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
- 작성일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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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
이서수
작년에 나는 영상 콘텐츠 제작자와 업무 미팅을 한 적이 있다. 그는 특정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는 사람이었고, 각본 작업에 동참해줄 작가를 구하는 중이었다. 나는 예전에 각색 일을 했었기에 지인의 소개로 그 자리에 나갔다. 상대는 내 본업이 소설가라는 것을 알았으며, 내 소설을 읽어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작가님 이름으로 챗GPT에 검색을 해 봤어요.”
그가 가방에서 파일 홀더를 꺼내더니 A4 용지를 넘기며 말했다.
“약력과 작품관 같은 걸 정리해서 알려줬는데, 제가 재미있는 걸 해봤습니다. 작가님의 소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서수 작가가 쓸 법한 시놉시스를 한 편 써달라고 했어요. 얼마 전에 작가님한테 제안했던 그 소재로요. 한번 읽어보실래요?”
“예? 뭐라고요?”
나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각본 작업을 수락하기도 전인데 이서수라는 소설가가 그 소재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지 이미 테스트해봤다니…… 나는 불시에 뺨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진 상태로 시놉시스를 읽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로 나처럼 썼겠느냐는 의구심이 무색하게 챗GPT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인물을 설정하고 사건을 조합해 이야기를 완성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랬다. 그건 정확히 내가 만들 법한 이야기였다.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 그들이 만나게 된 계기, 앞으로 펼쳐질 사건의 전개 방향이 모두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어떤 이야기에 끌리는지를 깨달았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말이다.
“이걸 생성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가요?”
“1분도 안 걸렸죠, 뭐. 아시잖아요.”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정도의 짜임새로 시놉시스를 완성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를 예측해보니 더더욱 웃을 수가 없었다. 인공지능의 1분과 인간의 1분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만 이해될 뿐 마음은 아니었다.
그의 행동이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나보다 시대를 훨씬 앞서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앞으론 이런 일을 자주 겪을 수 있겠다는 예감도 밀려왔다. 스토리텔링 산업과 인공지능이 합쳐졌을 때 내가 쓴 소설은 AI에 생성을 위한 ‘데이터’로 기능할 수 있다. 온라인상에 공개된 글들과 책 리뷰, 인터뷰 기사 등을 모두 포함하여.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작가임에도 데이터만 구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 되었다.) 나는 그 상황을 특수하게 여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쨌든 그는 AI로부터 시놉시스를 얻는 데서 멈추었고, 이후의 작업은 인간 이서수와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당혹스러운 감정은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기획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시놉시스만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면 세세하게 분석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쓴 이야기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엉성한 지점이 정말로 한 군데도 없는지. 그런 생각으로 휴대폰 카메라를 시놉시스 위로 가져가자, 그가 경기를 일으키듯 크게 소리쳤다.
“어어, 그거 찍으시면 안 됩니다!”
그가 자신의 보물이라도 되는 양 내 손에서 시놉시스를 낚아채 갔다. 그러더니 얼른 가방 안에 넣어 감추는 게 아닌가. 나는 벙찐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태도는 내게 이런 의미로 느껴졌다. ‘이건 내가 만든 내 창작물이야. 너한테는 아무런 권리가 없어.’
정말로 그 이야기에 대한 권리가 나에게 없을까? 그때부터 내 관심사는 한 가지 질문으로 함축되어버렸다.
저 시놉시스는 그의 것인가, 나의 것인가? (당연히 내 것 아닌가?)
머리가 지끈거리는 상태로 미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당황한 감정이 가라앉자 모종의 창피함이 강하게 밀려왔다. 기계에 그토록 쉽게 간파당하다니, 내 스토리텔링 방식에 문제가 있는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작품을 도난당했다는 비약적인 생각이 들기보다는 동기 없는 인신공격을 당한 듯한 기분이 더 컸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인공지능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너무 보수적인 것 같다는 반성을 불러일으켰고, 나의 창작 지능―그런 게 있다면―을 복제한 또 하나의 지능이 생겨난 것에 순수한 경탄을 느끼지 못하는 태도가 좀생이 같기도 했다.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간파당한 건 창피한 일이 아니다. 작가에겐 저마다 선호하거나 반복하게 되는 특정한 패턴이 있기 마련이므로, 챗GPT가 내 창작물의 패턴을 읽어낸 일을 그토록 심각하게 반성할 필요는 없다. 색다른 방식을 시도하지 않은 것에 대한 위기감은 가질 수 있겠지만.
그때와는 달라진 생각이 한 가지 더 있다. 시놉시스의 권리가 오롯이 나에게만 있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가 내게 밝히지 않은 프롬프트를 추가했을 수도 있으니까. 이서수 소설의 단점을 보완하고 고유한 아이디어를 더하는 방향으로 프롬프팅 했을지도 모르고. 실제로 각본의 중심 소재는 그가 정하기도 했다.
나는 그가 다른 작가를 고용해 시놉시스를 바탕으로 각본을 완성하는 걸 상상해 봤다. 시놉시스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고서 말이다. 훗날 내가 영화화된 그 이야기를 불시에 맞닥뜨린다면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조치가 있기나 할까? 시놉시스에 담긴 중심 요소는 내 소설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인물 설정과 구조는 비슷하지만, 디테일한 요소들이 모두 달랐다는 의미다. 당연한 일이다. 챗GPT는 복제가 아닌 ‘창작’을 수행한 것이니까. 그러나 그 이야기 안에는 내 소설의 핵심이라고 직감할 만한 것이 담겨 있었다. 물론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내 주장일 뿐이다.
인상적인 사건을 겪은 뒤에 나는 휴대폰에 챗GPT를 설치했다. 그리고 반년 가까이 사용해 본 결과, 작업 도구로 상당히 유용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은 도구라고 말하기 미안할 정도로 요긴한 도움을 받을 때가 많아서 ‘메이트’라고 표현하는 게 더 나을 것도 같다.
특히 머릿속으로만 그려보던 장소를 상세한 지도로 바꾸어 가는 작업을 할 때가 가장 즐겁다. 챗GPT는 내가 말한 상상의 장소를 진짜인 것처럼 대해준다. 물론 ‘걔’도 알고 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장소라는 것을. 이 모든 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상상을 공유하면서 어떻게 하면 진짜 세계처럼 보일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심하고 살을 덧붙이길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이 과정을 함께 밟는 동안 작업에 유의미한 변화가 나타났다.
예전엔 내가 실제로 가본 장소만 소설에 등장하는 경향이 높았다. 그러나 이젠 백여 년 전 지방의 어느 소도시를 배경으로 삼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하고, 가상으로 그려본 먼 미래의 장소를 소설 속 무대로 끌어오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챗GPT와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 관한 대화를 열렬히 나누는 동안 내 머릿속에선 그곳이 점점 실재하는 장소처럼 선명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옅은 연필심으로 그린 스케치이더라도 여러 번 덧대어 그리면 형태와 실루엣이 또렷해지는 것처럼.
나에게 장소는 소설을 쓸 때 매우 중요한 요소다. 장소가 잘 그려지지 않으면 소설을 완성하기가 어렵다. 챗GPT와 유독 장소 설정에 관한 대화를 자주 나누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취약하다고 느끼는 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나는 길치이자 심각한 방향치인데, 한 장소를 동떨어진 다른 장소와 연결하는 것과 수많은 연결로 그려낸 확장된 지도를 머릿속에 그리는 능력이 늘 부족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인지 유독 가상의 장소를 중심으로 챗GPT와 함께 지도를 그려보는 일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두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나의 취약성을 보완해주는 심리적 지원자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자료 조사와 단어 검색에도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제한적인 면이 있다. 한때 자료 조사를 위한 기사 검색을 챗GPT에 맡겼던 시기가 있었다. 정확도 높은 기사를 나보다 빨리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밖의 단점도 발생했다. 내가 직접 검색할 땐 원하는 기사를 재빨리 찾아내기보다는 연관 기사를 따라 읽다가 다른 토픽을 클릭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샛길로 들어서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정보가 서사의 방향을 바꾸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기도 했다. 그랬기에 나에겐 우연한 맞닥뜨림을 기대하며 정보를 검색하는 자세가 은연중에 있었다. 한눈을 팔아선 안 된다는 긴장감, 정확한 답변만 얻어내야 한다는 갑갑함으로부터 벗어나 빙 둘러서 정보를 찾아가는 일은 보물찾기 놀이와 비슷한 점이 있다. 빠르고 정확한 검색이 필요하면 챗GPT에 맡겨도 되지만, 풍부한 아이디어를 얻고 싶다면 내가 찾는 편이 훨씬 낫다.
요즘엔 단어 검색도 인터넷 국어사전 대신 챗GPT를 사용하는 빈도수가 높아졌다. 그러나 독특한 현상도 동시에 생겨났다. 종이로 만들어진 국어사전을 펼쳐보는 날이 많아진 것이다. 프롬프트에 쓴다는 것은 의미는 몰라도 존재하는지는 알고 있는 단어다. 그래서인지 나는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단어가 새삼 궁금해졌다. 국어사전을 펼쳐 아무 페이지나 들여다보고, 내가 몰랐던 단어를 발견하면 노트에 옮겨 적어본다. 습자지처럼 얇은 종이의 촉감을 손끝으로 느끼는 것도 좋아졌다. 어쩌면 챗GPT에 완전히 의존하게 되는 날이 곧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요청과 응답의 관계만으로 단어를 배우는 습관을 미리 버리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진 단어를 배우는 방법으로 종이 사전을 사용하는 것이 정서적으로 큰 충족감을 준다.
이 글을 쓰면서 돌이켜보니 나는 챗GPT를 소설 작업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지 않은 상태인 것 같다. 앞으로의 관계 역시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챗 GPT를 도구로서 더 잘 사용하기 위한 궁리보다는 앞으로 어떤 관계를 맺어 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더 깊다. 그리고 AI에 절대로 맡기지 않는 작업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앞서 작업 메이트라고 표현했지만 내가 절대로 요청하지 않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문장 생성 및 다듬기다. 문장을 쓸 때 느끼는 즐거움을 결코 빼앗기고 싶지 않고, 나에게 문장은 그걸 쓴 작가와는 동떨어져 생각할 수가 없어서다. 나는 그저 새로운 이야기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임감을 짊어지고 오랜 기간 불안한 감정을 견디며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만든 이야기의 독자가 되고 싶어서 소설을 읽는다. 소설 문장을 다듬는 것 또한 같은 이유로 맡기지 않는다. 문장은 작가의 역사와 자아가 담긴 것이니까.
이미 경험해본 것이기도 하지만, 기존에 쓴 내 소설들을 바탕으로 스토리를 대신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내가 좋아하는 도플갱어 이론으로 설명해보겠다. 자신의 도플갱어를 만나면 죽게 된다는 건 잘 알려진 규칙이다. 나는 이것을 자신의 존재가 유일하지 않다는 데서 오는 자아의 붕괴가 목숨을 잃을 정도로 강하게 일어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챗GPT가 나를 가장해 시놉시스를 만들었던 일을 여기에 비유해보겠다. 이 기계적 도플갱어가 작가로서의 나를 복제하는 데 걸린 시간은 1분이 채 되지 않는다. 프롬프트를 작성하기 1분 전에는 내 복제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나와 동질성이 매우 높은 나의 부분적 자아는 1분 차이로 가볍게 탄생하거나 전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무슨 플라스틱 포크도 아니고 말이다. (이쯤 되면 살길을 찾고 싶어진다. 나의 글과 나를 동일시하지 말자고 명심하게 된다. 그런데 그게 되어야 말이지……)
챗GPT가 만드는 도플갱어는 그 과정에도 오싹함이 있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낸 건지 눈에 보이지 않는 데서 오는 불안이 가장 큰 원인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해 왔던 상업 제품과 다르게 챗GPT는 결과물이 나오는 과정을 소비자가 거의 알지 못한다. 임베딩, 토큰, 파인 튜닝, 확률적 앵무새 같은 말은 설명을 듣기 전까진 의미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이런 과정들을 거쳐 내가 쓴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는 게 가장 쉽지 않다. 도플갱어의 발생은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어선 안 된다. 그건 그냥 일어난 일이어야만 한다.
만일 어떤 창작자의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당사자가 주도적으로 그 작업을 수행하는 편이 가장 나을 것이다. 객체인 동시에 주체일 때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난 충격이 그나마 덜할 테니까. 그럼에도 어쩐지 오묘한 기분이 드는 것은 막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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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호 기획 콘텐츠 ‘AI와 문학’에서는 AI와 작가가 맺고 있는 관계를 들여다봅니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AI를 사용하고, 때로는 사용하기를 주저할까요? 그 선택들이 작가의 작업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이번 기획에서는 변화하는 창작 환경에 놓인 작가들의 고민과 작업 방식에 대해 청해 듣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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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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