낸다. 하지만 이 대화는 다소 허황되다. 현대문학을 꾸준히 즐겨 온 독자라면 “너”가 예시로 드는 소설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거니와, 창작물과 사실을 구분 짓는 태도에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소위 “쓰는 자아”인 화자가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라는 발언에 “영화는 없”고, “계속 반복되는 앉아 있음”이라며 반박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무대의 생령」). 소설의 귀추와는 관계없이 현실의 참혹함은 분명하며, “물가에 발을 담갔”을 때 느껴지는 차가움처럼 자의적인 해명을 불허하는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이어지는 문장들은 친구 사이의 대화라기보다는 차라리 허구와 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몽상가의 상담 기록처럼 읽힌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화자가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정말 일어난 일은 “네가 죽었다고 생각”한 것뿐, 네가 죽은 건 아니라는 투의 서술 트릭을 구사하고, 자신이 바라본 서울의 삭막한 풍경을 “사실로는 적지 않아야겠다고” 성토하는 그의 문장들은 현실을 교묘하게 축소하고 왜곡한다. 그뿐인가, “꿈에서 본 것을 정말로 봤다고 믿기도 하고, 죽이고 싶은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명시적 사실과 허구의 인식을 적절히 뒤섞기도 한다(「무대의 생령」). 물론 자각은 많은 경우 객관화를 동반하므로, 화자가 스스로 꿈과 착각을 진실과 혼동했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뇌리에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명료하게 그어져 있음의 반증이리라. 그러나 진실에 기반한 정교한 거짓말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견인해 내는 것은 전적으로 소설의 일이다. 다시 말해, 화자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 적는 리얼리스트가 아니라 서술 트릭에 능한 작가다.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허구의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된다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때 기록 매체가 가진 허구성은 현실이 불변한다는 사실에 힘입어 시공간을 재구성할 수 있는 특권으로 변모하므로, “꿈에서 본 것을 정말로 봤다고 믿기도 하고, 죽이고 싶은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한다는 화자의 고백은 그가 “쓰는 사람”이라는 전제에 한해서 진실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이야기-쓰기 그 자체가 혁명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설득하기 위해 구태여 소설을 쓰는 것은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같다는 격언을 불러올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래서일까, 『사랑을 위한 되풀이』의 화자들은 대개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이다. 개중 「피카레스크」의 광경은 한눈에 보아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시골에 있는 나의 집”에서는 그곳이 나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겪어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삶이 자꾸 제작되”는 중인데 정작 나에게는 “슬픔이 찾아오는 날”만이 찾아온다거나, “어두운 시골길을 지나 이곳으로 오는 사람”인 그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모순이 짧은 시 내에서 반복된다. 이와 같은 사실들의 부정 교합은 “본 것을 사실로는 적지 않는” 이야기-쓰기의 원칙을 경유하여 읽어야 비로소 명료해진다. 그가 슬픔이 찾아오는 날마다 “다 소설이었다”고 거짓말을 적어 내리는 것이다. 당일 있었던 사건 사고를 받아 적는 일기는 그 페이지에 거짓말-허구를 적어 내리는 것으로 가뿐한 이야기와 괴로운 현실을 중재하는 메타적 매체로 변모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피카레스크」의 화자에게 이야기는 그를 계속해서 그리워하기 위해 고통을 가둬 두는 수용소이자 식민지가 된다.
그래서 이 화자는 말끝을 흐린다. 이야기가 영원할 수 없고, 아름다움의 영토가 넓어질수록 그에 대비되는 쓸쓸한 삶의 풍경 또한 더욱 명료해지기 때문이다. 기실 “그”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돌이키면서 괴로움을 견디고는 있지만, 시의 후반부에서 사실 “그”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가. 그래서 화자의 “고백”에 대한 진술은 “누적 없는 반복”이며(「아카이브」), 화자는 “생령”이다. 이렇듯 정작 그 “미래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화면보호기로서의 자연」). 이야기가 아름다움과 별개로 이 모든 것이 전부 현실 도피일 뿐이라면 화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명확한 대답을 내리기 어려워 보이는 이 질문을 손에 쥐고 “끝”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황인찬은 이야기한다.
어떻게 끝내야 할까,
그런 고민 속에서 이 시는 시작된다
문이 열리는 것이 좋을까, 영영 닫혀 있는 편이 좋을까, 아니면 문이 열렸지만 아무도 없었다는 결말은 어떨까
‧‧‧그런 생각 속에 있을 때,
우리 이야기 좀 하자”
맞은편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어떨까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이야기라는 것이 시작되겠지
어떤 목소리는 이야기와 무관하게 아름답고, 어떤 현실은 이야기와 무관하게 참혹하고, 그런데도 이야기를 하자는 사람이 있구나
이야기라는 것은 또 대체 무엇일까
이렇듯 이야기와 무관하게 아름다운 “목소리”가 있고, 이야기와 무관하게 참혹한 “현실” 또한 있다. 이야기는 이 목소리의 아름다움과 현실의 참혹함에 간섭할 수 없다. 이 시점에서 그간 현실과 이야기가 대등한 것처럼 읽혔던 것은 화자 자신의 자아가 두 세계의 사이를 적극적으로 오갔기 때문이지, 현실과 이야기가 서로에게 어떠한 물리력을 행사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이 무력함은 오히려 이야기라는 형태의 기록 매체가 무한한 가능성을 품을 수 있게끔 만든다. 이야기를 끝맺는 시점에 “우리 이야기 좀 하자”라는 발화를 삽입하면, 그 시점부터 다시 또 다른 이야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때 이야기 구조의 파괴는 단순히 상상을 발산할 여지를 열어젖히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에 “다음”을 가능하게 하는 기제로서 기능한다. 계속해서 시를 읽어 보자.
창밖은 어둡고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다
창에는 창밖을 내려다보는 내가 반사되고, 여길 좀 보라는 목소리가 있고, 또 이제 그만 끝내자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런 일이 이어진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어떻게 끝내야 할까,
영원한 폭우 속에 갇혀 버린 채로 끝난다면 어떨까, 문을 열고 나가니 전혀 다른 골목에 도착한다면, 어쩌면 영원히 계속되는 이야기로 이야기를 끝낼 수도 있겠지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다
그렇게 끝내면 정말 끝나 버릴 것만 같다
우리 이야기 좀 하자”
이렇게 이 시를 끝내기로 했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네게 말을 건네며
「부서져 버린」, 152p.
현실이 이야기와 무관하게 참혹하다면, 현실과 관계없는 비극도 있는 존재하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병렬적으로 진행되는 두 가지 층위의 내러티브가 서로 교류하며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해당 내러티브의 진위 여부는 문제가 될 수 없다. 문제는 언제나 “끝”이다. 만약 이야기에 사실을 덧씌우는 힘이 있다면, 이때 화자가 적어 둔 “이야기”는 단순히 허구가 아니라 우리가 갈망하는 유토피아로서 급부상하며, 그 뒤에 어떤 상황이 올지 모른다는 무한함은 더 이상 두렵지 않다.
황인찬은 현실을 낙관하지도, 비관하지도 않는다. 낙관과 비관은 내러티브의 종결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취하는 행동은 “우리 이야기 좀 하자”고 지금 나를 바라보지 않는 네게 건네는 말을 적어 두는 것이다. 이렇듯 시인은 시에서 다만 여러 전망을 펼쳐 놓는 것으로 “이야기”가 섣부르게 완결되는 것은 방지한다. 마치 살아남기 위해 왕에게 천일 밤 동안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용감한 셰에라자드의 일화처럼 결말을 유보하는 이야기꾼의 말솜씨는 우리에게 내일의 가능성을 담보한다. 이처럼 황인찬은 의도적으로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사실주의자”와 화자의 거리를 벌리는 동시에 상호 불가침의 영역처럼 느껴졌던 현실과 기록 매체의 관계를 새로이 정립한다. 언젠가 도래할 완결을 끌어안은 채 그저 아름답고 정교한 이야기로 영원히 덮이는 것처럼 보이던 그 순간, 누군가 이 “아카이브”에 접속한다.
3. 이슈잔
짐을 풀자
짐은 풀린다
모든 것과 오랜만이다 오랜만인 것들은 나에게 소중하고 독이 된다
어제는 운이 나빴다 웃긴 것은 얼마나 더 운이 나쁠 수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보려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는 운이라는 것이 꼭 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일어난 일이다 어디까지가 일어난 일인가 아는 것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 일이자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다
칫솔을 입에 물고
똑 부러뜨린다 입안을 구르는 머리통
「칫솔」, 14p.
황인찬이 시에서 현실과 이야기를 계속해서 교차시키며 이야기를 열어 놓는 참을성을 얻어 냈다면, 배시은의 화자는 되려 “오랜만인 것”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화자는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인식도 황인찬의 화자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그 차이점은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래의 일로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로 전제한다는 것이다. 황인찬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알 수 없는 것이고, 가능성으로서 열려 있는 모든 것이지만, 배시은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은 미처 알지 못한 것이고 그래서 습득해야만 하는 모든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배시은의 화자들은 “화자가 아니”고 “의견을 가질 수 없”(「현재형 일기」)으며, “그렇게 많이 말할 수도 없”다(「헬로 월드」). 그러한 관점에서 배시은 화자의 심리적 처지는 바우만이 액체 근대를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심상과도 흡사하기에, 「칫솔」에서 드러나는 단절의 이미지는 잃어버린 고향의 은유임과 동시에 의지를 거세당한 주체의 형상을 읽어 낼 수 있는 단적인 예시가 될 수 있다.
어떠한 요인에서든 내가 미처 갖추지 못한 과거를 숙지하고 외우려는 감각은 시집의 제목은 「소공포」와도 다분히 맞닿는다. 치과에서 치료를 진행할 때 환자의 입안을 제외한 얼굴의 모든 부분을 가리는 소공포가 환자로 하여금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도록 차단하는 장벽인 것처럼, 배시은에게 있어 상황 파악을 불가하게 하는 기제는 시간이라는 침묵이다. 언제나 앞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무자비함을 생각했을 때, 배시은의 시에 지나치게 깊은 들여쓰기나 보폭이 넓은 띄어쓰기가 자주 사용되는 이유로 침묵에 의한 정보의 결여를 연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배시은의 이런 화자 아닌 화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읽는 것, 그것도 대사를 소리 내어 읽는 것뿐이다.
유기 식물을 껴안고
그는 외웠다
무엇이라도 되어 주는 것이 좋겠어
대사를 외우면서
생각을 줄였다
대사를 외우면서
대사를 외우면서 대사를
대사를 외운다는 생각이
대사를 따라잡을 때까지
대사를 줄였다
대사는 외우는 게 아니랬는데
상황을 이해하는 거라고
그는 외웠다
상황을 이해하기에
상황은 항상 멀리에 있다
그는 외웠다
무엇이라도 되어 주는 것이 좋겠어
아무거나 있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없는 게 나은데 너에게는 무엇이라도 쥐어 주는 게 좋겠어
내가 너의 무엇이라도 되어 주는 게 좋겠어
식물에 대고
더빙을 했다
이 장면은 여기서 끝나
그는 식물을 외교 행낭처럼 대했다
소중히 하되 파헤쳐 보지 않았다
「비더빙 디비디」, 48p.
「비더빙 디비디」에서 “그”는 앞서 제시되는 경직성에 종사하며 대본을 외운다. 대본은 이미 완결된 상태로 배우 앞에 도착한다. 어떤 시점에 무슨 사건이 벌어지는지부터 인물이 어떤 발화를 해야 하는지가 전부 결정되어 있는 대본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로 하여금 이 모든 사항을 숙지하고 외울 것을 종용한다. 대개의 경우 배우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배우 본인을 극중 인물에 맞춰 넣기로 한 이상, 그 극은 역사라는 과거이며 그것을 짓고 연출한 작가는 세계의 진리와도 비슷하다. 하지만 이 경직성은 의견과 말이 없는 『소공포』 속 화자 아닌 화자들에게는 매혹적으로 느껴진다. 대본을 “평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곤욕스러운데 대본에는 해야 할 말과 행동이 다 적혀 있다는” 이유로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연극배우」), 영화의 제목만으로 이루어진 시가 존재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 때문인 것 같다(「소공포(2022)」).
그래서 이 화자들의 읽기는 수행이다. 입력된 것만을 산출할 수 있는 기계적 자아의 표상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나는 그것을 믿는 것 이상을 원한다”고 확언하는 화자의 발화는 완결된 내러티브에 자아를 의탁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도 느껴지며(「은점토」, 34p.), 대사를 외우면서 “유기 식물”에 목소리를 입히는 행위는 “그”라는 인물 자체가 식물과 겹쳐 보이는 효과를 통해 그의 현재 상태를 진단할 수 있게끔 만든다. 그러나 배시은은 이 시에서 “그”가 보여 주는 태도로는 청자에게 결코 “무엇이 되어 주는” 형태에 다다를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한다. 왜냐하면 배우는 언제나 대본을 “해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앞서 ‘대개의 경우’ 배우는 극본의 완전 암기라는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연기라는 행동이 극본의 재해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은 상황이더라도 다른 사람이 연기한다면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이에 비해 단순히 외운다는 행위는 피상적이다. 이때 “외교 행낭”이 그것을 옮기는 자에게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는 발화가 들어오는 것은 다분히 시사적인 지점이다.
다시 말해, 비디오에 담길 수 있을 만한 진정한 연기는 단순히 “믿는 것” 그 너머에 있다. 확정된 대본은 불변하지만, 결코 불가해한 것은 아니다. 시집 내부에서 화자들이 영화와 연기에 몰두하는 이유를 상기해 보자. 그것은 기억의 공백을 메우기 위함이다. 또, 기억의 공백을 메우는 것은 말할 자격을 얻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러한 화자들이 연극이나 연기를 삶의 방식 그 자체로 채택한다면 그것은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바꾸고자 하는 감정, 성찰적 노스탤지어를 배격하고 오로지 과거에의 고정을 원한다는 말과도 다름없다. 그를 증명하듯이, 대본을 원하는 행위 “연극배우의 연기는 형편없”다는 평가를 듣고, 심지어는 “믿음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는다”(「연극배우」).
여기까지 읽고 나면, “나는 그것을 믿는 것 이상을 원한다”는 문장이 전혀 달리 보인다. 이야기에의 자아 의탁처럼 읽혔던 “믿는 것 이상”은 어쩌면 극본과 비디오가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이야기로 재해석할 수 있으리라는 효능감이며, 내 것이 아닌 기억이 내 안에서 점차 상기되고 변주되는 방식으로 나의 부재한 과거를 메워 줄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더듬더듬 소리 내는 것은 단순한 음독(音讀)을 초월한 읽기의 수행이며, 수행적 읽기를 추동하는 원인 그 자체다. 그 징후를 시집의 말미 부근을 장식하는 시 중 한 편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문은 영혼으로 꽉 찼다
영혼에는 기체와 마찬가지로 주어진 공간을 완전히 채우려는 성질이 있다
투숙객은 문을 알아본다
내가 사랑했던 적 있는 문이다 문에 다가가 말을 걸고 싶다
문에게 말을 거는 것은 문을 두드리는 것인가 문고리를 돌려 여는 것인가 문에 몸을 기대는 것인가
문에 글씨를 적는 것인가
차라리 문짝을 떼어 집으로 데려가고 싶다
그리고 천천히 실감해 보고 싶다 문이 불러오는 기억에 대해
아주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며 내가 발견하지 않으면 발견되지 않을 일에 대해
투숙객은 두려움과 흥분을 느낀다
문과 체크아웃하고 비행기에 함께 타는 것이다 멀고 먼 나의 집 나의 방으로 돌아가
내 방에 너를 달아 놓는다면
그럼 너를 열고 닫고 하는 동안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가고
그러는 동안 우리는 무언가 깨달을 수 있을 텐데
문은 투숙객을 내다본다
문은 점점 불어 오른다
「체크아웃」, 107p.
한 ‘투숙객’이 문 앞에 선다. 그 투숙객은 문을 제대로 마주치자마자 그 문이 자신이 사랑했던 문임을 깨닫고, 문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가슴 설렌다. 하지만 투숙객은 문과의 대화를 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가 안절부절못하다가 종국에 문과의 도피를 꿈꾸는 것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거니와, 다소 당혹스럽다. 하지만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그가 “문”이라는 사물을 사랑했고 그것의 기억을 엿보려고 한다는 점이다. 투숙객이 문과 자신을 포괄하기 위해 사용하는 “우리”라는 명칭은 문이라는 매개체 자체가 가지고 있을 기억을 상정한다.
더 나아가, 문은 벽의 안팎을 중개하는 관개체적인 사물이다. 이때 소공포에 난 구멍의 존재를 통해 화자 아닌 화자들이 비디오-기억을 읽듯이, 문은 불투명한 천을 소공포로 만들어 주는 구멍임과 동시에 이야기 그 자체로도 읽힐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투숙객처럼 소공포를 뒤집어쓴 인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름다움의 실체-방 내부가 아니라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도 있겠다고 전망하게 만드는 실감-문의 존재, 즉 아름다운 것인지 참혹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 그 자체이다. 만약 투숙객이 문과의 소통을 통해 “내가 발견하지 않으면 발견되지 않을 일”에 대한 고양감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문 또한 투숙객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정동일 테다.
그래서 문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문은 기대로 부풀었던 투숙객의 마음처럼 독자적인 기억-이야기로 부풀어 올라 결국 투숙객을 읽을 것이다. 투숙객 또한 하나의 이야기이므로. 준동하는 이야기로서 투숙객 앞에 존립하는 저 문에게 말을 거는 행위는 결국 반복적으로 읽는 행위야말로 혁명이라던 어느 사상가의 말처럼4) “내 것 아닌 기억”을 읽어 내는 것으로 가능할 것이다.
4. 있게 될 것이고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토마스 모어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이름으로 이상향을 구축한 지 500년, 행복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영원히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 본능이 100배 줌을 지원하는 스마트폰 카메라와 메모리 등의 기술 발전 양상으로 건재하는 와중에 오직 상상된 그리움을 향한 희구의 몸짓만이 이야기의 형태로 난반사되는 것은 그 불가능성을 시사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또는 이야기 속 이야기)로만 보전될 수 있는 이 겪을 수 없는 허구를 그리워하는 화자들이 명맥을 이어 감은 분명 명시적 사실로서의 자장이 포괄하지 못하는 가능성이 분명 존재한다는 증거일 것이다.
사실은 그것이 해석과 해명을 불허하는 무균실이라는 점에서 시간처럼 냉혹하다. 사실로부터 기인하는 고통 또한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화자들이 두 시집을 아울러 겪어 본 적 없는 세상을 그리워하거나, 이야기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것이다. 물가에 발을 담갔을 때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의 직관마저 해명할 수 없는데, 하물며 수많은 기제와 규범으로 뒤엉킨 세계는 또 어떻겠는가. 멀리 돌아왔지만, 이러한 고립의 맥락으로부터 사회적인 시선 바깥에 유리되어 있는 소수자들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주디스 버틀러는 “그저 거리를 걷는 것, 그런 사소한 자유를 실천하는 것이 때로는 특정한 체제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5). 이 문장은 특정한 동작이 신체성과 정치성을 동시에 획득함으로써 운동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언하면서, 수행이 곧 저항일 수 있음을 담지한다. 다시. 고통이 사실로 굳건하므로 이야기를 쓰는 손은 멈추지 않고, 페이지는 끊임없이 넘어간다. 사실의 박해는 이야기를 멈출 수 없고, 오히려 촉진한다. 만약 지금까지의 독해가 틀리지 않았다면, 3년이라는 간극을 두고 세상에 나타난 두 시집에 똑같이 백 년의 시간을 언급하는 시가 수록되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너는 판서된 것을 따라 적고
나는 창 너머에서 그것을 따라 읽고
어떻게 말을 건넬까 어떻게 해야 모든 것을 망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말을 하지 않고
어떻게 그 말을 할 수 있지
자꾸 고민하면서 백 년째 말을 걸지 못하는 내가 있고
시간이 지나면 수업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나가시면 아이들이 복도로 밀려 나오고
복도에 서 있는 내 앞에 네가 서 있다
손을 내밀고 있었다
무얼 하느냐고, 빨리 들어오라고
「불가능한 경이」 부분, 『사랑을 위한 되풀이』, 46p.
백 년 전 비디오에는 이슈잔이 등장한다
이슈잔은 건물을 빠져나오는 동안 셀프캠을 찍었다: 층계가 나를 칭칭 감고 있었어요
녹화하는 동안 건물은 잠자코 있는다
색을 바꾸지도 않고
문턱을 세워 이슈잔을 넘어뜨리는 일도 없이
비디오는 신비하다
비디오를 재생하는 동안만큼은 비디오의 신비에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
비디오는 시간이 지날수록 팽팽한 긴장감을 갖게 되므로 이슈잔은 시간에 능숙한 사람이 되어 백 년 뒤까지 살아남는다
「이슈쟌」, 『소공포』, 118p.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자아가 현실과 자신의 안위를 동시에 보존하는 타개책으로 “존재할 수 없는 노스탤지어”가 탄생했다는 추측은 여기서 당위성을 확보한다. 이러한 만남의 과정을 통해 『사랑을 위한 되풀이』와 『소공포』가 줄곧 반복해 왔지만 결코 시집 내부의 세계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세계에 동시에 존재했던 “비디오”들은 마치 짝패처럼 서로에게 ‘존재할 수 없는 노스탤지어’와 ‘만들어 낸 유토피아’로서 입증된다. 백년이라는 존재한 적 없는 시간과 두 시집 사이에 있는 3년이라는 물리적 간극은 황인찬과 배시은이 주고받는 ‘씀’과 ‘읽음’의 욕망에 근거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백 년째 수업으로부터 배제된 존재였던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준 “너”와, 이슈잔이 백 년 전 찍은 셀프캠을 보고 있는 “나.” 만일 그들이 실제로 닮았다고 한다면, 결코 시집 내부의 세계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세계에 동시에 존재했던 “영화”들이, 그것이 누구에 의해, 왜 기획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알 수 없었던 그 “이야기”들이 서로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배시은의 시가 시기상 먼저 등장한 황인찬의 시를 참조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두 시집이 서로 맞물림으로써 동시에 시간이라는 사실로부터 해방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하며, 오히려 각각 ‘쓰는 자’와 ‘읽는 자’처럼 그려지는 각각의 화자가 서로 공명하며 강화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실로 쓰는 자는 읽는 자 없이 희망할 수 없고, 읽는 자는 쓰는 자 없이 수행할 수 없기 마련이므로. 만약 독자들이 이러한 해석에 동의한다면, 미래를 기약하는 일과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일은 결코 다른 일이 아니라는 결론에도 함께 발 내디딜 수 있을 것 같다.
그리하여, 결론을 내리기 전에 글의 서두에 있는 질문을 다시 불러오고자 한다. 독자들이 이와 같은 기나긴 여정을 밟게 만들었던 질문들이다. 겪어 본 적 없는, 심지어는 실존하지도 않는 허구의 세계를 상정하고 그곳에서의 활동을 논하려는 사변적 노스탤지어를 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왜 그리움은 이 세상에 없는가. 생경한 기억을 투약하는 주사기는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는가. 어디에서도 촬영된 적 없고, 촬영될 수 없는 비디오 속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 여기까지 당도한 이상 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답변을 얻기 위해 선로를 거슬러 원초까지 돌아왔는지, 이 시대의 자아를 매혹하는 원초적인 이미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 모든 질문을 하나의 답변으로 대신한다. 그것은 상상이라도 촬영할 수 있는 “셀프캠”, 즉 우리 자신이다. 우리 모두를 포괄하는 비디오의 첫 시퀀스가 이제 곧 시작될 것만 같다.
1) 이 글에서는 황인찬 『사랑을 위한 되풀이』(창비, 2019), 배시은 『소공포』(민음사, 2022)를 다룬다. 위의 시집에서 시를 인용할 경우 해당하는 제목만 표시하며, 맥락상 구분이 필요한 경우 시집명이나 쪽수도 함께 명기하도록 한다.
2) 2010년부터 미국에서 크게 인기를 얻기 시작한 음악 장르. 새롭게 녹음하는 것 없이 기존에 있는 음악들을 샘플링하고 붙여서 만든 음악과 홈 비디오 이미지와 광고 이미지를 콜라주해서 만든 영상이 결합된 형태로 온라인상에서 공유된다. (이하림 「생경한 그리움: 경험한 적 없는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잔재의 이미지」 《미디어, 젠더 & 문화》 35권 2호,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2020. 06. 30.에서 재인용.)
3) 「생경한 그리움: 경험한 적 없는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잔재의 이미지」
4) 사사키 아타루는 반복적으로 읽는 것은 그 자체로 혁명임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읽은 사람은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요컨대 루터가 종교혁명에 착수한 이유는 성서에 추기경, 교황, 대주교, 주교 따위에 충성하라는 말이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혁명을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자음과모음, 2012, 75~82p 참조.
5) 주디스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창비, 2020, 20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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