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작가
- 작성일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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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기획-Game & Writer]
게임과 작가1)
임가영
예술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는 20대 중반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모두 기억나지는 않는다. 나는 그림이 좋다거나 무언가를 만드는 게 좋다는 이유로 예술을 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현대미술’이 좋았다. 더 정확하게는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경계 설정에 관여하는 시도들이 좋았다. 더불어 ‘작가’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도 좋았다. 위대한 창작자의 숙련된 솜씨와 천재적 재능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들을 작품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관객이나 독자들에게 창작의 공을 돌리는 시도들이 공감이 갔다.
말하자면 나는 ‘저자의 죽음’을 목격하기 위해 현대미술을 택했다. 예술을 하기 전 나의 전공은 정치외교학이었고, 처참한 학점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관심이 갔던 과목이 ‘정치철학’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는 그때까지 나는 그림을 그려(웹툰 어시스턴트와 게임 캐릭터 원화가) 돈을 벌고 있었는데, 한 번도 나 자신을 창작자로 생각한 적이 없었고 한 번도 내 그림에서 예술 비슷한 것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래서 미대를 들어갔고,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들에 대한 작업을 하기 위해 애썼다. 미술 갤러리 안에서 카레를 끓여 나눠 먹거나 지역의 경찰과 청소년이 다 같이 둘러앉아 청소년 범죄율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작품들을 리서치하고, 이러한 참여형 미술을 둘러싼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와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 그랜트 케스터(Grant Kester)의 담론적 논쟁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어렴풋이, 나는 그게 내가 원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했고 역량이 되는 한도 내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이론은 이론일 뿐인 듯했다. 저자의 죽음이라는 말을 믿고 예술을 시작했는데, 저자는 좀처럼 죽지 않았던 것 같다. 한 교수는 술자리에서 내게 “너는 아직 작가는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작가는 ‘자기 일을 책임지고 해낼 수 있는 사람, 혹은 그에 준하는 물질적, 비물질적 중심점’처럼 느껴졌다. 작품을 만들고 그것을 관객에게 보여준 다음 그 과정을 포트폴리오에 잘 기록해서 다음 전시 기회를 얻어낼 수 있는. 다른 교수는 작가가 에고가 강하고 별나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나는 작가가 그런 것인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현대미술은 일종의 폰지 스킴(Ponzi scheme)처럼 나를 가짜 약속으로 끌어들였던 걸까? 아니면 나는, 남들에게는 당연한 것을(아무리 이런저런 반작가적 실천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선언이나 담론이 존재한다 해도 결국 제도는 안정적인 창작자–수용자 모델 속에서 지속되며, 이것은 사실 ‘저자의 죽음’ 자체와는 관련이 없다는 사실 같은 걸)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걸까?
학교를 나왔을 때 나는 더 이상 작업을 할 기력이 없었고, 집에서 은둔하다시피 하면서 게임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흘러, 문득 둘러보니 너도나도 전시 서문과 작품론에서 관객의 해방을 말하던 때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유행은 변하고, 한때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당연히 흘러가 버리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작가가 죽는 것을 한 번도 제대로 체험해 보지 못했는데, 이 기획은 어느새 내가 미처 따라잡지 못한 어딘가로 가버린 것 같았다.
그러다 근래, 나는 게임에 대한 연구들 속에서 내게 익숙한 참여예술이 다시 등장하는 것을 발견했다. 저자와 관객의 문제에서 게임은 예술과는 당연하게도 매우 다른 상황에 놓여 있다. 참여예술이 관객의 자리를 새삼스럽게 선언하면서 시작되었다면, 게임은 처음부터 ‘참여’를 전제로 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게임은 이미 완성된 참여예술인 걸까? 게임 연구에서 등장하는 예술 사례들을 발견할 때마다, 어쩌면 게임이야말로 저자의 죽음관객의 참여라는(나로서는) 미완의 프로젝트를 이어갈 수 있는 매체일까 기대하게 된다. 과연 어떨까?
C. 티 응우옌(C. Thi Nguyen)의 『게임: 행위성의 예술2)』은 여기에 직접적인 답을 내놓는 것 같다. 그에 따르면, “사용자가 어떤 작품을 경험하려면 실질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규정된다면, 그 작품은 참여예술(participatory art)이다.”3) 따라서 감상을 위해 플레이가 요구되는 게임 역시 일종의 참여예술이다. 한편 참여예술가들은 상황을 만들지만, 그것이 산출하는 참여 경험에 대한 통제는 회피하는 반면(한마디로 참여자들을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라고 풀어놓는다면), 게임 디자인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통제하려 한다. 거칠게 요약하면, 행위성(agency)이라는 매체를 다루는 게임 디자이너들의 ‘장인적 솜씨’를 통해, 게임은 참여예술 및 사회적 예술이 달성하고자 한 목표―참여자가 작품에 대한 경험을 통해 사회적, 도덕적 변화에 도달하는―를(어쩌면 더 잘) 해낼 수 있다.
그럼 게임의 창작자, 작가는 누구인가? 응우옌은 게임의 미적 책임에 디자이너와 플레이어 모두 역할이 있다고 말한다. “게임 디자이너들이 ‘플레이어의 행위성을 통해서’ 그들이 의도한 미적 효과의 상당수를 성취하고, 그 최종 결과는 디자이너와 플레이어 모두에게 미적으로 귀속된다.”4) 디자이너는 게임의 미적 형식을 설계하지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플레이어의 행위성을 산출하는 것이고, 미적 효과의 발생 또한 플레이어의 참여로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정말로 게임이야말로, 명시적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창작의 공을 작가와 플레이어가 나눠 가지는 참여예술인 것 같다.
응우옌의 게임 디자인에 대한 설명은 게임 업계에서 유명한 플레이 중심 디자인(Play-centric Design, 이하 PCD)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 PCD는 플레이어의 실제 경험을 설계의 출발점으로 삼고, 반복적인 플레이 테스트와 피드백을 창작 과정에 반영하는 게임 디자인 방법론이다.
그런데 여러모로 비슷한 언어를 공유하고 있음에도(‘플레이어의 행위성을 통해서’와 같은) PCD와 응우옌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금방 발견된다. 그것은 응우옌이 행위적 거리(agential distance)라고 부르는 것에 있다. 엄밀히 말해 게임 디자이너는 게임을 만들지, 게임 ‘플레이’를 만들지는 않는다. 창작 과정과 결과물 사이에 일종의 거리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응우옌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디자이너의 능력, 어떻게든 해법을 찾아내는 통제력을 강조한다. 디자이너가 만들어 놓은 것을 플레이어가 어떻게 경험할지를 예측하고 조절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좋은 디자인을 통해 어쨌든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PCD는 훨씬 겸손하다. 플레이 중심 디자이너는 플레이어의 다양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받아들인다. 그들의 해법은 정교한 설계와 통제가 아닌 거듭된 테스트와 조정이다. 트레이시 풀러턴(Tracy Fullerton)이 쓴 PCD의 교과서와 같은 책 『게임 디자인 워크숍』5) 9장에서는 플레이 테스트에 임하는 디자이너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자신의 게임을 테스트하게 될 사람들을 모아 두고, 그 앞에 선 디자이너는 작품에 대해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게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발전될지, 그리고 이 게임에 대한 자신의 희망과 꿈까지.
풀러턴은 그러나 그러한 충동의 억제를 강조하면서, 테스트 플레이어들의 순수한 피드백을 위해 디자이너는 뒤로 물러나라고 제안하며, “당신은 상자 안에 없다(You don't come in the box)”는 게임 디자인계의 격언을 인용한다. (당신은 상자 안에 없다니, 작품에서 작가가 사라진 모습을 이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한 문구가 있을까?) 이 인용구의 정확한 의미는 게임이 세상에 나가 대중에게 도달할 때 디자이너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고, 플레이어에게 직접 게임을 설명해 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디자이너의 부연 설명이나 ‘진짜 의도’로 플레이어의 반응을 조정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피드백에 따라 게임의 형태를 조정하라는 것이다.
응우옌이 말하는 게임 디자이너는 플레이어 앞에서 겸허하게 물러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미적 결정을 관철시키는 분명한 작가다. 다만 게임의 매체적 특성인 플레이(응우옌의 언어를 쓰면 행위성) 중심적 번역을 거친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 응우옌이 말하는 참여 예술로서의 게임 및 게임 디자인은 오히려 일반적인 게임 디자인 관행보다 작가 및 저자성을 복권시키는 쪽이었던 걸까?
문제가 좀 복잡해지는 것 같다. 특정 시기 예술계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저자의 위치를 흔들고 관객을 창작의 과정에 개입시키고자 했다. 이는 관객 개개인의 경험과는 상관없이 제도적, 담론적 위치를 확립한 저자―저자성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내가 상연하고 체험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게임에서는 통합적 비전과 통제력을 가진 작가, 혹은 저자성은 줄곧 취약한 자리에 놓여 있다. 응우옌이 말한 행위적 거리나 풀러턴의 상자의 안과 밖―디자이너가 만드는 것과 플레이어가 경험하는 것 사이의 불일치 같은 게임 매체의 특성과 함께, 포커스 그룹 테스팅과 같은 집단 창작의 관행들과 플레이어들의 소비자 중심주의, 그리고 게임을 산업 및 기술적 생산물이자 단순한 오락거리로 보는 통념 역시 이 취약성의 수많은 이유를 이룰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죽음은 예술계 저자의 죽음과는 무척 다른 의미로 느껴진다.
예술과 작가와 같은 개념의 경계 설정 문제에서 예술과 게임이라는 맥락은 그만큼 서로 다른 질문을 만들어낸다. 이제 나는 좀처럼 풀어낼 수 없었던 내 바람을 해결하는 길이 작가가 온전히 사라지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아닌, 취약하고 의존적인 존재로서 작가를 다시 발견하고, 작가와 플레이어가 맺을 수 있는 관계를 상상하는 것에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 작가는 응우옌이 말하는 정교한 통제자나 PCD의 겸손한 디자이너와는 좀 다른 것 같다.
돌이켜보면, 작업을 그만두고 게임에 몰입해 있던 시기에 나는 게임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그것을 거부하는 대신 반겼다. 왜냐하면 이때 작가의 목소리란 고립적 상황에서 벌어지는 비디오게임 플레이가 주는 편안함을 유지하면서도, 나 외의 타인과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순간들이 있다. 어지간해서는 가지 않게 되는 맵의 구석을 탐색하거나, 길을 잘못 들어 한참 동안 아무 이벤트도 이어지지 않는 구간을 헤매거나, 이상하게 맥락에서 튀는 선택지를 골라보게 된다. 명백히 옳은 진행이 아닌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충동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때 마치 기다린 것처럼 텅 빈 맵의 끝에 덩그러니 쪽지나 보물 상자 같은 것이 놓여 있거나, 게임 시스템에 포착되지 않을 산만하고 무작위적 선택에 대해 호통을 치는 대사가 출력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쩐지 게임의 메인 스토리에 몰입하고 있을 때보다도, 이 작품을 만든 사람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미겔 시카트(Miguel Sicart)와 더글러스 윌슨(Douglas Wilson)은 『이제 이건 사적인 문제다: 학대적 게임 디자인에 대하여』6)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게임에서 작가를 ‘말소’하고 투명화하는 경향이 타자의 응답을 구하지 않는 플레이어 자신의 ‘독백적 플레이(monologic play)’로 이어진다고 본다. 이를 막기 위해 ‘학대적 게임 디자인(Abusive Game Design)’이 제안된다. 학대적 게임 작가는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유희적인 경험을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를 역으로 활용해, 오히려 이를 배반하는 방식으로 플레이어에게 충격을 준다.
이러한 디자인은 작가가 충격과 불편함을 통해 자기 존재를 각인시키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문법을 연상시키지만, 궁극적으로 시카트와 윌슨은 플레이어와 작가 사이 대화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게임은 디자이너와 플레이어 사이 대화의 매개가, "플레이어에 관한 것도, 디자이너에 관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 둘 사이의 춤에 관한 것"이 된다.7)
이때 작가는 뒤로 물러나거나 통제자의 자리, 즉 상자 밖에 머물지 않고, 얼굴을 드러내며 직접 대화를 거는 자리에 참여한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8)처럼 거대한 미술관에서 관객의 눈을 마주 보며 ‘작가의 현전’을 선언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작가가 응우옌의 ‘행위적 거리’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게임 디자인의 통제를 벗어난 플레이어들을 교정하기 위해서가 아닌, 맞이하기 위해 나서는 모습을 떠올린다. 만들기와 플레이라는 서로 다른 시공의 참여자들이 함께 만나 만드는 춤 또는 대화를, 그 게임을 상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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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me & Writer> |
1) 이 글에서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writer), 미술의 예술가(artist), 게임의 디자이너(designer) 등 본래 구분될 수 있는 여러 위치를 가리키는 데 혼용된다. ‘저자(author)’ 역시 특정 분야의 직함이자 저자성(authorship)처럼 창작의 권위와 귀속을 둘러싼 이론적 개념이기도 하지만, 이 글에서는 엄밀한 구분 없이 ‘작가’와 교차하며 쓰인다. 이는 한국어에서 ‘작가’가 이미 이 모든 의미를 느슨하게 포괄하고 있는 사정을 반영하는 동시에, 참여예술에서 게임(글쓰기)으로 이동해 온 나 자신의 위치를 하나의 흐름으로 풀어가기 위함이다.
2) C. 티 응우옌, 이동휘 역, 『게임: 행위성의 예술』, 워크룸프레스, 2022.
3) 같은 책, 284쪽.
4) 같은 책, 253쪽.
5) 트레이시 풀러턴, 위선주·심연정 역, 『게임 디자인 워크숍』, 길벗, 2016
6) 더글러스 윌슨·미겔 시카트, 『Now It's Personal: On Abusive Game Design』, FuturePlay 2010, 밴쿠버, 2010.
7) 앞의 글, 2쪽.
8)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 1946–)는 세르비아 출신의 퍼포먼스 아티스트다. 여기서 언급하는 장면은 2010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의 퍼포먼스 〈The Artist Is Present〉로, 작가가 약 세 달간 미술관에 앉아 관객 한 사람 한 사람과 침묵 속에서 눈을 마주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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