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사람이 살고 있다
- 작성일 202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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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불행한 사람이 살고 있다
유진목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이 문장에 마침표를 찍기까지 석 달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수기로 적은 산발적인 산문을 정리하던 중에 어렴풋이 ‘불행’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불행은 나일까? 곧장 미간이 찌푸려졌다. 글쎄.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나는 짐짓 모른 척했다.
수기는 간결하고 가슴 아팠다. 타인의 이야기였다면 거기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이야기였다. 나는 정말로 불행하구나. 반박할 수 없었다. 나는 나의 이야기에 순응했다. 그래서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마침표.
쓰는 행위는 시간을 보내는 고통스러운 방법 중 하나다. 글을 쓸 때면 자꾸만 손목시계의 초침을 바라보게 된다. 나는 모든 것을 흘려보낼 수 있으면서도 글을 쓴다. 심지어 그것을 타인에게 공개한다. 그 역시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다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벌인 일로부터 태연해지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온갖 괴로운 일들을 책에 쓰고서 태연하게 살아간다. 마치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한다. 나는 쓰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잊는다. 오로지 살기 위해 고통을 기억에서 지우듯이 그렇게 한다.
한때 내 전부였던 것들을 잊으려고 이 글을 쓰는 중이다. 잊고 난 후에 무엇이 찾아올지 알고 싶어서 쓰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시간을 온통 글을 쓰는데 쓰다가 느닷없이 나타나는 무엇과 맞닥뜨리고 싶다. 이 글은 바로 그때 끝날 것이다. 나는 내심 그때를 기대한다.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되는 알맞은 때를 기다린다.
나는 내가 절망에 빠진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짧게 잘라버린 머리카락을 보며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원래 모양으로 되돌릴 수 있는지 생각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 거울을 보며 자기혐오에 빠질 나를 생각하며 진저리를 친다.
불행에도 기쁨에도 공평하게 무감해지는 대신 불안을 적극적으로 견뎌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짐작과 가늠으로는 판단해 볼 수 없는 영역에 나의 불안이 있다.
지난 가을에는 후쿠오카에 다녀왔다. 11월의 후쿠오카는 여름의 끝자락 같아서 챙겨간 가을 니트들은 모두 캐리어에 넣어 둔 채로 반팔 티셔츠를 사서 입고 발이 퉁퉁 부을 때까지 돌아다녔다.(나는 항상 여행 옷을 챙기는 데 실패한다.)
9월에는 부산지방법원에서 이혼을 확정 받았다.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다 짧은 질의에 대답하니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나에게 손을 높이 들어 인사했다. 그날 밤에는 갑자기 울음이 터져 소리 내 울었다.
10월은 어떻게 보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11월이 되자 후쿠오카에 가고 싶었다. 남편과의 좋은 추억들이 있는 곳이었다. 도무지 혼자 갈 엄두가 나지 않아 J와 함께 짐을 꾸렸다. J의 트렁크에는 후쿠오카 날씨에 걸맞은 옷들이 들어 있었다. J의 동행으로 배짱이 생긴 나는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J는 페이페이 돔 투어를 예약했고 목요일 저녁의 클래식 공연을 보려고 티켓을 알아보았다. 나는 여행을 떠나며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는 사람이지만 J는 나와 달랐다. 나 아닌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삶에 새로움을 더하는 일이 되어 준다. 나는 그것을 매우 즐긴다. 내가 타인에게 새로움을 더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오호리 공원의 미술관에는 여전히 그 그림이 걸려 있다. 춤을 추듯 손을 잡고 동그랗게 도는 사람들. 그와 몇 번이고 와서 보았던 그림이었다. 나는 다른 그림을 보다가 다시 돌아와 그 그림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전시실을 나와 로비를 한 바퀴 돌아보면 구석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그가 보였다. 의자에는 이제 낯선 사람들이 앉아 있다. 후쿠오카에 가면 변하지 않은 것들이 그 자리에 묵묵히 있으면서 나의 사랑이 짧기만 했음을 고한다. 나는 한 번의 인생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갖고 싶은 걸까? 나는 나보다 몇 배는 커다란 그림 앞에서 골몰한다. 나의 다음에도 사람들은 그림 앞에 서 있을 것이다. 나의 이전에도 그림들 앞에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나는 나보다 아주 오래된 것들 사이에서 내가 무엇인지를 가늠해 보려고 미술관에 간다. 나의 사무치고 흩어지는 감정들이 어째서 벽에 걸린 그림보다 망연한지 답을 찾고자 미술관에 간다. 맑고 화창한 그림 앞에서는 눈부신 기억을 떠올리면서 어둡고 무서운 그림은 빠르게 지나쳐 간다.
팸플릿에 적힌 읽을 줄 모르는 한자들은 언젠가 내가 적어 놓고 다시는 펼쳐 보지 않은 일기 같다.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모든 것을 알 것만 같은 채로 미술관을 빠져 나온다.
오호리 공원에서 내가 하지 않은 것
혼자서 물가에 앉아 있기.
오리배 타기.
건강한 사람들을 따라 달리기.
개와 산책하기.
아이스크림 먹기.
다음에 갈 곳을 정하지 못해 머뭇거리기.
그를 떠올리지 않기.
후쿠오카에는 좋아하는 킷사와 이자카야가 있고 그곳에서는 우아한 방식으로 연초를 피울 수 있다. 후쿠오카에서 내가 가는 곳은 어디에나 재떨이가 놓여 있고 흡연자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 점이 나를 매우 홀가분하게 한다. 그리고 후쿠오카에는 무엇보다 치요짱이 있다. 치요짱은 노란 간판을 가진 아주 작은 가게로 저녁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문을 여는 이자까야다. 구시다 신사 바로 옆에 있어서 찾기도 아주 좋다. 니은 자 바 테이블이 가득 차면 여섯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다. 메뉴는 단출하면서도 다양하다. 우선 오뎅이 있다. 일본을 돌아다니며 먹은 오뎅 중 나에게는 단연코 최고의 오뎅이 잔잔히 끓고 있다. 작은 화로에 구워 주는 꼬치도 있다. 좋아하는 재료가 가게에 있는지 물어 보고 주문하면 사장은 흔쾌히 “아리마스” 하고 구워 준다. 가지도 구워서 무쳐 주고 오크라도 데쳐서 버무려 준다. 닭을 구워 토막 내 양념에 볶아 주기도 한다. 오징어가 있냐고 물어 보면 “아리마셍”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내일 오면 해줄 수 있다고 말한다. 나의 대답은, 모찌롱, 모찌롱데스. 나는 우메슈소다를 다섯 잔쯤 마시고 마지막으로 무얼 먹으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다이콘과 아츠아게를 한 조각씩 더 음미한 뒤에야 겨우 가게를 나선다. 치요짱은 바쁘지 않을 때는 밖으로 나와 배웅을 해준다. 쟈, 마다 아시타!
J와 함께 오지 않았다면 혼자서 우메슈소다를 만취할 때까지 마시고는 바에 엎어져 울어버렸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는 숙소에 돌아와 변기를 끌어안고 토했을지도.
으.
J는 내가 혼자서 일본에 가는 것을 자신의 일처럼 걱정했었다. 내가 타지에 가서 혼자 있는 게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지난여름 나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오랫동안 모아 둔 약들이 있었다. 하루는 그것을 다 먹으면서 혼자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죽을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생각이 흘러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나는 이틀을 내리 잤고 친구들의 신고로 병원에서 깨어났다. 두 번째였다. 그 후로 약을 모으려는 노력 따위 하지 않게 됐다. 그게 얼마나 됐든 약만 먹어서는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게 된 탓이다. 나는 그저 죽는 시늉을 두 번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병원에서 깨어난 뒤 J의 집에서 열흘, M의 집에서 열흘을 지내고 나서야 혼자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집으로 돌아와 혼자가 되었을 때 나는 정말로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살면서 가장 겸연쩍은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사는 동안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돌연 죽을 수 있다면. 고통과 불행과 찰나의 기쁨을 안고 현재와 함께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시간보다 먼저 삶을 거절하는 방식으로.
십 년 가까이 혼자 집에 있지 않은 것에 안도했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안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트로피처럼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고 살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세상에서 아주 특별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있다. 사랑은 그럴 수 있다. 사랑은 삶을 전부 바꾸려고 한다. 무엇이든 사랑이 있으므로 할 수 있다고 믿게 한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실제로 바꿔버린다.
삶은 사랑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사랑이 없던 시절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랑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을 기적처럼 여긴다. 사랑 없는 상태는 불가능이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먹고 사랑하기 때문에 잠들고 사랑하기 때문에 깨어난다. 사랑은 그 자체로 신체가 된다. 크게 웃고 반짝인다. 울음마저 기껍다. 타인을 사랑하면 타인에 의해 살아가게 된다. 그것은 중독된 상태와 같다. 시간 안에서 사랑이 유한하다는 사실에 두려워한다. 그리고 사랑은 시간보다 먼저 끝이 난다. 남아 있는 시간을 사랑이 다 담지 못한다. 사랑이 끝나고도 시간이 전과 같이 흘러간다는 것은 실로 무서운 일이다. 한 사람이 빠져나간 만큼 시간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기 시작한다. 나는 사랑을 마주 보는 대신 시간과 오롯이 마주하게 된다. 사랑은 내가 공들여 시간을 살던 방식을 전부 제 것인 양 가져가 버린다.
나는 매일 다짐한다. 혼자서도 사랑을 지녀야 한다고. 혼자서도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다정히 나를 돌보며 둘이서 사랑하는 감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나를 통해 사랑을 익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인생을 사랑할 수 없어서 증오하게 된다. 그냥 죽어버릴까 생각이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혼자서도 사랑해야 한다. 하루를 마치고 잠드는 나를, 깨어나 꿈을 복기하는 나를, 밥을 짓는 나를, 설거지하는 나를, 일하는 나를, 걱정하는 나를, 슬퍼하는 나를, 용기 내는 나를, 비겁한 나를, 한심한 나를, 사랑해야 한다. 혼자이거나 둘이거나 마찬가지로 사랑을 지녀야 한다. 그런데 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지?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거지? 사실 나는 전혀 모른다.
이제 시간은 텅 비어 있다. 나는 그 공허한 눈을 들여다본다. 시간은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시간은 내게 일어나 오늘을 살라고 하지 않는다. 시간은 내게 옆에 누우라고 말하지 않는다. 시간은 내 머리를 쓸어 넘기지 않는다. 시간은 내게 말 걸지 않는다. 시간은 오로지 보기만 한다. 내가 죽을 때도 시간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볼 것이다.
나는 붙잡지 않고 한 사람이 나에게서 멀어지도록 내버려두었다. 시간이 내게 하는 방식으로 그를 떠났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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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6-03-01
[편집위원 기획 - 문학, 음악, 장면들] 지문 너머로 하나의 선율이 아를 lilysacredlily · 20251228_slowslofi playset 최초의 기억은 들렸던 것이다. 할머니의 불경 읽는 소리. 할머니는 늘 자기 전에 적혀 있는 그것들을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할머니가 나를 부를 때, 그리고 나에게 이야기할 때와는 또 다른 생경한 목소리와 리듬으로 그것들은 발화되었고 그 목소리는 음악처럼 들렸다. 할머니는 거기에 분명히 있었지만 어느 영겁 너머 다른 차원에서 내려오는 작은 신의 목소리처럼 들렸기에 그 소리의 흐름 속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나 또한 내가 무엇인지, 내가 있는 곳을 잊어버렸다. 그 뜻 모를 말들을 할머니의 입을 통해 전해 듣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거의 기도처럼, 주문처럼, 노래처럼 들렸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 전해지고 또 쓰인 것들이 할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나에게로 전해졌고 어린 나는 그것들을 어설프게나마 소리 내어 보기도 했다. 그 유년의 밤 동안 할머니는 나의 유일한 이야기꾼이었으며, 어린 나의 두 귀가 되어 주는 밤의 훌륭한 안내자였다. 구전. 우화. 신화. 전설. 민담. 시대를 넘어서도 계속되는 이야기들. 되풀이되는 노래 같은 것들. 요정. 고블린. 거인. 요괴. 도깨비. 기사와 문지기. 바드와 리라. 검과 용사. 광장의 하프 소리. 그것들은 때때로 꿈속을 수호하며 때론 일상의 그림자들이 되어 호출하면 응답할 것만 같았다. 들려지는 것들이 쓰여질 때, 쓰여진 것들이 들릴 때. 적혀 있는 것들이 그들의 입을 통해 귀로 전해지는 것. 반복해서 전해지고 지금도 여전히 전승되고 있는 것. 어느 날 들렸던 하나의 목소리가, 어느 한 구절이 누군가를 살렸다면, 그로 인해 살아갈 수도 있다면 그것은 신앙과 무엇이 다를까. 그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빌어 준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에 기대어 계속 갈 수 있었던 수많은 시간들로부터 지금도 계속되는 어떤 순간들이 지속될 수 있었을 뿐이고 그다음이 있기를 그 순간들로부터 감히 바랄 수 있었던 것이다. 늘 목숨처럼 붙들고 있지만 동시에 늘 너무 아득하기만 한 것에 대해 대체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그 고민의 끝에 일주일도 안 되어서 나는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다. 며칠 동안 정신이 몇 번이나 나갈 것 같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셀 수 없을 정도로 꿈을 정말 많이 꿨는데 잠깐의 꿈에서 할머니의 불경 읽는 소리가 들렸다. 꿈속의 소리였겠지만 귓가에서 목소리는 오래 머물렀다. 병실의 침대가 아니라 이제 마침내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나는 온 건가? 눈을 뜨면 나의 옆에 누워 그것을 읽어 주는 할머니는 없었지만 나는 들었다. 이곳을 넘어서, 시간을 넘어서, 세월을 넘어서. 그 밤 이전의 무수한 밤들로부터, 그 밤의 영겁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것 같았던 목소리를. 초연해지고자 열망하는 마음을 이미 초월해 있는 곳으로부터 목소리는 들린다는 것이. 나의 뼈의 일부는 부러졌고 언제까지 누워 있어야 할지 그때는 몰랐다. 부서진 건 뼈뿐
- 관리자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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