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지금부터
- 작성일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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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다시 읽기]
그러니까 지금부터
― 임솔아, <다시하자고>(2018년 6월호 수록)
김진선
아파트 분리수거장 입구에 접이식 교자상이 버려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주인이 교자상 위에 몇 가지 반찬과 국을 내어 밥을 차려 먹었을 테지만, 이제는 엄중한 글씨체로 ‘무단 폐기물 신고 비용 관리실로 납부’라고 적힌 종이를 붙인 채 수거를 기다리면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느라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멀쩡하게 생겼는데 어떤 이유로 버려진 것일지 궁금해하면서 지나쳤다. 점심이나 저녁 시간 아파트 복도에서 음식 냄새가 난다. 최근에는 청국장 냄새가 연이어 났는데, 가끔 생선이나 삼겹살을 굽는 냄새도 난다. 배달 음식도 그에 못지않다. 엘리베이터에서는 특정 브랜드의 치킨 냄새가 유난히 풍기는가 하면, 특정 요일에는 피자 배달이 잦을 때가 있다. 삼백여 세대가 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애쓰는 중이구나 생각하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난다.
임솔아의 단편소설 <다시 하자고>에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이 나온다. 지은과 수희는 어떻게 하면 비좁은 원룸 방을 알뜰하게 구획하여 지낼 수 있을지 궁리한다. 벽간 소음을 막기 위해 매트리스를 벽에 세워놓고, 침대 프레임마저 분해하려 든다. 수희는 지은과 함께 명동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편, 인명구조요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신경을 쏟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생활의 모습이겠으나 지은의 생활은 조금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은에게는 이름이 많다. 지은은 신영, 미희, 시한, 영은, 규리, 주영의 이름으로 산 적이 있다. 지하철 공공화장실 휴지걸이에서 주신영이라는 이름을 주운 뒤로 “다시 해보자. 주신영으로”라고 말하면서, 주신영으로 지냈다. 어느 날은 주영이 되어서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지은이 이름을 바꾸어 살 때마다 수희 역시 이름이 바뀌었고, 두 사람은 이름에 어울릴 만한, 그 시기에 그들이 꿈꾸는 세계의 서사를 지어냈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이거 명의도용 범죄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정말 한 번쯤은 다시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지.
나는 지은과 수희처럼 이름을 바꿔가면서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은 없지만, 새 삶이 필요해서 전학을 결심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인해 태어나 줄곧 살던 곳을 떠나 할머니가 계신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전학을 간 셈이라 사투리가 제일 큰 난관이었다. 내가 ‘살구’라고 불러왔던 놀이는 ‘공기’라고 부르는 것이었고(이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살구라는 어여쁜 단어가 있는데!), ‘정구지’는 ‘부추’이거나 ‘꼽표’는 ‘곱하기’였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단어들이 많았다. 억양 역시 어색하고 낯설었다. 경상도 억양은 강하고 말끝이 높은 편이라면, 전라도 억양은 폭이 크고 추임새가 자주 쓰인다. 당시 전라도 사투리가 익숙지 않은 나로서는 말을 하면 놀림거리가 될까 봐 걱정이 컸다. 어쨌든 이번의 이동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었기에 얼마간 적응이 힘들었다. 그래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갑게 다가와 준 친구들이 있어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이야기할 것이 많다.
내가 새 삶을 바랐던 것은 중학교 3학년 2학기 무렵이었다. 엄마에게 조심스레 전학 의사를 밝혔다. 고등학교는 거기서 다니고 싶다고. 엄마와 같이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때 나는 내가 온전히 나의 의지로 이루어진 존재는 아니라고 여겼다. (사춘기가 그렇지 뭐!) 전학을 가면 교탁 앞에 서서 으레 자기소개를 하겠으나, 고등학교 입학 시기에 맞춰 전학을 가면 그럴 일은 없으니 신분 세탁하기에 최적의 타이밍이라고 판단했다. 친구들과는 전라도 사투리를, 가족들과는 경상도 사투리를 썼기 때문에 말투를 바꾸는 것쯤이야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학교에서 전라도 사투리가 자연스레 나왔고, 역사 선생님께서는 전학을 왔는지 묻기까지 하셨다. 전라도가 전주와 나주의 앞 글자를 딴 지명이라는 막간의 학습을 곁들이시면서 말이다. 학생일 때는 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니, 교복을 입고 있는 한 경상도 사투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름을 알아듣는 건 사육되는 동물뿐이”라는 지은의 말처럼 내가 내 이름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대대적인 이동과 변화가 있었음에도 삶이 눈에 띄게 바뀌지 않았던 걸까.
지은과 수희가 일하는 카페 The Secret Garden의 한쪽 창으로는 명동 거리가, 반대편 창으로는 중국대사관의 텅 빈 정원이 보인다. 거리에 즐비한 간판은 가게마다 제각각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장사가 잘 안되거나 망하게 되면 새로운 가게가 들어설 텐데. 이십 대 때 나는 내 이름에 동그라미가 없다는 이유로 개명을 하고 싶었다. 이응이나 히읗 대신 각진 자음만 있는 이름 덕에 원칙을 지키며 올곧게 살아야 할 거 같아서였다. 우리는 언제 다시 삶을 시작하고 싶을까. 내가 나에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을 때? 내가 나에게 능숙해지는 방법을 모를 때? 가만 보면, 내가 새 삶이나 개명을 바랐던 순간에 나는 늘 손해 보는 게 있다고 간주했다. 세상에 대해서든 관계에 대해서든 퍼주기만 하고 끝난다고. 누렇게 변한 천장 벽지에 “예쁜 색으로 페인트칠을 하면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 지은처럼 허전해진 마음을 다시 잘 채우고 싶다고.
손님들이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을 때, 한 사람은 텅 빈 정원만 기억하고 한 사람은 명동 골목 간판만 기억할 거라고 지은은 말했다. 우리는 손님이 없을 때마다 공사가 중단된 중국대사관 정원을 바라보았다. 높은 벽돌담으로 중국대사관은 둘러싸여 있었다. 벽돌담의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였다. 나뭇잎이 떨어져 천천히 가라앉았고 천천히 바닥을 굴러다녔다. 나무 그네가 흔들리다가 멈췄다. 정원 여기저기에 파이프 더미와 안전모, 깨진 기와 조각과 삽이 널려 있었다. 바람에 삭아버린 것처럼 녹이 슬어 있었다. 대사관 창문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어떤 창문은 깨져 있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대사관 이층 테라스를 느릿느릿 걸어갔다.
공사가 중단된 대사관의 텅 빈 정원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막막”한 수희의 무력감을 시각화한 공간 같기도 하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말로 세이프 존을 확보해 놓”는 수희의 태도는 꼭 망명 준비의 일환으로 보인다. 우리는 어디로 망명할 수 있나. 방 도면과 위시리스트, 일기가 빼곡히 적힌 지은의 노트에는 수희의 일기를 훔쳐본 것처럼 정확한 수희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이처럼 한 시절 가장 가까이 보낸 이가 나의 망명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나에게로 망명하는 일은 가능할까? 이 소설은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지은이 어디로 떠났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수희가 드디어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처럼 자신만의 비밀의 정원을 가꾸고 사는 일은 현실 버전의 손쉬운 망명이겠다. 물론 여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만만한 것은 아니다. 지은과 수희의 본래 이름을 소설은 끝내 밝히지 않는데, 이마저도 작가가 마련해 준 세심한 망명 같다.
더 이상 나는 거창하게 새 삶을 원하지도 개명을 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십 년 일기장을 선물 받게 되어 이 년째 쓰다 보니, 신기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매번 비슷한 어려움을 호소하는 게 보였다. 그럴 때마다 비슷한 다짐도 하면서. 자격증을 따더라도 어차피 인명 구조는 못하겠지만, “언젠가 구조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좋은 거”라는 수희. 선택의 기로에서 주저하지 않고 입버릇처럼 “다시 해보자”라고 내뱉는 지은. 두 사람이 지닌 일면이 내게도 있다면? 소설의 결말과 달리 헤어지지 않고 계속 겪고 있다면? 사는 건 언제나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다시 하자고, 다시 해보자고 내가 나를 독려하면서. 다시 하자고 아끼지 않고 말하는 게 나를 아끼는 일이라는 걸 알아차리면서. 나아가고 있다는 실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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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2025년 한 해 동안 진행한 <문장웹진 Rewind>를 <문장웹진 다시 읽기>라는 이름으로 이어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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