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소설의 피로

  • 작성일 2024-09-01

[에세이]


   소설의 피로


양지예


   노엘 갤러거의 무대를 보며 음악가가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Talk Tonight>. 그의 젊은 시절 방황하던 경험과 더불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한 여인에 대한 곡이다. 노래는 발표한 지 삼십 년 가까이 되어 가고 무대 위 머리 희끗희끗한 노엘 갤러거에게서는 이제 방황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연주자와 합을 맞추는 모습이 흥겨울 정도다. 아련한 원곡의 분위기 역시 세월을 따라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편곡을 입었다.

   음악은 어떻게 나에게 올까. 일단 누군가 곡을 쓰고 발표해야 한다. 청자인 나는 플랫폼을 통해 음원을 감상하거나 드물게 전통적인 방법으로 앨범을 사기도 한다. 음악가에게는 다른 홍보 방법도 있다. 대중음악가라면 뮤직비디오를 찍어 유튜브에 업로드하거나 음악방송에 출연하기도 한다. 때로는 음악과 관계없는 방송이나 행사에도 출연하는데,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얽혀 있겠지만 역시 주는 새 노래 홍보를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신곡은 끊임없이 피로(披露)된다. 나는 가끔 궁금해진다. 가수들은 자신의 노래를 좋아할까.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또한 수만 번은 반복하여 들었을 그 노래를 정말 좋아할 수 있는 걸까.

   음악가는 본인 노래의 첫 청자다. 작곡에 참여하지 않는 가수라 하더라도 비슷하다. 곡이 만들어지는 영감의 그 순간부터 완성 후 녹음 과정까지 좋은 기억도 싫은 기억도 낱낱이 알게 될 수밖에 없다. 내면의 갈등뿐이 아니다. 요즘 세상에 창작자 홀로 만드는 음악이란 없다시피 하다. 사람이 여럿 모였는데 과정이 언제나 매끄러울 수는 없다. 드물게 하늘이 내려 준 노래가 어려움 없이 착착 완성된다 한들 매끈한 표면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울퉁불퉁 제멋대로이기 마련이다. 음악이든 소설이든 아름답기만 한 창작의 과정은 나로선 상상하기 힘들다.

   겉보기를 아름답고 멋지게 만드는 일이란 사실 어렵지 않다. 그저 포장 기술이다. 세상에는 정말 엄청난 포장 기술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내실 다지기보다는 포장 기술을 익히는 쪽이 빠르다. 포장이 어렵다면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 보여주는 방법도 있다. 피땀눈물을 삭제해 버린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처럼. 바라기만 하면 매끈한 성취가 이뤄질 듯한 환상을 듣는 이에게 심어 주는 요령을 수많은 표어와 마케팅 서적이 알려주고 있다. 이런 요령을 활용하면 가수도 어렵지 않게 싫어하는 노래를 즐거운 듯 피로해 보일 수 있을 터다. 삼사 분 정도 꾹 참아내면 그만이다. 케이팝 아이돌들의 화려한 메이크업과 현란한 조명은 혹시 드러날지 모르는 굴곡을 감추는 역할을 남몰래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감정은 가라앉기 마련이다. 설령 마이크를 집어던지고 싶을 정도로 격렬했다 해도 반드시 그렇다. 싫어하던 노래를 부르던 중에 즐거운 추억이 생기기도 한다. 기억은 뒤섞이면서 새로운 인상을 만들어낸다. 날것이던 감상은 무뎌지고 희미해진다. 뜨거울 만치 처절하던 열정도 냉정하게 식는다. 이 변화는 눈에 띈다. 음악에는 피로될 때마다 음악가의 컨디션과 마음이 담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대마다 달라지는 변화는 원인과 결과로 판단할 수 없다. 그저 시간이다. 변화는 시간의 본질이다. 나는 가끔 시간이 음악 속에, 문장 속에 녹아드는 상상을 하곤 한다.

   음악가는 일단 발표한 노래라도 계속 연습할 수 있다. 음악은 앨범에서 한 차례, 그리고 무대에서 여러 차례 피로되는 덕분이다. 레코드는 고정되어 있을지언정 음악 자체는 무대를 거칠 때마다 진화한다. 그렇게 음악이 또 음악가가 성장하는 과정은 심지어 멋지기까지 하다. 무대에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소설 쓰는 나에게 성장 과정이란 그만큼 멋지지 않다. 나의 성장도 소설의 성장도. 아니, 멋지지 않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때론 추하기까지 하다. 유튜브의 ‘소설 쓰는 브이로그’들이 나에게는 아연하다.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렇게 추해지면서 써내어 발표한 소설이 멋진 완성본이라면 좋으련만. 멋지지 않더라도 적어도 ‘완성본’이라면 좋으련만. 탈고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나의 소설이 결코 완성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나는 노엘 갤러거가 부러웠다. 노래 또한 완성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음악가는 인생이라는 시간을 거치며 탈고를 거듭하는 과정을 무대를 통해 보여줄 수 있다. 청자들과 실시간으로 교감하며 함께 작품 자체를 성장시킬 수 있다. 잦은 피로가 주는 커다란 이점이다.


   소설 역시 피로된다. 독자에게 읽히는 순간이 그렇다. 하지만 역시 소설의 첫 독자는 소설가 자신이다. 비슷한 점이 있긴 해도 음악에 비할 때 소설의 첫 피로는 내밀하다. 발표 전의 소설을 주변인들에게 널리 읽게 하는 소설가가 과연 있긴 할지 모르겠다. 굳이 꼽아 본다면 발표 전의 소설은 소설가인 나에게 피로되고 편집자에게 피로되고 때로는 또 다른 편집자에게 피로하는 데 그친다. 교류가 있긴 해도 음악만큼의 규모는 아니다. 일 대 일에 가깝기 때문에 덜 부끄러워서 좋은 점도 있긴 하다.

   일단 발표되고 나면 소설가에게는 수정의 기회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뒤늦게 오류를 발견하거나 신경 쓰여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맘에 들지 않는 문장이 나타나도 어쩔 수 없다. 아니면 소설에 담긴 생각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 소설가 개인의 멘탈에 따라서 이건 대재앙이 될 수도 있다. 가수라면 콘서트에서 편곡 버전으로만 노래해도 될 텐데 소설가에게는 그와 상응하는 방법이 없다.

   혹 북 토크 같은 기회를 통해 소설에 대해 부연할 기회를 얻는 운 좋은 작가도 있다. 한데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명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소설가는 없을 듯하다. 굳이 발표한 내용을 뒤집거나 그에 부언을 붙이는 건 자존심 상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소설가도 사람인지라 내 소설에 대한 공격이 들어오면 방어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러면 그렇게 방어 태세로 지켜낸 내 소설을 나는 좋아하는가. 독자분들께 정말 죄송하지만, 나는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위에도 썼듯이 내 소설이란 모조리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좋아하기에 소설은 나보다 너무 큰 존재이다.

   아니다. 솔직해지자. 소설가는 음악가와 달리 도망칠 수 있다. 북 토크나 낭독회를 진행한다 해도 소설 전체를 다시 피로할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굳이 자신의 소설을 다시 펼쳐 읽을 필요가 없다. 드문 피로가 주는 장점 아닌 장점이다.


   소설이 음악보다 덜 피로되는 이유라면 일단 시간상의 문제가 가장 클 듯하다. 가요 기준 요즘 러닝타임은 삼사 분. 청자가 음악에 집중하든 안 하든 그 시간이 지나면 음악은 끝나 있다. 소설은 다르다. 어쨌든 문자 위로 눈알을 움직여야 하고 뜻을 해독해야 한다. 제아무리 난해한 음악이라도 그 시간이 지나면 끝나기 마련이지만 난해한 소설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면 다음 단락, 다음 문장, 심지어는 다음 단어로도 넘어가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수록 의지에 불타는 독자도 있겠으나 책을 덮어버리는 독자도 많을 터다. 실물 음반 시장이 침체된 요즘, 음악은 물리적 형체를 벗고 자유롭게 어디든 날아다닌다. 일시정지했던 음악도 손가락 터치 한 번으로 다시 들을 수 있다. 반면 소설은 아직까지 이북보다 실물 책이 대세인 모양이다. 읽다 덮은 책을 다시 펼치기 싫어하는 마음은 나도 잘 안다. 묵직한 책의 존재감은 어딘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바쁜 시대라 그렇다. 단편소설이라도 공들여 읽다 보면 한 시간이 지나 있기도 한다. 최근에는 짧은 소설을 쓰려는 움직임도 있다. 고백하자면 나도 짧은 소설 쓰기를 시도해 봤다. 처음에는 성격 급한 내게 제격으로 보였다. 결론은 실패였다. 짧은 소설을 쓰기에 나는 지나치게 수다스러웠다.

   시간말고도 소설에는 언어라는 제한도 있다. 이 지점에 이르러서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다는 몇몇 노래 가사들이 좀 얄밉다. 음악도 화성과 박자를 알아야 즐길 수 있는 영역이 있긴 하지만 언어의 제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가령 아랍어로 쓰인 소설은 내게 소설이라기보다 멋진 조형물에 가깝다. 애초에 문자 언어는 오랜 기간 기득권층의 이익에 봉사해 오지 않았던가. 문자 언어를 무기로 삼은 소설가가 피로 무대가 적다고 해서 불평할 처지는 못 되는 것 같다.

   이쯤 되면 소설가가 된 것이 억울해진다. 소설은 21세기와 맞지 않는가. 나는 21세기와 맞지 않는 인간상인가. 스멀스멀 자괴감도 밀려온다.


   소설에는 소설 나름의 장점이 있다. 음악이 ‘악흥의 순간’에 집중할 때 소설은 ‘시간의 흐름’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하나의 장소로 고정될 수 있지만 시간적 배경은 다르다. 소설 속에서 시간은 반드시 흘러가야 한다. 시간이란 변화다. 소설 한 편은 사랑에 빠지고 배신을 당하고 이별을 한 후에도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심한 그다음 순간 격렬한 증오에 타오르는 마음의 변화를 그려낼 수 있다. 놀랍게도 일견 모순되는 모든 입체적 순간마다 인간은 공감할 수 있다. 이해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짧은 순간순간 소설 속 인물과 공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설이란 그 공명의 순간마다 피로될지도 모르겠다. 요즘 같은 무더위라면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탓에 끝내 유죄 판결을 받은 한 남자를 떠올리기 적당할 듯하다. 아니면 장마 동안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사돈의 이야기라든지, 이탈리아의 푸른 하늘 아래 낯선 손님과 만나 사랑을 시작한 소년의 이야기라든지.

   나는 분홍빛으로 물든 구름을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해진다. 그래서 소설에 분홍빛으로 물든 구름에 대해 썼다. 덕분에 누군가는 어스름의 그 순간 분홍 구름을 발견하고 내 소설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속 꼭짓점이 몽골몽골 둥글게 깎여 동그래지는 기분이다. 한편으로 손발이 오그라들면서 어디든 숨을 구멍을 찾고 싶어지기도 한다. 멋지려면 이런 순간을 견디어야 할 텐데 나는 자신이 없다. 멋지지 않은 것은 소설 쓰기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

   거슬러 올라가면 문장 짓기가 멋지던 시대도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조상들은 유명한 시를 외거나 이러저러한 제한을 두고 문장 짓기를 겨루며 여흥을 즐기지 않았던가. 소설가로서 그런 문화가 끝말잇기나 삼행시 수준에서 겨우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은 아쉽다(나에게는 즉흥적으로 문장 짓는 소질이 없음에도).

   멋이 있든 없든 나는 나의 할일을 할 뿐이다. 문장을 그러모아 소설을 쓴다. 모든 문장이 소설 속에 잘 녹아들었으면 좋겠다. 따로 두었을 때도 하나하나의 문장이 모조리 멋졌으면 좋겠다. 번역가를 고심하게 하는 문장을 쓰고 싶다. 인공지능이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단어와 문장을 발굴하고 싶다. 잠깐 망설인 기술이 곧 나의 문장을 따라잡게 되더라도. 따라잡힌 그만큼 소설이 더 커졌다고 믿으면서.

   맞는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상징과 의미를 찾아낼 때마다 소설은 피로의 기회를 널리 얻게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시대가 변화하더라도 새롭게 의미를 찾아가며 새롭게 피로되는 것이 좋은 소설일지도 모른다. 이에 따르자면 좋은 소설이란 결코 완성되지 않아야 한다. 읽힐 때마다 새로워진다니 그걸 과연 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지 자신이 없어진다.

   소설을 완성해야 하지만 결코 완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내게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완전히 오리무중이라면 좋을 텐데 가끔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깨달은 듯한 그 순간, 나는 다시 깨달음에서 멀어져 있다. 확실한 것 하나는, 그런 나는 멋지지 않다. 소설 쓰기는 멋지지 않다. 아직 소설 쓰는 나를 좋아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내가 쓰는 소설을 좋아할 준비도 되지 않았다. 역시 뭔가 억울하다. 소설가인 나에게도 뭔가 멋진 부분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면 노엘 갤러거에게도 음악 자체에서 기인한 남모를 고민거리가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너무 잦은 피로 때문에 나 같은 소설가를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걔네는 한번 쓰면 끝이잖아? 똑같은 노래를 나처럼 지겹게 반복할 필요도 없고 말야.” 내가 읽지 못한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고민하는 록스타는 내 상상보다 훨씬 멋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런 상상을 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고 소설을 계속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기획

[문장웹진 특집좌담(소설)] 안다무(安穩-多情-無害) 시대와 위험한 소설들

[문장웹진 특집좌담(소설)] 안다무(安穩-多情-無害) 시대와 위험한 소설들 진행 : 박인성 평론가 패널 : 이미상 소설가, 위수정 소설가 기획 : 이주란 편집위원, 박인성 평론가 박인성 문장웹진 기획좌담 10월호에 게재될 소설 파트 좌담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사회 겸 토론 참여자로 이번 좌담회에 참여하게 된 문학평론가 박인성입니다. 좌담의 주제는 ‘안다무 시대와 위험한 소설들’입니다. 위수정, 이미상 두 분 소설가를 모시고 함께 이야기 나눠볼 텐데요.두 분께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리고 최근 근황도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위수정 안녕하세요. 2017년부터 소설을 발표하고 쓰고 있는 위수정이라고 합니다.개인적으로 좀 힘든 일이 있어서 최근에는 소설을 잘 못 쓰고 있는데 이제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소설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박인성 최근에 이상문학상 수상이라는 경사도 있었기 때문에. (웃음) 위수정 그 상 덕분에 제가 평소에 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제안들을 받아서 즐겁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확실히 소설 쓰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가 없어요.제가 사소한 일에도 에너지를 많이 쓰고, 또 멀티가 잘 되는 사람은 아니라서, 어려운 점도 있지만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상 저는 소설을 쓰는 이미상입니다. 근황은 소설은 열심히 쓰지만 쓴 것을 내보내기는 싫은 상태입니다. (웃음) 그냥 집에 계속 쌓아놓고만 싶습니다. 박인성 그것은 개인적인 만족도의 문제일까요? 이미상 만족도도 그렇고 그냥 헤매는 거죠. 늘 그렇듯 엄청 헤매고 있습니다. 박인성 알겠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두 분 모두 열심히 쓰고 있으나 뜻처럼 원활하지는 않다는 말씀이네요. 이미상 그렇죠. (웃음) 셋 다 마찬가지죠. 박인성 저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두 분을 이렇게 모시게 된 건 두 분이 이번 주제에 잘 어울리는 분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찾아보니까 두 분이 《문학과사회》 2022년 여름호에 실린 기획에 나란히 산문을 발표하신 적이 있으시더라고요.이미상 작가는 실험을 "스스로 자극을 고안해 주입하고, 그로부터 파생된 효과를 관찰하고, 창작물에 적용하는 것"()으로 다시 정의해 "사적이고 만만한 것"으로 끌어내리셨고, 위수정 작가는 "그때도 지금도 '전위적'이라는 수식을 동일하게 붙이는 것은 전혀 전위적이지 않다."()고 쓰셨습니다.두 글 모두 이제 새로움이라는 요구 자체에서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는 글이었다고 읽었는데요.그 글이 쓰인 후 다소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각자에게 갱신이나 새로움이라는 말의 무게가 어떻게 남아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또 두 분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문학 장이나 문학의 풍경은 좀 어떻게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미상 저때 정의를 잘해놨군요. 지금의 저보다 낫네요. (웃음) 새로움에 대해 부정적이었다기보다는 어떻게 새로움을 소설에 집어넣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것 같아요. 소설을 저대로 쓰고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 2026-10-01

문장웹진 기획

돌고 도는 ‘남성성-코어’

[문장웹진 다시 읽기] 돌고 도는 ‘남성성-코어’ ― 최가은, 「과잉 남성 사회―장류진 소설의 남성-청년」 (2020년 7월호 수록) 정의정 패션 산업은 빠른 속도로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낸다. 발레코어, 고프코어, 놈코어… 아직 이것들도 다 알지 못하는데 또 포엣코어로 유행이 바뀌었다고 한다. 유행의 빠른 전환은 상품 소비를 부추기는 시장 전략이다. 그런데 무언가 사고팔지 않는, 시장의 대척점에 있을 법한 문학장에도 유행은 있다. 2025년 넷플릭스 시리즈 1)이 인셀2)의 정동을 다루면서 화제가 된 후, 그해 가을 계간지 『문학과사회 하이픈』은 ‘젠더-플레이’ 특집을 기획하며 청년 남성의 극우화 양상을 중심으로 하는 남성성 논의를 본격화했다.3) 올해 『문학동네』 또한 ‘남성성의 재구성’이라는 키워드 아래 기획된 여러 편의 비평·에세이를 발행했다.4) 대다수의 필진들은 이러한 특집호가 구성된 배경으로 12·3 계엄과 탄핵 이후 정국을 통과하며 테러, 집회에서 포착된 한국사회의 극우-인셀 정동과 그에 감응하는 근래의 문학 텍스트들을 짚는다.5) 지금 문학/비평장의 트렌드는 ‘남성성-코어’라고나 할까…?6) 그런데 동시대 지식장의 담론적 화두를 유행이라고 말해도 될까. ‘남성성’에 ‘-코어(core)’라는 말을 붙이니 진지하게 논의되는 남성성 담론을 가볍게 치부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우려스럽다. 그러나 내게 이 명명은 단순히 현상을 조롱하는 말이 아니라 동시대 현안을 발 빠르게 조사·수집하고 관련 서적과 글을 남독(濫讀)하고 그것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자신의 의견을 서둘러 표명해야만 하는 현장비평(가)의 생리와 한계를 통찰하는 언어로서 적실해 보인다. 물론 지금 한창 논의되는 ‘남성성’이란 이성애자-청년-남성 젠더의 극우적 멘탈리티에 주로 한한다. 이는 식민지 남성성이나 가부장 권력 비판에 비하면 지극히 동시대적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일베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2010년대 초반부터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백래시 국면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남성성은 언제나 문제가 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의 논의는 그때의 연속선에 위치하기보다 지금-여기에만 초점을 맞추어 과열되는 양상을 띤다. 이러한 담론적 단절은 이전의 남성성 논의가 정치성을 담지하지 못할 만큼 미진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언제나 ‘지금’을 가장 위태로운 시기로 지목하여 사태의 심각성을 극대화하고 독자의 주목을 요청하는 현장비평의 관습으로 읽힌다. 이런 식의 비평이 반복되면 결국 담론은 축적되지도 사태의 근원지로 진입하지도 못한 채 한때의 유행으로 떠돌게 되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이전 시기의 글을 지금의 관점으로 다시 읽는 작업은 중요하다. 이는 후속 연구로서 선행 연구를 참조하는

  • 정의정
  • 2026-10-01

문장웹진 기획

[문장웹진 특집좌담(비평)] 유동하는 세계, 대화하는 비평(가)들

[문장웹진 특집좌담(비평)] 유동하는 세계, 대화하는 비평(가)들 진행 : 윤재민 평론가 패널 : 이미진 평론가, 최선교 평론가, 현재 평론가 기획 : 윤재민 편집위원 윤재민 안녕하세요. 문장웹진 9월호 비평 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사회를 맡은 문장웹진 편집위원이자 평론가 윤재민입니다. 그리고 오늘 패널로 이미진 평론가, 최선교 평론가, 현재 평론가를 모셨습니다. 사실 이렇게 세 분을 모신 이유는 전적으로 저의 사심 때문인데요. 그간 제가 글이나 활동하는 것들을 인상 깊게 보았고, 궁금했던 분들 모신 겁니다. 참석자 분들 모두 간단하게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어요. 언제 데뷔했고, 어떤 활동을 주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현재 평론가부터 먼저 하실까요? 현재 안녕하세요. 저는 202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 평론 부문에 당선되면서 활동을 시작한 조현재라고 합니다. ‘현재’라고 성을 떼고서 필명 아닌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선교 안녕하세요. 저는 2022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안희연론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평소에도 원고에 넣을 약력을 요청받으면 이 정도로만 저를 소개하곤해서 어떤 말을 더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미진 안녕하세요. 저는 2025년에 김기태론으로 창비 신인 평론상을 통해 비평 활동을 시작한 이미진이라고 합니다. 이제 1년이 된 것 같고, 조금씩 평론가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는 시점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생활인으로서 돈을 벌고 있고요. 그렇습니다. 윤재민 오늘 이렇게 모신 세 분. 연차가 현재 평론가가 3년, 그리고 최선교 평론가가 4년 차 정도 됐죠? 2022년도니까 4년. 그다음에 이미진 평론가 같은 경우는 1년 되셨지요? 이미진 아마 발표 기준으로는 1년이 조금 안 된 것 같습니다. 윤재민 이제 1주년 돼 가시는군요. 세 분들 모두 신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인데, 그중에서 재미있는 글 많이 쓰시고 계시거나, 그럴 거라는 믿음이 드는 분들과 대화 나눠보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마련했거든요. ‘신인 비평가’로서 가지고 계시는 여러 가지 고민이나 문제나 목표나 욕심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궁금하고요. 우리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각자 다다르고자 하는 욕망·지평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일단, 비평가로 데뷔하게 된 각자의 계기가 있을 텐데요. 최선교 평론가 먼저 말씀해 주실까요? 최선교 평론가가 된 계기를 기계적으로 기술해 보자면 국문과 대학원 수업 과제로 처음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왜 평론을 계속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제 성향 때문인 듯합니다. 어릴 때부터 어떤 것에 심취하고 매료된 상태를 무척 즐겼어요. 그리고 내가 그것에 매료되었는지 꼭 설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정확하게 내가 그것을 왜 좋아하는지, 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일이 무척 중요했던 것 같아요. 저는 시나 소설을 쓰고

  •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문장웹진 다시 읽기]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 이민하, 「옛날 귀신」(2019년 2월호 수록) 김진선 귀신과 신의 차이를 아는가? 언젠가 시로 쓴 적 있지만, 돌아가신 나의 이모는 무속인이셨다. 어릴 적부터 자주 아팠던 이모는 신내림을 받으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듣고 다른 세계와 통로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이셨다. 멀리서 보이는 서낭기와 현관에서부터 나는 향냄새, 방 안을 채운 촛불의 온기,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기 무서운 탱화가 이모의 직업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모는 분명 신을 모신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모가 귀신을 본다고 했다. 이모에게 진짜 귀신을 보는지, 지금 여기에도 귀신이 있냐고 직접 물어보진 못했는데, 가끔 이모는 달라진 눈빛과 목소리로 다른 존재의 말을 전하셨다. 사실 나는 이모에게 깃든 것이 신이든 귀신이든 상관없었다. 이모가 예전보다 덜 아플 수 있다면,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가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골목을 지나갈 때 이모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법당 바닥을 몇 번이고 걸레질하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신과 귀신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지만, 둘을 가르는 차이는 어떤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대개 신이 인간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주와 삶의 질서를 다스리는 초월적 존재라면, 귀신은 생전의 삶과 죽음, 풀지 못한 미련, 한(恨)과 같은 정동에 매여 특정한 장소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한국의 무속에는 산신, 칠성신, 용왕신, 성주신 등 자연이나 공간을 관장하는 다양한 신이 있고, 원귀나 객귀, 잡귀와 같이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들도 있다. 그러나 한번 귀신으로 떠돌기 시작했다고 해서 영원히 귀신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영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온전한 안위와 정성 들인 제사를 받고 숭배의 대상이 되면, 마침내 그 서러움을 털어내고 신격화되어 누군가를 수호하는 신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을 통과하며 읽게 된 이민하의 「옛날 귀신」에서 귀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궁금했다. ‘옛날 귀신’이라고 하면 소복을 차려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처녀 귀신이나 쪽머리를 진 할머니 귀신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호러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호러물의 예고편이 상영되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는 나로서는 어릴 때 가족들과 본 이 귀신의 전형이다. ‘현대’나 ‘최신’ 귀신이라면 다른 옷차림과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으려나. 시에서 귀신은 특정한 형상을 지닌 존재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서 화자가 “커트 머리 엄마와 쌍둥이 동생과 오빠들이 납량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을 본다거나 “어른들이 마당에서 잔치를 하”는 상황에서 은연중 스산한 기운이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고 귀신이 따로

  • 김진선
  •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그러니까 지금부터

[문장웹진 다시 읽기] 그러니까 지금부터 ― 임솔아, (2018년 6월호 수록) 김진선 아파트 분리수거장 입구에 접이식 교자상이 버려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주인이 교자상 위에 몇 가지 반찬과 국을 내어 밥을 차려 먹었을 테지만, 이제는 엄중한 글씨체로 ‘무단 폐기물 신고 비용 관리실로 납부’라고 적힌 종이를 붙인 채 수거를 기다리면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느라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멀쩡하게 생겼는데 어떤 이유로 버려진 것일지 궁금해하면서 지나쳤다. 점심이나 저녁 시간 아파트 복도에서 음식 냄새가 난다. 최근에는 청국장 냄새가 연이어 났는데, 가끔 생선이나 삼겹살을 굽는 냄새도 난다. 배달 음식도 그에 못지않다. 엘리베이터에서는 특정 브랜드의 치킨 냄새가 유난히 풍기는가 하면, 특정 요일에는 피자 배달이 잦을 때가 있다. 삼백여 세대가 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애쓰는 중이구나 생각하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난다. 임솔아의 단편소설 에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이 나온다. 지은과 수희는 어떻게 하면 비좁은 원룸 방을 알뜰하게 구획하여 지낼 수 있을지 궁리한다. 벽간 소음을 막기 위해 매트리스를 벽에 세워놓고, 침대 프레임마저 분해하려 든다. 수희는 지은과 함께 명동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편, 인명구조요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신경을 쏟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생활의 모습이겠으나 지은의 생활은 조금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은에게는 이름이 많다. 지은은 신영, 미희, 시한, 영은, 규리, 주영의 이름으로 산 적이 있다. 지하철 공공화장실 휴지걸이에서 주신영이라는 이름을 주운 뒤로 “다시 해보자. 주신영으로”라고 말하면서, 주신영으로 지냈다. 어느 날은 주영이 되어서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지은이 이름을 바꾸어 살 때마다 수희 역시 이름이 바뀌었고, 두 사람은 이름에 어울릴 만한, 그 시기에 그들이 꿈꾸는 세계의 서사를 지어냈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이거 명의도용 범죄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정말 한 번쯤은 다시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지. 나는 지은과 수희처럼 이름을 바꿔가면서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은 없지만, 새 삶이 필요해서 전학을 결심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인해 태어나 줄곧 살던 곳을 떠나 할머니가 계신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전학을 간 셈이라 사투리가 제일 큰 난관이었다. 내가 ‘살구’라고 불러왔던 놀이는 ‘공기’라고 부르는 것이었고(이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살구라는 어여쁜 단어가 있는데!), ‘정구지’는 ‘부추’이거나 ‘꼽표’는 ‘곱하기’였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단어들이 많았다. 억양 역시 어색하고 낯설었다. 경상도 억양은 강하고 말끝이 높은 편이라면, 전라도 억양은 폭이 크고

  • 김진선
  • 2026-08-01

문장웹진 기획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 이서수 작년에 나는 영상 콘텐츠 제작자와 업무 미팅을 한 적이 있다. 그는 특정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는 사람이었고, 각본 작업에 동참해줄 작가를 구하는 중이었다. 나는 예전에 각색 일을 했었기에 지인의 소개로 그 자리에 나갔다. 상대는 내 본업이 소설가라는 것을 알았으며, 내 소설을 읽어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작가님 이름으로 챗GPT에 검색을 해 봤어요.” 그가 가방에서 파일 홀더를 꺼내더니 A4 용지를 넘기며 말했다. “약력과 작품관 같은 걸 정리해서 알려줬는데, 제가 재미있는 걸 해봤습니다. 작가님의 소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서수 작가가 쓸 법한 시놉시스를 한 편 써달라고 했어요. 얼마 전에 작가님한테 제안했던 그 소재로요. 한번 읽어보실래요?” “예? 뭐라고요?” 나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각본 작업을 수락하기도 전인데 이서수라는 소설가가 그 소재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지 이미 테스트해봤다니…… 나는 불시에 뺨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진 상태로 시놉시스를 읽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로 나처럼 썼겠느냐는 의구심이 무색하게 챗GPT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인물을 설정하고 사건을 조합해 이야기를 완성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랬다. 그건 정확히 내가 만들 법한 이야기였다.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 그들이 만나게 된 계기, 앞으로 펼쳐질 사건의 전개 방향이 모두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어떤 이야기에 끌리는지를 깨달았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말이다. “이걸 생성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가요?” “1분도 안 걸렸죠, 뭐. 아시잖아요.”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정도의 짜임새로 시놉시스를 완성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를 예측해보니 더더욱 웃을 수가 없었다. 인공지능의 1분과 인간의 1분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만 이해될 뿐 마음은 아니었다. 그의 행동이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나보다 시대를 훨씬 앞서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앞으론 이런 일을 자주 겪을 수 있겠다는 예감도 밀려왔다. 스토리텔링 산업과 인공지능이 합쳐졌을 때 내가 쓴 소설은 AI에 생성을 위한 ‘데이터’로 기능할 수 있다. 온라인상에 공개된 글들과 책 리뷰, 인터뷰 기사 등을 모두 포함하여.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작가임에도 데이터만 구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 되었다.) 나는 그 상황을 특수하게 여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쨌든 그는 AI로부터 시놉시스를 얻는 데서 멈추었고, 이후의 작업은 인간 이서수와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당혹스러운 감정은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기획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

  • 이서수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딸깍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딸깍 양안다 나는 시 창작과 관련하여 AI를 활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창작자의 윤리라던가 신념 같은 건 아니고, 그저 AI의 시 취향이 나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반복적으로 텍스트를 입력하거나 프롬프트를 통해 자세한 방향을 지시하면 나아지는 편이지만, 아직까지 나의 취향과 AI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내가 다른 이와 취향이 맞지 않는 경우와 다름없습니다. AI는 창작 주체라기보다 창작 주체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에 가깝고, 이러한 맥락에서 AI는 키보드나 사전, 아니면 노트와 펜의 역할과 같습니다. 다만 AI는 적극적인 도구입니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습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모든 것과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독자나 스승, 동료 시인을 포함하여 타 장르 창작자와 철학자, 그리고 세상을 떠난 시인과도 영향 관계에 놓입니다. AI는 이러한 점에서 모든 타자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AI는 때로 합평자가 되어줄 수 있고, 스승이 되어줄 수도 있으며, 시에서 벗어나 타 장르의 맥락을 끌고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는 근본적으로 사용자의 요청에 의해 움직이므로, 사용자의 요구로 형성된 타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나 : 위의 텍스트는 ‘시인의 AI 활용’에 대한 텍스트입니다. 당신은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ChatGPT-5.5 : 제가 조금 덧붙이고 싶은 것은, AI에게 “취향”이 있다고 말할 때 그 취향은 인간의 취향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AI의 취향은 어떤 미적 신념이나 삶의 이력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럴듯함의 평균값에 가깝습니다. AI는 시를 쓸 때 자주 매끄럽게 만들고, 의미를 지나치게 정돈하고, 이미지들을 문학적으로 보이게 배열하고, 감정의 결론을 너무 빨리 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AI의 기본 취향은 “좋은 시”라기보다 좋은 시처럼 보이는 문장 쪽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에게는 그게 참을 수 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장이 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AI는 적극적인 도구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는다. AI는 도구인데, 기존 도구와 달리 도구인 척만 하는 게 아니라 타자인 척도 합니다. 키보드는 수동적이고, 사전은 정적인데, AI는 말을 걸고 반응하고 제안하고 반박하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단순한 도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능동적이고, 그렇다고 창작 주체라고 하기에는 책임과 욕망과 고유한 삶이 없습니다. 나는 AI가 주체적으로 시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에 대해 공부하며, 그 과정에서 ‘취향에 맞는 시’를 언젠가 쓸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게 나의 영향 관계에 놓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AI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닙니다. 2020년에는 문득 이런 생

  • 양안다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AI와 함께, 평론가는 어떻게 읽는가?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AI와 함께, 평론가는 어떻게 읽는가?1) 노대원 AI 이후, 해석의 미래는? 평론가는 문학 텍스트와 평론뿐만 아니라 문학 이론을 비롯해서 여러 인문학 저서나 논문을 읽어야 할 일이 많다. 특별히 새롭고 다양한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외국어로 된 책과 논문도 읽어야 한다. 구글 번역이 나오고서 글과 책을 번역해 읽는 일에 큰 도움을 받아왔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았다. 엉뚱한 번역 표현이 자주 발견되었다. 그러다 ChatGPT가 나오기 전, 지금으로부터 거의 십여 년 전에 구글 번역의 성능이 상당히 향상되었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느낌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평론가로서 AI를 진지하게 걱정했다. 구글 번역이 혁신되었다고 한다. 이것도 '특이점'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기계번역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해석자로서, 다만 번역의 미래만을 생각할 것은 아니다. 번역과 해석은, 1차 텍스트에서 2차 텍스트로의 작업이란 점에서 같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이후 해석의 미래는 어떨까? 해석은 예술이지만 번역 역시 예술이지 않았던가? 텍스트와 해석(비평)의 풍부한 '병렬 코퍼스'가 인공지능에게 주어진다면 해석의 자동화도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번역가들은 번역의 미래를 고민한다. 해석자들은 해석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는가? (2016년 11월 19일) 이 글을 쓰면서, 링크를 걸어 인용한 글은 번역가 노승영의 「알파고와 번역의 미래」였다. 그 글은 이렇게 끝난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광고를 보거나 개인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웹 문서뿐 아니라 잡지, 단행본도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 번역가의 번역은 인쇄술 등장 이전의 책이 그랬듯 소수의 전유물이 될 것이다. 물론 이때가 되면 극소수의 번역가만 살아남을 것이다. 기계번역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결과물을 내놓는 번역가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기계로 대량 생산되는 저렴한 제품이 수공예로 소량 생산되는 고급 제품이 구별되듯 기계번역과 인간의 번역이 구별될 것이다. 이런 시대에는 어떤 번역가가 살아남을까?”2) 이 예상은 거의 정확하게 실현되었다. 그가 걱정했던 것처럼, 번역가가 생각보다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 어쩌면 그 예상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AI 번역은 점점 더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니까. 이 글을 페이스북에 남기면서, 친구와 대화를 나눈 것도 여전히 생생히 기억난다. 원고료는 너무 싸기 때문에 인간 작가를 상회하는 탁월한 AI를 개발하는 비용이 더 들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자조적인 농담을 던졌다. 그러면서도 내심, AI가 문학을 위협한다 해도, 나는, AI와 문학이 만나는 접점에서 새로운 작업을 도전적으로 수행하는 쪽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얼마 뒤(ChatGPT 출시 몇 해 전에), 제주도에 AI 관련 서머 스쿨이 있어 방문한 홍콩과학기술대학교 김성훈 교수를 만나 점심 식사를

  • 노대원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인공지능의 그 끝없는 지긋지긋함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인공지능의 그 끝없는 지긋지긋함 곽재식 인터넷에 누가 “자동차 엔진오일이 왜 중요한지 잘 모르겠다. 엔진오일에 정말 돈을 많이 들일 필요가 있나요?”라는 질문을 올렸다고 해 보자. 이런 덧글을 달면서 기대하는 것은 엔진오일에 대해서 잘 아는 자동차 수리 일을 하는 사람이나 엔진오일에 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전문 지식을 담아 써 주는 대답이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오래 자동차를 운전해 본 사람들이 각자의 엔진오일에 대해 이야기 해 주는 경험담을 들어 볼 수 있기를 기대할 것이다. “엔진오일 우습게 보다가 저는 큰코다친 적이 한번 있습니다.” 그 비슷한 답을 기대할 거라는 이야기다. 이런 기대는 무리를 지어 살면서 서로 경험과 기억을 언어로 공유하면서 발전해 온 사람이라는 종족이 원시 시대 때부터 갖고 있던 아주 오래된 습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한동안 이런 덧글을 달면, 부리나케 달려와서 “챗GPT에게 물어 봤더니, 이렇게 답변해 주더군요.”라고 자기가 인공지능에게 물어 본 내용을 복사해서 덧글로 붙여 주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다. 덧글에 엔진오일에 대한 이야기가 줄줄줄 써 두어서 열심히 읽어 보았는데 다 읽어 갈 때쯤 보니까 맨 마지막에 “이상은 제미나이에게 물어본 결과입니다”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덧글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거의 모든 곳에서 많이도 나왔다. 도대체 이런 덧글은 왜 달리는 걸까? 질문을 했던 나는 챗GPT나 제미나이에게 물어 볼 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살펴보자면 대부분의 덧글은 그야말로 순수한 의도로 달린 것이다. 질문을 한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고, 자기도 그 문제에 대해 궁금하다 보니 대규모 언어모델, 즉 LLM 방식으로 운영되는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결과를 받아 본 뒤에 그 결과를 남들과 같이 공유해 보려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런 심정에서 나온 동기는 조롱받을 이유도 없고 나쁜 마음이라고 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각계각층에서 LLM 방식의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거기에 다른 마음이 결합하는 경우도 가끔은 있는 것 같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내가 최신 기술을 이용하고 있다는 뿌듯함이다. 요즘 그렇게 유행이라고 하는 최신 첨단기술인 인공지능을 내가 이렇게나 잘 이용해서 남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자랑스러움을 느껴서 “나는 요즘 뭐든 인공지능에게 물어봐. 너무 편하고 좋거든!”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게 된다는 뜻이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다 바꾸어서 완전히 다른 사회가 탄생할 거라는 이야기를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온갖 매체에서 반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남보다 인공지능을 잘 활용하고 있다는 감각 속에는 거창한 환상마저 슬그머니 서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새로운 세상에서 나는 앞서갈 거라는 환상이다. 지금 치열한 경쟁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현실의 우리가 문학의 미래를

[문장웹진 다시 읽기] 현실의 우리가 문학의 미래를 ― 조연정, (2017년 8월호 수록) 김진선 어느 강의 시간, 교수님께서는 신입생들에게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면을 소개해 주셨다. 많이 읽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그날 이후 인터넷 즐겨찾기 목록에는 《문장웹진》이 빠지지 않고 있다. 햇수로 17년, 매달 1일이면 새로 올라온 작품들을 접했다. 나름 놓치지 않고 따라 읽었다고 자부했는데 다시 보니 아닌 일이다. 맞다, 이것은 고해성사. 나의 죄를 고합니다. 나는 장르 편식이 있어서 시를 제외한 소설, 비평, 기획 등은 대체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문장웹진 다시 읽기’ 기획은 적어도 나에게 ‘다시 읽기’가 아닌 셈이다. 그러니까 이 기획은 적어도 나에게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처음 마주한 글을 여러 번 살피고, “(다시) 읽을 기회가 생겨서 정말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마침내 말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시작은 2017년 8월호에 수록된 조연정의 이라는 비평이다. 평소 어렵다고 생각한 비평만큼은 피하거나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는데, 그간의 죗값을 달게 받는 거 같다. 이 글은 윤이형 소설가가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로서 고민하는 몇 가지 질문과 함께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중심으로 문학적 재현,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논의의 과정에서 《문장웹진》 2017년 4월호에 수록된 조강석의 에 의문을 표하며,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는 작품들이 미학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부정적 평가에 정면으로 맞선다. 먼저, 윤이형 소설가의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 나는 앞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서사의 중심이 되는 소설을 많이 ‘써야만’ 할까? - 앞으로 쓸 내 소설에서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순응하거나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하는 여성이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일까? - 나는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이기 때문에 앞으로 여성에 대한 어떤 멸시나 비하도 ‘현실 그대로’ 작품 속에 재현하면 안 되는 것일까? 꼭 필요해서 그런 식의 재현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럴 경우, 반드시 거기에 내가 작가로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음을 명시해주어야만 하는 것일까? - 이런 고민들을 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일까, 혹은 각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으로서의 내가 과잉 반영되어 있는 것일까? 혹은 나는 그저 여성 트위터리안-독자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녀들을 ‘타인’으로 여길 만큼 나는 그녀들에게서 먼가?1) 작은따옴표 안에 들어간 말(밑줄은 인용자 강조)이 유독 신경 쓰이는 것은 왜일까. 이 질문들은 의무(‘써야만’), 제약(‘안 되는’), 판단(‘비판적인’), 자기인식(

  • 김진선
  • 2026-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