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 작성일 2024-07-01
- 댓글수 0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 문학을 엄격히 구별해야 하고, 특정 장르의 테크닉을 시도한 후자의 경우 장르 문학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장르적 기법을 사용한 새로운 시도’라는 전제가 따라붙는다. 이 간극은 어디서 생겨나는 걸까.
다시 한 번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과 구별되는 작품을 쓰고자 하는, 또는 장르적 기법을 활용하여 기성 문단과 다른 무언가를 쓰고자 하는 작가들은 혹은 작가 지망생들은 장르적 기법에 얼마큼 알고 있나? 나는 아무래도 미스터리 분야 쪽 심사를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거기에 한정지어 말한다면, 정말 많은 작가/작가 지망생들이 ‘사람을 죽인다’라는 ‘상황’만 들어가면 그것이 미스터리/스릴러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정말 많았다. 간단히 말해서, 그렇지 않다.
그리하여 드디어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특징이 무엇인지 살펴볼 차례가 왔다. 19세기부터 서서히 본격적인 틀이 잡히기 시작한 미스터리는, 일단 수수께끼가 선행한 다음 그 답을 찾는 과정이 따라온다. 물론 수수께끼의 행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범죄다. 도둑이 감쪽같이 보물을 훔쳐가든, 누군가가 타인을 폭행하거나 살인을 저지르든, 경찰이나 검찰 혹은 마을 이장 등의 지도자가 몸을 일으켜서 그 수수께끼를 해결해야 하는 형법/사법 시스템이 움직임으로써 기본 구조가 성립된다.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너무 단순해서 혹은 지나치게 복잡해서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보였을 때, 예리한 눈썰미로 아주 미세하게 어긋난 ‘틈’을 발견하고, 그 논리적 유격에서부터 출발하여 결국은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는 과정이 전체 이야기의 주요한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아주 좁게는 에드거 앨런 포가 오귀스트 뒤팽을 통해서, 아서 코넌 도일이 셜록 홈스를 통해서 공식화한 구조를 떠올리면 된다. 미스터리를 쓰기 위해서는 뒤팽이나 홈스 같은 명탐정을 반드시 등장시키라는 소리냐고? 그건 또 다른 문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나 볼테르의 <자디그>,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등의 작품을 이 자리에서 거론하면 꽤나 뜬금없이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영미권의 수많은 학자들에게 미스터리 장르의 먼 조상으로 간주된다(이를테면 <걸리버 여행기>를 SF의 먼 조상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번지고, 국가의 존립을 책임져야 하는 오이디푸스 왕은 신탁에 귀 기울이며 이 전염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해결책은 무엇인지 들어야 한다. 그리고 신탁에서는 수십 년 전 벌어진 선왕의 죽음의 원인을 찾아 제거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과거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아나서는 여정, 그리고 충격적인 반전의 클라이맥스, 범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리하여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의 눈을 찌르고 스스로 추방된다. <자디그>에서는 주인공 자디그가 사라진 동물을 눈앞에서 보듯 정확하게 그 모습을 묘사하는데, 동물이 남기고 간 모래 위의 흔적이나 나뭇가지가 부러진 모양 등을 관찰하여 동물의 형태를 유추해 낸 것이다. 자신이 직접 겪지 않은 사건 현장에 뒤늦게 도착해 동물 찾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자디그의 모습은 셜록 홈스의 전신이라고 할 만하다. 아내 살해범 오셀로는 어떤가. 그는 잘못된 정보와 판단으로 인해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고 결국 깊이 잠든 그녀의 목숨을 끊는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다. 더 나아가 여기에는 오셀로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르도록 사주한, 그러나 자신의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진짜 살인범 이아고가 존재한다. 누군가의 은밀한 죄악감과 질투심과 불안감을 엿보고 그 약한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가장 지능적인 살인범(애거사 크리스티는 그의 대표작 중 한 편의 충격적인 결말을 위해 이아고 모티브를 정밀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말이다. 혹은,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 초반부터 라스콜리니코프가 살인범이라는 걸 감출 생각이 없었다. 그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어떻게 해서 살인을 저지르게 될 마음을 먹게 됐는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라스콜리니코프의 대단히 위험한 인간관의 요설을 퍼부으면서 그 자신이 ‘쓸모없는’ 타인의 희생을 발판으로 더 뛰어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잘못된 논리 체계를 보여준다. 라스콜리니코프를 의심하게 된 예심판사 포르피리가 그를 소환하여 벌이는 대화 장면, 즉 예심판사는 자신의 심증을 굳히려 하고, 범죄자는 어떻게든 법의 언어를 빠져나가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려는 치열한 논리 싸움은 이 작품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미스터리가 1) 범인이 누구인가? 2) 어떻게 범죄를 저지른 건가? 3) 왜 저질렀는가?에 초점을 맞춘다면, <죄와 벌>은 그 세 가지 주요 질문을 책 전체 분량의 1/3이 지나가기도 전에 전부 밝힌 다음, 그 이후의 과정에 더 집중한다. 이 범죄자를 어떻게 자백시켜 법정에 세울 것인가? 범죄자는 자신을 변호하고픈 마음과 죄책감 사이에서 어떤 갈등을 겪으며 왜 자신의 죄를 만천하에 고백하게 되는가?
위에서 예로 든 일련의 고전들은 미스터리, 더 넓게 명명한다면 범죄 소설(Crime Fiction)이라는 갈래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주요한 쟁점들을 전부 선취했다. 범죄가 등장하는 어떤 소설을 쓰고자 한다면, 그냥 살인범이 나오고 그냥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완성되는 게 아니다. 어떤 수수께끼(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범죄일 뿐이며, <자디그>의 경우처럼 동물이 사라진 경우도 가능하고, 혹은 최근으로 오자면 미카미 엔의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 수첩>의 경우처럼 왜 할머니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손도 못 대게 했을까 같은 궁금증도 얼마든지 미스터리의 영역에 들어올 수 있다)가 발생하면, 전후 상황을 폭넓게 조망하고 원인을 찾아냄으로써 그 사건의 외양뿐 아니라 내적 의미를 고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안에서 범죄를 둘러싼 여러 인물군상의 희로애락과 함께 범죄에 이르기까지의 필연과 우연의 곡절이 펼쳐진다. 수수께끼(범죄)의 발생이라는 발단을 통해 정말 많은 종류의 이야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1세기가 시작된 지도 벌써 20여 년이 훌쩍 지났는데, 여전히 이 장르의 구조와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기이하게 느껴진다. ‘미스터리’라는 단어의 우후죽순 남용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거나 할 때는 그저 헛웃음을 짓고 넘기면 그만이다. 미스터리를 SF나 판타지, 호러와 헛갈리는 경우는 조금 마음에 걸린다. 정말 장르의 정리를 모르기 때문에 혼동할 수도 있는데, ‘장르 문학’이라는 문제의 단어 때문에 ‘아 미스터리든 SF든 그게 그거 아냐? 장르 문학 다 똑같은 거 아냐?’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상대가 누구든지 사양하고 싶은 게 진심이다. 또한 ‘추리적 기법’을 사용했다는 홍보 문구에 끌려 펼쳐 봤는데, 살인이 등장하지만 그 극단적인 수수께끼의 앞뒤를 살피는 게 아니라 그것이 인생의 부조리라거나 주인공에게 그저 스쳐가는 이벤트인 것처럼 그려지고, ‘그래서 그 일은 어떻게 됐는데’라는 궁금증에 아무런 답을 주지 않을 때, 나는 그것의 장르를 미스터리라고 불러도 되는지 약간의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명탐정이 등장할 필요는 없다. 반드시 경찰이나 변호사가 나올 필요가 없다. 심지어 SF와 융합하여 배경이 우주선이거나, 주인공이 클론이거나, 먼 외계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도 상관없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에서는 고전부에 속한 고등학생들이 아까 그 문은 왜 잠겨 있었을까라든가, 우리 부에 가입하려던 후배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가 무엇일지 같은 수수께끼에 몰두한다. 그것만으로도 미스터리가 성립한다. 시공간적 배경이나 캐릭터의 설정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지속적으로 언급한 특유의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그것을 어떻게 변주하고 갱신하며 21세기에 걸맞은 이야기로 만들어 가느냐가 진짜 문제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정리해 보자. ‘장르’는 문학과 문학 비슷하지만 문학이라고만 부르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나누는 벽이 아니라, 어떤 개별 작품의 성격을 드러내는 카테고리다. 그리고 ‘장르’라는 호칭을 사용하려면, 적어도 그 장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팬들에게 익숙한 관습과 규칙이 구축되며 다져진 특유의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 구조에 얽매이라는 게 아니라 그 구조를 잘 알아야만 다음에 나아가야 할 방향이 보인다는 뜻이다. 이 부분이 확실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내가 권하고 싶은 바는 미스터리의 고전부터 시작해서 시대별 제일 유명한 작품들을 차근차근 읽어 보라는 것이다. 언제나 추천작을 뽑아 달라는 요청 앞에 난감해지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얻은 결론이라면 고전이, 유명한 작품이 제일 안전한 선택이라는 점이다. 셜록 홈스와 에드거 앨런 포, 애거사 크리스티, 존 딕슨 카부터 시작해서 코넬 울리치라든가 대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 요코미조 세이시, 마쓰모토 세이초, 에드 맥베인, 페르 발뢰&마이 셰발 등의 대표작들을 차분히 따라오며, 좁은 의미의 ‘명탐정 미스터리’가 20세기 한복판을 가로지르면서 어떤 식으로 변화하고 현재에 접합하며 현실의 더러움과 죄악을 어떻게 가장 잘 반영하고 또 그에 맞설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장르로 굳혀 왔는지를 스스로 파악할 수 있으면 좋겠다.
1) 21세기에 들어와서 전통적인 등단 제도를 통해 문학계에 등장하여 출간되는 책들에 대해 ‘순수문학’ 또는 ‘순문학’으로 자주 호명하는 편이다. 이 명칭이 가장 적절할지, 아니면 ‘등단 문학’이라는 호칭이 더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문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확신할 수 없다. “[순문학은] 근대 이후 일본 문단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독특한 용어로 통상 통속문학이나 대중문학에 대해 독자에게 영합하지 않고 순수한 예술적 감흥에 의거하여 창작된 문학 작품을 지칭한다. 따라서 ‘순문학’이라는 용어는 원래 문학 작품의 형식이나 내용으로 규정되는 개념이 아니고, 작가의 창작 자세나 독자의 작품평가 등을 염두에 두고 사용된 호칭이라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순문학(『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한국문학평론가협회).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530358&cid=60657&categoryId=60657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기획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 이서수 작년에 나는 영상 콘텐츠 제작자와 업무 미팅을 한 적이 있다. 그는 특정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는 사람이었고, 각본 작업에 동참해줄 작가를 구하는 중이었다. 나는 예전에 각색 일을 했었기에 지인의 소개로 그 자리에 나갔다. 상대는 내 본업이 소설가라는 것을 알았으며, 내 소설을 읽어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작가님 이름으로 챗GPT에 검색을 해 봤어요.” 그가 가방에서 파일 홀더를 꺼내더니 A4 용지를 넘기며 말했다. “약력과 작품관 같은 걸 정리해서 알려줬는데, 제가 재미있는 걸 해봤습니다. 작가님의 소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서수 작가가 쓸 법한 시놉시스를 한 편 써달라고 했어요. 얼마 전에 작가님한테 제안했던 그 소재로요. 한번 읽어보실래요?” “예? 뭐라고요?” 나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각본 작업을 수락하기도 전인데 이서수라는 소설가가 그 소재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지 이미 테스트해봤다니…… 나는 불시에 뺨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진 상태로 시놉시스를 읽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로 나처럼 썼겠느냐는 의구심이 무색하게 챗GPT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인물을 설정하고 사건을 조합해 이야기를 완성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랬다. 그건 정확히 내가 만들 법한 이야기였다.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 그들이 만나게 된 계기, 앞으로 펼쳐질 사건의 전개 방향이 모두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어떤 이야기에 끌리는지를 깨달았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말이다. “이걸 생성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가요?” “1분도 안 걸렸죠, 뭐. 아시잖아요.”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정도의 짜임새로 시놉시스를 완성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를 예측해보니 더더욱 웃을 수가 없었다. 인공지능의 1분과 인간의 1분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만 이해될 뿐 마음은 아니었다. 그의 행동이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나보다 시대를 훨씬 앞서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앞으론 이런 일을 자주 겪을 수 있겠다는 예감도 밀려왔다. 스토리텔링 산업과 인공지능이 합쳐졌을 때 내가 쓴 소설은 AI에 생성을 위한 ‘데이터’로 기능할 수 있다. 온라인상에 공개된 글들과 책 리뷰, 인터뷰 기사 등을 모두 포함하여.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작가임에도 데이터만 구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 되었다.) 나는 그 상황을 특수하게 여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쨌든 그는 AI로부터 시놉시스를 얻는 데서 멈추었고, 이후의 작업은 인간 이서수와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당혹스러운 감정은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기획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
- 이서수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딸깍[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딸깍 양안다 나는 시 창작과 관련하여 AI를 활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창작자의 윤리라던가 신념 같은 건 아니고, 그저 AI의 시 취향이 나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반복적으로 텍스트를 입력하거나 프롬프트를 통해 자세한 방향을 지시하면 나아지는 편이지만, 아직까지 나의 취향과 AI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내가 다른 이와 취향이 맞지 않는 경우와 다름없습니다. AI는 창작 주체라기보다 창작 주체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에 가깝고, 이러한 맥락에서 AI는 키보드나 사전, 아니면 노트와 펜의 역할과 같습니다. 다만 AI는 적극적인 도구입니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습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모든 것과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독자나 스승, 동료 시인을 포함하여 타 장르 창작자와 철학자, 그리고 세상을 떠난 시인과도 영향 관계에 놓입니다. AI는 이러한 점에서 모든 타자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AI는 때로 합평자가 되어줄 수 있고, 스승이 되어줄 수도 있으며, 시에서 벗어나 타 장르의 맥락을 끌고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는 근본적으로 사용자의 요청에 의해 움직이므로, 사용자의 요구로 형성된 타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나 : 위의 텍스트는 ‘시인의 AI 활용’에 대한 텍스트입니다. 당신은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ChatGPT-5.5 : 제가 조금 덧붙이고 싶은 것은, AI에게 “취향”이 있다고 말할 때 그 취향은 인간의 취향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AI의 취향은 어떤 미적 신념이나 삶의 이력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럴듯함의 평균값에 가깝습니다. AI는 시를 쓸 때 자주 매끄럽게 만들고, 의미를 지나치게 정돈하고, 이미지들을 문학적으로 보이게 배열하고, 감정의 결론을 너무 빨리 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AI의 기본 취향은 “좋은 시”라기보다 좋은 시처럼 보이는 문장 쪽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에게는 그게 참을 수 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장이 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AI는 적극적인 도구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는다. AI는 도구인데, 기존 도구와 달리 도구인 척만 하는 게 아니라 타자인 척도 합니다. 키보드는 수동적이고, 사전은 정적인데, AI는 말을 걸고 반응하고 제안하고 반박하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단순한 도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능동적이고, 그렇다고 창작 주체라고 하기에는 책임과 욕망과 고유한 삶이 없습니다. 나는 AI가 주체적으로 시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에 대해 공부하며, 그 과정에서 ‘취향에 맞는 시’를 언젠가 쓸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게 나의 영향 관계에 놓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AI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닙니다. 2020년에는 문득 이런 생
- 양안다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AI와 함께, 평론가는 어떻게 읽는가?[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AI와 함께, 평론가는 어떻게 읽는가?1) 노대원 AI 이후, 해석의 미래는? 평론가는 문학 텍스트와 평론뿐만 아니라 문학 이론을 비롯해서 여러 인문학 저서나 논문을 읽어야 할 일이 많다. 특별히 새롭고 다양한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외국어로 된 책과 논문도 읽어야 한다. 구글 번역이 나오고서 글과 책을 번역해 읽는 일에 큰 도움을 받아왔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았다. 엉뚱한 번역 표현이 자주 발견되었다. 그러다 ChatGPT가 나오기 전, 지금으로부터 거의 십여 년 전에 구글 번역의 성능이 상당히 향상되었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느낌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평론가로서 AI를 진지하게 걱정했다. 구글 번역이 혁신되었다고 한다. 이것도 '특이점'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기계번역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해석자로서, 다만 번역의 미래만을 생각할 것은 아니다. 번역과 해석은, 1차 텍스트에서 2차 텍스트로의 작업이란 점에서 같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이후 해석의 미래는 어떨까? 해석은 예술이지만 번역 역시 예술이지 않았던가? 텍스트와 해석(비평)의 풍부한 '병렬 코퍼스'가 인공지능에게 주어진다면 해석의 자동화도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번역가들은 번역의 미래를 고민한다. 해석자들은 해석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는가? (2016년 11월 19일) 이 글을 쓰면서, 링크를 걸어 인용한 글은 번역가 노승영의 「알파고와 번역의 미래」였다. 그 글은 이렇게 끝난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광고를 보거나 개인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웹 문서뿐 아니라 잡지, 단행본도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 번역가의 번역은 인쇄술 등장 이전의 책이 그랬듯 소수의 전유물이 될 것이다. 물론 이때가 되면 극소수의 번역가만 살아남을 것이다. 기계번역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결과물을 내놓는 번역가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기계로 대량 생산되는 저렴한 제품이 수공예로 소량 생산되는 고급 제품이 구별되듯 기계번역과 인간의 번역이 구별될 것이다. 이런 시대에는 어떤 번역가가 살아남을까?”2) 이 예상은 거의 정확하게 실현되었다. 그가 걱정했던 것처럼, 번역가가 생각보다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 어쩌면 그 예상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AI 번역은 점점 더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니까. 이 글을 페이스북에 남기면서, 친구와 대화를 나눈 것도 여전히 생생히 기억난다. 원고료는 너무 싸기 때문에 인간 작가를 상회하는 탁월한 AI를 개발하는 비용이 더 들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자조적인 농담을 던졌다. 그러면서도 내심, AI가 문학을 위협한다 해도, 나는, AI와 문학이 만나는 접점에서 새로운 작업을 도전적으로 수행하는 쪽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얼마 뒤(ChatGPT 출시 몇 해 전에), 제주도에 AI 관련 서머 스쿨이 있어 방문한 홍콩과학기술대학교 김성훈 교수를 만나 점심 식사를
- 노대원
- 2026-07-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