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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텍스트가 등장하는 여섯 가지 기획

  • 작성일 2026-07-01

  [문학의 곁]


  문학/텍스트가 등장하는 여섯 가지 기획

  ― 웹진 《비유》 기획‧운영자가 소개하는, 문학으로 향하는 여러 갈래들(@webzineview)


이세옥


  이 글은 일을 하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여러 문을 여닫으며 장소들에 드나들고, 밥을 먹고 쓰레기를 버리며 사는 한 생활인의 삶에, 문학 텍스트가 어떻게 등장하는지 살펴본다. 내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길러진 환경과 현재의 활동을 단편적으로 기록해보는 글이기도 하다. 예술과 문학은 세계에서 가치 있는 위치를 점하면서도, 사실 시급한 이슈에 해당되지 않는 편이라는 인식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은 처음 말을 꺼낼 때는 보통 압축적으로 말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이 썼다.


  주민센터 한켠 작은 책장

  어릴 때 살던 동네 주민센터에는 작은 책장이 두어 개가 있었다. 집에서 가깝고 생활 반경 내에서 손쉽게 방문할 수 있는 공간에 있는 그야말로 ‘작은 도서관’이었다. 여러 종류의 책들이 어떤 일관된 취향을 파악하기 어렵게 꽂혀 있었는데, 그중 문학상 수상작들이 많았다. 토니 모리슨과 같은 노벨문학상 수상작들도 기억에 남는다. 나는 종종 그 책장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돌이켜보면, 문학상이라는 제도가, 수상작이라는 선택이, 주민센터 한켠을 경유해서 청소년 시절 나의 독서목록을 구성했다. 이는 공공 인프라와 문학 제도가 연결되는 방식이다. 공공 도서관이 충분하지 않던 시기, 주민센터나 작은 도서관 같은 생활권 내 독서 공간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돌이켜보면, 문학 텍스트는 시장만이 아니라 행정과 복지 체계를 통해서도 유통되어 왔다.


  읽기와 쓰기 훈련의 학교

  학부 학업 과정 중에 내가 한 것은 텍스트를 읽는 훈련인 것 같다. 영문학과에서 시와 소설 그리고 희곡 등을 촘촘히 읽던 시기였다. 문장별, 단락별, 챕터별로 읽어가며 전체 작품을 조망하는 시점 이동을 학습했다. 가령 흔하지 않은 각종 식물명까지 찾아서 읽으며, 가까이서 텍스트를 들여다보기도 했다. 단어의 선택, 문장의 리듬과 속도, 단락의 호흡 같은 것들을 읽다가, 다시 텍스트의 맥락을 살펴보기도 했다. 작가는 어떤 사람인지, 언제 출판되었는지, 어떤 독자를 향하고 부르는지, 이 글은 어떤 제도를 기반으로 완성되었는지, 그리고 생략된 부분은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난 특정 주제에 따른 작품들을 모아 읽으며 그걸 바탕으로 창작하는 수업에도 참여했다. 그중 소설가 최윤 교수님의 성평등 글쓰기 워크숍 수업이 내게 오랜 기간 기준점이 되어주었다. 그 워크숍은 내가 창작 글쓰기를 자유롭게 전개해보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공유할 수 있는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였다. 기술적인 부분들을 연습하기보다는 내게 보이는 세상을 글로 쓰는 데 필요한 태도를 다질 수 있었다. 실제로는 자기 폭로에 가까운, 표현 자체에 치우친 짤막한 글들을 쓰고 공유했지만, 이 워크숍이 끝난 한참 뒤까지 내게 이 모임은 창작 자체가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와 관계 맺는 과정이라는 것을 배운 경험으로 남아있다.


  읽는 생활을 위한 열린 장소, 웹진 《비유》

  나는 최근 3년간 웹진 《비유》를 만들면서 문학이 작가의 집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체감하고 있다. 편집위원, 편집자, 기획·운영 담당자, 디자이너, 웹 퍼블리셔의 회의와 편집, 구성과 제작, 원고 청탁과 검토 같은 과정들은 모두 문학 텍스트 생산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문학 편집과 출판 현장 출신의 편집위원 및 편집자는 실제로 잡지의 구조를 안정시키고, 동시에 기존 문학 제도의 규준을 놓치지 않게 한다. 무엇이 문학으로 소개되어 왔는가, 어떤 형식이 독자에게 낯설고 익숙한가에 대한 이해 바탕으로, 그 범위를 확장하는 시도 역시 가능하기 때문이다. 웹진 《비유》는 문학과 인접한 여러 분야의 창작자, 편집자, 기획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통로 역할도 하고 있다. 이렇듯 《비유》는 문학에 직접 속하는 작품뿐만 아니라, 그 주변을 형성하는 여러 움직임들을 함께 담는 온라인 잡지로 기능하고 있다. 이곳은 창작자들이 자신이 하는 활동을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용기를 얻는 장소이다.

  《비유》는 온라인 잡지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작은 시도들은 해보고 있다. 그중 한 가지는 서로 다른 매체/장르 작가 간의 협업 지면 운영이다. 협업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것은 웹진 내에서 오래 지속되어 왔지만, 개편하면서 직접 “해상도 높은 장면”이라고 이름 지었던 시리즈로도 벌써 3년이 다 되어간다. 문학으로 향하는 다양한 갈래들로 보이는 작품들에서, 작가들과 독자들 조금은 낯선 감각을 깨워가는 것 같다.

  또 다른 시도 중 하나는 호별 원고들을 두 달에 걸쳐 몇 편씩 나눠서 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편집위원회의에서 호별로 원고들을 기획하고 발행까지 호 단위로 추진하지만, 호별로 묶어 발행하는 인쇄물 형태의 문예지가 아니다 보니, 원고별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나눠 발행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 부분은 다른 방식으로의 시도가 또 가능할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독자들이 개별 원고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게 하는 기제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독자들의 읽는 생활을 조금이나마 조력할 수 있도록, 《비유》는 한 달에 두 번씩 구독자의 이메일함과 소셜 미디어 피드를 채우고 있다.

  웹진 《비유》는 주민센터 한켠에 놓인 책장과 닮았다. 어릴 적 마주했던 그 작은 책장이, 이제는 웹진 《비유》의 화면으로 연결되어 보인다. 로그인 없이 무료로 접할 수 있는 글들은 다양한 읽기 모임의 재료가 될 수도 있다. 이렇듯 공공성은 이 웹진 제작이 놓인 조건 그 자체다. 나는 이렇게 만드는 《비유》를 무엇보다 읽는 생활 혹은 읽기 연습을 위한 열린 장소라고더 알리고 싶다.


  ▷ 웹진 《비유》 바로가기 : https://www.sfac.or.kr/literature


웹진 <비유> (서울문화재단 문학지원팀)


  공적자금으로 만드는 온라인 문학 잡지, 웹진 《비유》

  이 단락은 공적자금 운영의 특징에 대해 언급하며 시작하려고 한다. 웹진 《비유》는 서울문화재단 문학지원팀이 만드는 온라인 문학 잡지이다. 난 문화재단에서 다원예술, 지역문화·도시문화, 문학 분야 업무를 거치면서, 공적자금이 단순한 재정 지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관찰할 수 있었다. 가령 예술지원금은 개인 창작자에게 활동의 물적 조건을 제공하는 수단이지만, 동시에 그 활동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와 연결된다. 예술지원금은 흔히 ‘창작을 위한 돈’으로 설명되고 통용되지만, 실제로는 사회가 어떤 활동을 공적인 가치로 인정하는가에 대한 반영된 것이다. 무엇이 예술인가, 누가 예술가인가, 어떤 활동이 지원 대상인가, 어떤 결과물이 공공적 가치로 설명될 수 있는가는 모두 제도의 언어를 통해 실행된다. 특히 ‘예술노동’이나 ‘창의노동’이라는 개념은 단순하지 않다. 창작활동은 오랫동안 개인의 열정이나 재능으로 설명되어 왔고, 그 과정에서 노동으로서의 성격은 자주 가려졌다. 그러나 지원금은 개인의 창작활동이 시간과 기술, 관계와 지속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동시에 지원 제도는 기준과 심사를 동반한다. 공공성, 형평성, 예산 집행의 타당성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적자금은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에 특정한 언어와 형식을 요구하는 체계이다. 공적 자금 사용에는 원고료 지급 기준, 개인 계약 방식, 결과 보고 체계 같은 행정적 조건들이 따른다. 

구체적으로 공적자금으로 문학 웹진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 자금의 성격을 고려해보면, 계약서부터 기획·제작 절차에 이르기까지 고유의 출판·발행 체계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거나, 혹은 이를 만들어 가야 하는 필연성이 있다는 점을 떠올릴 수 있다. 또한 공적 자금의 특성을 활용해 필요한 영역에 실무 지침이나 운영 매뉴얼, 각종 가이드를 고안하고,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민간이 하기 어려운 연결과 실험을 시도하는 일 역시 고려 대상이 된다.


  문학을 통해 모이는 자리들, 〈문학으로 모이는 방법들 2025〉

  한편 사실 온라인 잡지라는 매체는 불안정성도 가진다. 간단한 예로는, 모든 외부로 가는 하이퍼링크들은 사라질 수 있다. 웹사이트는 물리적 보관장소가 없기 때문에 유실될 수 있다. 서버가 닫히거나 운영이 중단되면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 플랫폼이 종료되거나 도메인이 만료되면 축적된 텍스트들이 한 번에 사라질 수도 있다. 디지털 아카이빙의 불안정성은 온라인 문학 매체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이슈이다. 

  이러한 온라인 지면이 갖는 불안정성과 물리적 실체의 부재를 인식하면서부터일까. 독자와 시민과 작가들이 실제로 만나는 오프라인 접점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서울문화재단이 주최한 〈문학으로 모이는 방법들 2025〉이다. 다섯 번의 모임 자리와 한 종의 소책자로 구성된 기획 프로그램이었다. 사람들을 모으는 일, 공간을 운영하는 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텍스트 앞에서 말을 시작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드는 일이 공공적인 기관이 잘 할 수 있는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은 완성된 결과를 제공하기보다, 그런 움직임이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직해 제안하는 일에 더 가깝다. 그리고 기획자는 사람들을 직접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사람이다. 


  (사진) 문학으로 모이는 방법들 2025


  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면서 염두에 둔 것은, 문학이 내게 주는 경험 중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이다. 즉, 무언가를 빠르게 결론 내리지 않아도 되는 상황과 환경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문학은 좋은가, 나쁜가. 맞는가, 틀린가.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와 같은 요청들의 속도를 늦출 수 있는 공간이다. 내가 기획하는 자리들도 문학 텍스트를 통해 부정적 능력(Negative Capability)1), 즉 불확실함과 의문을 성급히 해소하지 않은 채 머무르는 힘을 연습하는 곳이 되기를 바랐다. 판단을 유보하고 질문을 조금 더 오래 붙들 수 있는 자리. 고민하고, 주저하고, 질문하고, 멈춰 설 수 있는 자리. 나는 그것이 문학과 문학을 통한 활동들이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올해 나는 또 다른 상상을 하고 있다. 문학 작가, 번역가, 편집자, 출판인, 독자, 그리고 문학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글쓰기 워크숍이자 퍼포먼스 작품인 ‘이어쓰기’를 해보고 싶다. 한 사람이 문장을 쓰고, 다른 사람이 이어받아 다음 문장을 쓴다. 그렇게 텍스트가 이어진다. 온라인으로 공유된 문서상에서 참여할 수도 있고, 연필로 직접 종이에 써나갈 수도 있다. 화면에 프로젝션하여 과정을 공유할 수도 있고, 최종적으로 도출된 글을 각자 가져갈 수 있는 방식으로 기획할 수도 있다.

  내가 구상하는 이어쓰기는 앞 문장을 보고, 읽고, 반응하는 방식이다. 서로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글쓰기 시도이다. 이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이어쓰기나 20세기 아방가르드의 협업적 글쓰기 전통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고, 오늘날 온라인 협업 문서나 공동 번역 작업처럼 여러 사람이 하나의 텍스트를 수정하고 이어가는 디지털 환경과도 닿아 있다. 그리고 이것은 퍼포먼스이기도 하다. 망설임과 결정의 순간들이 공간 안에 가시화될 것이다.


  퍼레이드 & 패치워크 – 예술 활동의 프레임워크이자 가상의 회사

  개인적으로 나는 창작자로서의 활동 경력을 바탕으로, 주로 텍스트로 구성되는 예술적 활동을 수행하는 프레임워크를 ‘퍼레이드 & 패치워크’라고 이름 지었다. 퍼레이드는 어떤 존재가 사람들 사이를 지나고 거리를 일정 시간 점유하며, 장면의 일부로 나타나는 시간적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패치워크는 서로 다른 조각들이 나란히 놓이며 기억과 상처, 맥락들이 공존하는 방식으로 본다. 이 두 단어를 조합한 이름 아래에서는 일시적이거나 비가시적인 활동, 아직 미완의 시도들도 잠시 머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 그것은 장면이 되기도 하고, 기록이 되기도 하며, 느슨한 관계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퍼레이드 & 패치워크는 창작과 기획, 기록과 대화가 놓일 수 있는 장소이다.

  최근에는 내가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사람들을 초대해 글과 인터뷰 기록을 남기고 있다. 얼마 전에는 개인적으로 청탁한 원고와 인터뷰 기록을 퍼레이드 & 패치워크 웹사이트에서 공개했다. 리뷰와 에세이 형식으로 청탁할 때는 작가에게 특정한 주제와 조건을 함께 제안했다. 우선 내가 그 작가의 문장으로 읽고 싶은 글을 의뢰했다. 인터뷰와 대화 형식의 기록에서는 요즘의 생각, 실제 사람을 만나고 함께 일하는 태도, 작업과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을 초대한 분과 일대일 대화로 나누었다. 이렇게 만든 글들을 예술·문화 분야 종사자와 애호가들, 특히 혼자서 여러 질문들을 오래 붙들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씩 읽어나가고 싶다.

  또한 퍼레이드 & 패치워크는 ‘창의적 실천’을 시도하는 예술가와 조직들을 위한 가상의 스튜디오이다. 나는 2024년부터 퍼레이드 & 패치워크를 단순히 창작의 프레임워크를 넘어서, 예술가 혹은 혁신적인 사업을 추진하는 조직의 가치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는 서사와 맥락과 언어를 만드는 가상 스튜디오처럼 다루어 보기 시작했다, (조용히). 이 회사는 예술적, 사회적, 기술적 환경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고, 분야를 넘어 연결되며, 새로운 실천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프로젝트들에 힘을 실어줄 수 있을 테다. 예술적 통찰과 비판적 시각에 기반해 쌓아온 활동들이, 정체성을 구성하고 복잡한 질문들을 다루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예술적, 사회적, 기술적 영역/씬에 새롭게 등장하는 시도들이 보다 해상도 높은 방식으로 세계와 만날 수 있도록 돕는 모습을 그려본다.


퍼레이드 & 패치워크 바로가기 : https://seirhee.com/


퍼레이드 2026 (ChatGPT(OpenAI) 생성 이미지)



〈문학의 곁〉은 창작자뿐 아니라 문학을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하고 확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책이 독자에게 닿기까지 그 과정에 머무는 사람들, 문학과 독자 사이 어딘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1) 소극적 수용력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존 키츠는 1817년,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과 이성을 조급하게 찾아내려 하지 않고, 불확실성과 신비와 의심 속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이라고 썼다. 그는 이것을 ‘Negative Capability’라고 불렀다. 쉽게 해석하거나 결론짓기보다, 이해되지 않는 상태를 견디는 능력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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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마음에 물성을 입히는 일

[문학의 곁] 보이지 않는 마음에 물성을 입히는 일 ― 원고를 읽고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북디자이너(@yj.archive) 권예진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파주로 향한다. 꼬박 40분 동안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하는 곳은 유난히 나무가 빽빽하고,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파주출판도시다. 누군가의 손에 쥐어질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 이 일을 해온 지도 벌써 1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3평 남짓한 서재 책장 한편에는 유난히 가벼운 책이 있었다. 아버지가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미국 페이퍼백이었는데,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눅눅하고 낯선 냄새가 났다. 그 옆으로는 규칙적으로 꽂힌 만화책들, 어린 손으로는 한 번에 들기도 버거운 역사책이 나란히 있었는데, 그때는 그게 종이 두께와 제본 방식의 차이라는 걸 몰랐다. 그저 어떤 책은 손에 착 감기고, 어떤 책은 자꾸 손에서 미끄러진다는 감각만 있었을 뿐이다. 중학생 때는 도서관에서 친구와 경쟁적으로 소설을 빌려 읽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이야기만큼이나 표지의 질감이나 판형이 주는 무게감에 자꾸 눈길이 머물렀다.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무지갯빛이 반사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까슬까슬 사포 같은 질감의 책도 있었다. 그렇게 직접 손끝으로 짚어보며, 책이라는 물성이 주는 낯설고 매력적인 감각을 좋아하는 취향이 생겨났다. 지금의 일을 시작하게 된 건, 내 안의 두 다른 감각이 우연히 겹친 순간부터였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며 텍스트를 깊이 들여다보는 눈이 생겨났고,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늘 디자인에 대한 깊은 갈증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국어 시간과 미술 시간에만 눈을 반짝거리는 학생이었는데, 그 편식이 성인까지 쭉 이어질 줄이야. 하지만 어느 쪽으로도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고, 인정받지 못한 채 마음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서울북인스티튜트(SBI)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두 감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하던 내가, 마침내 책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매일 가슴이 뛰었다. 문학출판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막내 디자이너에서 팀장이 되기까지, 수많은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단편적인 이력만 보면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막내 디자이너였던 내게 주어진 일은 멋진 프로젝트가 아닌 중쇄 진행과 광고 작업이었고, 자리에는 전원을 켜면 ‘윙-’ 하고 사무실이 떠나갈 듯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형 맥이 놓여 있었다. 중쇄 작업을 하려면 어김없이 그 요란한 전원을 켜야 했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괜히 동료들 눈치가 보여 슬그머니 버튼을 누르곤 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나 집에서는 틈만 나면 단축키와 툴 사용법을 독학해야 했다. 정말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시절 내 퇴근 후 일상은 낯선 용어와 디자인 프로그램 튜토리얼을 붙잡고 씨름하는 게 전부였다. ‘내가 정말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까?’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

  • 권예진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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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만에 만난 호주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 30년 만에 만난 호주 김중석(시옷책방 상주작가) “호주라니!” 상주작가 우수시설에 선정되었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기대했던 해외연수의 행선지가 호주라는 메일을 확인하는 순간 실망감이 밀려왔다. 이전 해에는 유럽으로 다녀왔다고 알고 있었던 터라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호주라니. 하지만 연수를 하는 내내 그리고 돌아와서 되돌아보는 지금까지도 호주가 너무 좋았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짧은 여정에 많은 문화공간과 아름다운 자연을 둘러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가진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즐거웠고 새로운 창작을 향한 에너지와 영감을 듬뿍 채운 시간이었다. 사실 호주는 30년 전 신혼여행으로 다녀온 곳이었다. 그때는 결혼식을 마치고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고 여행사에서 안내하는 코스를 따라 몇 팀의 신혼부부들과 다녀오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딘가에 내리고 밥을 먹고 멋있는 자연을 보며 감탄했지만, 자세한 것은 모두 다 머릿속에서 지워진 상태였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기억에 선명한데 또 어디를 갔더라? 캥거루를 만나서 먹이를 주기는 했는데 이제는 어느 동물원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그렇게 나의 호주는 아주 오래전 앨범을 뒤져야만 나오는 추억 속의 나라였다. 호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몇 개의 이미지는 오페라 하우스, 캥거루, 코알라 그리고 거대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멋진 공원들 그리고 원주민들의 미술이었다. 그때의 호주와 지금의 호주는 무엇이 달라져 있을까? 기대감을 잔뜩 안고 출발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맑고 청명한 날씨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어제까지 비가 내리고 우중충한 날씨였다는데 다행이었다. 우리 일행 중에 ‘날씨요정’이 있었는지 여정 내내 좋은 날씨 덕분에 즐거운 연수를 마칠 수 있었다. 공항을 벗어나 시내로 들어오니 그때의 호주가 조금씩 떠올랐다. 커다란 나무들, 온통 영어로 만들어진 간판들(아주 당연하지만) 익숙함이 밀려왔다. 며칠의 여정 동안 인상 깊었던 몇 개의 장면들을 기억해 본다. 1. 라이온 킹 뮤지컬 시드니에 도착한 첫날. 우리 일정에는 뮤지컬 ‘라이온 킹’이 관람이 포함되어 있었다. 창작자로서 부끄럽지만 뮤지컬은 몇 번 본 적이 없다. 공짜 티켓이 생겨서 다녀온 게 전부였다. 영어 대사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미 영화로는 보았던 것이니 대충의 스토리는 이해가 되었다. (아! 영어의 벽. 이럴 때마다 영어 공부를 해둘걸, 이라는 후회) 공연이 시작되기 전 놀라웠던 모습은 극장의 분위기였다. 판매원이 돌아다니며 맥주와 음료와 음식을 팔고 옆 사람과 떠들고 인사하며 사진을 찍고 객석에서 바로 보이는 무대 옆쪽 매점에서 음식을 판매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공연 전의 풍경과는 많이 다른 풍경이었다. 내가 집중적으로 본 것은 무대 미술과 의상이었다. 한정된 무대에서 공간을 변화무쌍하게 만드는 게 얼마나 많은 고민과 시행착오로 이루어졌을까? 무대의 일정 부분은 회전판을 사용하고 어떤 부분은

  • 김중석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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